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 최후의 밤>(2019)
결코 객관적이지 않은 영화의 세계
사람들은 자신이 얻은 정보를 끊임없이 의심한다. 가짜뉴스가 범람하는 이 시대에 진실이 무엇인지 알려면 그런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진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판단의 여부는 갈릴 것이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사실이란 ‘실제로 있었던 일이나 현재에 있는 일’을 뜻하고, 진실이란 ‘거짓이 없는 사실’을 뜻한다. 말하자면 진실은 사실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것, 사실에 가치판단을 섞어 만들어낸 결과물이 바로 진실이다. 그래서 진실이란 상대적이고, 때와 장소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는 유동적인 지식의 산물이다. 결국 사실이란 무엇인지를 논하면서 진실을 밝힐 수는 없다. 아니, 애초에 그 말은 성립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진실을 요구하면서도, 진실을 쉽사리 믿기 힘든 시대를 살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항상 중립을 유지하려 하고, 사실관계로만 세상을 바라보고자 한다. 즉, 지금의 우리에게는 중립지대로의 강박. 사실이라는 거대한 압박이 드리워져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사람들은 영화를 보면서 그런 압박감을 느끼지 않는다. 쉽게 말해, 영화를 그냥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이는 영화가 해석의 대상, 세계의 재현물이라는 점에서 연유하겠지만, 보다 더 근본적인 지점을 짚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왜냐하면 영화가 무언가를 ‘보여준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그것은 진실을 전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영화란 자신이 목격한 ‘사실’을 토대로 ‘진실’을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산물이며, 영화라는 쇼트의 총체는 눈에서 분해되어 뇌에서 조립된다. 말하자면 영화 속 세계는 처음부터 분해된 상태로 담겨있는데, 세계가 분해된 시점에서부터 이미 그것은 사실이 될 수 없다고 그들은 믿는다. 그러니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이곳에는 사실은 없고 진실만이 있다. 그러니 내가 이것으로 사실을 구축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고 그들은 말한다. 그런데 이 수사에서 죄책감의 유무조차 간과되는 일이 잦다. 예컨대 영화를 ‘해석’한다는 행위 자체가 죄를 짓는 일이라고 그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이때 누군가는 영화를 해석하지 않으면 어떻게 볼 수 있느냐고 묻겠지만, 사실을 독해하는 것과 진실을 해석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사실을 독해하는 역할로서의 카메라는 이미 그곳에서 제 역할을 다했고, 그를 거쳐 영화를 바라보는 우리에게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당신의 현실에서의 사실만이 영화로 투입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바로 이때 영화에는 영화의 것이 아니라 당신의 것인 사실이 생겨난다. 사실에 대한 기다림이 현실에서 영화로의 투입을 끌어내고, 영화에 본래 없던 사실은 당신의 사실로 대체된다.
결국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영화는 결코 객관적이지 않다. 분명 영화는 세계의 객관적인 포착으로부터 출발했지만, 우리 눈에 상이 들어올 때는 주관적이게 된다. 어쩌면 이를 두고서 담론 세계의 양자역학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유동하는 담론들은 포착되는 순간 이미 우리가 아는 형태에서 벗어나 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진실을 허용한다. 그래서 현대 사회에 영화를 보는 우리는 모두 다 비평가가 되고 모두가 감독이 된다. 말하자면 최근의 관객은 일종의 프로슈머(Prosumer)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을 어떻게 어디까지 먹을 수 있는가
비평가가 관객과 감독을 잇는 환류의 다리를 놓는다고 가정해볼 때, 사람들은 ‘관객으로서의 자신’과 ‘관객인 동시에 비평가인 자신’을 분리하여 영화를 본다. 관객으로서의 자신은 영화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찾는 반면, 관객이자 비평가인 자신은 내가 이 영화를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찾는다. 여기서 전자는 그렇게 새로울 것도 없는 기존대로의 영화이다. 하지만 후자는 최근 우리 사회에 유행하는 먹방, ‘무엇을 어떻게 어디까지 먹을 수 있는지’에 관한 한계점을 찾아내려 하는 것과 유사해 보인다.
