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형태에 관한 질문

<유열의 음악앨범>(2019)

by 수차미
M00007085756_104517.jpg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의 작품 포스터 © CGV아트하우스


1. 우리는 고도를 기다린다.



사무엘 베케트의 유명한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는 다소 희한한 내용을 다루는데, 그 이상함이란 다음과 같다. 이 희곡은 제목처럼 고도를 기다리는 두 남자가 나오지만 정작 고도는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고도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지도 않아서 우리는 그들이 왜 고도를 기다리는지를 알 수 없다. 예컨대 이 작품은 고도가 아니라 그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관심이 있다. 이런 기다림의 순간에 대해 오랜 시간을 투자하는 게 이 작품의 화법인 것이다.



두 남자는 아무 말이나 해댄다. 아무 말이나 해대기에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은데 어찌 되었든 간에 대략적으로는 이어진다. 이 대목이 이 작품이 정말로 기다림을 보여주는 것에 모든 것을 할애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두 남자가 누구이든, 고도가 누구이든 간에 그들에게 중요한 사실 하나는 고도를 기다리는 ‘시간’이다. 말하자면 이 희곡의 중심 주제는 제목처럼 ‘기다리며’라는 현재진행형의 마음이다. 여기서 잠깐, 나는 방금 그들이 기다리는 게 ‘마음’이라고 말했다. 고도라는 인물을 통해 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 마음 자체가 본질이라는 뜻이다. 예컨대 이것은 관념이 아니라 형태에 가깝다. 그래서 이 희곡은, 기다림의 끝으로 나아가는 운동 에너지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에 더 관심이 있다. 즉 이것은 철학보다는 과학에 가깝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고도를 기다리며>가 과학적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눈에는 이것이 과학으로 보인다.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지를 감정으로 헤아리는 것보다, 뇌의 신경 사이 시냅스가 보내는 전기신호가 전달되는 메커니즘에 관한 호기심이 더 동한다. 이런 비유조차 여전히 헷갈리지만, 적어도 <고도를 기다리며>가 어떤 작품인지에 대한 대략적인 전달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고도를 기다리며 나누는 대화는 언어가 아니라 원인의 형태로 우리에게 전달되어서, 본래의 형태를 잃고 관념이라는 전기신호로 변환되어 우리 눈에 관찰된다. 이때 그 신호가 어떤 함의가 있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지만, 그 신호를 받아 행동하는 두 남자의 모습을 보면서 교훈을 얻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관념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에 관심을 두게 된다. 우리의 교훈은 어떤 형태로 다가올까? 이것이 <고도를 기다리며>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2. 기다림의 형태에 관한 질문



내가 <유열의 음악앨범>을 보면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떠올린 것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김고은(미수)의 모습이 고도를 기다리는 두 남자의 모습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 작품에서 고도의 자리에 있는 건 현우(정해인)이기에 두 남녀는 실제로 만난다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 허나 그런 만남의 사이에는 계속해서 멀어지는 현우의 모습이 있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두 남녀의 모습은 마치 자석의 같은 극과도 같아서 가까이 다가가면 멀어질 수밖에 없는 숙명을 안은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그들이 끌어안은 숙명을 풀어주면 서로는 자유로워질 텐데 그러지 않는 걸 보면, 이것은 확실히 부조리극이다. 이때 만약 당신이 연애담을 말하는데 어떻게 부조리를 말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가는 것만이 부조리극은 아니고, 세상에 섞이지 못한 채 둥둥 떠다니는 부유물 또한 부조리한 것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비유하자면 이렇다. 먼지가 둥둥 떠다니는 장소에 있는 어떤 이를 보여주는 게 부조리극이라면, <유열의 음악앨범>은 그 먼지 중에 두 개를 골라 보여주는 느낌이다. 이 먼지에 관하여 말 그대로의 먼지, 세상의 사물로부터 날려오는 잔분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물 위에 떠다니는 꽃가루를 관찰한 브라운 운동에 더 가까워 보인다. 오래전 과학자들은 물 위에서 바람도 불지 않고 물결도 치지 않는데 꽃가루가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현상을 발견했고, 그 원인을 몰랐다. 단지 그것을 발견한 로버트 브라운 박사의 이름만이 남겨졌을 뿐이었다. 그리고 브라운 운동을 다시 주목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알버트 아인슈타인이다. 그렇다면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물 분자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면서 그에 부딪힌 꽃가루 입자가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었다.



