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2019)
1.
동의하지 않을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시야란 여성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으로 나뉜다. 성별에 따라 세상을 다르게 본다는 게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두 가지 관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칼 융이 말했듯이 남자에게도 여성성이 있고 여자에게도 남성성이 있는데, 이것을 원점으로 돌아가 생각해보면 인간이라는 존재에는 성별이 없지만 그 안의 성질은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룬다는 뜻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남성적 시야와 여성적 시야는 우리가 A와 B라는 두 가지 성질을 두고서 그것이 자주 발견되는 표본의 이름을 붙인 것일 뿐, 우리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이 되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이것은 성을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이 될 수 있다. 인간이라는 개체를 무엇으로 볼 것인지에 관하여 성별이 그 기준에 포함될 수가 없다는 뜻이다. 나는 어쩌면 성별이라는 게 인간 자신에게 주어진 두 가지 특성을 ‘편히’ 분류하기 위해 지칭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예컨대 성별이라는 건, 인간의 피부색처럼 인간이라는 개체에 따라붙은 선택적 요소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마치 게임에서처럼 종족과 직업에 따라 능력이 달라질 뿐, 피부색이나 성별에 따라 무언가 차등이 있지 않다는 점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인간 본원으로의 회귀적 논리이다. 즉, 우리를 플레이하는 건 당신이라는 플레이어일 뿐, 이 신체 자체가 당신이라는 존재 자체를 대변하는 건 아니다. 이 신체는 단지 현실 세계에서 서로를 구분 짓게 하는 물리적 그릇일 뿐이고, 반대로 말하면 신체를 얼마든지 자유롭게 연성할 수 있는 네트워크 안에서 우리는 본연의 가치를 찾는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니 여성성과 남성성의 가운데 지점을 두고서 중성이라 칭하는 건 옳지 못하다. 여성성과 남성성이라는 단어가 사회적 관습이 아니라 신체적이거나 성격적인 특성이라고 생각할 때, 그 양측의 특성이 한자리에 모여 중화된다면 그건 인간 본연으로 돌아간 것이지 그 두 가지 섞인 무언가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중성이라는 단어는 관습과 맥락이 만들어낸 후천적인 성별을 구분할 때만 사용될 뿐,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물음을 던질 때는 있을 수가 없는 말이다. 그렇다면 위에서 말한 여성적 시야와 남성적 시야는 무엇일까. 이 또한 성별에 관한 도식화라는 비판을 피해갈 수는 없겠지만, 그동안 써왔던 연역법이 아니라 귀납추론법으로 접근해보는 시도가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동안 연역법이 만들어낸 성에 관한 생각이 우리 사회의 제도와 규율을 만들어내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여자이고 남자이기에 무엇을 해야 한다’는 성별 위주의 귀납추론법이 그동안의 제도와 규율을 떠받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의 여정은 A를 파훼하기 위해 A를 사용하면서, 그 해체의 결과물을 다시 B로 번안하는 작업을 거칠 것이다.
2.
김보라의 <벌새>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이것이 한국영화에서 여성영화로서의 위치를 점할 수 있는지였다. 여성영화인 것에 의구심이 들었다는 게 아니라, 그 주변을 감싼 위화감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사항이다. 영화는 은희(박지후)가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는, 그 입구에 어머니를 배치함으로써 이곳을 어머니의 자궁으로 만든다. 은희는 문을 열어주지 않는 어머니(이 시간이면 아버지는 가게에 있을 테니)에게 불안감을 느끼는데, 이 모습이 부모에게 거절당한 자녀의 두려움을 외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으면서도, 집이라는 공간이 그렇게 포근하지는 않아도 반드시 돌아가야만 하는 삶의 종착지로 제시되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은희에게 집이라는 공간 자체는 ‘자신을 왜 낳았느냐고’ 물을 때 ‘태어나야만 했다’ 또는 ‘태어나기는 했지만’이라는 타의에 의한 존재를 자꾸만 확인시킨다. 