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있었다

<우리집>(2019)

by 수차미
d0014374_5d2c3cac5170d.jpg 영화 <우리집>의 작품 포스터 © 롯데엔터테인먼트


로컬 시네마와 지역성의 영화들


윤가은의 두 번째 장편영화인 <우리집>은 작품의 내적인 흥미보다 외적인 흥미가 더 동하는 작품이다. 이는 전작인 <우리들>이 워낙 히트했기도 하지만, 그녀가 국내에서 아직 대명사가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의 세계에 먼저 진입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서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녀를 보며 옆 나라의 가족영화 장인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는 지리학적으로나 영화적으로나 우리에게 가장 가깝다. 물론 그 둘은 전혀 다른 출발선에 있으므로 이것이 불합리한 비교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을 다른 측면에서 보면 어딘가 마음이 짠해지는 부분이 있다. 그 말인즉슨 우리가 그러한 영웅의 도래를 기다려왔다는 것이다. 즉, 어른인 우리는 아직 오지 않은 아이들의 세계를 기다려 왔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약 이 가설이 맞는다면, 우리는 히어로 영화에서 현실정치를 떠올리듯이 아이들의 모습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싶어 했을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어른인 우리가 아이들의 세계를 찍는다는 시도가 과연 성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 두 번째는 우리가 아이들이라는 단어에 ‘우리도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말로 이미 ‘타자가 되어버린 나의 과거’에 견주어 그들을 바라보게 되는 ‘타자화의 문제’이다. 그러니까 사실 이 두 가지 문제는 어느 하나로 구분되는 게 아니라 서로 면밀히 어울린다. 생각해보건대 여성영화를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 찍었을 때 그것을 두고 여성 영화라고 할 수 있는지 논란이 분분한 이 시점에서, 또는 흑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를 흑인 감독 (<문라이트>와 <겟 아웃>이나 <블랙 팬서>와 같은)이 찍었다는 점에 가산점을 부여한 아카데미 시상식처럼, 아무래도 타자의 이야기를 하려면 타자가 그것을 찍어야 보다 더 설득력 (이라는 이름의 진정성을 우리는 요구한다)이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이것이 PC (정치적 올바름)적인 요소로 비추어지기만 할 게 아니라, 근원으로 흘러가면 위에서 언급한 ‘광범위한 맥락에서의 타자’ 문제로 확장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때 나는 이 대목에서 영화제와 영화들이 갖는 영화의 ‘지역성’에 관해 언급해두고 싶다. 소위 ‘로컬 시네마’라고 불리는 특정 장소에서 찍은 어떤 영화들을 두고서, 감독의 정체성이나 혹은 해당 장소를 ‘홍보’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우리는 말하곤 하는데, 그것은 부산국제영화제나 칸영화제나 무주산골영화제처럼 영화제가 열리는 지역의 부흥을 위한 수단이면서도, 영화의 열린 공간에 명확한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그들을 우리 곁에 살아가는 ‘이웃’으로 만들기도 한다. 요컨대 불특정 다수에게 어필하기 위해 그곳의 이름과 시간을 지우려는 시도가 보통의 영화에서 시도된다면, 반대로 로컬 시네마에서는 바로 이곳을 찾아와달라며 주소와 주민등록번호를 부여하고 그들이 이곳에 오기를 고대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로컬 시네마라는 공간의 성격에는 ‘해당 공간에 사는 누군가’가 있다는 점이 전제되어있고, 그 누군가가 우리의 곁에 있는 ‘이웃’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그게 바로 타자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로컬 시네마라는 것은 영화가 기본적으로 누군가의 