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2019)
봉준호와 한국사회, <기생충>이 관통하는 것들
<기생충>에 대한 생각을 여러분과 나누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제가 평소에 쓰는 글은 혼자만의 것이라서 대화 주제로는 적합하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저는 지금 제 부끄러움을 설토하는 중입니다. 여러분이 느끼는 걸 저 자신도 느껴오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무엇보다, 봉준호 감독이 이루어낸 쾌거를 나누려면 한곳에 모이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이 자리는 축제이자 파티입니다.
여러분이 이 영화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을련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발언은 타인에 대한 저의 무지를 고백하는 것이자, 봉준호 감독 영화의 풍부함을 지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전자에 대해서는 위에서 말한 부끄러움의 연장선입니다만, 후자는 오늘 저희가 말하게 될 주제입니다. 이때 그 주제를 여러분과 대화해보고 싶은 것은, 우리 모두가 다른 부분을 봉준호의 영화에서 보고 듣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봉준호 영화는 극장을 나온 후에 친구와 대화를 하고 싶어지는 영화입니다. 그만큼 제공하는 실마리가 많고, 반대로 우리가 영화에 제공할 수 있는 개인적인 경험이 많기도 합니다. 쉽게 말해 작품의 내외적인 스펙트럼이 넓다는 뜻이고, 그의 영화를 제대로 즐길 방법은 타인과 생각을 나누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저는 생각을 나눈다는 말이 부끄러움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봉준호 영화에서 찾아내는 것은 대체로 부끄러운 모습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영화에 비추어 떠올리는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일 수도 있고, 또는 영화에서 발견하는 한국 사회의 부끄러운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 전자는 개인적인 부끄러움이고, 후자는 사회적인 부끄러움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겁니다. 말하자면 봉준호 영화는 그런 두 가지 갈래로 해석됩니다. 안과 밖으로 부끄러움을 목격하게 됩니다. 따라서 저는 이것을 두고 ‘관통한다’라는 표현을 쓰고 싶습니다. 안에서 밖으로 관통한다고 말입니다.
1.
관통한다는 표현만큼 일방적인 단어는 또 없을 겁니다. 관통이라는 것은 어느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나아가는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이건 꽤 무례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일방적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무례함에는 파괴적인 것에 대한 은유가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관통이라는 표현이 과녁에 꽃히는 화살이나 지나가는 총알에 비유될 수 있다면 말이죠.
우리는 총알이 갖는 파괴력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파괴력은 앞으로 작용하는 물리적 힘에서 비롯되는 게 아닙니다. 그런 파괴력은 앞으로 나아가면서 반대로 작용하는 것들, 이른바 작용과 반작용으로 수급되는 부작용과도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요컨대 관통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뒤로 하는 것들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두고 ‘작용-반작용 법칙’이라고 부릅니다.
이 부분에서 수전 손택이 했던 말을 떠올려봅시다. 수전 손택은 카메라가 피사체를 일방적으로 노출시킨다고 말하며 사진의 폭력성을 주장한 바가 있습니다. 그녀는 사진을 찍는 행위를 총기의 발포에 빗대어 표현합니다. 따라서 그녀는 카메라라는 것이 피사체를 ‘관통’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생각하기에, 봉준호 영화를 관찰하는 방법론뿐만 아니라 영화를 구성하는 기술적 요인 또한 그런 점에 귀인합니다. 봉준호의 영화에서 카메라는 피사체를 촬영(관통)하는 동시에, 그로부터 반작용을 돌려받습니다. 이때 그 카메라가 보는 게 현실적인 피사체인지 또는 담론적인 메시지인지에 따라서, 그런 반작용 또한 동일하게 돌려받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피사체를 보며 사적인 부분을 관통시킨다는 점입니다. 이런 걸 카메라 동일시라고 표현합니다만, 쉽게 말해서 관객인 우리는 카메라가 응시하는 대상에 스스로를 대입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저런 상황에 처했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 것인지와 같은 물음이 이에 해당합니다. 물론 이게 우리가 피사체에 폭력을 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런 관통에 부차적으로 딸려오는 반작용이 다름 아닌 폭력이라고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2.
이를테면 <기생충>에서는 봉준호의 어느 영화처럼 수직과 수평의 이미지가 도드라집니다. 그리고 그것은 각각 통로와 계단이라는 두 가지 요인으로 드러나게 되죠. 그런데 이 영화에서 카메라가 통로와 계단을 어떤 구도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떠올려 보면, 우리는 이 카메라가 관통을 유도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이 영화의 주요 무대인 부르주아 가정의 집 안 거실은, 계단을 올라와야만 다다를 수 있는 장소입니다. 반대로 2층에서 거실로 내려오는 계단도 있는데, 영화는 거실로 올라오는 장면은 보여줘도 내려오는 장면은 보여주지 않습니다. 이게 과외수업하려 올라가는 모습을 찍는 게 불필요하다고 느껴서 보여주지 않는 걸까요?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아마도 작품의 주요 무대를 거실에 붙들어 두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거실이라는 게 바깥의 정원을 포함해서 넓디넓은, 수평의 이미지를 준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영화가 왜 수평을 그리 염두에 두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수직으로 관통하는 시선은 위에서 아래로의 힘이 부가되는 것에 반해, 수평으로 관통하는 시선은 어느 한쪽의 힘이 보태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떠올려볼 수 있을 겁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 부르주아 가정에서 거실로 진입하는 계단과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이 수직의 이미지를 보여준다는 점을 논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거실로 진입하는 계단과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은 계급의 분리를 드러내는 요소입니다. 반지하 가족들이 거실로 올라오면서 일시적으로나마 부르주아의 탈을 쓰게 되고, 반대로 지하실로 내려가게 되면 그들 모두는 반지하 때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됩니다. 영화의 결말에서 반지하 가족의 아버지(송강호)가 살인자로 몰락해 지하실에 갇혀버리는 건 그런 점을 말해줍니다.