그런 이유로 이 자궁은, 은희의 고향이지만 자신을 밀어내는 장소가 되고 그래서 은희는 자신의 방 안으로만 계속해서 기어들어가게 된다. (이에 대해 이주현은 『온화한 슬픔이 차오른다』라는 글에서 “세상은 인력과 척력을 따른다.”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나의 대답은 그것은 근사한 말이지만 세상을 이루는 힘 중에 중력이 빠져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 안에는 가부장제를 대변하는 아버지(정인기)가 있다. 그리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사건건 무시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얼마 가지 않아 그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사실을 알고도 묵인해버린다. 왜 묵인하는지는 자세히 나오지 않고, 그로 인한 갈등도 단 하나의 쇼트로만 처리된다. 그러니까 영화가 집에 대해 말하려는 것은, 어머니의 자궁 안은 포근하지만 그 안에서 모든 것이 무화되거나 용납되고 있다는 식의 차가운 포옹이다. 이때 혹자는 자궁 안에서부터 가부장제의 불합리함을 겪는 여중생 은희의 모습에 대해 쓰겠지만, 내 생각에 이것은 자궁 이전에 내려받는 기성세대로부터의 압박에 관한 이야기다. 왜냐하면 영화는 후반으로 가면서 은희의 한문 선생님(김새벽)의 운동권 출신 사실을 암시하거나, 88올림픽을 겪으며 부유해졌고 민주화에도 성공했지만 사실은 여전히 과거에 머무를 뿐인 것들의 대표로 성수대교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 영화가 가부장제와 그 안의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여성영화가 아닌 이유는, 여성이라는 존재가 아니라 94년도의 중학교 2학년생이라는 인간 존재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러니 이를 두고 허우샤오셴의 초기작처럼 보인다는 혹자의 평은, 막연하게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 맥락을 따라가면 이해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허우샤오셴의 초기작 중에 아이를 주인공으로 한 <고향의 푸른 잔디>, <펑꾸이에서 온 소년>, <동동의 여름방학>, <동년왕사> 같은 작품을 보면 이것이 무언가 거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신기하게도 그 안을 살아가는 작은 세계에서 배후의 거시적인 것들이 우리 눈에 감지된다는 점이 무척이나 신기하게 느껴진다. 이는 우리 기준으로 보면 왜곡된 세계에서 살아가는 설정적 주체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통용되는 세계가 거기가 아닌 이곳에 있었다는 과거완료 형태의 선언이다. 그러니까 맥락적으로 이해하자면, 지구가 아니라 우주 어딘가에 불시착한 <혹성탈출>의 내러티브가 어느 순간 갑자기 ‘이곳이 미래의 지구였다는 사실을 밝힐 때’ 우리가 받는 충격이다. 그리고 이 선언에 대해 우리가 해볼 수 있는 생각은, 우리가 사는 현실은 현재로부터 조금만 떨어져도 굉장히 이질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숱한 로드무비가 자아내는 풍경이 어딘가 고독한 장소로 주인공을 늘 데려다 놓는 이유이다. 말하자면 로드무비의 주인공은 자동차를 탄 사람이 아니라 그 주변의 다가오는 풍경들이다.
그 주변의 다가오는 풍경을 보며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는 동시에 그들이 우리를 덮쳐오기에 양측의 운동 이미지는 상쇄된다. 작용이 있다면 반작용이 있기에 그 중간의 에너지는 0에 수렴한다. 그래서 우리가 현재에서 현실을 체험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현실 부정이 되거나 혹은 그런 당연함을 이겨냈다는 극복의 성과이다. 예컨대 이는 지구의 중력 아래를 살아가는 온 지구 상의 생명체가 중력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정작 지구 밖으로 나가려 우주왕복선을 쏘아 올렸을 때는 그것을 심각하게 체험한다는 점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지구 밖으로 나가고 나면 우리 지구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크거나 아름답다. 말하자면 우리를 지배하는 중력이라는 것, 우리를 덮쳐오는 풍경이 존재하는 현재를 벗어나고 나면 비로소 그 이질성에 대해 논할 수 있게 된다. 같은 이유로 역사는 동시대가 아니라 충분히 시간이 흐르고 난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야 현재를 논할 수가 있다.
