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시간으로부터 쓰이는 여기

<아이리시맨>(2019)

by 수차미


KakaoTalk_20191202_172054230.jpg 영화 <아이리시맨>의 한 장면 © 넷플릭스







1.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지.” 마틴 스콜세지가 로버트 드니로에게 말했다. 그렇게 로버트 드니로는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 <택시 드라이버>에서 주연을 맡았다. 여기서 로버트 드니로는 택시를 타고 과거의 미국으로 넘어간다. 이때 <백 투 더 퓨쳐>의 마티가 박사님에게 물었던 질문처럼, 넷플릭스 영화를 만든 마틴 스콜세지에게 사람들이 물었다. “마티, 왜 하필 넷플릭스인가요?” 그러자 노년의 ‘마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티는 마틴 스콜세지의 애칭이다.) “이런 짓에 돈을 대줄 회사가 없었거든.” 마티는 신경질이 약간 섞인, 하지만 여전한 중후함으로 말을 이어나간다. “모름지기 과거로 돌아가려면 돈이 아주 많이 필요한 법이지.” 박사님의 이 말처럼 <아이리시 맨>은 로버트 드니로의 젊은 시절을 CG로 처리하는데 예산의 대부분을 사용했다. 그러니까 마틴 스콜세지에게는 로버트 드니로의 젊은 날이 몹시 중요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영화를 보기 전에는 이 말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말로 젊어지는 것도 아닌데, 역사 체험 따위에 그렇게 큰 돈을!”라고 <백 투 더 퓨쳐>의 마티처럼 말할지도 모른다. 한 마피아의 시선으로 미국의 과거를 그려낸 이 작품이 영화에만 그친다는 걸 우리는 잘 안다. 마티가 드로리안을 타고 떠난 옛 미국의 풍경처럼, 이곳은 현실의 또 다른 면에 자리하는 시간선일 뿐이니 말이다.



신기한 것은 바로 그 부분이 마티에 대한 물음이자 답변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현실이 될 수 없는 현실을 왜 굳이 그려야만 하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이 영화는 다른 쪽의 답변을 제안한다. 마틴 스콜세지가 주연 배우들의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기 위해 소모한 비용은 이것이 마티가 아닌 박사님의 영화라는 점을 보여준다. 쉽게 말해 이 영화는 배우가 아닌 감독의 시선으로 그려졌다. 영화는 원래 감독이 만드는 것이니 그 산물은 감독의 시선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로버트 드니로와 알 파치노라는 두 명의 배우를 두고서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다. 여기에 버젓이 서 있는 두 명의 아우라를 외면한다면 그것은 큰 무례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드니로와 파치노의 <대부>를 생생히 기억하기 때문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고 나면 또 다른 세대가 등장할 테다. 하지만 아직은 드니로와 파치노의 시대가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그들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중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아직 현재 진행형이고, 스콜세지는 그 이야기의 마지막 장을 닫으려 한다.



뻔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뻔해도 좋은 이야기다. <아이리시 맨>의 시작과 끝은 드니로가 들어앉은 방의 입구와 출구이다. 영화의 내용은 그 시작과 끝 사이에 자리하는 드니로의 삶이다. 그러나 회상의 형태로 진행되는 이 영화가 이미 완성형으로 시작한다는 점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영화가 시작하면 드니로는 이미 늙어있다. 영화가 끝나도 드니로는 늙어있다. 이 중간 사이에 자리하는 건 카메라가 문으로 들어갔다가 문으로 나오는 일련의 움직임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말년의 드니로가 지난 삶을 회상하는 방식처럼 보인다. 허나 핵심은 이것이 노인의 회고록이라는 점이 아니다. 입구와 출구로 카메라가 들어가는 과정에서 문을 열고 닫는 동작이 생략되어있다. 표면적인 이유를 찾자면 이곳이 요양원이기에 노인들을 위해 문을 만들지 않아서다. (휠체어를 탄 채로 문을 열기란 불편한 일이다.) 허나 삶을 회고하는 기억의 출입구에 문이 달려있지 않다는 점은, 그 기억의 경계가 딱히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요컨대 그곳에는,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과 같은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다. 노신사의 늙은 기억에는 걸림돌이 없다. 휠체어를 타고 감에 있어 바닥에 문턱이 있으면 안 되듯이, 휠체어를 탄 드니로에게 회상의 걸림돌은 없는 것이다.



