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야마에서 온 발라드

<토이 스토리 4>(2019)

by 수차미



da2e6f0663514ba3aaf1f003733d08831560262646934.jpg 영화 <토이 스토리 4>의 작품 포스터 © 월트 디즈니 코리아



여전히 키덜트인 우리들


<토이 스토리 4>의 도입부. 전편으로부터 9년의 시간이 흘렀음을 자막으로 말해주는 동안에, 우리는 숨을 가다듬는다. 이 만남은 어린 시절을 대변하는 장난감들을 9년 만에 다시 만난다는 점에서,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를 마주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허나 단순한 친구가 아니다. 유년기를 함께 보냈다는 점에서 그들은 소꿉친구다. 그리고 우리는 유년기의 추억이 유달리 인상 속에 남는다는 점을 안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어린 시절로의 여행을 염두에 두면서 커튼을 열어젖힌다.


그런데 이 작품을 보는 관객은 성인이다. 성인이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게 뭐가 이상하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장난감들은 늙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요컨대 만약 그들이 우리와 어린 시절을 함께한 친구라면, 그들은 여전히 어린 시절에 머물러 있는 게 되어버린다. 여기서 우리가 던질 화두는 우디(톰 행크스)가 50년대 말에 제조된 인형이며 그 내용이 <토이 스토리 2>에서 증명된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앤디의 유년기를 다루는 게 1편에서 2편까지이고, 이제 막 성인이 된 앤디를 보여주는 게 3편이라는 점에서 2편은 그들의 마지막 ‘어린 시절’이 담긴 시간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우디는 박물관에 남을지 앤디의 집에 남을지 선택하게 된다. 말하자면 그 어린 시절의 또 다른 표현은 ‘어른이 된다’는 것이다.


방금 ‘어른이 된다’는 표현을 썼지만 그것은 성숙함의 척도보단 시간에 가까운 말이다. 우디의 두 가지 선택 중에. 박물관에 남는다는 것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상징으로 전시되겠다는 것, 일종의 ‘화석’처럼 박제를 자청하는 행위다. 이때 존 라세터는 늙지 않는 장난감 사이를 살아가던 우디에게 자신이 출연했던 애니메이션 영상을 보여주면서, 피터팬의 환상을 깨뜨린다. 이 장면은 우디가 화면 속의 우디를 바라보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그 모습이 흡사 거울이라는 걸 처음 마주한 아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직 자아가 무르익기 전의 아이들이 거울 속의 자신을 알아볼 수 없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이 장면에서 우디는 자신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태어난 시점부터 몸과 마음 모두 늙지 않는 저주에 걸린 이 장난감들이 원더랜드를 살아간다면, 동산 밖의 시간이 흘러들어오는 것은 티브이라고. 이 장면이 작품의 핵심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우디 개인의 성장뿐만 아니라, 티브이를 통해 ‘원더랜드’를 접하는 우리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요즘은 다른 매체가 들어섰지만, 2편이 나온 1999년만 해도 티브이는 현실에 뚫린 통로 중 하나였다. 우리는 티브이를 보면서 환상의 나라로 모험을 떠날 수 있었다. 바보상자라는 비판은 우리가 티브이에 몰두한 나머지 자아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인류의 퇴보를 지적하는 맥락에서 유발되고 지지되었었다. 이는 어쩌면 디즈니랜드라는 환영에 대한 자기비판일 수도 있을 것이지만, 정반대로 우디는 자신이 속한 앤디네 집이야말로 원더랜드라는 점을 깨우쳤던 것이다.


따라서 우디의 성장이 이루어진 3편은 좋다고만 볼 수 없다. 박물관 속에서 시간의 편린으로 남기보단, ‘살아있는 기억’으로 작동하고자 하는 우디의 선택이 우리를 위해 악용되기 때문이다. 서부개척시대의 카우보이나, 그들이 등장하는 웨스턴 장르 영화처럼 한 시대를 풍미한 시간으로 남기를 거부한 우디. 매체가 지닌 시간의 영속성을 거부하고 개인의 기억 속으로 거니는 우디의 선택은, 인간이라는 매체 속으로 뛰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다르게 말하면 주인이 계속해서 바뀔 운명인 장난감들은, 어느 시대에도 속하지 않는 게 아니라 주인이 바뀌는 동시에 시대를 관통하는 게 된다.