이야기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맥락은 같지만, 그것이 허구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점에서는 ‘그럴듯한 가짜’를 표방하는 일반 영화와는 결이 다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우리가 생각해둘 수 있는 생각의 지점은, 자신의 기억을 담은 영화를 찍는다고 할 때 그것이 과연 ‘그럴듯한 가짜’인지 아니면 ‘나라는 이름의 이웃’인지를 명확히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우리가 ‘떠올리는’ 우리의 어린 시절은, 우리가 현시점에서 기억을 통해 사후적으로 구성한 시공간이고 그래서 그것의 진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다시금 다카포. 위의 문단으로 돌아가서 우리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말을 선언지로 외쳐두면서 <우리집>을 보게 된다면, 그것은 그저 우리의 현 상황을 보여주는 것에 그쳐버린다. 이는 아이들이 어른에 종속된 채로 살아가기에 어른의 이야기가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요컨대 나는 히어로 영화에서 외양을 제거하고 나면 그들의 모습이 살아있는 시대적 기호로 변환되듯이, 타자의 영화에서 외양을 제거하고 나면 불특정한 전체 세계 안에서 특정한 지역성으로만 살아갈 수 있는 ‘우리’의 모습이 기호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가정을 위에서 말했던 거대 공식 안에 대입해보려 한다. 그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세상을 하나의 인격으로 생각해볼 때, 그 안을 살아가는 여러 모습의 우리가 그 인격을 구성하는 다양한 성격 중 하나가 된다면, 세상을 기반으로 하는 영화가 우리의 모습을 묘사할 때 그것이 우리를 조명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가정에 근거하면서 우리의 모습을 ‘묘사’할 뿐인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식을 세상이 아닌 우리의 시점으로 변환하면 다음처럼 된다. 분명 이 세상을 이루는 건 우리와 같은 무언가이지만 우리가 그걸 명확하게 알 수는 없다. 우리는 그저 막연하게 ‘세상은 사람들과 어울려서 사는 것’이라고 말하고는 하는데, 어떤 사람이 있는지를 모르니 당장 우리 주변에 있는 것만을 보고 들을 뿐이다. 그러니 여기서 도출되는 생각은 일부를 보고 상상한 거대한 세상, 중세 시대 사람들이 우주를 보면서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했던 식의 편협함이 도드라지게 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소위 말하는 로컬 시네마가 특정하는 시공간을 두고서 그들을 편협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이를 두고 편협하다는 말을 쓰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로컬 시네마의 기본은 그런 편협함을 전제로 바로 이곳에 타인을 끌어들이려 한다는 점에서 편협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이것이 PC라고 불리는 타자 문제를 말하는 영화와 로컬 시네마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타자 문제를 말하는 일부 영화의 착각은 이것이 세상 전부라고 말한다는 점에 있다. 그들은 자신이 사는 세상이 전부라고 말하면서 그 자체로 하나의 울타리를 둘러놓고는, 그것을 영화의 외양으로 사용한다. 이렇게 둘린 울타리를 통해 그들의 세계가 우리 세상으로부터 명확하게 독립되어 일종의 ‘구분됨’을 획득할 수는 있겠지만, 교류까지 차단하는 모습에서 우리가 그들에게 공감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전제된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쉽게 말해 타자를 말하는 영화들은 고독감을 그 안에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고독해, 그러니 너희는 나를 이해할 수 없을 거야.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를 위해줘야 해. 나는 그들의 처우에 공감할 수는 있어도 이러한 이기적인 태도까지 공감할 생각은 없다.