그러니 내가 이 영화에서 느낀 위화감은, 영화가 제작되는 시점에서 1994년의 모습을 돌아보는 형태를 취하기 때문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성찰적인 태도가 과거를 반면교사 삼아 탈가부장제가 이루어지는 현재를 발전시키려는 시도가 될 수는 있겠지만, 이 영화는 고작 그것만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릇이 크다는 소리다. 그러니까 사실 이 영화에서 카메라가 취하는 시점은 미래의 누군가가 과거를 헤집어 놓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느낌은 터미네이터가 과거로 돌아갔다는 식의 유머가 아니라, 현재의 자신이 과거의 내가 있던 기억을 들여다보는데, 영화가 보여주는 건 그 기억 속 주체였던 나의 시점으로 기억을 들여다보는 미래의 나를 나지막이 암시하는 것이다. 예컨대 이 영화는 나의 마음에 담긴 기억이라는 하나의 혹으로서, 필름의 표면을 그것의 보호낭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니 누군가는 이를 두고 코스믹 호러라고 표현할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는 존재가 나의 외부에서 나를 관찰하고 있다니? 이것은 마치 바닥을 기어가는 개미에게 자신을 관찰하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인지되지 않는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이를 두고서 ‘사후적으로 관찰되어 현재로부터 쓰이는 기억의 생환’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보았을 때 선뜻 이해하기 힘든 개념이지만 영화가 그걸 가능케 한다. 이 이상한 모습에 대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영화라는 매체가 우리의 기억을 새로 쓰는 방식일 테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중학교 2학년 은희이지만, 그녀의 주변에는 늘 그녀가 감당할 수 없는 사건들이 사사건건 닥쳐온다. 어쩌면 죽음이 늘 우리 곁을 맴도는 것처럼 그 사건들이 인격의 형태로 은희에게 다가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예컨대 은희는 우리가 걸어온 길이 구현된 과거의 어느 한 지점에서 ‘그들’로부터 신탁을 받는 셈이다. 하지만 그리스의 영웅이 그러하듯 이 신탁은 영웅에게는 버겁거나 번거로운 일이다. 그럼에도 기묘한 보조가 따라붙으면서 영웅은 아슬아슬한 차이로 임무를 완수하고는 성장을 위한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그러니까 사실 우리 입장에서 그는 이미 완성된 지점에 도착해 있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세상천지가 왠지 모르게 나에게만 덮쳐 오는 듯한 느낌일 테다. (영지 선생님의 한 마디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는, 이러한 현상에 대한 부정적 맥락을 꼬아 긍정적으로 번안한 것이다. 이것이 성장통인지 아니면 재난의 연속인지는 생각하는 사람에 따라 다를 테다.)
이쯤 되니 이것은, 과거에는 원인이 규명되지 않고 결과만이 남아있다가 미래가 되어서야 비로소 관찰과 증명을 통해 원리가 규명된 어느 사건이나 현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를테면 중력은 분명 존재하는 사실이었지만 그게 중력이라는 것을 몰랐기에 우리는 사과가 떨어지는 이유를 증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가 보기에 사과의 추락은 지극히 당연한 것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은희를 덮쳐오는 여러 사건은 당시에는 원인을 규명할 수 없는 이상하고 신비로운 것들이지만, 시간이 흘러 그게 과거가 되고 나면 지극히 그럴 만한 충분한 일로 바뀌어 버린다. 성수대교 붕괴는 올림픽을 치를 정도로 부유해진 우리나라로서는 있을 수가 없던 일이지만, 이제야 우리는 그게 무리한 능력을 끌어다 썼기에 벌어진 재앙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은희에게 찾아온 두 개의 사랑, 이성애와 동성애라는 두 가지는 운명 같은 만남이었겠지만 사실은 학창시절에 있을 만한 여러 우연 중 하나에 불과했을 뿐이다. 이때 혹자는 여중과 여고라는 특수한 환경에서는 여성이 여성에게 반하는 ‘듯한’ 감정이 들 수 있다는 말로 동성애를 설명하려 들지만, 그것과 무관하게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은희가 겪은 두 가지 연애는 원인으로부터 출발하는 연역법이 아니라 ‘헤어졌음’이라는 결과로부터 출발하는 귀납추론법이라는 것이다.
누군가와 헤어지고 나면 우리는 ‘무엇이 좋았는가’가 아니라 ‘무엇 때문에 헤어졌는지’를 먼저 따지게 된다. 말하자면 관계에 대한 기억은 그 시작이 아니라 끝에서부터 전체를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흔히들 헤어졌던 이를 다시 만날 때는 과거의 연장선이 아니라 새로운 기억으로 새 출발을 하라고 말하고들 한다. 따라서 우리는 첫 만남으로부터 이별까지를 운명 같은 만남, 기적의 연속이라는 식의 연역법으로 해석하지만. 반대로 헤어진 후로 그것을 거슬러 가는 과정은 그 모든 사실이 그저 공식에 불과했다는 생각으로 새로 쓰는 당신의 기억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어쩌면 이것이 은희의 한문 선생님인 영지가 운동권으로 설정된 이유일 것 같다. 왜냐하면 운동권이라는 게 거의 과거의 유물처럼 되어버린 현시점에서, 정작 당시에 운동하던 이들은 그들의 과거가 필히 그렇게 흘러갔어야만 했다고 믿으며 울거나 혹은 웃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실 당시에 눈에 보이는 것들을 하나씩 밟아가며 운동의 선봉에 선 이들이,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는 과거의 것들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쓰면서 우리의 성공/실패는 예견되어있었다는 식의 귀납추론법이 되어버리는 걸 지금의 20대는 용서하지 못한다.