이 세상은 3편에서 막을 내리고, 4편에서 새 악장을 연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이 친구들은 작품 속 10년 동안이나 작품 밖의 24년(95년~19년) 동안이나 나이를 전혀 먹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 이 모습에 대해 질문한다면, 나는 이것을 ‘오타쿠’스럽다고 말할 예정이다. 꽤나 직설적이지만 이 말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디즈니의 행보는 <알라딘>이나 <라이온 킹>이나 <곰돌이 푸>와 같은 과거 명작을 실사 영화로 다시 제작하고 있으니까. 말하자면 디즈니는 그들이 써왔던 역사의 한 장이 이미 신화가 되었음을 선언하고서, 이들의 시대는 하나의 원더랜드가 되었음을 반포하는 듯 보인다.


여기서 문제, ‘사자에상 시공’처럼 보이는 이 영화 시리즈에서 우디가 자신의 속한 본래 시간을 맞닥뜨렸을 때 벌어지는 현상은 무엇일까. 이 장면에서 우디가 본 것은 깨어진 거울이 아니라, 영화에 자신을 투영하던 우리의 일그러진 얼굴이다. 2편에서 우디는 시대의 상징으로 남기를 거부하고(정확하게는 수복하는 것을) 다시금 자신의 시간대로 돌아온다. 그런데. 앤디의 몸과 마음은 자라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그가 집으로 돌아오면 방안의 인형들은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있다. 그러니까 이들은 시간이 기록된 매체처럼 늘 언제나 그곳에 남아있는 것이며, 주인이 알던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한다는 점에서 스스로 지워질 수도 없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살아있는 동시에 죽어버린 시간이며, 본질적으로 우디 앞에 놓인 두 개의 선택지는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두 개의 차이점은 시대를 떠돌거나 떠돌지 않거나 일뿐이다.


만약 2편에서 우디가 박물관에 남기를 택했다면 이 영화는 여전히 앤디의 유년기에만 머물렀을 테다. 하지만 존 라세터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이 픽사의 규칙이기 때문이다. 픽사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을 거부한다. <UP>의 그 유명한 오프닝 장면, 혹은 <인크레더블>의 1편과 2편이 예상하지 않은 기획으로 세월을 넘어왔다는 점을 떠올려 보라. 여기에 첨언할 수 있다면 픽사의 가치관은 디즈니의 그것과는 정반대라는 점이다. 디즈니의 길은 우디가 박물관에 남기를 택한 것, 현존하는 원더랜드인 ‘디즈니랜드’를 더 잘 가꾸는 것이다. 또한 이에 대한 긍정적인 표현은 디즈니가 우리의 환상을 지켜주려 한다는 것이고, 부정적인 표현은 우리를 자폐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폐적이라는 표현을 오타쿠스럽다는 말과 연결한다면 비판이 뒤따를 수도 있다만, 적어도 나는 그런 표현이 부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키덜트라는 이름의 피터팬들이 원하는 건 자신의 시대에서 현존하는 시간을 관찰하는 것이지, 그 시대로 돌아가려는 게 아니니 말이다. 단적으로 말해 <토이 스토리>는 작품 속의 시간이 흐른다는 결정적인 대목이 있다. 말하자면 이것은 <쥬라기 공원>에서 시간 여행이 아니라, 시대가 담긴 호박으로부터 유전자를 추출하던 모습과 유사하다. 그러니까 우리는 흐르는 시간 속에 한 시대를 기억하는 자신과 흐르는 시대 속에서 갇힌 시간을 살아가는 인형들의 모습을 겹쳐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몸은 자랐는데 마음은 여전히 어린 키덜트(Kid+Adult)라면, 그들은 마음은 자랐는데 몸은 여전히 어린 키덜트인 셈이다.


노병은 사라질 뿐


조금 전의 문장에서 몸을 시대에 비유한다는 점을 깨달았을 테다. 자연스럽게, 몸이 시대라면 영혼은 시간이다. 이에 대한 맥루언식의 변환, 등식을 세우면 아날로그는 시대이고 디지털은 영혼이다. 그리고 등식의 실전 적용, 디지털 시대의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아날로그. 반대로 <토이 스토리>가 보여주는 것은 아날로그 시대가 그리워하는 디지털이다. 이 대목에서 1편이 최초의 디지털 풀 장편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을 떠올렸다면 그것은 분명 우연이다. 하지만 그 반대는 결코 우연이 될 수 없다. <토이 스토리>를 보는 우리가 최초의 디지털 생명체를 보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 말이다.


