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 돈 다이>(2019)
짐 자무시의 새 영화 <데드 돈 다이>를 보면서 나는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다양한데, 먼저 하나를 꼽자면. 영화의 도입부에서 그는 ‘이것은 영화이고 내 마음대로 할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이 발언은 문장만을 놓고 보았을 때 별 게 아니지만, 적어도 그게 짐 자무시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누구나 한 번쯤은 짐 자무시의 늙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가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고, 그러나 그 움직임은 우리가 부정하고 싶은 사실이어서 입 밖으로 꺼내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의 데뷔작인 <영원한 휴일>, 그곳은 찰리 채플린의 떠돌이가 웃음을 잃은 채로 도착한 도시이다. 사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현실 한 가운데에 뚫린, 끝은 보이지 않는 나락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의 친우 빔 밴더스가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뚫린 구멍의 끝자락에 천사의 선한 미소를 인간구원의 희망으로 남겨두었다면, 자무시는 그저 등을 돌리며 어딘지 모를 나락으로 계속해서 향해만 갔었다. 그가 그렇게 늙어가는 가운데 찍은 2017년의 <패터슨>은, 그의 다른 영화들보다 평화롭긴 했지만 여전히 그 끝은 알 수 없는 깊은 심연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심연에 관해 잠시 쓰자면. 패터슨 시의 패터슨 씨는 영원한 듯 보이는 삶 속에서 틈새를 찾고 그것을 시로 쓰지만, 작품은 변화의 조짐이기보다는 이전 시대를 긍정하고 변형하는 방식의 미래를 제안한다. 즉 이 작품에서도 그는 데뷔작의 제목처럼 영원함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쩌면 우리는 그가 영원히 우리만의 아웃사이더로 남아있기를 원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영원한 그곳에서 우리가 느꼈던 썩은 동태 눈알 같은 분위기가 이번작에서는 좀비의 핏기 어린 눈으로 변모한다. 그 두 가지 생명체는 각각 죽어있다는 점에서 같지만 좀비 쪽은 흡혈을 통해 탱글탱글한 생기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더 나은 존재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자무시가 늙어가면서 능청스러워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 능청스러움은 때와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고 그렇게 허물없이 지내는 비격식의 관례를 우리는 깨고 싶지 않았다. 이때 분명 누군가는 그 방랑자 캐릭터를 두고서 채플린식의 떠돌이, ‘아웃사이더’라는 말을 사용하고 싶어 할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채플린식의 방랑자가 아니라면 그것은 단지 외톨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허나 그 속뜻이 동일하다 하여도 아웃사이더라는 표현 자체에는 최근 우리 사회에 떠오르는 골방에 틀어박힌 장인의 이미지, 오타쿠적인 면모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아웃사이더라는 표현이 오타쿠라는 단어의 용례가 긍정적인 쪽으로 변화하는 모습과 맞물린다는 점을 여기서 지적해볼 수 있겠다. 그 오타쿠가 과거에는 주류 문화로부터 따돌림을 당하여 방구석에 처박힌 이들을 말하는 단어였다면, 최근 들어서는 주류 문화와는 별개의 길을 걷는 독자적이거나 독보적이라는 칭호를 붙일 만한 장인을 말하는 단어가 되었다. 또는 되었다기보다는 그런 성향이 이전보다는 강해졌다. 그렇지만 그게 자무시의 이전작들을 설명하는 단서가 되지는 않는다. 이 단어의 긍정적인 활용은 기껏해야 최근 5년 정도에 불과하다. 즉 자무시가 태어난 시대와 그 이후의 작품들을 두고서 오타쿠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오역이다.