그러니 우리가 가와세 나오미와 같은 로컬 시네마의 진국들을 보면서 그러한 편협성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은, 단지 그들의 특정 지역에서만 찍었다는 이유만이 아니라, 그런 이기심을 인정하면서 ‘우리 동네는 잘났어. 다른 곳처럼 엄청 잘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좋아.’라는 식의 긍정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이로는 중국과 한국의 지역을 조망하는 장률을 떠올려볼 수도 있겠다. 생각해보건대 우리가 장률의 <군산>에서 목격한 것은 그곳이 옛 일제의 식량 수탈 창구였다는 부정적 언사가 아니라, 그저 아름다운 장소일 뿐이라는 헌사와 그런 이미지의 연성에 필요한 윤동주 시인의 이야기였었다. 결국 이러한 이야기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타인과의 대화에서 요구되는 예절이나 태도’로 환원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는데, 따라서 내가 한 말이 무조건 맞는 말도 아니고 어떤 이에게는 분노까지 자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단 하나의 사실은, 지역성이나 특정성이라는 말은 편협하다는 말로 쉽게 변형될 수 있다는 점이다.


지역성이나 특정성, 그 편협함에 관하여


우리의 논의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현실정치와 우리들의 모습을 재조명한다. 만약 세상을 하나의 영토에 비유할 수 있다면 우리의 세계는 그중 어디까지를 기반에 둘까. 말하자면 이러한 범주의 설정은 누구나 아는 개념이지만, 바로 그렇기에 암묵적인 합의에 의해서 제조되고 전시된다. 이렇게 쓰니 어려워 보이는데 사실은 누구나 겪는 삶의 딜레마 중 하나다. 예를 들면 친구의 정의는 무엇인가. 우리가 친구를 타인에게 소개할 때, 그가 내 삶의 어디까지 침범해있는지를 정확하게 지적하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일 테다. 그리고 이건 사랑의 척도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니, 인간사의 감정문제는 거진 이 범주 안에 모두 포함된다고 보아도 좋다. 누군가가 좋고 나쁜 것을 따져 물을 때 선을 딱 그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다른 분야로 전이되면 사안은 조금 심각해진다. 우리가 타인에게 무언가를 베풀 때 과연 어디를 기준에 두고 그들을 돕는 게 좋을까. 말하자면 이타심과 도덕심이 개입하게 되는 상한선은 어디일까. 이는 현대 사회에서 가족의 범주에 관한 문제이거나 혹은 그런 가족의 확장판인 난민 문제로 확장되기도 한다. 또는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이 양쪽 국가 중에 어느 나라의 정체성에 기반을 두는지, 혹은 이것이 학문으로 갈 때 어디까지가 물질이고 작용인지를 구분할 수 없는 뇌 심리과학과 같은 신학문적 경향을 따져볼 수도 있겠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모두 별개의 기준을 갖게 되고 그것들은 모두에게 면밀히 대응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편협해지고 그렇기에 그것은 이해될 수 있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이 우리의 기억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를테면 어제 눈을 감은 우리가 오늘 아침에 눈을 뜬 우리와 동일한 존재임을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 그 기억의 단절은 마치 컴퓨터의 전원을 넣는 것과 같아서 우리에게 기억의 불확실성을 유발한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와 별개로 어제의 시간선을 계속해서 살아가지만,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의 기억을 단순히 복사만 하여 이곳에 데려다 놓은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에 따르면 ‘오늘만 산다’는 말은 단순히 막장을 뜻하는 것뿐만이 아니다. 오늘만 산다는 말은, 우리라는 존재가 하루를 경계로 매번 새로이 분화한다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시간선은 우리라는 ‘개체’가 아닌 ‘기억’에 존재의 의미를 불어넣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즉, 존재라는 것은 우리 몸이 남긴 유산이 아니라 영혼에 기반을 둔다고 현대 사회는 말한다.


우리는 이 모습에서 많은 의견을 도출해낼 수 있다. 만약 이것을 유물론에서 현상학적 존재론으로 변화시킨다면, 우리는 가족은 피가 아니라 연대라고 말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을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가족이란 개념은 어디까지가 물질이고 작용인지의 문제가 아니라 기억의 문제가 될 테다. 그렇다면 이를 영화에 적용해 본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흥미로워진다. 만약 하나의 쇼트가 하나의 순간-기억에 대응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보며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떠올릴 수 있을 테다. 요컨대 이때의 영화는 매 순간을 분화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순간마다 다른 개체로 규정해야 마땅하다. 이를 두고 어제와 오늘의 말이 다르다며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결국 우리가 아직 형체를 목격하지 못했다는 점에 그 원인이 있을 테니, 따지고 보면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에 한계점이 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그 눈이 달린 우리의 신체가 더는 과거처럼 절대적인 신뢰의 기반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해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 신체에 우리가 지금껏 알던 여러 육체를 대입해보면 그 모든 것은 땅을 내디디고 일어나 허공의 여러 각도에서 육신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를테면 가족, 이 가족이라는 개념은 보통 혈연으로 맺어져 있는 것들을 뜻하지만 더 나아가서는 피보다 진한 우정 비슷한 무엇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위에서 말하는 편협함이라는 말을 순화하여 협소함이라는 말로 바꾸고, 그것을 우리를 신체에 가둔 유물론적 기반으로 바꾼다면 이 편협함은 로컬 시네마의 딜레마로 탈바꿈한다. 로컬 시네마라는 것을 ‘우리가 사는 고장’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면, 영화라는 매체가 불특정한 시공간으로 그곳을 만듦에 저항하는 게 바로 그 편협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윤가은의 <우리집>에서 눈여겨본 것들이 그러했다. 첫 번째로,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 알았지만 이 영화는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만들어졌다. 이는 영화 속에서 그만큼 장소가 ‘서울’이라는 점이 잘 도드라져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서울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찍었기에 서울시의 민관단체가 영화 촬영에 투자한 것일 테니 말이다. 물론 이는 독립 영화에 가까운 이 영화를 찍기 위한 투자를 끌어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습을 통해서 나는 윤가은의 영화가 지역성을 획득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르게 말하면 사실 이 영화에서 장소가 왜 서울인지에 대해서는 딱히 특별한 언급이 없는데, 그 말인즉슨 왜 이 어린이들을 보여주는지를 물어도 동일한 답변을 돌려줄 수 있는 게 된다. 어떤 시각으로 본다면 너무 익숙하거나 혹은 생소하기에 서울인지 몰랐을 그 배경에 대해서, 우리가 너무 익숙하거나 혹은 생소하기에 그 아이들이 주변에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을 수도 있을 테다.