애니메이션이 셀 하나씩 그려 만드는 것으로 시작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것은 하나의 생명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디지털 작업으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생명으로 볼 수 있는가. 이른바 신체 없이 태어난 영혼, 이것은 단순히 디지털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포성에 그치지 않는다. 그 철학적 물음의 우리식의 변환은 다음과 같다. 기억 없이 태어난 추억, 혹은 시간. 실제로 겪어보지 않은 일에 공감하여 웃고 우는 우리의 모습에 대해, 그것이 가짜 기억인데 어찌하여 그러고 있는지 묻는다면 영화란 무엇이 되는 걸까. 여기서 다시 한 번, 그 문제의 변형 공식.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게 될까. 맞닿은 신체 없이 태어난 감정이라는 말은, 함께한 시간 없이도 교감한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결국 이것은 시간과 감정이면서도 영화와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우리는 더는 과거처럼 시대를 순차적으로 건너는 게 아니라, 선택적으로 건너간다고 할 수 있다. 즉, <토이 스토리> 시리즈는 누구나 겪어봤을 법한 과거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누구나 겪고 있을 만한 현재를 묘사했다. 그래서 기억 없이 태어난 추억이라는 말은, 기억되지 않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유효한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억의 기능을 외부에 위탁하면서 정작 본체는 기능하는 것에만 중점을 두니 말이다. 휴대전화가 생기고 나서 전화번호를 외울 필요가 없어졌듯이, 사진기가 생기고 나자 얼굴을 기억하는 의도가 달라졌듯이. 즉석에서 말을 꾸며낸다거나 하는 게 아닌, 진실로 기억되지 않는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이 대목에서 1편에서 3편까지 장난감들의 고민이 주인이 어른이 됨에 있어 자신들이 버려진다는 공포라는 점을 상기해보자. 어른이 되기에 장난감들을 멀리하게 된다는 말이 장난감에 담긴 추억 모두를 간과했다는 말과 동의어는 아니다. 어린아이에게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시간이 곧 시대이며, 그 시대가 허물없이 지나가 버린다는 점에서 그것은 근본적으로 시간의 뿌리를 지니지 못했다. 사실 이건 디지털이라는 특성 때문이 아니라 세계의 확장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는 하다. 다르게 말하면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기억 너머로 사라져야 할 게 있는데, 진실이 아니더라도 그 시대를 쌓아올릴 수 있다고 픽사는 믿는 듯하다.


그러나 반문. 디지털 시대에 홍수처럼 쏟아져 내려오는 픽셀들의 향연에서 우리가 진실된 이미지를 어떻게 찾아낼 것이고, 어떻게 추모할 것이며, 어떻게 느껴야 하는가. 디지털 애니메이션이 고민하는 게 있다면, 그 모습은 2편에서 버즈(팀 앨런)가 맞닥뜨린 ‘버즈라이트이어’가 전시된 장난감 가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신을 닮은 숱한 이미지 속에서 특별한 존재가 되려 하는 버즈의 모습은, 엇비슷한 추억을 묘사하는 매체 안에서 특별함을 선사하려 하는 픽사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는 물론 자신이 특별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우디와 반대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토이 스토리 4>를 보며 한 시대가 끝났음을 깨우칠 것이다. 서부개척시대의 카우보이가 특별한 개인, 웨스턴 장르의 어느 특출난 개인을 묘사하는 것이라면. 그다음으로 등장한 기술복제시대의 아폴로 우주사는 복사되고, 반복되는 다음 이미지 시대를 예고한다. 이는 티브이 안에서 자신의 특별함을 발견하는 우디의 모습과 장난감 가게에서 자신의 특별함을 잃어버리는 버즈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4편에 와서 우디의 시대는 너무 오래되었는지 옷장 안으로 퇴장하며, 이는 곧 다음 시대인 디지털이 다가옴을 예고한다. 이에 맞추어 그동안은 집안과 가까운 근교 가게로 공간이 한정되었다면, 4편에서는 놀이동산이나 유치원처럼 그동안 보여주지 않았던 바깥세상으로 향하게 된다.