물론 이런 모습 자체는 어느 나라에나 비슷한 형태와 성질로 있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가 없다. 대표적인 게 68년도의 파리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것이 우리나라의 일이라는 점에서, 그것이 민주화 운동과 경제화 과정에서 내쳐진 운동들의 반작용이라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폭발적으로 발전해가는 시기에는 그만큼 뒤로 향하는 것들이 점점 더 가속하고 있는데, 그 속에서 우리는 그에 마땅한 힘으로 달려가다가 어느 순간 느려지는 세상에 적응을 못 하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야 만다. 이 시기가 <벌새>의 배경인 한국의 90년대다. 그리고 그 끝은 20세기의 마지막이자 신한국의 종말이 될 것만 같았던 IMF라는 짙은 그림자이다. 이 영화를 보는 당신은 은희가 머지않은 미래에 IMF라는 무지막지한 일을 겪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을 테고, 그것은 영화의 결말에 다다를수록 은희가 재앙에 다가간다는 느낌을 주면서 끝나지 않을 94년도의 10월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여기서 나아갈수록 우리는 삼풍백화점 붕괴와 대구 지하철 참사를 목격하게 될 것이지만, 그것들은 모두 시련이 아니라 비극에 불과할 뿐, 그래서 우리는 결코 영웅이 아니며 은희 또한 평범한 어느 한 개인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의 당신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여성영화가 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것을 두고 여성영화라고 칭할 수는 있지만, 단지 그것으로만 부르기에는 너무 아깝다. 이 영화는 여중생 은희의 이야기이자 가부장제 아래에서 신음하는 여성들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이상하게도 여기서 ‘여자’라는 성별을 제하고 ‘인간’이라는 보편적인 단어를 넣어보면 그것 ‘또한’ 신묘하게 들어맞는다. 예를 들면 이것은 A라는 사람의 이야기이자 90년대 한국 어중간한 민주화와 경제발전 그 사이 어딘가를 떠도는 IMF 시대의 실업자들, 더 나아가면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면서 과연 무엇을 위해 운동해야 하느냐는 식의 ‘사상적 실업’이 발생한, 84년도와 88년도로부터 떠나와 그 모든 존재의 의미를 잃은 신한국이 붕괴하는 모습을 목격하는 시기의 사람들이 이곳에 있다. 과거에 청소년이 머물던 콜라텍은 현재의 우리에게 중장년층이 춤추는 장소로 바뀌어 있고, 은희가 지나가면서 본 건설 현장에는 대금 처리가 다 되지 않아 유치권 행사가 한창이지만 어느 순간 현수막이 찢겨 있다. 이 모든 것은 세계가 변화한다는 것에 대한 증거 혹은 전주곡이지만, 노래가 끝나고 나면 그것들은 그곳에 있어야 할 것들이 아니라 그냥 있었던 존재로 탈바꿈해버린다. 이 잔인한 기억의 미화 과정을 두고 누군가는 추억이라는 문자를 써 붙이지만, 그것은 다 지나고 나야 겨우 추억이 될 뿐 현재에는 왜 하필 나에게 생긴 일인지를 알 수 없는 것에 불과하며, 그런 미지가 동경이나 두려움을 불러일으킬지언정 이곳에서 멈출 수만은 없다는 게 기정사실로 남겨진다. 말 그대로, 나만 빼고 모든 게 변화한다. 그 속에서 나는 아직도 1994년에 있는데 세상은 2019년인 웃지 못할 이야기가 들려오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2019년의 우리는 1994년의 육체로 그곳에 남겨졌다. 하지만 우리가 그곳에 간 게 아니라 정신만이 과거로 이동한 것이다.
