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라는 감독의 분열된 자아들이 주고받는 유쾌한 만담

<강변호텔>(2019)

by 수차미


홍상수의 <강변호텔>을 보고 나서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별 다른 이유는 없다. 원래 홍상수 영화는 볼 땐 낄낄 대면서도, 정작 보고 나면 허공에 붕 떠버리는 게 특징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 영화에서 흘러나온 의미가 맥락으로 이어지지 못한다고 느꼈다. 내가 이 글에 적으려는 건, 그 느낌이 내 마음에 도달하는 과정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다. (주관에 대한 주관적인 평가일 테다. )


노파심이지만 앞서 일러두고 싶은 것은, 허공에 붕 떠버린다는 말을 사유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으로 읽어선 안 된다는 점이다. 그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우리는 기표와 기의의 불일치를 찾게 되는데, 이때 기표는 영화의 미장센에 기의는 인물의 대화에 대응한다. 요컨대 홍상수 영화의 정체성은 라깡의 말을 빌려 “기표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기의”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눈으로 보이는 것을 그대로 믿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가 아니라 우리에게서 발견되는 문제이다. 즉 그 사유는 영화가 아닌 우리에게서 찾아야 한다.




영화 <강변호텔>의 한 장면 © 전원사




외부로부터의 개입 혹은 침입 : 청각


홍상수 영화에는 영상이 있고 그 아래 언어가 있다. 쉽게 말해 그는 영화의 형식에 신경을 쓰는 듯 보인다. 이 사실은 홍상수 감독의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원작이 있음에도 원작에서 틀만 빌려왔다고 할 정도로 감독의 손을 통해 개조되었다. 그 세부사항을 여기서 논할 수는 없다. 다만 이 지점에서 출발한 홍상수의 영화는 그 형식의 고고함으로 대중과 평단에 이름을 알리게 되는데, 어느 시점(아마도 <밤의 해변에서 홀로>쯤)에서부터 이전까지 자신이 설정한 한계를 줄곧 변형하려는 시도가 있어 왔다.


그 시점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세부사항이 갈린다. 다만 그 시작점 근처에 <밤의 해변에서 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는 영화의 형식이 내부가 아닌 외부로부터 진입해오는 뚜렷이 관측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홍상수는 조심스럽게 변화의 의지를 내비친다. 베란다 밖과 해변 위에서 관찰되는, 스크린 밖의 우리에게만 보이는 어느 남성을 등장시키면서 말이다. 이후로 나온 <클레어의 카메라>나 <그 후>에 대해 상세하게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카메라가 인물을 바라보던 방식은 이 영화에서도 줄곧 유지되고(클로즈업을 통해 보여지는 세계로부터의 ‘응시’, 그 시선의 진입지점은 외부다.), 세계가 아닌 인물로 옮겨간 시선에서 후경으로 남겨지는 ‘것들’ 위에 춤추는 형식의 실험을 우리는 목격할 수 있다.


무엇보다 내가 최근의 홍상수에게서 놀랐던 것은 <풀잎들>이다. 이 영화에는 어느 인물이 카페 구석에 앉아서 타인의 대화를 엿듣는다. 그런데 카메라는 인물의 대화 장면을 보여주기만 할 뿐이다. 그렇게 대화가 진행되고 나서, 일종의 리액션을 보여주는 게 해당 인물이다. 이른바 ‘나레이션’이라는 이름의 언어가 그 인물에게서 흘러나오게 된다. 이때 그 나레이션이 홍상수 영화에서 이례적으로 등장했다는 형식의 문제를 제쳐놓고서라도, 이 나레이션이 이 세계 밖(스크린이라는 카페와 영화관이라는 골목길)에서 기원한다는 점을 우리는 알게 된다. 그러니까, 그녀가 작품의 서사를 관찰하고 있다는 점은 마치, 그녀가 <풀잎들>이라는 연극을 보는 한 명의 ‘관객’처럼 보이게 한다.


나레이션이 세계 밖에서 흘러나온다는 말이 조금 추상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간단히 말해 이것은 소리의 문제이다. 이전에도 홍상수 영화에 나레이션은 있었지만 그건 영화 속 인물이 영화 속 이야기를 논하는 것에 국한되었었다. 이른바 삶, 영화적으로는 서사, <하하하>에서 흑백 쇼트로 이어지는 영화적 흐름이 시간을 직시하고 있다면, 그 위에 흐르는 청각은 그런 시간을 이어주는 실 같은 역할이었음을 떠올려보라. (어쩌면 무스비일까?) 요컨대 <풀잎들>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건 극을 이끌어가기 위한 도구로서의 청각(=나레이션)이 아니라, 관객을 끌어당기기 위한 청각적 ‘효과’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홍상수가 하는 형식의 실험이 내부에서 외부로 옮겨가고 있음을 느꼈다. 홍상수 필모그래피의 전반부 영화 (개혁 이전의)가 철저히 독립된 세계 안에서 벌어지는 그들만의 이야기였다면, 개혁을 시도하는 형식의 여러 실험에는 외부로부터의 개입 혹은 침입이 있었고, 이제는 아예 관객의 손을 붙들고 적극적인 이입을 유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청각이 영화에서 관객의 몰입을 위해 사용된다는 점은 지극히 당연하지만, 홍상수의 영화에는 기표가 기의 아래로 쭉 미끄러져 들어가는 형태인데 그걸 더 착 달라붙게 하려는 용도로 청각을 ‘이용’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나는 놀라게 되었던 것이다.