이제 우리는 그 식사에 관하여 말해보려 한다. 먹는 것 자체가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함이었던 시대에서 벗어나, 귀족들의 포만감 넘치는 식사의 연속이 되었을 때 그것은 사치가 되었다. 고대 로마의 귀족들은 먹고, 입안을 간질여 먹은 것을 토해냈다. 이때 식사는 자신이 무엇을 먹을지의 문제뿐만 아니라, 무엇을 얼마나 먹을 수 있는지에 관한 한계측정이 되었다. 그런데 이는 현대 관객이 영화를 대하는 태도와도 유사해보이는 면이 있다. 현대 관객은 영화를 단순히 자신의 취향만으로 선택하지 않는다. 그들은 타인이 추천하는 영화를 두고서, 그것을 자신이 어떻게 소화해낼 수 있는지에 더 관심을 갖는다. 아트하우스관의 인기는 그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현대 영화 시장에서 아트하우스관은 양날의 검이다. 누군가는 그것을 두고 소외받는 예술 영화에게 활로를 열어준다고 말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과연 상업적으로 소비되는 예술영화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많은 사람들이 찾는, 잘 팔려서 예술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다. 이것을 보아야만 당신은 시네필이라고, 혹은 이것을 소화할 수 있어야만 당신은 대식가라고 홍보하는 영화사의 홍보 시스템을 두고 비판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단순히 쇼맨십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자신의 취향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사실과 진실의 문제는 뒤죽박죽으로 섞여버리면서 등외시된다.
객관적이지 않은 영화가 갖는 장점은, 자신이 아는 사실을 토대로 진실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 있었다. 이를 두고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고 말할 수도 있지만 영화는 모든 것을 보여주기에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는 말이 맞을 테다. 말하자면 우리는 영화를 편식하지는 않지만, 그곳에서 모든 맛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리고 미각을 통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이미 보통의 영화 관객을 뛰어넘었다. 이것이 그저 영화를 먹기만 하는 이들, 장르와 배우를 두고서 영화 관람을 택하는 이들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더욱 실망스럽기도 하다. 알 만큼 알 사람들이 더 한다는 점이 그러하다.
영화 별점 사이트의 별점은 미슐랭 가이드의 별점과 사실상 동일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시네필이라는 타이틀은 미식가라는 칭호와도 유사하게 작동한다. 심지어 미슐랭 가이드를 따라서 맛집 투어를 하는 광경도 동일하게 재현된다. 단지 차이점이라면 영화는 방구석에 앉아 손가락질 몇 번을 하는 것만으로도 합법과 불법을 넘나들면서 ‘파일’을 구할 수 있다는 점이다. 허나 식사는 그걸 허락하지 않는다. 미식은 네트를 타고 전류를 넘어 당신의 혀에 깃들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지금이 인터넷 시대, 이미지의 세상이라는 점이다.
