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2019)
1.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이 있다. 꽤 유명한 말이기에 다들 잘 알겠지만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이 말은 우리 인간이 필멸자임을 기억하라는 것인데, 죽음이 세상에 만연해있기에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식의 위로로 사용되기도 한다. 쉽게 말해 지금 우리 눈앞에 보이는 죽음은, 그 마지막이 남들보다 조금 더 일찍 찾아온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말이 슬픔을 위로하는 것에 정말로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눈앞에 찾아온 죽음을 난생처음으로 마주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첫 경험에 대하여, 이론으로는 알더라도 현실에서 접하게 되면 누구라도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머릿속의 가설은 이상이라는 자궁에 깃들어있으나, 그것이 밖으로 나와 세상을 처음으로 마주할 때 그는 매섭게 울어댈 테다. 아기가 세상을 처음 마주할 때 터뜨리는 울음이 첫 만남에서의 당혹스러움 때문이듯이 말이다.
HBO의 드라마 시리즈 <체르노빌> 또한 죽음이 만연한 장소를 다룬다. 이 죽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죽음의 징후 자체를 명확하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질병’에 빗대어지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을 보면 중세 유럽에 창궐했던 흑사병이 떠오른다. 흑사병과 방사능의 공통점은 시신을 폐기해야 한다는 점과 해당 지역을 봉쇄해야 한다는 점 등이다. 또한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점과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이들이 있었다는 공통점도 있다. 그래서 흑사병에 대한 이해는 체르노빌 사건에 대한 이해와 유사한 면이 있다. 죽음 안에서 인간은 어떻게 실존하는지와 같은 이야기인데, 체르노빌 사건은 중세의 흑사병에서 더 나아간 부분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진실과 은폐이다.
흑사병이라는 죽음의 파도가 일으킨 파급력이 유럽 문화에 끼친 영향은 어마어마했다. 기록할 사람이 다 죽어버린 나머지, 책임질 사람이 기록을 두려워했던 나머지 기록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서 이 시기는 말 그대로 암흑으로 남았다. 죽음을 형상화한다는 점에서도 암흑이고,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암흑이기도 하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가 진실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체르노빌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건이 일어났던 당시 소련 정부는 체르노빌 사건에 대한 진상을 최대한 은폐하려 했으며, 그러나 너무 확연했던 죽음의 향기는 그런 은폐 공작이 무의미한 짓이었음을 말해주었다. 작품의 도입부는 그런 상황에 놓인 한 남자의 모습으로부터 시작한다.
2.
진실에 관한 단서를 추적해보자. 5개의 파트로 나뉜 이 작품의 도입부는 한 남자의 자살이다. 뒤이어 체르노빌 사건이 발생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이 배치는 체르노빌 사건의 끝과 시작을 나란히 함으로써 작품이 다루는 게 그 중간이라는 점을 예견한다.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가 체르노빌이라는 사건에 대해 아는 두 가지 이미지가 선두에 제시된다. 시작되었고, 끝이 났다는 것. 하지만 우리는 체르노빌이라는 사건의 진행과정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걸 교과서로 배웠고, 이제는 역사가 되어버린 이 사건에 대하여 ‘책상머리 위의’ 단편적인 서술로만 알고 있었다.
책상 위에서만 오가는 논의가 현실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말할 때, 우리는 탁상공론이라는 표현을 쓴다. 말하자면 높으신 분들은 현장의 이야기를 잘 모른다. 작품은 중간 관리자급에 해당하는 인물과 25세 입사 4개월 차의 직원을 대비시키면서 ‘경력이 많은 사람이 곧 현장’이라는 개념을 바닥에 깔아둔다. ‘경력이 오래되었고 그래서 현장 일에 익숙하다는’ 논리인데, 중간 관리자의 말대로 했더니 사건이 터지게 된다. 작품의 마지막에 가서야 그것이 단순히 인재에 불과하지만은 않다는 걸 깨닫지만, 지금 당장은 인재처럼 보이는 이 사건의 시작지점을 통해 우리는 그다음 내용을 추측해보게 된다. 높으신 분들과 현장 사람들 간의 대립이 작품의 주된 동력원이라고 말이다.
