영화라는 홈 타운, 스크린이라는 집

<라스트 미션>(2019)

by 수차미


우리는 그를 ‘배우에서 감독으로 탈바꿈한’ 클린트 이스트우드라고 부른다. 그런데 감독으로서의 그가 만든 작품에는 특정한 경향이 없다. 그는 여러 장르의 여러 이야기를 만들었고, 우리가 거기서 보는 건 오직 ‘클린트 이스트우드’일 뿐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사람에 대해 재고하게 된다. 이 영화들은 감독 기획 감독 연출 감독 주연이라는 세 가지 조합인데, 다른 사람이라면 감독이 다재다능하다고 말할 것을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두고는 다재다능한 배우라고 말한다. 감독이면서 주연배우로 나오는 그에게, 감독보다 배우라는 말이 우선한다. 요컨대 우리는 감독이 된 그를 칭할 이름을 잃었다. 그는 언제나 배우로서 ‘먼저’ 칭해진다. 어쩌면 데뷔순서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단순한 절차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감독이 세계의 창조주이고 배우가 그 세계 속의 삶을 뜻한다면, 우리가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칭하는 화법은 삶 속의 세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감독이 배우를 인형 부리듯 하는 게 영화 촬영이다. 그런데 그는 배우이자 감독이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자기 세상에 숨어든 인형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쉽게 말해, 자기가 축조한 세상에서 자기가 바라는 것을 연기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마치 <인셉션>의 최하단에 자리한 림보처럼, 그것은 자폐적이거나 후회가 가득한, 감정이 빠져나가고 남은 장소일 테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기에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은 배우로서의 자신을 답습하는 후회의 절차인 것 같다.





543fa29e7cd84ad29f2c6249064d01d61549870049787.jpg 영화 <라스트 미션>의 작품 포스터 ©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세상으로부터 강제된 영웅으로서의 자신


우리는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작품에서 배우 시절 그가 대변하던 여러 가치들이 낡아가는 것을 본다. 대체로 미국이라는 국가와 늙어가는 아버지에 대한 자기반성적인, 혹은 자기위로적인 헌사처럼 보인다. 그건 아주 분명해서, 소수의 몇몇 사람에게만 보이는 게 아니라 전방위로 관측된다. <그란토리노> 같은 영화를 보면, 이것이 늙어가는 영웅과 시대에 뒤처진 늙음이라는 사실을 누구라도 알 수 있다. 이때 우리는 영화 속 배우라는 직책이, 영웅이라는 사명에 대응됨을 깨닫는다. 영화 세계가 부여한 것은 배우로서 연기하는 것, 현실 세계가 부여한 것은 영웅 같은 행동,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으로서 과거의 자신을 반성하고 답습하는 과정에는 그런 무기력함이 강하게 작용하는 듯 보인다.


감독으로서의 그는 자신의 작품에서 과거 행적을 묵묵히 바라보는 과거의 영웅상을 그리고는 한다. 과거에 영웅이었던 것, 혹은 영웅적이라고 칭송되던 행위가 시대가 바뀌어 구닥다리가 되어버릴 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것을 전혀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긍정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그곳에 묵묵히 서 있을 뿐이다. 마치 파도치는 해변에 우뚝 선 소나무처럼, 영웅은 아무 말이 없다. 변한 건 자신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듯이 말이다. 이 부분이 문제가 되는 건 그가 배우가 아닌 감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감독은 연출과 편집을 통해 영화의 담론을 만들어내는 사람이기에, 은퇴한 영웅에 따라붙은 온갖 은유들은 그 자신이 만들어냈다는 뜻이고, 결국 그의 영화는 자기 할 말을 위한 무대장치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니까 사실 이 무대에서는 배우도 세계도 모두 기계장치에 불과할 뿐이다.


이쯤에서 꺼내두는 고백. 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영웅으로서의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강제된 것이라고 말하는 듯한 그의 영화를 보면, 그 사명감에 대해 실망하게 된다. 어떤 사명감인가 하면, 불현듯 와서 멋지게 싸우고 갑자기 떠나버리는 그런 태도다. 나는 그를 잘 모르지만, 적어도 그런 행위에 어떠한 이유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았다. 누군가를 구하는 건 그냥 멋진 거고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당위성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감독이 된 그는 그런 자신의 당위성을 ‘당연히’ 내쳐지는 것, 시대에서 버려지는 것으로 바꾸어 버린다. 영화 속의 그는 폐차장에 버려진 자동차처럼 서서히 죽어간다. 죽음 이전에 무언가 하나 해두려 하는데, 그게 영화의 주된 서사가 된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 같은 영화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게 정말로 답답하다. 왜 그는 혼자서 모든 것을 짊어지려 하는 것일까? 왜 그는 자기 세계에서 홀로 영웅이 되고, 홀로 버려져 쓸쓸히 죽어가는 것일까? 당장 옆 동네의 히어로 영화만 보아도 혼자로는 힘에 부치니 다른 동료를 끌어모으지 않던가?