더 이상, 식사는 미식을 위한 행위가 아니다. 식사는 이미지의 재현을 위한 예비 동작일 뿐이다. 우리는 인스타그램의 1:1비율을 위해서 식사를 찍고 촬영한다. 또는 굳이 SNS가 아니더라도 지인에게 보낼 인증샷을 찍는 행위가 식사 전에 예비된다. 여기서 잠깐. 만약 식사가 영화를 본다는 맥락에 상통할 수 있다면, 식사 전에 온전한 모습의 음식을 남겨두는 행위는 영화의 순수함을 지켜내려는 시도가 아닐까. 그런데 영화는 자신의 순수함을 결코 지켜낼 수 없다. 무언가와의 첫 만남은 순수의 상징이지만, 영화는 첫 장면을 진입구로 열어둔 후에 속에서는 줄곧 변화한다. 그것은 양자 세계이며, 물질세계의 우리가 받아들이기에는 버거운 풍경이다. 그러니 영화는 결코 미식이 될 수 없다. 미식이라기보다는 폭식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우리는 왜 영화를 폭식하는가. 이때 이 말을 이렇게 돌려주고 싶다. 우리는 이미지를 폭식하고 있다. 현대 사회에 넘쳐나는 이미지는 우리로 하여금 단어가 아닌 이미지로 판단하게 한다. 그 속에 허우적대는 우리는 이미지를 삼켜대면서, 끝내 감당 못 할 것들은 뱉어내고야 만다. 현대 사회의 부유하는 이미지들에게서 사실과 진실을 구분하는 것은, 개인의 능력 여부와 상관없이 방대한 양으로 인해 침탈받고 있다. 이 과정에서 소위 아트하우스라고 부르는 예술 전시의 공간은, 누군가에게는 진실일 사실을 두고서 경쟁하는 경쟁사회의 단면이 되었다. 문제는 이들이 제공한 사실조차 세계의 일부에 불과하기에, 어떤 면에서는 부정확한 이미지의 표본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사실을 보기 위해 들여다본 현미경의 경통마저 흐릿하다면 당신은 무엇을 볼 수 있겠는가?
데이터베이스 소비의 사회
만약 오늘 지구가 멸망한다면, 그래도 나는 한 그루의 나무를 심을 것이다. <지구 최후의 밤>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한 비간 감독의 이 영화는 그런 오해를 부르기 딱 좋다. 사실 영화의 원제는 ‘밤으로의 긴 여로’라는 어느 희곡 제목을 빌려왔다. 밤으로의 긴 여로와 지구 최후의 밤 중 어느 게 더 나은지는 잘 모르겠다만, 그 느낌이 다른 것만은 확실하다. 전자는 여정의 느낌이 나고 후자는 여정 후의 느낌이 난다. 여기서 떠오르는 이미지를 곧바로 말해보면, 전자는 <반지의 제왕>이거나 후자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다. 허나 여기서 방점은 그런 영화의 제목이 아니라, 밤이라는 시간적 배경이다.
오늘 진 태양이 과연 내일도 떠오를 수 있을까? 이 상상은 지구의 막다른 골목에 처한 우리가 떠올리게 되는 물음이다. <나는 전설이다>처럼 밤에만 등장하는 것들은 정말로 무섭고, 그 이유는 인간이 야행성 동물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조금 엉뚱하지만 이를 풀이하면 인간이 죽음을 정복했다는 착각이 되기도 한다. 그 어둠, 사후세계와도 같은 짙은 새벽을 밝히는 건 에디슨의 전구였다. 이 전구를 통해 밝혀지는 거리의 풍경이 시대의 어둠으로 치환되는 순간, 그것은 허우 샤오셴의 <비정성시>가 된다. 하지만 시간을 조금 더 돌려서 태초의 빛으로 돌아가는 순간, 그것은 에드워드 양의 대만이 된다. 그러니까 <하나 그리고 둘>의 카메라는, 세상을 빛으로서 포착하는 게 아니라 사진 안에 가둔다는 점에서 이미지의 포화를 피하는 도구였던 셈이다.
이용철은 이 영화를 두고서 전 세대 중국 감독을 열거하는 건 별로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그 말에 동의하면서 작은 소견을 덧붙이자면, 그렇기에 우리에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이유가 생겼다. 역사가 아니라 기원으로서, 이미지의 탄생 지점으로 돌아갈 필요가 생겼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이미지를 포착하는 방법론이 문제가 된 현대 사회에서, 다시금 원점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발발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이 원점은 이미지의 과포화가 이루어진 현대 이미지 사회에서, 우리가 잊고 지내던 게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이때 여기서 우리는 이미지의 제국에서 빌려온 방법론 하나를 사용해보고자 한다. 그것은 데이터베이스 소비이다. 데이터베이스 소비라는 것은, 우리가 이미지의 전체가 아니라 이미지의 부분에서 흥미를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모에다.
