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2019)
1.
우리가 쿠엔틴 타란티노라는 감독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은 많지만, 그의 작품을 두고서 할 수 있는 말 또한 많다. 말하자면 그의 영화는 하나의 거대한 화덕이다. 못 만들어서 불태워버리고 싶다는 게 아니라, 뜨거운 입담에 뜨거운 몸짓을 끼얹은 그의 영화에는 ‘뜨거움’이 가실 날이 없다는 뜻이다. 이 화덕은 항상 꺼지지 않는 불을 우리에게 제공하면서, 요리와 난방을 비롯한 온갖 바리에이션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그러나 불이라는 게 늘 그렇듯, 뜨거움의 이면에는 큰 위험이 따라붙기 마련이다. 그러니 우리는 불을 다룰 때 조심해야만 한다. 조심하지 않으면 그 불은 모든 것을 집어삼킬 테니 말이다.
이번에 개봉한 그의 9번째 영화 또한 그러하다. 개봉하기 전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그의 이번 영화는, ‘타란티노의 작품’이라서가 아니라 ‘다루는 사건’이 워낙 민감한 소재였던 탓에 많은 우려를 받았다. 그는 이번 영화에서 ‘로만 폴란스키’라는 논쟁적 인물이 겪은 끔찍한 사건인 ‘맨슨 패밀리 샤론 테이트 살해 범죄’를 작품의 안으로 끌어왔다. 물론 타란티노 본인은 ‘그것’이 아니라 1969년의 할리우드가 중점이라고 말했지만, 타란티노와 폴란스키의 외부적인 관계와 할리우드를 포함한 세계적인 미투 운동의 사이에서 이 영화를 ‘차갑게’ 보려는 건 무리에 가깝다.
그래서 우리는 타란티노의 이번 영화를 이전과 동일 선상에 둘 수 없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모두 가상이었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있었던 사건이다. 비록 영화적으로 각색을 거처 실화가 아니게 되었지만, 그것이 너무 유명한 사건이기에 우리는 이 영화를 사건에 견주어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영화는 타란티노의 이전 영화와 결이 다르다. 그동안의 영화에서 인물에 가해지는 폭력의 강도가 이념과 역사에서 끌어온 단죄를 대변하는 것이었다면, 이번 영화에서의 폭력은 가해자에 대한 감정적 단죄에 가깝다.
2.
타란티노의 영화가 19세 이용가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으니 이번 영화도 으레 19세 이용가라고 생각하던 우리는, 영화가 거의 끝나갈 때까지 아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목격한다. 왜냐하면 타란티노의 영화에 19금 딱지가 주어지는 건 선정성보다는 폭력성이 무척 짙기 때문인데, 이 영화에는 중반까지 다른 영화에서도 나오는 정도의 가벼운 폭력만이 묘사된다. 그러니 왜 19세가 붙었는지를 생각해보던 중에, 클리프 부스(브래드 피트)가 이전에 두어 번 지나친 히피족을 차량에 태워주면서 영화는 역사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클리프 부스가 들어선 곳은 히피족이 모여 사는, 이전에는 영화 촬영장이었던 어느 한 폐허이다. 이곳에서 클리프 부스는 과거에 알고 지내던 주인 조지 스판(브루스 던)의 얼굴을 확인하는데, 그는 왠지 모르게 부스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 와중에, 부스를 경계하던 히피들의 시선이 그가 타고 온 자동차의 앞바퀴를 뚫게 되고, 다행히도 그는 트렁크에 넣어둔 스페어타이어를 이용해 자동차를 수리하고는 다시 길을 떠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소소한 폭력이 있긴 했지만 말 그대로 소소한 수준이고, 그에 원군을 요청하러 간 어느 한 히피가 있었으나 원군과 부스의 만남은 간발의 차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이 대목에서 영화는 그다음 등장할 사건에 불을 붙인다. 도화선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소소한 폭력이 그다음의 거대한 폭력 시퀀스, 맨슨 패밀리의 가택 침입 사건의 그것으로 증대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물론 타란티노가 좋아하는 ‘대체 역사’의 그것으로서, 현실과는 달리 사망자 하나 없이 안전한 결말을 맞이한다. 가택에 침입한 괴한들은 배우의 대역(이른바 스턴트맨이다)으로서 ‘퇴물(릭 달튼)의 대역’이 되어버린 부스에게 전멸당한다. <장고>의 결말이나 <바스터즈>의 하이라이트처럼 과하다 싶을 정도로 두들겨 패는데, 이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못된 놈들’에게 내리는 형벌과도 같기에 허용될 수 있는 부분이다.
