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싸들이 또 우리 것을 빼앗아갔다

<미드 소마>(2019)

by 수차미
midsommar_ver3_xlg.jpg 영화 <미드 소마>의 작품 포스터 © eaglepictures




0.



아리 애스터의 <미드 소마>는 그의 두 번째 작품이지만 그렇게 얕은 소산으로 이루어진 영화가 아니다. 이는 물론 그가 이전에 수편의 단편 영화를 만들어왔다는 점에서 귀인하는 중고 신인으로서의 노련함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게 아리 애스터라는 감독의 영화가 우리가 아는 어떤 것으로부터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지적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장르영화라면 장르영화, 예술영화라면 예술영화에도 속할 수 있는 이 범주에서 우리는 그를 표현할 단어로 컬트라는 문장을 찾아내고야 만다. 그리고 이때 컬트라는 단어가 소수의 팬에게 발굴되어 열광을 얻는 것을 뜻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컬트라는 딱지를 그에게 붙이기 미안해진다. 왜냐하면, 아주 분명하게도 우리가 생각하는 컬트의 범주는 그렇게 긍정적인 것에만 걸쳐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가 아는 컬트는 작품성은 제하고서라도 대중성이 그리 뛰어난 무언가가 아니다. 하지만 대중성이 곧 작품성을 보장하는 것이 아님에도 우리는 대중성이 상대적으로 없는 컬트를 주류에서 벗어난 것, 일종의 하위문화로 생각해왔다. 따라서 우리는 아리 애스터의 영화를 두고 그런 물음을 던져보게 된다. 컬트라는 장르가 하위문화를 대표하는 것인가. 또는, 우리가 그런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려면 단순히 관심과 인기라는 요인 말고는 어떤 것을 주된 홍보요인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인가.




1.



인터넷 등지에서 소위 말하는 하위문화를 아싸들의 문화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주류의 바깥에 속한다고 느끼는 이들이 주로 소비하는 하위문화가 그들에게 자기 정체성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문장으로 보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 이 현상은 그들이 말하는 하위문화라는 게 소수에게만 먹혀드는 코드가 아니라 소수에게만 유통되는 코드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쉽게 말해 소수에게만 유통되었을 뿐 소수의 취향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터넷 공간에서 소수 문화의 소비자들은 그들이 향유하는 것들이 단지 집단의 국소적인 공간에 따른 것뿐임에도 그런 공간 안의 문화를 즐기는 것 자체가 자신을 히치적이고 컬트적인 사람으로 보이게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분야로 보면 홍대의 인디 뮤지션이 영원히 무명으로 남아야 자신만 아는 ‘나만의 작은 ~’으로 남을 수 있기에 지지하는 뮤지션의 성공을 기원하지 않는 뒤틀린 팬심이 이에 해당할 텐데, 인터넷 문화의 경향에서 두드러지는 건 그렇게 국소적으로만 포진하던 인터넷 문화가 양지에서도 인기를 끌 때 그것을 향유하던 이용자들이 거세게 반발한다는 점이다.



“인싸들이 또 우리 것을 빼앗아갔다.”고 그들은 장난스럽게 한탄한다. 이 문장은 진지하게 사용되기보다는 유머에 가까운 성격이기에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발언의 기저에 자신들이 소유한 문화라는 키치적이고 컬트적인 무언가라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그들이 인터넷 문화를 아싸의 것으로 남겨두려 한다는 공간의 인식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곳에서 발견되는 중대한 사안은 인싸와 아싸라는 두 개의 분류가 공간의 용법으로 확대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인싸와 아싸라는 단어가 ‘내부자(insider)’와 ‘주변인(Outsider)’이라는 두 개의 용례에서 파생되었음을 고려해볼 때, 인터넷 문화를 자신의 것으로만 남겨두려는 폐쇄적인 성향은 어떤 면에서 언더그라운드라는 이름의 그라운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다시 말해서 언더그라운드라는 공간에는 이미 주변인이라는 이름만이 남았을 뿐 소속자에게 그 본질은 주류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아싸라는 소속감은 얼핏 보았을 때 정말로 이상한 말이다. 아싸라는 그라운드는 주류가 아니기에 점조직의 형태로 포진해있으면서도 물 밑으로는 점조직의 형태로 연결된 형태를 띤다. 아싸들의 문화가 현실보다 인터넷에서 더 활발한 소통의 형태를 띄는 것도 그런 연결 방식이 이유일 테다. 그렇지만 이러한 문화의 연결 방법이 인터넷 문화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닌 듯 보인다. 은밀한 것이지만 익숙하게 알려진 것이라는 아싸라는 문화적 방식 자체는 일루미나티와 같은 현실의 몇몇 단체에서도 유사하게 관측된다. 여기서 방점은 일루미나티가 아니라 몇몇 단체라는 용어를 선택하는 우리의 기준이다. 점조직으로 포진해 있는 개인들이 하나의 이상향을 향해가는 모습은 그것이 물 위에서 이루어질 때는 그다지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물 아래에서 줄곧 진행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언더그라운드의 것들이 그라운드로 여겨지는 해당 공간에 대해 사람들은 두려움이나 호기심, 둘 중 하나의 감정을 느끼게 되며 그 과정에는 일루미나티라는 음모론이나 ‘인싸들의 아싸 문화 절도’라는 일종의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때 해당 문화를 향유하던 원거주민은 자리를 피해 떠나지만 현실의 젠트리피케이션 현상과는 달리 점조직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응집하는 게 용이하다. 예컨대, 단단한 지반에 구멍이 뚫려 그 아래에 있는 모래더미로 대지가 가라앉을 때 형체를 유지하는 건 지반이 아니라 지하의 모래더미인 것처럼 말이다.