baab07d93b8f499ebeef819754b5cb7b1551158854477.jpg 영화 <라스트 미션>의 한 장면 ©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버려진 영웅, “가족은 등한시하고 일만 해서”


그의 모습에서 영웅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보게 된다. 어쩌면 영웅이란 건, 우리가 붙인 칭호에 불과한 게 아닐까. 그는 그저 자기 삶을 살았을 뿐인데 누군가는 그것을 두고 감명받았기에 영웅이라 칭한 게 아닐까. 영웅이 나오는 영화에 어떤 외부 맥락을 투영하여 담론을 끌어내는 해석법은 분명 쓸모가 있다. 하지만 나는 어쩌면 그런 해석법이 영웅의 본질을 망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내가 그의 영화를 오판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아마 그것도 맞는 말인 것 같다. 내가 보았던 건 감독인 그가 배우로서의 자신을 부정하는 모습이었고, 그런 무기력함에 화가 났었다. 그러나 자신의 행동이 옳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태도는 영웅이 가져야 할 제1의 원리이기에. 그 행동적 맥락이 어떠하든, 누구에게나 사연은 있고 그들은 그 세계의 영웅일 테다.


영웅적인 자신의 과거가 사실은 허상이었음을 보여주는 서사에서 그런 태도 자체가 현대적인 영웅상처럼 보이기도 했다. 과거를 인정하는 것도 영웅적인 행동 중 하나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든 순간 나는 내 생각이 단단히 꼬여있음을 느꼈다. 자신의 신념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게 영웅인가. 아니면 시대가 요구하는 태도를 취하는 게 영웅인가. 또는,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고 인정하는 게 영웅인가. 이것들은 모두 달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영웅이라는 하나의 단어에 부합하는 여러 정의(Justice)이다. 첫 번째는 <아저씨> 같은 거고, 두 번째는 <택시 드라이버> 같은 거고, 세 번째는 <변호인> 같은 거다. 이때 중요한 건, 그 세 가지 행위의 토대가 되는 건 외부평가라는 점이다. 자기 스스로를 믿어도 타인이 지지해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웅이 아니다. 고담 시의 배트맨처럼, 혹은 한국전쟁 이후에 버려진 노익장처럼.


그런데 재밌게도,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에서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용사들이 자주 나온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이들도 있다. 그리고 대체로 그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과거를 떠벌리는 게 취미인 듯 보인다. 이번에 개봉한 <라스트 미션>을 봐도 총구를 들이대는 갱에게 하는 말이란 게 참전용사라서 이런 것쯤이야 우습다는 대사다. 그들은 왜 버려졌는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대답은 “가족은 등한시하고 일만 해서”이다. 여기서 우리가 떠올리는 것은 서부영화에서의 영웅이 존재하는 방식이다. 서부영화 그리고 그에 파생된 영웅 플롯에서, 영웅은 우연히 왔다가 홀연히 떠난다. 즉 일만 한다. 이때 우리는 그가 돌아갈 장소가 어디인지를 알 수 없다. 그는 출신지도 도착지도 불명이다. 그저 하염없이 떠돌기만 하는 존재가 과거의 영웅이다. 요컨대 그들에게는 가족도 없는 것만 같다.


처음에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대답이 미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것처럼 보였다. 가족을 중요시하는 한국과는 다른 의미의 가부장제는 미국의 주된 문화 중 하나이기에. 미국이라는 국가의 지배계급인 백인, 남성, 기독교라는 세 가지에 부합하는 장면은 아마도 식사 자리에 가족을 모아두고 주님께 기도하는 어느 백인 가정일 테다. 그러니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위 대사는 이런 전통을 버려두고 헛된 영화로 망상한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때의 일은 당연히 해야만 하는 것, 당위성을 포함한 신념으로서의 그것이다. 왜 구해야 하는가. 그가 영웅이라서가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구하는 건 그냥 당연한 거다. 그 당연함에 영웅이라는 칭호를 붙이는 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눈에는 쓸데없고 가소로운 행위처럼 보였을 테다.