이 모습은 마치, 퇴근길 만원 지하철 안에서 열차의 움직임이 사람들 전체로 퍼져 나가면서 나에게도 큰 파장으로 다가오는 것을 떠오르게 한다. 쉽게 말해, 미시 세계에서의 나는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능동적인 존재이지만 거시 세계에서의 나는 주변 환경에 휘둘리기만 하는 소극적인 존재이다. 즉 여기서 부조리한 것은 당신 주변을 가득 메운 퇴근길의 인파이지 당신이라는 사람 자체는 아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면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이 부조리해 보인다. 무언가 어색하다고 해야 할까, 또는 객관적이게 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아무리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하여도 자신의 시야를 기준으로 자신을 파악하는 작업은 한계가 있다. 결국 근본적으로는 관찰 카메라와 같은 것으로 자신을 외부에서 바라보아야만 비로소 객관적일 수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부조리하다. 위에서 말했듯이 이것은 철학이 아니라 과학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내면으로부터 외부로 파악하는 작업은 실존에 관한 철학적 물음이지만, 외부를 기준으로 우리를 볼 때 우리 자신은 세상을 이루는 부속품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고도를 기다리는 우리 자신은 실존에 관해 묻지만 고도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는 우리 자신은 세계의 질서를 보고 있다. 어쩌면 이를 두고 신이라는 표현을 쓸 수도 있지만, 우리는 신의 정의를 잘못 알고 있다. 신이라는 게 있다면 그가 세계의 원리를 모두 알기에 신인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마음을 잘 알고 있기에 신인 것인지를 면밀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즉 전자는 과학의 신이고 후자는 철학의 신이다.



3. 영화의 두 가지 분류



기본적으로 영화는 인간이 만들어낸 세계라는 점에서 우리를 신으로 만든다. 그러니 영화를 보는 행위는 자신을 신의 반열에 오르게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신이라는 개념에 대해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등장한 영화의 두 가지 분류가 여기에 있다. 첫 번째는 과학의 신이고 두 번째는 철학의 신이다. 물론 그 두 가지는 어느 하나가 고도화될 때 다른 하나를 집어삼키기도 하므로 딱 잘라 구분이 되지 않을 때도 있다. 예를 들어 타인의 습관을 잘 관찰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다음 행동을 어느 정도 예견할 수 있다. 이는 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살아가는 원리, 생리(生理)를 온전히 이해했기 때문이다. 또한 반대로 타인의 속마음을 잘 헤아리는 사람은 그가 어떤 행동을 취할지도 대략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마법이 아니다. 삶의 기술이라 할 수 있겠고, 이에 따르면 결국 신이라는 것 또한 기술적 숙련의 결과물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결국 영화를 창조하는 행위는 기술을 갈고 닦는 것과도 같다. 그러니 이를 두고 신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다. 왜냐하면 영화라는 세계가 거의 마술적인 행보를 보이는 반면에, 그것을 만들어내는 건 기술이기 때문이다. 즉 기술이 마술을 만들었노라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때 타인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독심술이라는 게 과학보다는 철학에 더 가깝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우리는 이를 두고서 과학이 철학을 만들었노라고 선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발언이 가져올 파장 또한 엄청나리라고 예상해볼 수 있다. 영화가 예술의 영역에 들어선 이후로 우리는, 영화가 철학을 담은 매체라고 생각했지 ‘과학’의 영역에 몸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아서 클라크는 고도로 발달한 과학은 마법과 분간할 수 없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고도로 발달한 영화는 거의 마법처럼 보일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연역 해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가끔 영화가 신에 가까운 무언가로 보일 때가 있다. 허나 세상에 신이란 없다. 그것은 기술적 숙련의 결과이다. 영화가 우리를 바라볼 때, 그가 우리 삶의 원리와 속마음을 꿰뚫어보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면, 그것은 고도로 발달한 기술이지 영화가 신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게 아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면서 일부로 속아준다면 꽤 재밌는 결과가 도출된다. 신에 대한 우상숭배가 실은 기술로부터 출발했다는 점을 깨닫는다면, 영화를 본다는 건 결국에는 기술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4. 본다는 것에 관하여



본다는 건 물음을 던지는 행위이다. 우리는 시각을 통해 물음을 던지게 된다. 헬렌 켈러의 말처럼 본다는 게 가장 큰 축복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물음을 던지는 건 축복이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마찬가지로 눈이라는 게 시각이라는 마법을 행하지만, 결국에는 시력이라는 기술을 행하는 기관이기도 하다. 예컨대 마법이 축복이라면 그것은 곧 기술이다. 기술은 축복이며, 물음을 던지는 건 마법을 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세상을 본다고 말할 때 그것은 특별하게 정해진 대상이 없다. 응시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는 소리다. 이에 따르면, 우리가 무언가를 볼 때는 시각을 무차별적으로 살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수전 손택은 인간의 눈을 모방한 카메라를 두고서 폭력적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니 위에서 했던 말은 다음처럼 바뀌게 된다. 폭력은 마술적이다. 또는, 물음을 던지는 것은 폭력이다. 다시 말해서 본다는 게 축복일 경우는 뚜렷한 목적의식이 있어야 한다. 초점 잃은 시각은 그저 폭력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에게 물음을 던질 때 모호하게 흐려버리는 것을 경계해야만 한다.