2.



다시 영화로 돌아와 보면 <미드 소마>의 공간은 내부자와 주변인(외부인)으로 나뉘어 있음을 떠올려볼 수 있을 것이다. 작품 속에서 친구들이 스웨덴으로 떠나는 여행은 표면적으로는 기분전환이라는 형태를 취하지만 그 속에는 인류학 조사라는 목적이 담겨있다. 이 대목에서 주인공 남자 무리와 한 명의 여자친구는 서로 다른 그룹에 속하게 된다. 성별로도 나눌 수 있겠지만 남자 무리의 주된 목적은 인류학 조사를 위해 떠나는 것이나 그런 친구의 옆에 동행하는 것이니 영화 전체의 이야기로 보면 그들은 내부자 그룹에 해당한다. 반면 한 명의 여자친구 대니 아더(플로렌스 퓨)는 그런 남자들로부터 정신적으로도 거리감이 있는 상태고 여기에 영화는 그녀의 모든 가족을 배제해버리는 방식으로 그런 거리감에 장력을 불어넣는 단 하나의 끈을 남자친구와의 고리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니까 영화는 남자친구 크리스티안 휴즈(잭 레이너) 그룹 안으로 대니를 편입하는 방법으로 영화의 도입부를 내부자 안으로 들어오려는 외부자 구도로 설정한다.



내부의 안으로 들어오려는 무언가라기보다는 앞서 말한 것처럼 주변인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이 영화에는 휴즈와 대니라는 두 명의 그룹이 있기도 하지만 휴즈와 대니가 스웨덴의 마을 공동체 안으로 들어간다는 점에서 실제 공간에서의 분리가 이루어지기도 하니 말이다. 이때 그들 무리에서는 연구자 신분으로 마을을 방문한 이도 있다는 점에서 무리 전체는 단순히 방문객에만 불과하지 않고 조사자라는 신분도 겸하게 된다. 그러니까 무리라는 형체만 보면 하나일 테지만 역할이라는 분류로 보면 그들에게는 두 개의 공간이 주어진다. 그런데 이 두 개의 분류에서도 대니는 소속된 지점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좀 전에 대니가 내부자 그룹에게 초대를 받아 스웨덴 공동체에 초대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그녀는 방문자도 조사자도 아닌 내부자 그룹에 딸려온 사람이라는 제 3의 주변인으로만 존재한다. 그들은 초대를 받아 갔고, 이는 주변인이라는 단어가 초대라는 허가가 있을 때만 비로소 안으로의 출입권한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또한 스웨덴 여행 사실을 들킨 휴즈가 대니에게 마지못해 여행을 권하는 것도 불청객을 초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마을 공동체 입장에서 대니는 예상치 못한 손님인 셈이 된다. 이러한 대목은 대니가 영화 전반에 소속되지 않는 인물로서 영화의 주인공인 이유를 설명해준다.



상태로 따져 묻자면 대니는 세상과 점점 멀어지는 지점 어딘가에 놓여있다. 남자친구와는 이별을 앞두고 있고 가족은 제 곁을 떠났으며 이 두 개의 것 말고는 대니가 어떤 것과 연결되어 있는지 영화는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나오는 대니의 휴즈 그룹 이외의 인간관계는 초반에 잠깐 통화하는 여자친구 한 명뿐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대니의 정체성은 확실하지 않거나 불안정해 보이는 면이 있다. 예를 들어 이 영화가 대니의 시선으로 진행되지만 정반대 편에서, 휴즈의 시선으로 대니를 바라보는 형식이었다면 우리는 대니라는 인물이 정말로 실존하는 것이었는지를 의심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니라는 인물이 이 영화에서 확실하게 존재한다는 점을 입증할 만큼의 연결고리가 영화 초반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그게 대니가 휴즈에게 무서울리만치 집착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했고, 스웨덴의 마을 공동체 안에서 대니와 휴즈 커플이 점점 멀어지게 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그렇게 영화는 도입부에서 제시하던 혼란스러운 커플의 마지막 감정을 공동체라는 우회지를 통해 종언을 선고해버린다. 마을 공동체라는 우회지를 통해 대니는 휴즈와의 안전한 이별을 수행할 수 있었고 이제 영화 전반에 자리하던 혼란은 사라진 듯 보인다.