그다음 시퀀스는 연료 동력부 장관인 보리스 셰르비나(스텔란 스카스카드)가 책상에서 현장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처음에 그는 방사능이 펄펄 나오는 체르노빌 원전의 열린 뚜껑 위로 가자는 등의 고집을 피우지만, 이내 사안의 심각성을 깨닫고 사태 수습에 매진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발레리 레가소프(자레드 해리스)와의 갈등이 1화의 주된 흐름이지만, 이것이 실제 역사를 기반으로 한 만큼 그 둘의 사이가 어찌 될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 갈등은, 문제 해결이 아닌 그 중간과정을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작품의 도입부가 묘사하는 가장 중대한 이미지가 체르노빌 원전 주위의 풍경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책상을 떠나 현장에 가야만 비로소 실체를 마주할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직시해야 할 것은 그 실체라는 게 단지 죽음의 풍경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방사능은 마치 흑사병과도 같아서, 그 실체를 눈앞에서 목격할 때야 비로소 죽음의 외관을 띄고 우리 앞에 찾아온다. 허나 우리는 그 안에 든 게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수수께끼이다. 마치 잉마르 베리만의 <제 7의 봉인>처럼, 우리는 죽음이 숨겨놓은 퍼즐의 단서를 차례로 찾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 든 건 그들이 ‘죽음’을 통해 은폐하려 했던 진실이다. 이 죽음은 진실을 씨앗 삼아 우리 세계에 발현했고, 그러니 우리는 죽음의 핵을 이루는 진실에 대하여 묻지 않으면 안 된다.
3.
화산이 터지거나 할 때, 공기 중의 먼지는 하늘로 올라가 비나 눈이 되어 내린다고 한다. 이른바 낙진이다. 다르게 말하면 방사능 먼지가 비에 섞여 내릴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때 낙진은 비와 눈이 생성되는 과정에서 씨앗 역할을 한다. 즉 체르노빌의 폭발하는 불기둥의 이미지가 쏘아 올린 것은 죽음의 씨앗이었다. 결국 진실을 처분하지 않으면 그것은 대지에 죽음이 되어 내려온다. 이 파종을 막으려면 우리가 먼저 진실을 처단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체르노빌>은 처단에 실패한 이들의 모습이 대체 역사의 형태로 돌아오는 드라마이다. 왜냐하면 진실이란 것은 이미 죽음의 핵을 이루었기에, 죽음을 마주한 순간부터 이미 그것을 피할 수 없게 되었듯이, 진실을 마주하기 한참 이전부터 그것은 ‘발현’하고 있었던 셈이니 말이다.
5화를 보고 난 후 1화로 돌아오면, 체르노빌 상공의 이온화 현상을 바라보면서 낙진을 눈처럼 여기며 좋아하는 이들의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진다. 이는 잘 익은 봉숭아 씨가 여물며 터져 나오듯, 썩은 진실이 죽음이 되어 퍼져 나가는 것을 연상케 한다. 단적으로 말해 그들은 그게 죽음인지를 몰랐다. 하지만 마주하게 되었고, 마주한 후에야 죽음의 근원이 뿌리에 있음을 깨닫고는 그에 ‘진실’이라 이름 붙였다. 그러나 우리가 5화를 보고 1화로 돌아오면 알게 되듯, 그것은 단순히 도입부에서 벌어진 인간들의 재앙이 아니었다. 역사가 말하는 가장 강력한 스포일러는, 인간이 문제이기 이전에 인간이 놓인 상황이 문제라는 점이었고, 그런 상황을 만든 것은 국가였으며, 그런 국가가 만든 또 하나의 물건은 잘못된 원자로였다는 점이었다.