요양원을 배경으로 시작과 끝을 매듭짓는다는 것. 이것이 그가 편안한 여생을 살았음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들려주는 이야기를 편한 마음으로 들으라는쯤의 충고는 될 수 있다. 그러니까 생각을 다른 측면으로 접근해보자면, 이는 <택시 드라이버>의 로버트 드니로가 생각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택시 드라이버의 드니로는 자신이 믿는 일에는 거리낌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속된 말로 하면 우리에게 드니로는 뒤로 가기 없는 직진으로만 기억되고 있다. 실은 <아이리시 맨>의 이야기가 프랭크 시런(로버트 드니로)이 지미 호파를 살해했음을 털어놓는 것이라는 점에서도 이 조언은 유효하다. 초점을 여러 곳으로 분산시켜보면 스콜세지나 드니로, 파치노의 영화 전반에서 문짝이 성할 날이 없기도 했다. 다르게 말하면 그들의 영화에서는 걸림돌이라는 게 정말로 많았다. 그곳에 걸려 넘어지는지 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당장 <대부>를 돌아보면 문 너머로 사람을 쏘아 죽이거나, 한쪽에서는 행사가 진행되는 와중에 다른 쪽에서는 암살의 현장이 진행되고 있기도 했으니 말이다.



2.



영화 바깥으로 눈을 돌려보면 스콜세지가 마블 영화를 두고 말한 발언이 눈에 띈다. 스콜세지는 마블 영화를 두고서 모종의 아쉬움을 표한 바가 있다. 이때 우리가 그 내용에 대해 갑론을박을 벌이지 않는다면 다른 점을 눈여겨볼 수 있다. 마블은 <스파이더맨 : 파 프롬 홈>을 통해 자사의 마블 프렌차이즈 영화에 대해 간접적인 농담을 건낸 바가 있다. 이 영화에서 제이크 질렌할은 “이 좋은 기술을 왜 이렇게 써먹지 않는 거지?”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 말은 사실 CG 기술이라는 게 꼭 휘황찬란한 미래를 보여주는 것에만 사용될 이유는 없다는 뜻이다. CG란 우리의 한계를 보완하는데 사용하는 도구다. 그것이 도구이므로 우리가 그것에 휘둘릴 필요는 없다. 도구에 휘둘리게 된다면 그것은 더는 도구가 아닐 테니 말이다. 이것이 <파 프롬 홈>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이기도 했다. 인간의 상상력이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이미지의 형상으로 나타날 때, 그 형상을 좀 더 잘 빚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가 우리를 이미지의 형상 안으로 끌어당겨 버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이미지로 쌓은 집이 제국으로 변모하게 될 때, 그것은 이미지에만 그치지 않고 현실에 손을 뻗게 된다. 이미지에 지배당한다는 점에서 그리 좋은 일은 아니라 할 수 있다. (마블 영화에서 질렌할은 “대중에게는 그들을 인도할 이미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이미지가 우리를 지배하는 게 긍정적으로 평가될 때가 생기기도 한다. 이를테면 시간이나 관계처럼 물질로 표현될 수 없는 것들은 카메라 자체만으로는 재현되지 않는다. 마틴 스콜세지도 그것을 잘 알기에 <휴고>에서 현실의 카메라라면 하지 못할 카메라의 움직임을 컴퓨터를 통해 만들어냈다. 무엇보다 <휴고>가 조르주 멜리어스에게 바치는 헌사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곳에서의 컴퓨터는 영화 역사의 현재가 무엇인지를 잘 말해준다. <휴고>의 카메라는 시계탑을 관통해 오래된 기계 태엽 인형을 바라보았고, 이러한 카메라의 움직임이 시간에 기계를 더한 ‘시간기계’로서의 영화를 강조하는 것이라면, 비가역적으로 달려온 뤼미에르의 열차가 도착한 장소는 바로 (조르주 멜리어스의) <달나라 여행>이었을 것이다.