3.



영화에서 신성한 장소로 언급되는 삼각형 모양의 노란 건물이 어딘지 모르게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떠오르게 한다면, 아니 그것이 마치 일루미나티의 은밀한 상징처럼 보인다면 우리는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컬트적인 요소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생각할 테다. 그렇지만 일루미나티라는 게 실체라기보다는 그 이름 그대로의 상징에 더 가까운 상황에서 음모론이라는 비현실적인 현실의 요소에 대해 우리가 말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본래도 그렇지만 점조직으로 알려진 일루미나티라는 음모론이 사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유머 소재에 더 가깝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할 무렵에도 그것은 점조직의 형태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고, 비유하자면 언더그라운드에 있던 것은 그라운드로 올라와도 그 형질이 변하지 않은 셈이다. 그런데 과연 일루미나티라는 음모론이 있던 곳이 언더그라운드라고만 볼 수 있을까. 일루미타니하면 비밀결사라는 말이 여전히 떠오르지만 그 누구도 비밀스럽게 여기지 않는 이 상태를 두고서 그라운드가 된 언더그라운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미드 소마>가 자기만의 화법을 완성해나가는 방식도 그것과 유사하다. 영화 안에 일정한 법칙을 지정해두고 그곳으로 관객을 인도하는 방식을 취하는 몇몇 영화에서는 세계의 강한 왜곡이 두드러지는 현상으로 관찰된다. 설득력을 준다기보다는 현혹이거나 강탈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한 자장의 영향 안에서 우리는 스웨덴 마을 공동체라는 곳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는데, 현실의 측면에서도 영화 밖에서 알던 것을 버리고 완전히 이질적이고 새로운 공간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주변인의 신분으로 내부로 들어가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렇게 자리를 옮긴 곳에서 여전한 주변인의 신분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건 아무래도 우리가 그곳에 제대로 동화될 수 없다는 사실, 해당 공동체로부터 다시 나오게 될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있어서일 테다. 예컨대 우리가 영화관에 관객으로서 찾아왔다는 점이 그곳을 여전한 언더그라운드로 남게 하는 것이다.



어떤 광경이 펼쳐지든 간에 우리는 아무런 의문 없이 그에 납득해버린다. <미드 소마>의 공간이 우리가 사는 곳과 살지 않는 곳을 명확히 분리함으로써 논리적으로 자유 혹은 방종이 될 수 있는 책임감의 유예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는 영화를 보는 관객이 영화를 보는 것만큼이나 그들에게 여행이라는 행위 또한 여행을 보는 행위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이는 영화에서 마을로 오가는 간격이 타임머신처럼 묘사되는 게 환각 약물 때문이라는 점에서도 영화라는 매체가 무엇을 보여주는지에 대한 은유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니가 초원에 누워 한껏 취하고 눈을 떠보면 어느새 마을에 와있다. 예컨대 바깥세상에서 안쪽 세상으로 향하는 중간 과정이 생략된 셈인데, 이는 공간의 전환에 있어 중간지대가 없다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시각이 정보를 전달함에 있어 세상과 자신이라는 단지 두 개의 것만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바꾸어 말하면, 믿음과 의심이라는 두 개의 극단 사이에서 고민하는 대니와 휴즈 커플에게서 대니가 휴즈에게 보내는 믿음은, 휴즈가 대니에게 보내는 불신과 접합되는 지점에서 벌어지는 것들이 스웨덴 마을 공동체라는 공간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눈을 감았다가 떠도 여전히 낯인 이곳은 마치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면이 있는데, 그렇다면 그런 비현실을 횡단함으로써 그들은 이미 현실에 대한 의무와 과오를 뒤로 했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미 한번의 역전을 겪은 이 세상에서는 언더그라운드였던 것들이 그라운드로 자리하기에 그라운드에 대한 의무는 곧 현실에 대한 의무와 과오를 다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마을 공동체의 미드 소마 의식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은 가차 없이 제거된다. 마을의 절벽에서 72세를 넘은 노인이 떨어지는 의식이 거행될 때 비명을 지르는 두 명의 남성은 (설사 자신의 금기에 대한 대가라 하더라도) 영화 안에서 제거당하며, 순서에는 차이가 있지만 종국에 단 한 명의 생존자로 남은 건 내부에도 주변에도 자리하지 않던 대니이다.