발레리 레가소프가 5화의 법정에 설 때, 진실을 토로하자 판사는 ‘지금 하는 말이 국가에 대한 발언으로 해석될 수 있으니 유의하라’고 경고한다. 이 대목에서 본작이 말하려는 게 진실과 은폐를 수행한 국가권력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이 확언된다. 그러나 국가권력에 관한 이야기이지 권력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이 작품에는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KGB 국장도, 연료 동력부 장관도 공평하게 감시당하고 있다. 그래서 발레리 레가소프는 당신 같은 사람이 이곳에 있어 행운이라고 말하지만, 반대로 보리스 셰르비나는 나라서 온 게 아니라 위에서 시켰을 뿐이라고 답한다. 그렇지만 발레리는 현장에서 죽음을 목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신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준다.
4.
이 대목은 이미 사라져 버린 구소련을 언급하기에 크게 유효하지는 않다. 이미 죽은 사람을 두고 죄를 논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권력에 의한 진실과 은폐라는 맥락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실은 시대를 불문하고 언제나 유효했던 명제이다. 그러나 이 명제가 작품 속에서 반대로 향할 때, 우리는 다른 생각을 해볼 수 있게 된다. 이를테면 권력은 곧 죽음이고, 국가는 그에 대한 통수권자이다. 따라서 이 작품에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KGB 국장도, 연료 동력부 장관도 공평하게 감시당하고 있다. 발레리 레가소프는 당신이 권력자이기에 죽음을 피한 게 아니냐고 말하지만, 보리스 셰르비나는 나라서 살아남은 게 아니라 죽음이 나를 빗겨갔을 뿐이라고 말한다. 즉, 그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평범하기 그지없고, 이 생존은 행운일 뿐이다.
죽음이 나를 빗겨간다는 말은 권력이 나를 빗겨갔다는 말과도 같다. 보리스 셰르비나는 자신을 두고 ‘특별한 이에게 묻혀간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고 말하지만, 권력이 죽음이라 생각하면 몹시 다행이라 할 수 있다. 권력은 곧 죽음이고, 그것을 쟁취하려면 손에 피를 묻혀야만 하니 말이다. 결국 권력을 행사한다는 건 죽음을 행사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이미지는 총을 둔 군인에 옮겨가면서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요한다. 국가에 충성하지 않으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 또한 우리는 소련이라는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그런 일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체르노빌을 구한 이들은 죽음에 대항한다. 자신이 왜 죽는지에 대해 이유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르게 말하면 이유 없는 죽음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 죽음은 숭고한 희생이다.
작중에서 체르노빌 아래로 땅을 파기 위해 부른 광부는, 자신이 어둠 속에 있기에 빚을 더 잘 본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유 없이 움직이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요컨대 은폐된 것 안에서 진실은 더 잘 목격된다. 그리고 이유를 듣자 자신의 희생에 토를 달지 않는다. 이 장면은 그 전에 나온 체르노빌 안의 냉각수 탐사대원을 즉각적으로 보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밸브를 열어 냉각수를 개방하지 않으면 원전이 폭발한다. 그래서 그걸 열 사람이 필요한데 그것은 사실상 3명에 대한 죽음 선고이다. 죽음 안으로 들어가라는 요구를 듣고, 모인 사람 중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 이유를 물었을 때 지원자는 나타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다음을 생각해보게 된다. 영웅은 처음으로 지정되어 있었는가? 그 세 명의 지원자는 그들 사이에서 갑작스레 나타난 것인가, 아니면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영웅의 자질을 타고났는가. 이것은 발현이거나 잠재이다.
5.