오늘도 멀리 돌아오기는 했지만 <유열의 음악앨범>은 본다는 것의 두 가지 방향에 관한 영화다. 이는 각각 철학과 과학이라는 방향으로 나뉜다. 이 영화에서 음악이 곳곳에 삽입된 이유는 시대를 구분하기 위한 이정표 역할을 하기 위함인데, 어찌 보면 영화의 제목인 ‘유열의 음악앨범’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 컨셉에 충실한 것일 수도 있다만, 그보다 중요한 건 작중에서 현우가 말하는 자신의 트라우마이다. 현우는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세상에 하나쯤은 있어도 되지 않겠느냐고 미수에게 말한다. 현우는 자신의 삶은 친구를 잃은 그 순간에 이미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하는데, 이때의 삶이란 그가 아는 지평선 안쪽까지를 의미한다. 그러니 지평선의 바깥에서 다가온 미수에게 현우가 끌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잠깐, ‘당연하다’라는 말에 태클을 걸 당신에게 다음 같은 부분을 말해두고 싶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태초의 사랑은 아무런 이유가 없다. 두 사람은 아무런 이유 없이 서로에게 끌린다. 말하자면 사랑이란 거의 마법 같은 일이다. 다시 말해서 사랑이란 고도로 발달한 기술이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현상은 두뇌의 화학작용에 불과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마음속으로는 이 감정이 어디에서 흘러온 것인지가 궁금해진다. 적어도 우리가 아는 인식의 범위, 그 지평선 안쪽에서 온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랑을 한다는 건 물음을 던지는 것과도 같다. 내 마음에 찾아온 이방인에게 질문을 던지고 출신을 묻는 것이다. 그래서 연인들은 항상 서로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싶어한다.



5. 당연하다는 것에 관하여



그러나 이때 현우는 자신의 이전 삶까지는 미수가 알지 못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현우에게 사랑이란 미수가 알고 있는 것과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미수에게 사랑이 물음을 던지는 행위라면, 현우에게 물음을 던지는 행위는 곧 폭력이다. 예컨대 영화의 후반에 현우가 미수의 곁을 떠나버린 건 두 사람의 삶의 방향이 일치하지 않은 게 이유이다. 미수에게 사랑이 포괄적으로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라면 그것은 타인에 대한 이해일 것이다. 하지만 현우에게 그런 이해는 그저 무차별적인 폭력에 불과하다. 신기하게도 두 사람은 영화가 거의 끝나갈 때까지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다. 서로가 믿는 신이 다름에도 거의 결말에 다다랐으니 어찌 보면 잘 버텨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미수가 숭배하는 게 닿으려고 하면 멀어지는 현우라는 관념이라면 그녀는 철학이라는 신을 믿는다고 볼 수 있다. 이때 신이란 그녀가 살아가는 세계 전반에 통용되는 법칙을 뜻한다. 아마 미수에게는 세계 전체가 현우라는 관념으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아마도 이것일 텐데,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현우와 마주치는 미수의 모습에서 그걸 찾아볼 수 있다. 이 만남은 거의 운명적이다. 다르게 말하면 운명이라는 이름의 마술이고 마술이라는 이름의 영화이기도 하다. 즉 마법 같은 만남, 그 영화가 본다는 것의 축복으로 변하는 게 미수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관념의 형태로 미수에게 흘러오는데, 영화는 그에 대한 시각적 표시로 라디오를 택한다. 유열의 음악앨범이 처음으로 런칭하던 날 찾아온 현우는 미수에게 있어 잊지 못할 날이 되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음악이 스크린 안에서 스크린 밖으로 옮겨갈 때, 그것은 디제시스가 미메시스로 확장되는 순간이 아니라 세계 안에 신이 깃드는 신성한 순간이다. 이 신성함은 사랑이라는 단어에 대응하여서 영화 전체를 신성하게 만들고 본다는 것을 성스럽게 한다. 물론 이것은 이 영화가 미수의 시점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 귀인한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이 영화의 시점에서 현우는 신비로운 대상이 된다. 이를테면 이 영화가 미수의 세계를 보여준다고 하면 현우는 라디오의 음악처럼 다가와 금세 세상 너머로 퍼져버리지만, 우주를 떠도는 보이저 1호의 골든 디스크처럼 점점 더 멀어져만 갈 무언가이다. 허공에 퍼진 연기가 사라지지만 대기 중에 녹아들듯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건 현우라는 관념의 전체화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이는 마치 우주로 나간 히틀러의 연설이 현대에 와서 다시 수신되었다는 괴담처럼 미수에게 처음 찾아와 시간이 흘러 다시금 나의 마음으로 들어오는 추억의 음악, 그 레트로에 관한 마법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Av2mBkKYW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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