한정되었던 공간이 열리고 보니가 여행을 떠난다. 여기서 제시되는 것은 놀이동산과 골동품점이다. 정확하게는 골동품점이 놀이동산 앞에 있고 순번상으로 놀이동산의 바로 전에 해당한다. 말하자면 놀이동산이라는 현대 사회의 유희적 공간이 있고, 그렇게 유희하는 것들이 남겨진 장소가 골동품점이다. 흥미롭게도 이곳에는 팔리지 않는 구닥다리 장난감들과 그들의 폭군격인 개비 개비(크리스티나 헨드릭스)가 있다. 이곳에 포키(토니 헤일)가 개비 개비에 의해 감금되면서 우디가 그를 구출하러 가는 게 작품의 주요 플롯이다. 그런데 그 포키는 쓰레기통에서 태어났고, 태어나자마자 자신이 있을 곳은 쓰레기통이라고 말하는데 그 모습 또한 조악하기 짝이 없다. 다르게 말하면 포키는, 이미지를 조합해 다시금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디지털 시대에서 그런 걸 만들고 남은 쓰레기들이 담긴 곳에서 태어난 생명이다. 따라서 ‘남겨진’ 것들로 만들어진 포키가 ‘남겨진’ 이들이 있는 골동품점에 갇힌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9년 동안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런 표현은 어떨까. 우디는 떠나고 버즈는 남고 포키는 다시금 후임을 맞이한다. 초등학교 1학년이 된 보니가 자신의 여성형 버전을 만들어왔을 때, 포키는 그녀를 환대하며 쓰레기가 아니라고 말해준다. 요컨대 우디라는 고정된 이미지, 정립된 이미지는 놀이공원이라는 현대 사회의 대표적 공간 안으로 탈출하게 된다. 여기에는 그동안 우디와 같은 남성형 캐릭터에게 의존하기만 했던, 하지만 이번 작에서는 재회와 함께 거추장스러운 치마를 벗어 던진 보 핍(애니 파츠)이 함께한다. 여기서 우리는 픽사가 달라진 여성주체를 표현한다고 지적할 수도 있다. 허나 그에 앞서는 건 ‘구시대’를 대변하는 두 인물이 떠난다는 점이다.


픽사는 개비 개비의 생산 연도를 우디와 같은 50년대로 설정하면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가지 선을 세워두고, 수동적인 여성상을 보여준다고 비판받았던 보핍을 골동품점으로 투입시키면서 다시금 두 여성 캐릭터를 교차시킨다. 여기서 개비 개비는 목소리를 잃은 채로 태어났고, 그렇기에 자신은 사랑받아본 적이 없다며 우디에게 울림통을 기부할 것을 호소한다. 물론 우디는 거절한다. 이때 혹자는 개비 개비가 악당으로 나오고 그를 중심으로 한 서사가 매력적이지 않다고, 혹은 매끄럽지 않다고 비판한다. 이 비판은 그전의 영화를 떠올려 보면 합당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영화가 그동안의 <토이 스토리> 시리즈에 ‘정말로’ 종지부를 찍을 용도로 기획되었음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영화에서 주인으로부터 버림받은 하지만 잘 살아남은 보 핍은, 주인으로부터의 이별과 전통적 여성상으로부터의 이별이라는 두 가지 함의를 내포한다. 이런 맥락이 보 핍이 우디에게 두 가지 모두를 전수해주는 구도로 연결된다. 우디에게 의존하던 보 핍이 우디를 돕게 되고, 우디가 장롱 안에 처박혀 있을 때 밖으로 나오라고 (실질적인) 조언을 해준다. 골동품점 안에서 개비 개비도 우디에게 같은 말을 했지만, 그건 우디를 현혹하기 위한 말에 가까웠다. 덧붙여서 보 핍은 회전목마 위에서 우디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이 구도 속에서 우리는 주종관계가 성립된 이미지들이, 스스로 끈을 끊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을 목격한다. 이 모습은 골동품점이라는 내향적이고 구시대적 이미지로부터, 놀이동산이라는 외향적이고 (나름) 신시대적인 이미지로 탈피하게 됨을 보여준다.


결국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간단하다. 시대로 대표되는 주인, 그 주종관계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곧 자신이 태어난 시대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본래 태어난 시대와 주인이 부여한 시대, 어찌 되었든 간에 뿌리가 있어야 하기에 주인이 있어야먄 한다고 생각하는 그들. 다른 인형들이 주인이 있음을 부러워할 때 우디와 보 핍은 놀이동원에 남는다. 요컨대 우리는 이 영화에 나오는 유원지를 사이버 공간에서의 광장에 빗댈 수 있다. 이미지가 흘러들어오는 곳에서, 근본은 사라지고 이곳에 남은 현재, 시간만이 있다. 디지털 시대가 지워버린 게 시간이라는 점에서는, 그들이 어떤 시간을 살아가든 간에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경험과 변형의 연속일 테다.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우디의 사라진 발성 기관에 담긴 소리, 그것이 기록된 시간이 ‘여전히’ 과거에 남기를 원하는 이에게 이식되었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방향을 향해야 할까. 확실한 건 우디는 신화와 상징으로 남기를 거부하고 세상을 떠돌게 되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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