죽음은 타고나는 것일까? 다시 말해서 죽음에 대한 두 가지 가정을 해볼 수 있다. 첫 번째, 죽음은 발현된다. 두 번째, 죽음은 잠재되어 있다. 이때 전자는 병에 걸려 죽는 부류이고, 후자는 메멘토 모리의 성격이다. 위에서 말했지만 후자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영역이다. 그렇기에 유의해서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전자는 우리가 처해있는 위협이다. 병사하거나 사고사할 위험에 대해 우리는 늘 생각한다. 그런데 체르노빌이라는 원전, 죽음의 씨를 뿌리는 화산이 대기를 오염시킬 때 우리는 후자가 된다. 죽음을 목격한 이상 우리는 죽음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이 문장을 다시 한 번 반복하자면, 방사능에 피폭된 이상 그들은 죽음이 선고되었음을 부정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 명제는 자신들에게 남은 시간이 5년 정도라는 발레리 레가소프의 말로 확인된다.
중세에서 흑사병의 모습은 사람의 목에 사슬 낫을 건 사신의 형태였다. 그 이유는 언제든지 죽음이 선고되기 때문이었다. 잉마르 베리만의 <제7의 봉인>은 흑사병이 떠돌던 시기, 그곳을 방문한 한 기사의 이야기다. 그곳에서 기사는 인간의 형상을 한 ‘죽음’을 만나는데, 죽음은 ‘그’ 또한 죽음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체스 내기를 하면서 자신의 수명을 일시적으로 연장시킨다. 동시에 남은 수명을 신의 존재를 따라가는 것에 사용하기로 마음먹는다. 이미 죽음이 예고된 상황에서 그는 ‘흑사병’으로부터 안전했고, 그렇기에 마을을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건 마치 발레리와 보리스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들이 사건 현장에 계속해서 머물렀던 이상, 오래 살지 못하리라는 점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들도 신의 존재에 의문을 던진다. 그것은 국가이다. 소비에트 연방은 통치자가 신격화되는 나라이다. 만약 신이 있다면 우리가 이렇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들은 묻는다. 마찬가지로 국가는 우리를 이렇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그렇게 내버려두었으니 그들에게 국가란 존재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신은 죽었다. 니체의 이 격언은 국가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된다. 사실 소비에트라는 국가는 실체가 없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라들의 ‘연합’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하게 체르노빌이라는 풍경에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어느 특정한 사안만이 원인으로 작동하지 않았고 거의 모든 곳에서 벌어진 비극이었다. 이는 마치 방사능에 피폭되어 죽어가던 이들이 다발성 장기 부전으로 사망한 것과도 같았다. 병원에 실려 온 소방관들은 말 그대로, 권력에 몸 전체를 두들겨 맞은 것이다. 방사능 이름의 총알이 그들을 관통했다.
6.
헬기를 탄 보리스 셰르비나는 조종사에게 옥상의 흑연을 잘 확인할 수 있도록 가까이 가라고 명령한다. 이에 발레리 레가소프는 체르노빌 원전 바로 위로 가는 건 자살 행위라고 말한다. 화가 난 보리스는 당장 옥상으로 가지 않으면 총을 쏠 것이라고 협박한다. 발레리도 화를 내면서, 만약 저 위로 간다면 내일 아침에는 차라리 머리에 총을 쏴 달라고 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장면 전에 발레리는 보리스에게 원전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핵분열을 총알에 빗댄다. 그러니 어쩌면 최초의 방사능은 바로 이전에 있었던 세계 대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시기에 일본에서는 두 번의 원폭이 있었다. 여기에 체르노빌에서 나오는 방사선량은 히로시마의 수 배라는 설명이 덧붙여진다. 이 설명은 히로시마 당시로부터 우리가 나아간 기술발전의 척도를 보여주면서도, 히로시마보다 더 많은 사람이 사망하리라는 점을 예고한다.