나는 그런 태도가 짜증났던 것이었고, 하지만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니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달리 보였다. 가족을 등한시하고 일만 한 게 아니라, 집을 등한시하고 밖으로만 돌아다닌 것이라면? 쉽게 말해, 집안도 난장판인데 바깥일이 더 급하다며 밖으로만 돌아다녔다면? 영화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배우자가 말하듯이 세상에 가족보다 중요한 건 없다. 불이 났을 때 먼저 꺼야 할 것은 옆집이 아니라 집 안이다. 정해진 순서는 없지만, 도의적으로 생각해보면 밖보다 안을 챙기는 게 우선이다. 그리고 이 간단한 문구는 최근 히어로 영화에서 다음과 같은 문구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영웅은 집으로 돌아간다.”





cecb7ac7ffdc4f169a48197b6431eacd1551159034948.jpg 영화 <라스트 미션>의 한 장면 ©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영화라는 홈 타운, 스크린이라는 집


서부극과 그 파생 영화에서 영웅은 늘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주변을 떠돈다. 배트맨 시리즈를 보아도 그렇고, <수색자>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보아도 그렇다. 영화 밖에 자리하기에 단지 보이지 않을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어찌 됐든 영화는 말해주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 마블 영화들을 보면 영웅들에게는 늘 집이 있다. 토르에게는 아스가르드가 있고,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겐 서로가 곧 집이 된다. 어벤져스의 구성원인 호크 아이는 일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며, 어쩌면 <어벤져스>라는 영화 자체가 다른 출신의 여러 구성원으로 가족을 꾸리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것을 가족의 품에 안겨야 한다는 할리우드의 고전 화법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국가와 시대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벤져스>와 같은 영화에서 도시는 늘 싸움으로 인해 갈려 나가는데, 정작 민간인 피해는 제대로 조명되지 않는다. 영웅에만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집중은 당연하고 굳이 나쁘게 볼 이유도 없다. 또한 우리가 이입하는 대상도 스크린 위의 영웅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논점 한가지. 그 영웅이 지키는 건 그 도시이고 사회이다. 그들은 그 도시가 집이기에. 집이 없으면 돌아갈 곳이 없고, 돌아갈 곳이 없으면 스크린 밖으로 떠돌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이것은 스크린이라는 집이기도 하다. 그 가족은 스크린이다. 영웅과 관객을 객석에 붙잡아 두는 힘은 가족의 그것이다. 영화라는 홈 타운, 그 속의 스크린이라는 집.


내가 생각하기에 최근 히어로 영화에서 영웅들이 계속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그만큼 그들이 지켜야 하는 무언가가 강조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 대상은 지켜야 할 ‘사람’이 아니라 터전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그’가 아니라 ‘그곳’을 구한다. 어벤져스가 지구를 구하는 것처럼 그들은 특정 사람이 아닌 공간, 혹은 장소를 위해 헌신한다. <아저씨>나 <다이하드>보다 <킹스맨>이나 <본 시리즈>가 요즘에 인기를 끄는 것은 특정인이 아니라 그 뒤의 사회와 이념에 대항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대항하는 이유는 자신의 물욕 때문이 아닌, 발 디딘 곳을 지켜내기 위해서다.


서부극에서는 영웅이 집 밖으로 나돌아다닌다. 즉 시대가 원하는 영웅상은 국가의 의무를 짊어진 이상향, 하지만 정작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이방인이다. 요컨대 나는 이것이 헌신이 아니라 소모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라스트 미션>을 비롯한 <그란토리노>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노익장을 연기하듯이 말이다. 그런 식의 분리는 이 영화에서 집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집 안에서는 가장이지만 집 밖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전통적인 가부장제에서의 아버지였다. 그래서 <라스트 미션>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가족에게 그렇게 말한다. “나는 평생 가족을 위해 일했다.”고 말이다. 그러나 가족에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일만 하고, 일하는 사람들이랑만 노는 일 중독자일 뿐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그는 그대로, 가족은 가족대로 지지할 방법을 찾는데, 그게 바로 “영웅은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러면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여전히 영웅이고, 집은 여전히 집이다. 그 영웅은 집 밖이 아니라 집 안에 존재해야 하고, 그런 식의 화법이 과거의 자신에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이 영화다.


영웅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문제는 집 밖에도 있지만 집안에도 있다. 그 집은 영웅이 존재하는 이유가 아닌, 영웅의 존재를 담은 그릇이다. 쉽게 말해 그것은 사회와 개인의 관계다. 개인은 자신의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사실은 사회 시스템 안에 부품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눈으로 가시화되지 않아서 인지할 수가 없다. 시스템에 대항하기가 어려운 건 그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항한다는 건 정말로 두렵고,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부패한 공권력이라던가, 절대악이라던가하는 것은 그 뿌리를 찾기 힘들다. 말 그대로 형용할 수 없는 공포이고, 그것이 형상화되는 건 서부극이다. 혹은 서부극이라는 이름의 영웅놀이다. 이제 다 끝났나 싶으면 다시금 몰려오는 적들의 향연, 그것은 마치 구로사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과거의 영웅 영화가 영화 속 세계에서 표면으로 도달하는 적을 보여주었다면, 요즘의 영웅들은 영화 속의 집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 같다. 영화라는 골짜기에는 스크린이라는 집이 있고, 넓은 세계에서 선택된 시야만을 보여주는 스크린의 문제는 영화 담론의 표적지가 집처럼 보이게 한다. 요컨대 과거의 영웅들은 스크린이라는 집으로 돌아왔다가 다시금 나가는 것이었다. 거쳐 간다는 표현이 맞을 테다. 그렇다면 최근의 영웅들은 어떠한가.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사람은 어떠한가. <라스트 미션>에서 그는 집으로 돌아간다. 덧붙여서 영화의 결말에는 자신이 정말로 있어야 할 곳, 즉 가정이라는 집에서 사회라는 집으로 돌아간다. <그란토리노>처럼 아예 집에서 끝나버리는 삶도 있다.