자무시를 두고 오타쿠적이라고 말할 때 그 표현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많을 테다. 그러나 오타쿠적이라는 말 이전에 그 자리를 대신했었던 키치적이라는 표현을 쓴다면 동의할 사람은 많아질 듯하다. 문화적인 방랑자가 아니라 해당 국가의 바깥 자리에 맴돈다는 맥락에서 그는 아웃사이더이고, 우리는 그의 두 번째 작품인 <천국보다 낯선>에서 그러한 모습을 목격한 바가 있다. 그러니까 사실 우리가 그에게서 기대하는 건 영원토록 떠돌아다니는 부초 같은 인생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부초 같은 인생, 그건 산을 등반하다가 우연히 찾아낸 산삼처럼 나만 알고 싶고 그래서 더욱 소장하고 싶은 인디의 감성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때 우리는 <패터슨>을 두고 벌어졌던 자무시 왕조의 예송논쟁을 떠올리게 된다. 그의 <패터슨>이 국내에 개봉했을 때, 소위 말하는 인싸(인사이더)들 사이에서 이 영화는 예술이 무엇인가를 알고 싶다면 반드시 극장에 가서 보아야 할 것으로 취급되었다. 이 모습을 두고 분명 우리가 할 말은 많을 것인데, 이를테면 인싸의 기준은 무엇이고 그 유행이란 게 정말로 실체가 있는 현상이었는가에 관한 물음이다. 정말로 인싸들은 짐 자무시의 영화를 문화적 기호품으로서 소비한 것이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미국 아웃사이더 영화의 대표주자라고 불리는 짐 자무시를 바라보는 인싸의 시선은 무엇이었을까. 다르게 말하면 바깥 고리에 다가서는 내부 사람들의 방법론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짐 자무시의 영화는 안과 밖으로 굉장히 기묘한 느낌을 주었는데, 그 이유는 작품의 내러티브와 외부적인 지향점이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확정된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그 자신이 인터뷰를 통해 부인한 사실도 많아서다. 우리가 자무시에게서 찾아내는 것은 많지만 정작 그는 그 모든 것으로 자신을 보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이는 아마도 자유로운 영혼인 그에게 해석의 꼬리가 달라붙어서는 안 되어서였을 테다. 어찌 되었든 간에 자무시의 영화들은 거의 한결같이 어딘가로 떠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실제로 지향점도 확실한데, 그 모습은 우리가 지금 어디로 떠나야 한다고 말하는 듯한 주장처럼 보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는 미국 사회의 바깥을 떠도는 유령으로서, 자신을 진입하지 못하게 하는 장벽에 대한 원인과 결과 그리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고 사람들은 주장했다. 그러니 어쩌면 자무시가 부정한 그런 해석들은, 사실은 본심인데 주변 사람들의 압박을 뿌리치려고 일부러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을 테다. 물론 진위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가 걷는 길 자체가 하나의 산책로가 되어서 자무시 마을 주민들로 하여금 그가 향하는 곳에는 무언가 볼거리가 있다고 믿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번작에서도 짐 자무시의 영화가 어딘지 모를 정치적 메타포로 읽힐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그건 착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분명 그건 확실하게 목격되는 현상이지만, 이게 자무시의 영화라는 점에서 우리는 그런 해석을 피해가려고 노력하게 된다. 보았음에도 못 본 체하라는 게 아니라, 그가 보여주는 풍경이 그곳에 직접 발을 내디디는 게 아닌 미국이라는 국가의 풍경을 돌아간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데드 돈 다이>에서 물질주의를 추구하던 이들이 되살아났다고 말하는 아담 드라이버의 대사에서, 우리는 이것이 현대 자본사회에 찌들어버린 이들을 비판하려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덧붙여서 그 이전에 언급되는 <노스페라투>와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과 같은 좀비물의 계보는, 이 영화가 <신체 강탈자의 침입>이나 <마부제 박사>와 같은 냉전 시대의 산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허용한다. 그리고 이 계보에 따르면, 우리는 좀비라는 뇌가 없는 상대를 경유하면서 자무시가 정치적 무관심이거나 무지에 찌든 이들을 비판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모든 것들의 계보는 <혹성탈출>에서처럼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될 것들이 인간으로서 살아나오는 것에 대한 공포, 즉 인간 이하의 것들이 우리 세계를 침범해오는 것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공포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서 흑인과 여성을 기준으로 놓인 인간 대 좀비의 차단막, <월드 워 Z>에서 따스한 것과 따스하지 않은 것을 두고 판가름나는 인간의 조건, 더욱이 슬픈 것은 이러한 구시대의 산물이 여전히 요즘 시대에도 적용된다는 점이다. 세상 어디를 가도 사람 사는 이야기는 다 똑같다고 말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똑같아서는 안 되었고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발전하고 있지 않다는 회의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면서도 그것들은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한 아주 원초적인 문제, 또는 원론적인 지점으로 회귀하면서 결국에는 풀리지 않을 구렁텅이로 빠져 버린다. 죽지 않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또는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어요, 라는 말은 아주 논리적이면서도 상대방으로서는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대척점을 만들어 낸다. 말하자면 이것은 그들 사이에 놓인 거대한 장벽이고, 이 장벽은 동굴이라는 천연 요새를 거쳐 중세의 고성을 지나치면서 마침내 현대 미국 사회의 국경으로 바뀐다. 단지 미국 국경에만 불과할 이야기던가. 토착민 대 이방인이라는 공격자와 수비자의 구도가 18세기, 아메리카 대륙이 아직 신대륙이던 시대의 인디언들을 떠오르게 한다면 이것을 두고 자리가 바뀌었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그때는 공격자인 미국인이 수비자인 인디언들을 몰아내려 했지만, 지금은 수비자인 미국인이 공격자인 난민들을 몰아내려고 하니 말이다.