3.
이때 이 장면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것이 타란티노가 내리는 형벌이라는 점이다. 이는 타란티노의 이전 영화에서 나온 폭력이, ‘나치’라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나 결국에는 영화적 ‘허구’에 가려졌던 것과는 다른 맥락이다. 그러면 잠시 그의 이전 영화를 잠시 살펴볼까. <먼저 <장고>의 폭력은 통쾌했지만 흑인 문화를 이용했을 뿐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킬빌>은 동양인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다는 비판을 들었다. 그 논란은 이번 영화에서도 이소룡에 대한 묘사로 비슷하게 불거졌지만, 주인공의 ‘이웃’에 사는 것으로 설정된 게 로만 폴란스키 가족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본작의 자세를 알 수 있다.
서부극에서 은퇴해 이탈리안 서부극으로 넘어간 릭 달튼(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모습은 실제 역사와 일치한다. 그러니 이는 우리의 현실 역사이다. 그런데 현실 역사에서 로만 폴란스키의 가족과 친구들은 잔혹하게 살해당한다. 이때 타란티노는 이전과 같은 선택을 한다. 잘못된 사실에 대한 가상의 결과를 제시하면서 영화를 우리 삶의 대리물로 제안한다. 하지만 이 선택은 대의보다는 사심에 가까운 판단이다. 혹은 우리가 그렇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미투 운동이 불거진 이후로 로만 폴란스키의 범죄 사실에 대한 찬반 의견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기 때문이다.
이 찬반 의견에 대해 우리가 더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의견이 딱 정해져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영화가 아닌 현실이라는 이유에서다. 반대로 말하면 이것은 타란티노의 말처럼 ‘현실을 다룬 영화’이기도 하다. 로만 폴란스키가 겪은 사건 이후로 본격적으로 몰락의 길에 접어든 미국의 히피 문화는, 다른 분야에서도 그러하지만, 할리우드의 영화가 1970년대라는 ‘새 시대’로 접어듬을 보여준다. 이른바 ‘뉴 할리우드 시네마’라고 불리는 미국에서의 영화 사조는, 전 세계적으로는 ‘누벨바그’라는 이전의 혁명과 차분히 결별하면서 ‘블록버스터’와 같은 기술과 상업의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선언하는 것이기도 했다.
4.
어쩌면 이 대목이 흥미로울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가 개봉한 2019년, 우연히 ‘9번째’ 작품이기도 한 본작의 배경은 1969년이다. 이는 50년 전이라는 반세기의 시간이자, 68혁명이라는 시대적 광풍이 불어오던 때이기도 했다. 이 두 가지 포인트가 위에서 언급한 영화의 역사와 미묘하게 맞물리기도 하지만, 우리 삶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 영향이 무엇인지는 교과서에 잘 나와 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이라는 시간 설정 자체가 던지는 명제는, 부스가 문득 접어든 히피들의 농장으로 가는 길이 <선셋대로>의 그것처럼 보이게 한다.
작품의 배경인 1969년으로부터 50년 전으로 흘러가면 <선셋대로>의 주인공이 살아갔던 때가 나온다. 이는 할리우드의 무성영화 시기이다. 우연이지만 일제강점기 슬하에서 조선인이 만든, 진정한 의미에서의 한국영화가 개봉한 연도이기도 하다. 이때 그 두 장소의 공통점은 한때는 잊혀졌던 이들이 살아갔던 연도라는 점이다. <선셋대로>의 무성영화 시대는 1970년대 들어 ‘뉴’ 붐이 일기 전까지는 완전히 잊혀졌으며, 한국에서도 일제강점기 시대의 영화는 시대상으로도 그렇지만 문헌이 없기에 우리가 알 수 없고 그래서 잊혀졌었다.