허나, 이 지적으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달나라 여행>이 영화사상 최초의 ‘CG(의 조상님격)’에 해당한다는 점이 아니다. 스콜세지가 <휴고>를 통해 영화라는 매체에 헌사를 바치는 방식이 과거의 CG를 현재의 CG로 바라보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미지가 두둥실 떠오르는 3D 포맷의 <휴고>는, 매체가 아닌 이미지의 측면에서 우리 눈 앞으로 떠오르는, 과거의 열차가 스크린으로 달려오던 것처럼 현재의 그래픽은 우리 눈으로 달려온다고 말할 수 있는 ‘입체’의 형식이었다. 예컨대 CG의 본래 역할은,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의 측면이 아니라 ‘있는 것을 보다 더 생생하게 만드는’ 사실성의 측면에 더 무게가 실려 있다. 이게 CG가 왜 영화를 만드는 것에 있어 도구로만 남아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CG가 모든 것을 만들어낼 수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현실이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할리우드의 늙은 시네아스트들은 말한다. 스티븐 스필버그도 <레디 플레이어 원>으로 그 점을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다소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우리가 접하게 된다. 그들이 CG를 대하는 태도가 ‘넷플릭스라는 시대이자 매체’를 대하는 태도와 얼추 비슷하게 맞아 떨어지는 듯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마틴 스콜세지는 마블 영화가 ‘시네마’가 아니라고 비판했다. 이는 물론 마블이라는 콘텐츠가 아니라 마블이라는 콘텐츠가 다루어지는 방식과 그걸 둘러싼 주변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다. 스콜세지는 영화관에 모여 영화를 함께하는 경험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함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파리의 시네마테크에 앉아 낯선 이들과 함께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의 <잔 다르크의 수난>을 감상하는 경험은 넷플릭스가 줄 수 없는 경험이라는 점이다. 아마도 스콜세지는 영화를 찍기는 어려워졌지만 영화를 보기는 쉬워진 현 상황을 두고 그런 발언을 한 것으로 보인다. 쉽게 말해 영화가 점점 더 상업논리를 따라간다는 뜻이다. 다른 분야지만 웹툰의 사례를 들어보면, 일주일을 쉬지 않고 일해 한 편을 연재하고 나면 그것을 5분 만에 읽은 독자는 100원짜리 미리보기 구독권으로 작가를 향한 독설을 쏟아낸다. 돈을 얼마나 버느냐를 떠나서 5분이라는 시간과 100원이라는 금액에 갑질을 당하는 행태가 작가에게는 좋게 보이지 않을 것임을 그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스콜세지는 창작자가 소모한 시간이나 정성만큼의 노력을 관객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최소한의 예우만큼은 갖추어주기를 요청한다. 말하자면 이는 영화를 만드는 이와 소비하는 이 사이에 자리하는 예티켓이다. 그래서 그는 영화는 영화관에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리시 맨>을 집에서 본다면 아이패드와 같은 큰 화면을 보라고 권장했다.) 그는 영화가 단순히 유희를 위한 도구로만 취급되는 것에 반대한다. 도구로서의 영화가 우리 삶에 어떠한 교훈이나 재미를 안겨줄 수는 있겠지만, 영화를 본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을 느끼던 이미지 이전 시대의 유희가 어디로 갔는지를 그는 묻는다. (3D라는 입체가 촉각을 대변한다면, 그 이전에는 본다는 것, 즉 시각이 주류였었다.) 예컨대 이는 스콜세지가 왜 <아이리시 맨>을 노화하는 방식으로 촬영했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만약 스콜세지가 예산을 줄이고자 했다면 <대부>처럼 젊은 시절에는 다른 대역을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대부> 시절에는 CG가 없기는 했다.) 하지만 스콜세지는 주연 배우를 그대로 늙어가는 것처럼 만들었다. 다르게 말해서 그는 영화 속의 인물이 영화라는 비가역적 매체와 함께하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관객이 그들의 노화를 눈으로 목격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함께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기쁨, 이는 감독 본인에게도 적용되는 성숙함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노년의 감독이 노년의 배우에게 보내는 러브콜인 셈이다.