그렇다. 물질만능주의를 추구하는 좀비들이 장벽에 가로막히는 모습과 그들에게 끝내 먹혀버리는 모든 등장인물의 최후는,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메타포를 이것저것 섞어 버린다. 마을을 설명하는 설정 쇼트에서 그는 잡화점, 식당, 장의사의 집 등을 차례대로 나열하는데, 결말에 다다라서는 그것들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여기에 자무시는 난데없이 자신의 개인적인 애정사를 고백하고, 그 강한 애정의 산물인 사무라이 문화에 빙의한 틸다 스윈튼이 나타나 경찰서 컴퓨터를 해킹하여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우주선을 소환해낸다. 그렇게 틸다 스윈튼이 우주선과 함께 사라지고 나면, 그냥 자동차 안에 있어도 될 것을 굳이 밖으로 나와서 싸우다가 장렬하지 못하게 전사하는 경찰관 무리가 우리 눈에 들어온다. 이 모든 쇼트는 마치 <포레스트 검프>의 톰 행크스처럼 짐 자무시의 필모그래피를 가로지르는 것처럼 작용하여서, 그가 여태까지 구축해 온 온갖 미국적 이미지의 산물을 우리 안에 쑤셔 넣는 듯한 느낌을 준다. 요컨대 이 느낌을 모습으로 그려내라면 독일에서 와 미국적인 것의 산물이 된 햄버거를 떠올려낼 수 있을 것이다. 그 햄버거는 여러 이미지의 모음집이면서도 동시에 한입에 털어 넣기에는 너무 비대한 크기를 가지고 있다. 그 이름하여 바로 빅맥이다.
빅맥. 큰 코를 지닌 아담 드라이버. 크다는 것. 국제 사회에서 점점 영향력을 잃어갈 것을 우려하는 미국적 남근을 대표하는 것들. 미국의 대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평소에 즐기던 취미가 사냥이었다는 점에서, 일각에서는 사냥에 쓰이는 큰 총이 그의 작은 성기에 대한 열등감이 아니었냐고 의심하기도 했다. 그리고 시작되는 좀비 사냥. 마을 한 켠의 주유소에서 일하던 청년이 가게에 들이닥친 좀비를 피해 달아난 곳은 남자들의 성역이라 불릴 만한 공구점이고, 그곳에서 청년을 포함한 두 남성은 거대한 두 발 샷건을 손에 집어 든다. 이 샷건을 보면서 우리는 이 거대한 남근이 과연 무엇에 대항하고자 하는지를 떠올려 보게 되는데, 아무래도 그것은 현대 사회의 사무라이를 표방하면서도 정작 무기는 총을 사용하는 짐 자무시의 소년 <고스트 독>일 테다. 전쟁을 대표하는 사무라이와 그 위에 세워진 군국주의 제국, 이때 사무라이 칼이 고중세근대의 남근이라면 권총은 보다 더 발달한 현대의 남근이다. 그런데 사실 이 영화 <데드 돈 다이>에서 사무라이로 묘사되는 것은 외계인 역할의 틸다 스윈튼이고, 그가 사용하는 것은 본래대로의 일본도이다. 이런 추론을 통하면,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 영화에서 떠오르는 메타포는 거세게 흔들리게 된다. 그는 부정했지만 우리가 자의적으로 그를 해석하면서 만들어낸 시대를 관통하는 이미지는, 바로 이곳에 모여 시체를 살려낸다는 말도 안 되는 관습처럼 앞으로 고꾸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자무시의 전작들에 출연했다. 먼저 우리는 틸다 스윈튼을 <오직 사랑하는 자들만이 살아남는다>에서 만난 바가 있다. 이 영화는 실제로 망해버려서 슬럼화가 한창 진행 중인 미국의 자동차 고장을 배경으로 했고, 그곳에는 현명하고 지혜롭지만 외로움을 타기도 하는 뱀파이어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그 뱀파이어는 좀비와는 전혀 상극의 지점에 있는데, 왜냐하면 뱀파이어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피를 빨지 죽은 이의 피를 빨지는 않기 때문이다. 요컨대 자무시가 행한 유머는 제목처럼 신선한 피를 위해 살아남는 이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뱀파이어의 모습을 직격하고, 이미 망한 도시에 남아있는 사람은 사회적으로 죽은 사람일 것이므로 그 아이러니는 증대된다. 그러므로 이 영화 <데드 돈 다이>에서의 틸다 스윈튼은 자연스럽게 그런 이미지, “죽은 것들은 죽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무시의 작명 센스에 반하여 ‘죽은 것들 또한 먹을 수 있다’고 말하는 스캐빈저가 된다. 