잊혀진 것들이 사는 시대, 또는 잊혀진 이들이 여전히 우리 시대에도 살아 있다는 사실. 비유하자면 공룡이 인류와 공존했다는 쯤의 이야기다. 본작에서 부스가 농장에 들어설 때, 우리는 50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는다. 이곳에서 부스는 잊혀진 것을 목격하는데, 그곳에는 모든 것을 잊어가는 이들도 있고 사회로부터 잊혀진 ‘히피’라는 존재도 있다. 물론 작품 속에서는 아직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2019년이라는 우리 현실에서 그들은 잊혀졌다. 이때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2019년에 히피가 잊혀졌지만 1919년의 그들은 오히려 살아났다는 점이다. 1919년은 100년이 지나 재평가되었으며, <선셋대로>에서 미치광이로 보이던 그녀는 지금의 우리에게 영화의 어머니가 되었다.
5.
이 영화에는 잊혀지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이 한 명 있다. 하나는 릭 달튼이다. 그런데 실은 잊혀가는 사람이 또 하나 있었으니 그가 바로 클리프 부스다. 본작에서 릭 달튼은 할리우드를 떠나 스파게티 웨스턴을 찍고 제2의 전성기를 누리는데, 그가 성공했으니 ‘카게무샤(옛 일본에서 주군의 대역으로 활동하며 위기상황 시 생명을 헌납했던 그림자 같은 존재)’인 부스 또한 성공해야 마땅하므로, 영화는 스턴트맨 릭 달튼에게 ‘호쾌히’ 폭력을 휘두를 수 있도록 ‘허가’를 내린다. 이 폭력은 위에서 말한 응징의 성격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잊혀지지 않도록 강렬한 인상을 선사해야만 하는 ‘업계’의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잊혀지지 않으려면, ‘강렬한 인상’을 남기려면 자극적인 무언가를 내세워야만 한다. 그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전 시대를 기준으로 한다면, 여성의 경우에는 여성성을 강조하는 것이었고 남성의 경우에는 남성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때 전자는 팜프파탈이고 후자는 소위 말하는 마초로서 나타나고는 했다. 반대로 말하면 여성성과 남성성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은 게 되어버렸다. (이를테면 <선셋대로>는 여성적이지 않은 목소리를 지녔다는 이유로 몰락에 이른 여배우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리고 타란티노의 인물은 대체로 마초적이다. 영화 자체가 그렇다고 보는 게 맞을 듯하다. 다른 측면으로 보면 타란티노가 사용한 원전 자체가 마초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테다.
잊혀지지 않기 위해 마초적인 것을 사용한다는 말은, 강렬한 인상을 주려고 마초적인 것을 사용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것은 ‘마초’라는 단어에 ‘여성적’이라는 개념을 대입해도 동일하다. 소위 말하는 ‘노출’을 강요하는 영화가 좋은 예다.) 이 중 타란티노의 영화는 후자다. 예컨대 예술을 위해 자극을 소비한다는 점으로 그에게는 면죄부가 주어진다. 나치를 때려잡았던 <바스터즈> 같은 게 좋은 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위에서 말했듯이 영화가 아니라 현실처럼 보인다. 이른바 ‘What If?’인 셈인데, 문제는 그가 만들어낸 대체 역사가 우리 현실에 더 가까워질수록 영화가 아니라 다큐가 된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위의 후자에서 전자로 이동해버린다.
6.