여기서 집에 관한 언급을 빠뜨릴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영화에서 집은 두 가지 방향, 제의로서의 집과 신화로서의 집으로 설계되어 있는데 그 두 가지는 순환이라기보다는 일방향적이다. 제의가 신화를 거드는 것처럼 보이는 면이 있고, 예를 들어 작품 속에서 유미 유진 자매 (김시아 주예린)가 지으려 하는 가상의 집은 이사를 막기 위한 제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무엇보다 여기서 집을 지으려는 시도가 실제 집을 지켜내려는 것이기보다는, 그 집에서 함께한 순간들을 보존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가정은 위에서 말한 편협함이 아이들의 세계라는,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어떤 맥락에서의 ‘순수함’과 교체되는 과정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만약 이게 어른의 모습이었다면 또 달라 보였겠지만, 작품에서 하나(김나연)는 유미와의 갈등 과정에서 자기도 모르게 부모님이 싸우면서 했던 말을 되풀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게 말 그대로의 대물림, 일방향적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허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모습이 말 그대로 편협한데, 그게 또 아이라서 그렇다고 하기에는 그들의 행동이 너무 어른스럽다는 점이다.


이 일방성을 두고 폭력의 대물림 또는 아이들은 어른을 보고 배운다는 말을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이것은 기억의 문제가 될 수도 있을 듯하다. 이건 어른도 마찬가지이지만 누구든지 자신의 주거공간에 관한 기억은 각별하게 남는다. 그래서 오래 산 집에서 쉬이 떠나기 힘든 것인데, 만약 영화를 하나의 집으로 가정하면 그곳에 개체가 오래 머물수록 기억은 진해질 테다. 그러니 결국 이사를 자주 다니는 유미네 집은 기억이 머물지 않거나 머물기 힘든 장소이고, 이는 현대 사회가 인간관계를 이룰 수 있는 장소를 넓게 제공하지만 그만큼 가벼운 관계가 많이 생겼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영화에도 거의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이지만 이 글에서 그런 이야기는 너무 과한 것 같고, 방향을 돌려 가족의 개념이 넓어지고 있다는 쪽을 겨냥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여태까지 그래 왔듯이 피로 맺어져야만 비로소


이 영화에서 내가 신기하게 느낀 것은, 하나의 부모님이 그렇게 싸우면서도 하나에게는 유난히 친절하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부부싸움에서는 부부간의 갈등이 주가 되는 것이지 아이까지 싫어하게 될 이유는 없다. 너무 당연해서 말할 것도 없지만 상대에 대한 감정이 아이에게 투영되는 순간이 있다면 그건 아이에게서 내가 싫어하는 배우자의 모습이 보일 때일 텐데, 이는 결국 우리가 그만큼 신체의 물질성에 의존한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것을 또 다르게 말하면 다음처럼 번안될 수 있다. 우리가 특정한 공간에서 받은 인상이 있다면, 그 인상에 따라 전적으로 그 안 사람들의 인상 또한 결정된다고 말이다. 예컨대 어느 나라로의 첫 관문인 공항의 이미지가 중요한 건 그게 나라 전체의 인상이 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 집에 관한 기억의 문제는 공간의 구도로 논해지는 게 아니고, 자기 삶의 일부가 계속해서 변화하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벌어진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신체의 변화에 관한 어린아이의 거부’로도 볼 수 있다.