<그란토리노>에서 노익장을 대변하는 게 낡았지만 새것인 자동차 ‘그란토리노’였다면, <라스트 미션>에서 노익장을 보여주는 건 낡은 트럭이다. 그 트럭은 낡은 것인 동시에 수십 년 동안 사고 하나 없던 새것이기도 하다. 이 대목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기 자신을 그런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낡았지만 새것, 그건 연기를 향한 열정일 수도 있고, 새것이지만 낡은 취급받는 것들에 대한 옹호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그의 나이를 생각해볼 수 있는데, 이 영화에서 낡은 트럭은 노쇠한 육신처럼 보인다. 돈을 벌어 새 차를 사지만, 간단한 인터넷조차 못하는 건 여전하다. 결국 그는 육신이 새것이 되어도 여전히 낡은 사람이고, 영화의 슬픔은 낡은 방식으로 낡은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던 모습에서 우러나온다.




05b634dd5bf44a1093c903b55c8e19531551158820658.jpg 영화 <라스트 미션>의 한 장면 ©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무엇보다 노익장으로서


나는 그동안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가 반성적인 영화라고 생각했었다. 진정성이 없다고나 할까.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요즘 시대에 알맞은 말을 하는 것 같다고 이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다. 그건 변명이나 반성이 아니라, 그냥 요즘 시대의 영웅상일 뿐이고 그는 여전히 영웅을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여전히 뚝심을 지키는 거고, 결코 과거를 후회하는 게 아니라 과거를 후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 자체가 요즘의 영웅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과거의 자신, 혹은 과거의 시대에 갇혀버린 이의 변명거리가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현대에 뚝 떨어져 버린 영웅처럼 보였다. 결국 바뀐 것은 그가 아니라 시대일 뿐이다.


영화에서 짤막하게 스쳐 지나가는 ‘껌둥이’라는 시대착오적인 발언은 “내가 아직 몰랐소.”라는 항변으로 넘어가고, 한편으로는 레즈비언 폭주족들에게 ‘레즈들’이라고 발언하기도 한다. 이게 과거에도 문제가 되었을까? 안되었을 테다. 하지만 현대에는 명백한 문제적 발언이다. 문제는 문제임을 지적할 때 그곳에 생겨난다는 말이 이것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영화가 어떤 문제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게 된다. 다르게 말해서 이것은 존재의 문제이다. 존재는 존재임을 지적할 때 그곳에 생겨난다. 존재가 무(無)일 때는 그게 이미 우리의 의식을 이루는 세계에 포함되어 있을 때다. 그 세계 안에서 특정한 대상을 응시하기 시작할 때야 비로소 존재는 존재된다. 그 응시가 바로 문제의식이다. 문제의식이 없다면 문제가 당연시된 세상에서 문제를 끄집어낼 수 없다.


영웅도 마찬가지다. 영웅은 영웅임을 지적해야만 생겨난다. 반대로 말하면 영웅은 원래 그곳에 있었고, 단지 인지되지 않았을 뿐이다. 즉,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바라보는 시대가 변한 것이지 그가 변한 건 아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영화 안에서의 그는 집에서 죽고, 영화 밖에서의 그는 스크린으로 돌아간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영화인으로서 영화로 돌아가고자 하고, 그런 돌아감의 의지가 사회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그만의 방법일 것이다. 영화인으로서 그의 시선은 스크린이라는 집 안으로 향하고 있다. 결국 문제는 집 밖이 아니라 집 안에 있다. 자기 존재의 그릇이 되는 가족 혹은 집이라는 것에는 자신이 무엇으로 구성되었는지를 돌아볼 좋은 근거가 많이 있다. 한국전쟁 참전 훈장을 이웃집 꼬마에게 전달해주던 <그란토리노>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떠올려 본다면 그러하다. 무엇보다 노익장으로서, 그 노련함에 첫 번째로 헌사를 보내고, 감독이자 배우를 겸했다는 두 번째 사실에 다시금 존경을 바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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