타란티노는 로만 폴란스키를 옹호하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을까. 아닐 것이다. 하지만 맥락상으로 그렇게 보일 수 있다는 점은 고려해볼 만 하다. 로만 폴란스키는 현재 아동 성범죄를 저질러 해당 법이 작동하지 않는 타국으로 망명(이라 쓰고 도피라고 읽는)을 한 상태다. 이에 대해 할리우드 인사들의 의견은 양측으로 갈린다. 먼저 찬성 측은. 그런 끔찍한 사건을 겪었으니 해당 범죄 사실에 정상참작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의 주장처럼 죄는 인정하되 작품 활동은 계속할 수 있도록 보석금을 내고 석방해달라는 의견이 있다. 그리고 반대 측은. 아동 성범죄는 범죄 중에서도 중범죄이므로, 유명인사라고 해서, 그런 과거를 겪었다고 해서 용서받을 수 있는 범주의 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두 가지 의견은 죄를 인정한다는 대전제를 중심으로, 예술활동을 보장하느냐 아니냐의 차이가 있다. 이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은 각자 다를 테지만, 이것이 ‘왜 미투운동이 촉발된 근래 시기에 다시 화두로 떠올랐는지’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어쩌면 타란티노의 영화가 마초적이라는 점에서 그 프레임이 감독에게 옮겨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것들 모두는 ‘영화 바깥의 이야기’이고 그렇기에 다시 영화 안으로 들어온다면, ‘원스 어폰 어 타임(옛날 옛적에)’이라는 명제로 잊혀진 지날 날의 이야기를 스크린 위로 끌고 오는 타란티노의 화법에는, 본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어딘가 크게 엇나갈만한 ‘부분’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된다.
‘옛날 옛적에’라는 명제는 지날 날을 신화로 만드는 선언지이다.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가 당신의 지난 삶을 말할 때 가장 처음으로 제시되는 문구가 바로 ‘옛날 옛적에’이다. 쉽게 말해 이 선언지 자체에는 어떤 삶이라도 신화화하는 힘이 있다. 이 신화화는 긍정이나 부정이나 어느 쪽으로든 작동한다는 점에서 중립을 지키지만, 우리가 자세한 사실을 알 수 없도록 진실을 흐려버린다는 점에서 중립적이지 않기도 하다. 한국의 단군신화가 진상을 알 수 없게 되었듯이, 성서의 이야기나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같은 것들은 신화가 됨으로써 현실이 아닌 ‘이야기’로 변질되고야 만다. 예컨대 전장에서 사라진 이들이 신화가 된다면, 그것은 역사가 아니라 이야기가 된다. 기록으로만 있기에 신화로 취급되었다가 훗날 실제 역사로 입증된 폼페이처럼, 타란티노의 선언지는 이것을 역사 이후의 ‘시대(Era)적 이야기’로 만든다.
7.
역사는 기록이다. 그러나 역사 이후에 역사는 잊혀진다. 그것은 진화론에서는 잊혀진 고리이고 서양사에서는 ‘암흑의 시대’이다. 반대로 말하면 로만 폴란스키에게 본작의 이야기가 바로 암흑의 시대이다. 타란티노는 본작에서 그렇게 선언하는 듯 보인다. 그런데 그 선언은 확실히 위험하다. 암흑의 시대를 밝혀야 하는 이유는. ‘잊혀짐’에 대항하여 그 시기를 살아갔던 ‘잊혀진 것들’의 지위를 수복한다는 점에 잇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이 수복은 ‘그 시기를 반면교사 삼아’ 현재의 이야기를 설명하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선셋대로>의 이야기가 어느 한 남자가 잊혀진 여배우의 시대로 접어드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그와 동일하게 이 영화는, 로만 폴란스키의 이야기를 잊혀진 시대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그 시기를 반면교사 삼아’ 현재의 ‘폴란스키’를 설명하거나, ‘잊혀진 폴란스키’의 지위를 수복하려 한다.
이쯤되면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무언가 할 말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것은 로만 폴란스키를 두고 벌어지는 현재의 할리우드 이야기이다. 그리고 현재의 우리는 과거를 배경으로 한 영화 안에 들어선다. 이 만남은 클리프 부스가 히피들을 만나는 모습으로 은유되거나 재현된다. 바로 이 부분에서 영화라는 매체의 함정이 발동한다. 타란티노 본인이 말했듯이 이것은 로만 폴란스키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1969년의 할리우드 풍경을 담은 영화이다. 예컨대 이 선언은 그가 이 영화를 만든 목표가 해당하는 시공에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그는 지난 역사를 신화화함으로써 그 안의 작은 것에 해당하는 로만 폴란스키의 이야기 또한 ‘그렇게’ 보이도록 의도한다.