4.



대니에게는 마을 공동체가 대니의 전부라고 보아도 무방한데 반대로 휴즈에게는 이 영화 속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 그에게는 이어나가야 할 학업이 있고 여자친구 이외의 다른 여자가 있으며 그것이 해피엔딩이든 배드엔딩이든 간에 열린 세계로의 열린 결말을 추구할 의향이 있는 듯 보인다. 그래서 이 영화는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간에, 들어갔던 의문의 순간만큼 나올 때도 의문의 순간을 거쳐야 한다는 불문율을 지키려고 한다고 볼 수 있다. 넓은 범주에서 보자면 그러한 분리와 순간에 관한 판단은 죽은 노인의 머리를 한 번 더 내리치는 절벽 의식에서도 간접적으로 언급된다고 할 수 있을 테고 말이다. 마을 사람들은 죽은 노인의 이름을 따서 새 아이에게 붙이는 것으로 환생이라는 하나의 고리가 성립한다고 말하지만 그 중간의 인과가 어떻게 되는지는 상세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노인이 죽고 훗날 아이가 태어났을 때 노인의 이름을 붙여준다면 그 사이의 공백에는 노인이라는 혼령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가? 다르게 보면 이는 대니와 휴즈가 처한 헤어진 것도 만나는 것도 아닌 이상한 상황으로도 볼 수 있을 테다. 그런 맥락에서는 대니의 시선으로 시작한 이 영화는 영화의 마지막이 대니의 시선으로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영화 자체가 의문과 의문 사이에 자리하는 믿을 수 없는 미싱링크인 셈이다.



무엇보다 작중에 등장하는 두 인물의 전공인 인류학은 해당 풍습이 이루어지는 장소를 직접 방문하는 방식으로 주된 자료 수집이 이루어지는 학문이기도 하다. 공간 안으로의 진입이 필수적이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이때 공간 안으로의 진입이라는 말은 공간의 안팎을 분리하는 기준이 무엇이냐는 물음을 낳기도 한다. 어느 선을 넘으면 내부자의 공간으로 진입하게 되는지, 혹은 어느 선 밖에 있어야 주변인으로만 남을 수 있는지에 대한 기준은 인류학이라는 학문이 본질적으로는 인간이 형성한 공간에 대한 탐구를 진행하는 일을 주된 업으로 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인류학에 대한 시선은 우리와는 다른 무언가, 타자에 대한 호기심으로 접근해 어떤 면에서는 호의라기보다는 불쾌한 쪽의 경이에 호도되는 경향이 있기도 했다. 쉽게 말해 인류학의 연구 대상은 인간을 학문으로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열광하는 특정 범위를 발굴해내는 식으로 컬트화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컬트의 대상이 굳이 하위문화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그런 맥락으로 영화를 보면 바깥 자리에 들어온 안쪽의 사람들이 바깥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이 사뭇 신기하게 느껴진다. 주류의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지에 따라 달라지는 사안이지만 안과 밖이라는 두 개의 세상이 인싸와 아싸라는 두 개의 용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 바깥 세상에서는 마을 공동체가 다소 이질적인 문화이지만 오히려 이곳에서는 그들이 마을의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주변인이다. 그리고 이 주변인들은 도심 안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끝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벤야민식의 방랑자, 빔 밴더스의 독일과 짐 자무시의 미국이 다소 낯설지만 익숙하게 흥겨운 장소인 이유를 만들어내는데 일조하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 휴즈와 휴즈의 친구는 마을 공동체를 바탕으로 논문을 쓰는 것을 두고서 갈등을 빚지만, 결국에 우리에게 중요했던 사실은 논문이라는 실적으로도 절도되지 않을 마을 공동체의 운명과 시련에 관한 주객전도, 그 젠트리피케이션에 관한 흥미로운 단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 영화는 이마무라 쇼헤이의 <신들의 깊은 욕망>과 비슷한 구석이 많다. 이마무라 쇼헤이 영화의 금기와 서열에 관한 선이 주로 불쾌에 관한 감정을 자아냈지만, 후기작으로 가며 불쾌의 성질이 희망 혹은 희열에 대한 것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도 <미드 소마>에서의 대니가 겪는 감정이 그런 종류의 오르가즘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테고 말이다. 여기서 지적 하나, 오르가즘은 순간 의식이 끊어진다는 점에서 죽음과 유사하지만 죽음과는 달리 그 뒤의 예후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명백히 다르다. 그 대목에서 이 영화는 대니가 오르가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듯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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