모든 음식을 먹을 수는 없지만, 그 음식들의 일부만을 먹을 수는 있다. 실제로 음식의 특정 부위는 너무 맛있어서 그것만 따로 떼어먹는 사람도 있다. 이를테면 피자, 호화스러운 토핑을 골라 먹는 건 얌체 같지만 맛있다. 또는 케이크의 장식물, 초콜릿 덤터기나 체리 꼭지를 따로 떼어먹는 건 정말로 맛있다. 또는 경우가 다르지만 소고기처럼 부위별로 나뉘는 고기를 떠올려 보아도 좋겠다. 농담이지만, 만약 당신이 등심을 좋아한다면 등심 모에가 있는 것이고, 안심을 좋아한다면 안심 모에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는 다른 요리에도 안심이 있다는 것만으로 그 요리를 좋아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단지 그게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전체를 사랑하게 되는, 하지만 그럼에도 전체가 아니라 부분을 사랑하는 모에라는 것의 불합리함이다.
영화인을 위한 직역을 제공하자면, 히치콕은 금발 모에가 있었다. 그냥 그렇게 말해두면서 다음으로 넘어가자면, 일본의 2세대 서브컬쳐 비평가 아즈마 히로키는 현대 일본 사회의 모에가 데이터베이스 소비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쉽게 말해, 모에라는 것이 전체의 부분을 사랑하지만 전체를 사모하지는 않는다는 점, 이것이 바로 파편화된 이미지의 산물, 데이터베이스로 지정된 이미지-도서관의 교집합을 찾아내는 퍼즐 게임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서브 컬쳐의 향유자들은 데이터가 아닌 데이터베이스, 수많은 데이터로 이루어낸 하나의 데이터베이스를 보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데이터를 찾아내는 것에 흥미를 느낀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지를 소비하는 하나의 방법론이다. 이미지 전체가 아니라 이미지의 일부를 통해 이미지 전체에 접근하고, 그곳에서도 본래의 흥미를 잃지 않는 초심이다. 이는 단순히 일본 애니메이션뿐만이 아니라 영화로도 퍼져 나가면서, 캡틴 아메리카 역할을 맡은 크리스 에반스가 다른 영화에 나올 때 그의 늠름한 캡틴 아메리카 모습이 떠오른다면서 그 영화를 관람하는 풍토가 생겨났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이것이 배우가 아니라, 배우의 이미지를 소비한다는 것이다. 이를 할리우드 시대의 스타 시스템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지금 이미지 시대의 데이터 시스템을 소비한다고 보는 게 맞다. 그것은 데이터뱅크이며, 총체이자 부분이다.
국가가 걸어온 길을 조명하는 스포트라이트
그런데 일본의 3세대 서브컬쳐 비평가인 우노 쓰네히로는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는 지금 데이터베이스가 아니라, 데이터베이스를 소비하는 자신을 소비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데이터베이스를 사용해 자신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믿는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맥락을 가지고 와서, 그것이 함유된 특정 이야기를 진실이라고 믿는 가짜뉴스와 맥락이 닿는다. 우노 쓰네히로는 서브 컬쳐의 방법론을 들고 와 그렇게 현대 사회를 말한다. 허나 우리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그런 이미지를 선호하는 방법에 대해 말해볼 수 있다. 위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영화가 세계를 조각낸 것임을 알기에, 그것을 데이터베이스화해서 데이터로서 소비한다. 이 과정에서 장르는 파편화되고, 기호적 혼종성을 띄게 된다. 즉 현대 영화를 하나의 장르로 재단하는 건 거의 무의미한 일이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다 아는 말이지만, 이 말을 이렇게 바꾸어 쓰면 다르게 들린다. 현대 영화를 하나의 이미지로 재단하는 건 거의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이다. 영화가 제공하는 하나의 이미지라는 것은 거의 옛말이 되었고, 따라서 현대 영화의 어떤 경향은 그것들을 하나로 잇는 믹싱 작업이다. 이것은 마치 프리즘과도 같아서, 어떤 시선을 투입해도 다양한 칼라가 나올 것이고, 그렇게 들여다보기를 시도하면 영화는 자신을 내보이기를 거부할 것이며, 물음을 던지면 질문이 부서져 돌아올 것이다. 영화에 질문을 던지지 말라는 말은 그런 맥락에서 흘러나온 답변이다. 