하지만 스캐빈저 하이에나가 남성적 우위를 점하는 사바나의 왕 사자보다 아래에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총보다 더 강한 모습을 보이는 칼을 휘두르는 틸다 스윈튼의 모습은 확실하게도 반역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우리는 자무시가 말하는 미국의 과거, <데드 맨>에서의 조니 뎁이 죽은 이의 환생으로 불린다는 점, 즉 죽었지만 살아있는 시체 ‘데드 맨’이라는 점을 떠올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생각하는 미국의 정체성이란 죽어버린 것들을 비대하게 물어내는 좀비의 커다란 입이 아닐까? 아담 드라이버가 왜 그리 비정상적으로 침착하냐고 묻는 빌 머레이의 모습에서는 다음의 두 가지 영화가 떠오른다. 첫 번째로 아담 드라이버는 <패터슨>에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잊지 않는 버스 기사 역할로 나왔고, 그 모습은 이 영화에서도 동일하다. 두 번째로 빌 머레이는 <브로큰 플라워>에서 권태롭게 지내는 독신남으로 나왔고, 그 모습은 이 영화와는 전혀 무관하다. 말하자면 우리가 그들을 보면서 자무시의 전작을 직접적으로 대입하려는 시도는 거의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클리블랜드에서 온 세 명의 친구들이 남자 둘에 여자 하나라는 점이 <천국보다 낯선>의 연장선에 있지 않을까 하는 착각을 자꾸만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그의 첫 작품 <영원한 휴가>에서 꼬마는 뉴욕의 길거리를 떠돌아다녔고, 두 번째 작품인 <천국보다 낯선>에서 사내는 뉴욕을 떠나 클리블랜드로 향했으며, 그러니까 그 영화들에는 하등관계가 없음에도 단순한 지명의 일치만으로도 무언가 이어지는 통로가 생긴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무시는 경찰차 안에 갇힌 빌 머레이와 아담 드라이버의 대화를 통하여 이것이 영화라는 말로 영화를 결론지어버린다. 다섯 개 나라의 밤을 묘사한 <지상의 밤>에서 전 세계로 눈을 돌리며 대영제국과는 반대로 해가 뜨지 않는 나라를 만들어낸 자무시는, <데드 돈 다이>에서 지구의 자전축이 맛이 가버려서 일몰과 일출이 제멋대로인 상황을 설정해버린다. 그러면서도 뜬금없이 좀비가 나타날 무렵은 꼭 밤이어야만 한다는 일련의 공식은 지키고 있다. 이는 분명한 의도라고 할 수 있는데, 어두운 곳에서 암투를 벌이던 과거의 낯선 이들과는 달리 요즘의 낯선 이들은 대낮에도 자유롭게 활동하고 있으며, 그래서 근래 좀비 영화들에는 낮과 밤 중에서 낮이 선호된다. 그리 멀리 가지 않아도 <월드 워 Z>는 빠르게 달려가는 좀비뿐만이 아니라 낮에 활동하는 좀비로 유명한 영화이다. 말하자면 인간이 활동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조차 낯선 이에게 빼앗긴 인간들에게는 결코 찾아오지 못할 어둠이 오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런 밤은 뱀파이어가 활동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며 이 대목에서 좀비와 뱀파이어는 빛과 어둠과도 같은 존재가 된다.
이를 대략적으로 나열하면 아마도 이런 식의 말이 될 것이다. 밤과 낮, 좀비와 뱀파이어, 조니 뎁의 <데드 맨>과 <오직 살아있는 자>의 틸다 스윈튼, 그곳의 서부와 이곳의 디트로이트 시, 좌파와 우파, 공화당과 민주당, 요즘 시대의 이야기가 대부분 이분법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에서 이런 도식이 아주 유의미한 것처럼 들려올 수도 있는데. 그리고 그런 해석으로서 자무시의 영화를 발견했던 우리가, 이를테면 <패터슨> 속에서 목격되었던 이질동상의 쌍둥이들이 암시하던 사실들, 그 모든 것들 혼란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으면서 대환장파티를 일으키는 짐 자무시의 새 영화. <데드 돈 다이>는 66세라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어느 노감독이 만들어낸 그만의 세계이다. 이곳에서 그는 자신을 부정하고 있지만 사실 그건 우리가 생각하던 그의 모습일 뿐이므로 나는 여태까지 하던 것처럼 영화를 만들었을 뿐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