영화 <강변호텔>의 한 장면 © 전원사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 제작신고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나는 지금 심각하다. <강변호텔>의 도입부에서 그 유명한 홍상수의 ‘전원사’ 시퀀스 (라고 표현했지만 사실은 오프닝 크레딧이다.)가 오즈 야스지로 영화의 도입부처럼 보인다는 점을 떠올리고, 이 영화에서 홍상수 감독이 “이 영화는 영화 제작 전원사에서 만들었습니다. 2018년 1월 29일부터 2월 14일까지 만들었습니다. 각본 감독은 홍상수이고 나오는 배우는 기주봉, 김민희, 송선미, 권해효, 유준상 등입니다. 이 영화의 제목은 강변호텔입니다.”라고 말한다는 점을 떠올려본다면, 나는 그 대목에서 오즈 야스지로의 페르소나가 “이 영화는 쇼치쿠 영화사에서 만들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떠올리며 웃음을 감출 수가 없을 것이다. ‘것이다.’라고 표현한 건 실제로는 웃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그것은 꽤 웃음이 나올 만한 일이다.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이례적인 일이다.


이 나레이션의 존재는 우리로 하여금, 마치 그들 스스로 이게 연극이라는 걸 아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이렇듯 발화의 힘은 그토록 대단하다. <재즈 싱어>에서도 그렇듯, <위대한 독재자>에서도 그렇듯. 반면, 그럼에도 영화 속 그들은 그들 삶이 영화라는 점을 알 수는 없다. 결국 그런 ‘느껴짐’은 우리의 착각일 뿐이다. 그렇다면 영화 시작 부분의 목소리는 누가 어떻게 무슨 이유로 그들 삶을 논하게 되는 것일까? 아마 감독의 대리인이라는 점을 논할 수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영화의 제목뿐만 아니라 등장인물과 제작 시기를 읊는 도입부의 나레이션은 일종의 출생신고와도 같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것에 대한 답변, 제작신고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답변은 단지 사무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일 뿐이다. 이른바 ‘국어사전 읽기’, 하지만 사람의 삶과 그 탄생, 혹은 기원에 대해 따져 물을 때 우리는 삶의 이유, 그리고 존재 이유에 대해 묻지 않으면 안 된다. 말하자면, “왜 태어났는가?”라는 물음이 이 영화에는 없었다는 소리다. 이 대목에서 나는 라깡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홍상수 영화를 떠올리게 되었다. 왜 태어났는지에 대한, 존재 이유를 찾는 그 물음은 바로 세상에 나라는 존재의 기표로 지정된 나의 의미, ‘기의’를 찾아 헤매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표 아래로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기의, 그것은 영화의 필름 아래로 흘러들어오는 영화의 서사적 맥락, 인간의 삶으로 말하면 정해진 역할 속에 방황하는 영혼, 이것을 칼 융의 언어로 번역하면 “가면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페르소나의 본질은 흐름이다.)” 이 맥락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허공에 붕 떠버리는 ‘느낌’이다. 이때 이것을 홍상수의 언어로 번안하면 다음과 같다. 형식 아래로 미끄러지는 의미, 이름 아래로 미끄러지는 역할, 홍상수의 영화에서 인물의 행동이 지리멸렬하게 보이는 건 그런 이유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홍상수의 최근 영화가 보여주는 건 스크린의 안팎을 치환하려는 시도이다. 기표와 기의의 자리를 영화의 측면이 아닌, 영화와 관객의 자리에서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영화 <강변호텔>의 한 장면 © 전원사



홍상수라는 ‘집=세계’


이것은 폐쇄적인 세계가 ‘나름’ 개방적으로 변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신호이다. 조금은 위험한 말일 수도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사람이 그렇게 달라질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이것을 라깡의 언어로 번안하자면, 홍상수가 세워둔 자신의 거울상이 스크린이라는 ‘거울(메츠의)’ 속에서 묘사되고 있었던 전반부 영화가, 이제는 그 거울을 자신의 내면이 아닌 외부에서 찾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므로 이런 맥락에서는 앞서 말한 홍상수 영화의 형식이란, 홍상수라는 ‘집’을 뜻하게 된다. 건물이 아니라, 그의 자아가 담긴 그릇으로서의 집이다.