우리가 영화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들은 더는 우리의 사실을 확증하지 못한다. 영화로 투입한 사실이 분해되므로 그들이 우리에게 돌려줄 수 있는 것 또한 없다. 그곳엔 단지 현상으로서의 이미지만이 잘게 남아있을 뿐이다. 손을 뻗으면 아스라이 부서지고, 눈을 감으면 찰나의 풍경이 달라지는 빛의 산란만이 존재할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영화가 제공하는 전환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영화의 중반부에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시작되는 2D에서 3D로의 전환은 일체의 예고 없이 시행된다. 이 시행은 인물이 영화관에 들어가 안경을 쓰는 순간, 요컨대 영화가 메타 영화로 진입하는 지점이면서도 관객에게 안경을 써달라고 지정하는 명령어이기도 하다. 이것을 두고 영화가 체험의 영역으로 진입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 이전에 2D와 3D에 관한 차이를 지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2D와 3D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이미지가 적층된다는 점이다. 2D에서 이미지를 배치하는 것은 하나의 층계에 여러 이미지를 조합하는 과정이지만, 3D에서 이미지를 배치하는 것은 그런 층계를 무수히 반복하면서 다양한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영화는 그런 가능성의 급격한 변화, 급류를 우리에게 제안하고 있는 셈이다.
또는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다. 2D는 스크린이고 3D는 현실이다. 그 이미지는 스크린에서 현실로 이동하고 있다. 하지만 분명 그것들은 거쳐 가는 과정에서 분해와 조립을 반복하고, 그 때문에 필연적으로 손상이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지를 데이터베이스화해서 우리가 보고 듣고 원하는 사실만을 취사선택한다. 이것은 DIY (Do It Your Self) 과정이며, 당신이 조합하는 이미지가 곧 총체이자 부분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이미지의 평면에서 우리가 벗어나는 방법은, 모서리의 끝을 뚫고 나가는 게 아니라 그 위로 복층을 쌓아올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건축 과정이 일종의 믿음으로 변질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복층 이미지는 곧 그곳으로 우리가 자라나게 하는 것, 뚫고 들어가는 체험의 영역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바로 그런 느낌,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화가 떠오른다는 사람이 많았다. 또는 주인공이 어두운 오르막길을 올라가는 장면에서는, 중국의 여러 영화가 스쳐 지나가는 듯 보였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리고 그것들은 분명 하나의 이미지이다. 중국이라는 하나의 국가가 걸어온 길을 조명하는, 어둠 속에서 비춰지는 한 곳의 스포트라이트이다. 허나 그런 이미지가 곧 하나의 중국으로 수렴되지는 않는다. 그곳에서는 중국의 세기가 있고, 징후가 있으며, 비간 감독은 그것들은 이미지가 아닌 데이터베이스로서 당신이 원하는 지점을 골라보라며 3D의 풍경 안으로 초대한 것뿐이다.
그러나 착각하지 마시라. 이곳에는 선택이 있을 뿐 주장은 없다. 비간은 그가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존재론적인 물음은 지난 세기에 끝났다. 마찬가지로 영화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물음도 끝났다. 우리는 사실과 진실을 구분하는 문제가 아니라, 사실을 토대로 진실을 만들어내는 자신에게 물음을 던지는 사회를 살고 있다. 당신의 선택은 옳았는가? 또는 당신이 목격한 여인은 정말로 아내였는가? 그 남자와 우리의 공통점은 영원 속에 존재하는 여러 이미지를 소환하고, 목격하고, 체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영화에 개입하는지, 만들어가는지를 묻는 게 아니라, 어떻게 영화를 체험할 것인지에 관한 자문을 구해야 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지구 최후의 밤, 그리고 그곳에서의 긴 여로를 우리는 지나쳐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