지하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그런 힘이 작용합니다. 위에서 아래로 가하는 힘, 중력을 더해 가하는 발길질이 가정부 여인을 뇌진탕에 이르게 합니다. 다시 말해서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는 이 카메라에는 유난히 일방적인, 그런 관통하는 힘이 비추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계단에서의 시선에는 중력이 부가적인 힘으로 덧붙여지고 있습니다. 요컨대 우리는 이 중력이 과연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수가 있습니다. 아마도 위에서 아래로 사람들을 짓누르는 것일 테죠. 사회로부터의 압력이라던가, 상사로부터의 압력이라던가. 이것은 마치 그리스 신화의 아틀라스처럼 하늘을 짊어지게 된 천벌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버텨내지 못하면 죽으니까, 버티기 위해 그 힘을 역으로 약자를 벌주는 것에 이용하는 것입니다.
전 가정부에게 발길질이 작용할 때, 반작용을 되돌려 받게 됩니다. 이것은 물리적인 법칙입니다. 하지만 그런 발길질을 가하는 장면에 우리를 대입한다면, 우리는 평소의 행실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것을 일종의 반작용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살아간다’라는 동사가 시간에 몸을 담아 ‘일방적으로’ 뒤에서 앞으로 향함을 내포하고 있다는 맥락에서, 살아가는 것은 곧 일방적이기에 폭력이라는 말이나 다름없게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누군가에게 반작용을 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발길질을 보면서 떠올리는 것은, 지나친 삶에서 뒤로 남겨진 이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발길질을 보며 폭력에 몸서리친다면,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의 폭력에 몸서리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요컨대, 우리는 이 발길질에서 ‘나’의 반작용으로 성립하는 ‘거울 속의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는 이런 장면도 지적할 수가 있을 듯합니다. 동영상 파일을 볼모로 잡혀, 자신들이 술을 먹던 거실 구석에서 손을 들고 서 있는 반지하 가족들의 모습을 떠올려 봅시다. 이 장소는 거실이기에 수평한 장소, 모두가 평등해야 할 장소임에도 그들 사이에는 위에서 아래로의 위계가 존재하게 됩니다.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반지하 가족, 그 위에서 아래로 바라보는 전 가정부 가족의 모습이 그런 위계를 말해줍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이런 모습은 꽤 이상합니다. 수평의 이미지에서는 중력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오히려 수평의 이미지에서는 중력이 전제되어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평평한 바닥에 중력이 흐르고 있고, 그래서 이건 수직의 이미지와는 달리 육안으로 관측되지 않습니다. 구분할 수가 없는 거죠. 따라서 이 장면에서는 인위적으로 중력을 보여준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카메라가 시선을 위에서 아래로 투과시키면서, 바닥에 깔려있던 중력을 우리의 눈앞에 드러내는 겁니다.
은폐된 것을 육안으로 드러낸다는 점이 <기생충>이라는 제목처럼, 사람들 앞에 민낯을 강제로 드러내게 하는 시선의 폭력을 직시하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공론화하여 다 같이 해결방안을 찾는 게 맞을 겁니다. 이때 우리는 그렇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우리 사회의 약점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생각해서는 안 된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요구된다는 게 더 맞을 듯합니다. 약점을 고치려면, 먼저 약점을 인지할 수 있도록 드러내는 절차가 필요하니까요.