요컨대 이 영화에서 집이라는 순간과 신체에 얽힌 기억의 순간에 관한 이야기를 종합하면, 아마도 그것이 윤가은의 영화 두 편에서 여자아이들의 나이가 3학년과 5학년(<우리들>), 그리고 4학년(<우리집>)인 것에 대한 힌트가 되지 않을까 한다. 그러니까 나는 사실 이 영화가 이제 막 생리를 시작할 무렵의 여자아이들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 그것이야말로 어린 여자아이에게 찾아올 수 있는 가장 극적인 신체변화의 순간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바로 이 대목에서 윤가은의 영화는 여성영화로서의 의미가 있지만, 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에서 아이들이 바다를 찾아 떠나는 모습이 바다-달-달거리(생리)로 이어지는 일련의 여성적 궤도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윤가은이 이를 딱히 의도했겠다는 확신이 들지는 않지만, 이 일련의 모습에 관하여 우리는 달거리라는 신체 일부의 탈락이 신체에서 비롯된 기억의 탈락으로 이어진다고 가정해볼 수 있을 테다. 즉, 이것은 집에서 탈락되는 것에 대한 공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 탈락되는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그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음에도 그들이 암묵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쩌면 그것은 달거리라는 신체의 움직임이 내부에서 외부로의 일방적인 운동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단지 운동만을 본다면, 달거리라는 것은 투입된 게 없음에도 도출되는 결과는 있는 정말로 이상한 에너지이다. 그리고 이 문장의 변형, 아이들은 자신에게 닥친 상황이 왜 그러한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을 두고 어리다는 말 한마디로 갚아버릴 수는 있겠지만, 이유를 따져보면 그들에게 있어 이 불화는 ‘투입된 게 없음에도 도출되는 결과는 있는 정말로 이상한 상황’이다. 그러니 아이들이 어른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주변을 맴돌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다시금 글의 첫 문단으로 다카포, 내가 윤가은의 <우리집>을 보면서 느꼈던 인상 중에 하나는, 아이들의 편협함은 설득을 위한 자기주장이 아니라 그저 그들이 그런 신체-공간-집에 놓여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그러니 ‘아이들’이라는 인간의 어느 특정 시기, 그 로컬함에 관해서 우리는 타자로 놓여도 괜찮은 것이고 이는 그들을 억지로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그저 그렇게 바라만 본다는 게 긍정되는 시기임이 틀림없다.


아이들은 그런 식으로 어른이 되면 편협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그런데 어른이 된 우리가 느끼는 바는 어른이라고 해서 뭔가 다르지는 않다는 점이다. 어른의 생각도 단지 시야가 넓어졌을 뿐 편협하기는 어린아이와 비슷한데, 오히려 넓은 시야에서 좁은 생각만을 하게 된다는 점에서 어릴 때와는 다르게 핑계 댈 구석조차 사라진다. 아마도 이러한 부분이 이 영화를 보는 어른들에게 일종의 안식처로 생각될 것 같다. 어른이 되면, 혹은 어른이라는 사회적 진화의 마지막 자리에 올라서기 위해서는 어제의 나와는 다른 무언가를 오늘의 내가 보여 주어야만 한다, 고 우리는 자기 스스로를 강박한다. 그러나 아이들에게는 오직 지금 당장의 현실 문제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다.