히피들의 거주지에 들어설 때부터 풍기는 왠지 모를 불안감은 그 배경상 옛날 옛적의 서부에서 빌려 온 게 분명하지만, 그 거친 황야의 이미지가 히피에게로 옮겨갈 때 그들은 무법자가 된다. 실제로 말을 타고 다니기도 하니 이 비유는 꽤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따로 있다. 히피들의 거주지에서, 클리프 부스에게 성상납을 하고 대가를 받으려 했던 히피들의 ‘자극적인 것’과, 클리프 부스가 휘두르는 펀치에서 나타나는 ‘마초적인 것’이 한데 모인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곳에 모인 강렬함을 목격한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어떤 ‘잊혀짐’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인지는 불분명하다. 클리프야 먹고 살기 위해 강렬해져야 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히피들은 무엇을 수복하려 드는 것일까?
8.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선택지를 받아든다. 첫 번째는 이 장면에서 촉발된 클리프와 히피간의 갈등이 영화 후반의 무참한 살해로 나아간다는 사실이다. 이 경우에는 타란티노가 로만 폴란스키를 옹호하기 위해 본작을 만들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 장면을 통해서 타란티노가 반세기가 흐른 현재에 잊혀진, 히피라는 존재를 말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는 각각 신화화하는 것과 탈신화하는 것이라는 차이가 있다. 즉, 로만 폴란스키를 신화화하거나 반대로 히피라는 신화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때 그 두 가지는 각각 그 뿌리에 리좀(Rhizome)을 형성한다.
그 리좀을 통해 우리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부분으로 불이 번지게 된다. 마치 릭 달튼이 사용했고 <바스터즈>가 사용하기도 했던 화염방사기처럼 말이다. 첫 번째 리좀은 미투 운동이라는 단어가 우리 일상에 깃든 여러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뻗어 나가면서, 할리우드를 비롯한 여러 계통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영화 안으로 끌어온다. 두 번째 리좀은 베트남전과 히피라는 단어가 현실 정치의 여러 방향으로 분화하면서, 도날드 트럼프를 둘러싼 이야기가 되거나, 우리 시대에 촉발된 여러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영화 안으로 끌어온다. (영화에는 베트남전에 관한 언급이 딱 한 번 나온다. 길 잃은 히피를 태우고 그들의 거주지로 향할 때다. 그가 군인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다시금 전장에 뛰어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임시적인 과거를 그에게 제공한다)
그러니 우리는 아마 타란티노가 제시하는 영화 속의 세 가지 타입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이는 세 가지 길이다. 또는 세 가지 시점이기도 하다. 첫 번째는 주인공 릭 달튼의 길로서, 잊혀진 과거에서 벗어나 다시 새 인생을 살고자 하는 욕망의 길이다. 이는 과거와 단절하고 새롭게 나아가는 일이지만(메이지 유신이나 프랑스 혁명), 과거를 잊었느냐는 비판을 들을 수 있다(문화대혁명과 2차 세계대전). 두 번째는 클리프 부스의 길로서, 잊혀진 과거로 문득 들어가 그것이 현재에 영향을 끼치는 모습을 목격하는 것이다. 이는 잊었던 사실이 현재에 돌아와 우리를 공격하거나(과거에 발을 붙잡혀서 회개해야만 하는), 현재 생긴 문제를 돌파하기 위해 과거로 돌아감을 뜻한다(부정된 역사로의 회귀 또는 제국과 권력의 시대). 세 번째는 샤론 테이트(마고 로비)의 길로서, 자신이 출연한 영화가 극장에서 잘나간다는 사실을 목격하고는 환희에 빠지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자신이 살아온 시대가 교과서에서 ‘반응이 좋다’는 ‘사실(이라는 이름의 환상)’을 목격하고는 ‘환희’에 빠지는 것이기도 하다.
이 중 무엇을 선택할지는 온전히 우리의 몫으로 남겨진다. 하지만 타란티노는 다음 열 번째 영화에서 은퇴한다고들 하니, 그전까지 생각해두어야 할 듯싶다. 허나 확실한 것은, 그 옛날이야기가 더는 신화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두어야 한다는 점이다. 아마 그게 베트남전을 숨기며 히피족을 전면에 세운 타란티노의 의도일 테다. 신화를 이어나가는 것은 시대가 아니라 사람이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