우리의 정신은 현재에서 과거로 이동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알던 모든 중간 과정이 혼합되어 과거에 현신한다. 그러니 이를 두고 정말로 있었던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은희가 알던 연애의 모든 것, 상대에 대한 모든 감정은 정말로 있었던 일인지를 부정당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성수대교 붕괴의 원인이 정말로 있었던 것인지에 대한 불안감을 엿본다. 이 사건은 결과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 원인, 그러니까 책임의 소재가 붕 떠버린 이상한 사건들의 연속이 은희에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과 연결된다. 그 속에서 은희에게서 주로 목격되는 이미지는 트램펄린 위에서 위와 아래만이 연결되고 중간은 생략되는 이상한 쇼트, 콜라텍에서 정신없이 몸을 흔드는 좌우 허나 중간은 없는 운동 이미지, 여기에 결말 부분에서 은희는 감독으로부터 오징어처럼 흐느적거리라는 주문을 받는다. 그런데 그 와중에 영화는 이것이 현재진행형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에서 과거를 들여다본 사후적인 구성체라는 점을 말해주기 위해서 은희 부모님이 부부싸움 중에 깨뜨린 삿갓등 조각을 거실 바닥에 위치시킨다. 이것은 기억의 파편처럼 작용해 언제 박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와보니 그때 박혀있었다는 식의 ‘상처의 뒤늦은 발견’을 은희에게 전달한다. 과연, 그때부터였구나 하고 은희는 생각하며 우리 또한 추억의 시작점이 그때였음을 실감하게 된다. 하지만 은희라는 신체를 조종하는 건 우리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여성영화가 아니라 여성 캐릭터를 조종하는 우리라는 플레이어의 추억 탐사기이다. 당신이 무슨 성별인지와 어느 나잇대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감독이 구축한 이 기억의 세계 안에서 은희라는 플레이어로 세계를 탐험한다는 점에 있다. 아마도 이는 감독 본인이 말하듯이 내 것이지만 내 것이 아니기도 한 논픽션의 세계라는 점이 가장 큰 요인인 것 같다. 어디까지가 픽션이고 논픽션인지의 경계는 불분명하지만, 이것이 이미 영화라는 점에서 그런 가정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는 영화 속의 은희에게 막연한 위로를 주었다가 사망에 이르는 영지 선생님이 감독 본인의 오너 캐릭터라는 점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예컨대 그는 은희와 영지라는 두 가지 형태로 자신을 주고받으면서 1994년이라는 시기에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글의 도입부로 돌아가서 우리는 ‘태어나야만 했다’ 또는 ‘태어나기는 했지만’라는 두 가지 양상에 대해 말해야 한다. 타의에 의해 존재를 확인받는 공간에서 집이라는 자궁이 영화라는 자궁, 그 기억을 잉태한 특정 시기의 10개월이라고 말할 수만 있다면, 은희는 ‘태어났다’는 선방향의 운동과 영지는 ‘태어나기는 했다’라는 역방향의 운동을 담당하는 게 된다. 임신 당시에 사람들은 잉태의 신비함이 그리 높은 확률이 아니라는 점에서 기쁘든 슬프든 간에 그것을 운명으로 간주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서 그 탄생을 돌아보면 왠지 모르게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자식만이 떠오를 뿐 그와 나의 태초의 만남(Mating)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영화가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뱃속에 아이가 있는 동안에는 양측의 시간이 한자리에 모여 중화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가 품은 10개월간의 기억은 가히 잉태라고 부를 만하며, 그래서 제로로 돌아가는 것이자 기억 그 자체로만 파악될 수 있도록 제공되는 중립지대인 셈이다.
그러니 나는 이 영화가 여성의 시선으로 쓰인 94년도라는 말은, 어딘지 모르게 탐탁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시선이 몹시 흥미롭고 시의적절한 선택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여성 은희가 아니라 14세의 어느 인간이 그곳에 있었다고 생각하면 이 텍스트는 더욱 긴밀하게 다가온다. 예컨대 인간을 논할 때 성별과 외모와 지위를 제하고 그 본연의 성격과 주변의 환경을 들여다볼 때, 중심부의 이야기는 더욱 빛이 난다. <벌새>는 여성의 이름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성별을 지닌 한 인간이 여성적인 시선으로 인간의 이야기를 하는 영화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남성이라는 성별로 바꾸어 놓고 보아도 거의 비슷하게 성립한다. 만약 그 경우에는 차이점이라면 여성인 은희에게 여성 친구들이 많았다는 것처럼, 남성인 은희에게 남성 친구들이 많았다는 것뿐 그 안에서 은희가 하는 선택은 인간 은희의 것이었지 여성 은희의 것이 아니었을 테다. 마찬가지로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과 대구 지하철 참사와 IMF로 이어지는 일련의 붕괴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불특정 다수의 인간 존재를 세상에서 지워버렸다. 그러니 은희의 스승인 영지가 그 시간 그곳에 있었던 것은 결국에는 우연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여성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이야기이기에 국적과 나이와 성별을 초월하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 나는 이 모습이 한국에서 여성영화라는 이름으로 우리 앞에 도착했(을 수도 있)다는 점이 새롭다. 단지 여성이기에 여성의 모습을 찍는다면 그것은 영화이기보다는 여성영화라는 꼬리가 더 강하게 드러나지만, 인간 존재가 여성인 자신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한 영화인 <벌새>는 무엇보다 귀중한 우리 시대의 여성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