허나 중요한 것은 어른이 이런 모습을 보이면 미래가 없는 사람이라고 잔뜩 욕을 들어먹을 것이라는 점이다. 어른은 미래를 꿈꾸며 살아야 한다, 고 사람들은 말하는데, 아이들은 애초에 미래 따위는 관심이 없고 오직 현재만으로도 의미 있는 존재이다. (이것이 미래를 위해 공부해야 한다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 이유이다) 그래서 세상의 중심에 선 아이들은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생각하지만, 그런 자신을 둘러싼 현상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이 어른과의 차이점이다. 어쩌면 이것이 영화 속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당연하지’라는 하나의 말을 설명해주기도 할 수도 있을듯하다. 사실 당연하다는 말은 자신의 맥락에서 파악한 것이기에 타인과의 대화에서 사용하면 안 되는 말인데, 이런 표현을 엄마나 유미와의 대화에서 사용한다는 것은 이 영화가 당연한 것들이 배신당하는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을 보여준다. 일상적으로 그래 왔기에 내 기준에서는 습관이거나 루틴이 되지만, 그런 차이를 마주하는 게 인간관계에서의 첫 만남인데 어느 순간 그게 익숙해져 버리면 가족의 당연함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것들은 너무 당연해서, 그렇게 행동하던 도중에 문득 이것이 우리의 과거에 비추어 구성한 ‘사후적으로 구성한 시공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매번 거처를 옮기는 유목민이 자신이 떠나온 곳을 기억하지 못하듯이, 매번 이사하는 유미에게 그곳은 자신의 집이 아니다. 그녀에게는 단지 사후적으로 구성된 시공간, 일단 우리가 이곳에 왔고 그렇기에 이곳이 우리의 집이라는 여태까지의 루틴에 의한 습관적인 기억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앞으로 나아가기보다는 그들이 떠나왔다고 짐작되는 부모님의 장소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모습은 가족의 개념이 여태까지 그래 왔듯이 피로 맺어져야만 비로소, 라는 대목으로 회귀하려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영화는 아이들을 성공적으로 찾아가게 하지 않는다. 단지 그들이 본래 찾아가려던 해변이 아닌, 해변이기는 한데 다른 장소로 내보내기만 할 뿐이다. 이전부터 집이라는 것, 공간과 신체에 관한 구도에 균열이 가던 그들의 관계에 언제 갈등이 터질까 하던 와중에, 윤가은은 해변을 리턴포인트로 삼는다. 이때 그들은 그곳에서 이제 막 진통을 시작하는 임산부가 떠난 자리에 남은 텐트를 발견하게 되고, 이전에 계란판으로 만든 ‘가짜 집’을 부수었던 아이들은 ‘유사 집’인 텐트를 거처로 삼아 과거를 가짜 가족으로 떠나보내고 ‘순간의 모음집’인 ‘현재’를 ‘유사 집’으로 삼게 된다. 나는 이 모습이 집-가족-공간-신체의 계열로 연대를 이루면서 그것들을 뒤로하며 아이들을 앞으로 보내는 윤가은의 희망적인 처사라고 생각했는데, 잘 생각해보면 이것은 이 시대 청춘의 행보와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SNS나 카카오톡과 같은 서비스에서 우리가 매 순간 남기는 시간의 흔적들은 기록으로 남는데, 그것들은 모두가 우리라는 사람이 썼다는 점을 확인시켜주면서도 동시에 ‘우리가 그러지 않았다’고도 말한다. 까놓고 말해 핸드폰을 훔쳐다가 메신저를 도용해도 우리는 화면 너머에 있는 사람이 우리 친구인지를 모른다. 단지 조금 전까지 대화했던 이가 내 친구라는 확신만으로 현재에서 과거를 사후적으로 구성한 것뿐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우리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다’고 말하는 다른 추억의 영화들이 내보이는 화법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니 나는 어쩌면 윤가은의 이번 영화가 단지 아이들의 세계에만 머무르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좀 웃긴 이야기지만 어른들이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반면교사로 삼는다는 게 아니다. 영화가 아이들의 모습을 설명하는 방법이라는 게 우연히도 이 시대 청춘의 모습과 닮아 있다는 것이다.


왠지 이 부분이 그녀가 존경하는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안녕하세요>에서 영향을 받은 듯하여 키노라이츠 측을 통해 질문했다. 그녀가 씨네 21에 쓴 글 중에 <안녕하세요>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는 게 있고, 국내에 발간된 오즈 야스지로 수기집에 추천서를 실기도 했으니 이 추측은 그리 나쁘지 않다고 본다. 아직 답변은 오지 않았지만 이 추측이 맞는다면, 그녀의 이번 영화를 비롯하여 앞으로의 ‘아이들’ 영화는 그런 식으로 진행되리라는 점을 예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투입된 게 없음에도 도출되는 결과는 있는 정말로 이상한 상황은, 의도치 않게 산 오해로 진행되는 오즈의 영화들을 떠오르게 하는 면이 있기도 하다. 또는 해준 것도 없으면서 열정만을 강요하는 상황과도 비슷하다. 말하자면 이것들은 형태는 다르지만 결국에는 무기력과 외면으로 연결되는 존재, 자존감의 증표인 셈이다. 반대로는 열정만으로 모든 것을 해줄 수 있는 관계가 가족이기도 하다. 이 흥미로운 사실에 관해 좀 더 생각해볼 여지가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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