그렇다. 나는 홍상수 영화에서 집이라는 그릇을 보았다. 홍상수 영화에서 집이라는 공간은 전반부가 아닌 후반부에서 두드러진다. 그의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도 ‘집’ 혹은 그에 비견되는 ‘모텔’은 인물이 잠시 머무르는 공간이거나 혹은 사망에 이르는, 비극적인 공간이었다. 또한 우리는 그동안 홍상수의 영화에서 집이라는 게 얼마나 부질없고, 어서 떠나고 싶은 공간이었음을 목격하지 않았던가. <밤과 낮>은 집은 집인데 타향에 있는 집이고 그것은 가짜였다. 또한 돌아가야할 집도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이제와서 그런 공간들을 일일히 지적하기에는 너무 많은 ‘집’들이 세계 너머로 사라져버린 게 현실이다. 그의 영화 속에서 인물들은 자신의 출신을 ‘말로만’ 밝힌다. 그러므로 그것은 언어로만 존재하는 집이다. 반대로 말하면 기표 없이 태어난 기의인데 그것을 규명할 기표조차 없다.


그런데 <풀잎들>은 집이라는 공간 안에서 시작해 집이라는 공간으로 끝난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카페 안에 떠도는 목소리다. 이 영화에서 감독에 대응하는 인물은 카페 구석에 앉아 노트북 모니터를 바라보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줄곧 다른 이들의 대화에 딴죽을 걸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인물이 노트북을 통해 쓰는 건 그들을 관찰한 행동의 결과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감독이 창조한 인물들을 다시금 들여다보는 후천적인 판단을 보여주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걸 자기 자신의 객관화라고 해야 할까. 문제는 이 영화에서 관찰자이자 기록자(=창조주)처럼 보이는 그 인물이 영화의 서사 속에서 자신이 관찰하던 이들과 얽히고설킨다는 점이다.



영화 <강변호텔>의 한 장면 © 전원사


심금을 울리는 한마디


그러니까 내가 홍상수 영화에서 보는 건 홍상수라는 감독의 분열된 자아들이 주고받는 유쾌한 만담이다. 의식이 하나의 강물이라면 그 속에 박힌 돌다리는 분열된 자아일 테다. 어쩌면 그가 시나리오를 손수 쓴다는 점이 그것을 보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영화 밖에서도 세상에 대해서는 줄곧 신비주의로 일관하는 그를 알 수 있는 게 단지 그의 모습으로 표현된 그의 모습뿐이라는 점에서 나는 답답했었다.


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자아가 무의식의 공격을 받는 것처럼 보였다. (자아가 일방적으로 무의식을 관찰하는 것은 꿈속인데, 그 꿈에서 갑작스럽게 무의식이 자신을 응시해온다. <인셉션>에서의 묘사를 떠올린다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 자아는 무의식에게 나레이션이라는 형태의 청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논의를 빌리자면, 실재계의 소음을 기록해 상징계로 불러내는 것이 바로 축음기의 역할이다. 즉 그것은 소음이다. 잡음이다. 뇌간 주름 사이를 타고 오르는 강렬한 청각적 심상이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지나치는 여러 백색 소음들, 그것을 지나치지 않고 새겨듣는 것이 <풀잎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실재계를 기록하던 축음기 역의 인물은 서사 속으로 개입하게 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청각에 몸을 던지게 된다. 그것은 이미지의 형태로 뇌에 흘러들어와 어머니의 형태를 구성하게 된다. 요컨대 우리의 꿈이 일종의 흐르는 물의 형태를 띠는 것은 어머니의 양수가 다름 아닌 물인 덕택이다. 그러니까 라깡의 오이디푸스 과정을 빌려서 설명하면, 홍상수 감독은 영화를 아버지(상징계로의 진입)로 섬기면서 그 자신이 되고자 하는 어머니(실재계)를 스크린 속에 묻어두려는 게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때 홍상수가 <강변호텔>의 도입부에서 툭 던지는 한마디는 그야말로 내 심금을 울렸다. 이전 영화에서도 줄곧 그의 인물들이 “죽고 싶다.” 거나 “죽을 것 같아.”라고 말하던 것과는 달리, 밖에서 안으로 흘러들어온 청각으로 이어진 안팎의 세계에서 기주봉 배우의 입을 빌려 그는 “아무런 이유 없이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라고 말한다.


다른 의미에서 이것은 자신이 그린 풍경화 (그림이라는 상상계) 속으로 들어가는 신선의 모습처럼 보인다. 자신의 거울(서사) 속으로 들어가는 신선(감독). 또는, 상상계(기표로서의 영상)에서 상징계(기의로서의 언어)로 진입하는 과정(*거울 단계)의 반대절차. (*영상 속에서 전지전능한 것처럼 보였던 그는 언어의 차원으로 진입하면서 자신이 말하려는 게 바르게 전달되지 않음을 자각한다. = 기표 아래로 미끄러지는 기의.) 요컨대 나는 감독 홍상수가 영화를 통해 무언가를 표현하려는 게 아니라, 영화 그 자체가 그의 욕망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르게 말해서 홍상수의 영화는 상징계에서 태어난 상상계(언어로 구축하는 영상)라는 이름의 스크린이 아닌, 실재계가 잉태한 상상계(소음이 구축하는 영상)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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