3.



마틴 스콜세지는 <아이리시 맨>에 돈을 투자하지 않은 할리우드의 여러 배급사를 두고서 서운함을 드러낸 바가 있다. 그도 나이 든 배우를 젊게 만드는 데 예산의 절반을 쏟아부은 영화에 선뜻 돈을 투자하기가 꺼려지는 게 이해는 갔을 것이다. 그러니 그가 서운함을 드러낸 지점은 ‘청년 시절을 연기할 대역을 따로 마련하지 않고, 굳이 나이 든 배우를 올타임으로 기용해야만 했던 이유를 이해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실망이었을 테다. 말하자면 스콜세지는 배우가 대체 불가능한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또한 많은 감독들이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인물의 컨셉에 맞는 배우를 미리 염두에 두기도 한다. 그가 아닌 이 배역은 존재할 수 없다고, 상상할 수 없다고 말이다. 여기에 개입하는 게 바로 CG라는 상상적 이미지의 산물이다. 지금까지 할리우드에서는 죽은 사람을 영화에 출연시키려는 갖은 노력이 이어져 왔다. 이는 영화 촬영 중에 사망한 배우의 남은 분량을 대체하기 위한 사례도 있었지만, 처음부터 죽은 사람을 스크린 위로 끌고 오려는 사례가 있기도 했다. 브루스 리나 마를린 먼로, 제임스 딘과 같은 이들은 배우이기 이전에 ‘시대의 아이콘’이기도 했기에 그들을 스크린으로 직접 호명하려는 시도가 있어 왔다. 그러나 그때마다 윤리적인 문제가 제기되었다. 죽은 이의 얼굴을 뒤집어쓴, 컴퓨터 그래픽이라는 이름의 유령은 망자를 모욕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그들은 말한다. 고작 얼굴 가죽만을 재현한 CG는 배우의 역할을 외견으로만 규정지어버리고, 배우는 영혼을 연기하는 직업이기에 그것은 큰 모독이라고 말이다.



컴퓨터 그래픽이라는 게 현존하지 않는 것을 그려내는 것에 주로 사용되기는 하나, 우리는 그 범주 안에 시간과 같은 관념이 존재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간과한다는 표현이 더 맞을 듯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화라는 매체가 시간에서 자유롭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그 안의 시간이 어떻게 흐르든 간에 ‘영화일 뿐’이라는 말로 타협해버린다. 하지만 영화는 본디 시와 유사한 매체이다. 시가 쓰이는 방식이 떠올린 이미지를 곧바로 써내려가는 것, 즉 이미지를 지면에 맞닿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지를 지면에 투영하는 게 된다. (카메라 만년필설, 작가의 펜은 영화에서의 카메라이다.) 이 과정은 이미지를 입체로 부풀려 지면에 기록하는 것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영화 또한 떠올린 이미지를 필름에 기록하는 행위다. 이때 영화는 카메라와 스크린 사이의 중립 지대로 설정된 ‘현실’이라는 공간을 어떻게 지울 것인지를 강구하게 된다. 현실은 영화라는 이미지가 스크린에 점착되는 것을 방해하기에 제거되어야 마땅한 유독물질이 된다. 다르게 말하면 현실의 시간은 영화의 시간에 이입하는 것을 방해하기에 스크린에서 제거되어야 할 관념이다. 그런 이유로 어떤 이는 현실의 시간을 철저히 스크린에서 지워버리려고 노력하지만, 모름지기 시적인 분위기란 감독의 세계가 현실을 거치지 않고 스크린에 곧바로 닿을 때 피어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마틴 스콜세지라는 노감독은 현실의 시간을 영화가 아닌 배우에게로 투영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곳에서의 영화란 <아이리시 맨>이라는 제목이 아니라 로버트 드니로와 알 파치노라는 현실의 시간으로부터 쓰이니 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1qDlsnSTI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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