이처럼 위에서 아래로 시선을 관통시키는 건 약점이라는 이름의 중력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중력이 곧 약점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게 반지하라는 평지 아래의 장소, 중력 탓에 물이 줄곧 밀고 들어올 수밖에 없는 장소를 설명해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요컨대, 반지하에 살 수밖에 없는 그들은 늘 중력에 노출되어 있고, 늘 약점을 잡힌 채로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영화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은, 약점을 인지할 수 있도록 드러내는 작업, ‘카메라만이 할 수 있는 관통’입니다. 이 관통이 마냥 폭력에만 해당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렇게 설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이 거실에서 두 가족이 대치하는 모습에는 중력이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그런 중력이 위로부터의 압력이라고 가정한다면, 이 거실에서는 누구든지 가난의 족쇄를 벗고 자유의 몸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 거실에 담긴 의미는 보다 분명해집니다. 영화의 주 무대로 설정된 부르주아 가정이 우리 사회를 작게 축소한 것이라면, 거실에 올라서서 자유로워진다고 해서 하층민들의 삶이 나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자유롭게 경쟁한다고 해서’ 하층민이 부르주아의 삶으로 올라설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자유롭게 경쟁하는 사회요? 이 대목에서 신자유주의를 떠올렸다면 착각이 아닐 겁니다. IMF가 터졌던 지난 1997년에, 그들은 도움의 손길을 대가로 신자유주의 체제로의 뼈아픈 개혁을 요구했었습니다. 말 그대로 작용(도움)이 있으면 반작용(개혁)이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IMF를 필두로 신자유주의 사회에 본격적으로 진입하게 된 우리에게, 반작용으로 딸려오는 것은 높은 실업률과 자살률이었습니다. 이것이 ‘부작용’이 아니라 ‘반작용’이 되어야만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심장혈관확장제였던 비아그라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부작용이 꼭 해로운 쪽으로만 작용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말했던 반작용이야말로 일방적인 폭력으로 수반되는 것일 테지요.
3.
여기에 저는, 관통이라는 단어를 봉준호 영화 전체를 관통하면서 다시금 발굴해보고자 합니다. 감독님의 팬분들이라면 잘 아시겠지만, 이 영화가 보여준 수평과 수직의 이미지는 그의 영화 전체에서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것들을 일일이 대조하고 나열하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그럼에도 저는 IMF라는 단어를 언급한 이상, 위에서 아래로 가해지는 것들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플란다스의 개>가 개봉했던 2000년도에, 우리가 아직 가시지 않은 쓴 내를 입안으로 삼키고 있던 것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 영화가 그런 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지는 않지만, 정식 교수로 임용되기 위해 촌지를 주고받아야 하는 남자의 모습에서 그걸 엿볼 수 있습니다.
먼저 이 영화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을 꼽으라면, 강아지를 버리고 내려오던 와중에 아파트 복도를 횡단하게 되는 것일 테지요. 이 장면에서 애꿎은 강아지를 위에서 아래로 버리는 남자의 모습은, 자기보다 약한 이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어떤 이를 떠오르게 합니다. 말 그대로 그 강아지가 떨어지는 게 중력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 본다면, 남자의 그런 행동은 강아지 살해를 통해 자신의 죽음을 대체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행동은 제의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앞서 말했듯이,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타인을 뒤로할 수밖에 없다는 작용-반작용 법칙을 은유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고 나서, 추격전이 벌어지는 아파트 복도의 수평적 이미지를 생각해봅시다. 이 대목에서 돌아보게 되는 건, 두 영화 모두 드라마틱한 시선의 이동이 없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통로라는 공간의 특성상 위나 아래를 바라보는 것은 불가능한 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런 통로에 속한 우리에게 통로 전체를 조망하는 쇼트가 성립하는 것은 카메라 덕분이라는 점입니다. 카메라가 아니었다면 수평적 이미지에서 관통은 성립하지 않으니까요. 요컨대, 영화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그런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생각해볼 지점 중 하나입니다.
이 수평적 이미지는 훗날 <설국열차>의 기차로 이어지는 듯 보입니다. 단순히 바닥이 평평하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앞서, <기생충>의 거실이라는 공간에는 중력이 미리 전제되어 있다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은폐된 요소를 드러내는 게 카메라의 역할이라고도 말했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설국열차>라는 평평한 사회에서 계급이 성립한다는 것 자체가 몹시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계급이라는 개념은 수평보다는 수직의 이미지에 더 잘 부합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사실, <설국열차>는 애초에 영화의 출발지점에서부터 모순점을 품에 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순점을 이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설국열차>는 일방적인 공간과 구도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 열차는 뒤로는 가지 못해서 지구 전체를 일방향으로만 달려야 합니다. 또한 그런 이유로 열차 안은 꼬리 칸부터 머리 칸까지 계급이 나뉘게 됩니다. 요컨대 이 영화에서 열차는 수평이 아니라 수직의 이미지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가 앞서 '수평적 이미지에서는 중력이 없다'고 말했던 사실은 틀린 게 됩니다. 이 열차를 일방향으로 달리는, 위로부터 아래로 가해지는 중력이 작용하는 수직적 이미지로 바라보게 될 때, 비로소 영화는 성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기생충>의 재미는 위에서 나열한 것으로부터 오는 듯합니다. 정확하게는 그런 DNA가 작가의 이름으로 내려오고 있다고 보는 게 맞을 듯합니다. <기생충>에서의 여러 장면은 그동안 봉준호 감독이 찍었던 영화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런 기시감은 수평과 수직이라는 두 가지 이미지를 통해 도드라지게 됩니다. 아마 영화의 하이라이트에서 지하실이 주는 이미지가 수평과 수직 모두를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 지하실 아래는 사람 두 명이 오고 갈 만한 크기의 통로임에도 그들은 일방향으로만 이동합니다. 지하실에서의 대치는 그런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왜 그들이 일방향으로 대치하게 되는지에 대한 물음은, 우리가 지금까지 논했던 관통이라는 주제를 통해 해명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