죽음은 방사능의 이미지로 총체화 된다. 방사능에 닿은 모든 것이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체르노빌에서의 죽음은 권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방사능은 권력이다. 예컨대 어떤 면에서 이 드라마는 권력에 대한 수습이기도 하다. 스파이물처럼 우리가 알 수 없는 곳에서 진행되는 권력의 암투, 또는 원전 기술을 두고 다투던 소련과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은유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냉전 시기의 권력은 자존심과 연계된다는 점을 깨닫는다. 사람들을 더 잘 부릴수록, 더 잘 통제할수록 국가권력의 위상이 올라간다. 누가 우주에 더 빨리 우주선을 보내는지와 같은, 국가 예산의 수십 퍼센트가 들어간 해당 프로젝트에 소모된 자원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면 더 효율적이었을 것이라는 점은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다.
그에 대한 유머 장면 하나는 실제 현장에서 측정된 수치보다 훨씬 낮은 수치를 대외적으로 발표하면서 벌어지는 불상사이다. 서독에서 가져온 로봇이 현장을 이기지 못하고 고장 나버리고, 원인을 따져보니 중앙위원회(정부)가 허위로 기재한 수치만 견딜 수 있는 로봇이었다는 점이 밝혀진다. 보리스 셰르비나는 그에 분개하면서 수화기를 때려 부순다. 우습게도 이 장면의 전후에는 발레리 레가소프와 웃고 떠드는 묘사가 있다. 처음에 대립하던 이와는 친해졌으나, 체르노빌이 처한 현실과는 여전히 사이가 서먹한 셈이다. 그리고 그들은 로봇이 안 된다면 사람을 투입하자고 제안한다. 이른바 바이오 로봇이다. 여기서 로봇이 인간으로부터 명령만을 받는 존재라고 생각하면, 이 바이오 로봇은 명령을 거부한 게 된다. 왜냐하면 그건 온전히 타의에 의한 것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7.
<신과 함께>의 법정 장면을 떠올려 보자. 저승사자가 망자를 재판으로 인도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체르노빌>의 이야기는 방사능이라는 이름의 사자가 우리를 재판으로 인도하는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이 재판은 시대에 대한 진단이기도 하다. 발레리 레가소프는 원자력 회의가 있었던 오스트리아 빈에서 위증을 택하지만,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관련자 공판에서 진실을 선언하기로 마음먹는다. 다르게 말하면 물리학자이기에 환자들을 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가, 물리학이라는 과학 세계로부터 소련 연방이라는 시대의 흐름에 편입되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과학자들은 순수하기에 진실을 목격할 수 있었었으니, 위증을 택해 순수하지 못하게 된 그의 양심은 서서히 죽어가는 육체를 통해 진실을 말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모습은 체르노빌 현장에서 근무하던 근로자를 면담할 때, 서서히 죽어가는 육신임에도 당시에 있었던 일을 말하고자 했던 의지를 떠오르게 한다. 즉, 죽어가는 육신에도 양심은 살아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련은 죽어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양심이 살아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당시 소련의 수장이었고 동시에 마지막 수장이기도 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약간의 과정을 섞어 체르노빌 사건이 소련 붕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 말인즉슨 어차피 죽어가던 중의 소련에 사형 선고를 내린 게 체르노빌이라는 것이다. 이런 시대적 상황은 방사능에 피폭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우리에게 말해준다. 방사능은 죽음이자 권력이기도 하다. 그러니 권력에 취하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죽음 속에도 삶은 있다. 이것은 불사조이다.
어쩌면 죽음 속에 삶이 있다는 말이 메멘토 모리라는 상투적인 단어와 연결될지도 모른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은, 죽음 안에 삶이 있음을 기억하라는 것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나 그건 체르노빌 안에 방사능이 떠돌고 있음을 명심하라는 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방사능은 지구 상에서 가장 오래가는 물질이기 때문이다. 물질에 따라 다르지만 길게 가는 것은 반감기가 수만 년 정도로, 인간이라는 종이 그 최후를 목격할 수 있으리라고 장담하지 못한다. 결국 방사능의 짙은 그림자는 체르노빌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죽음의 짙은 그림자는 체르노빌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발레리 레가소프의 말을 빌리자면 적어도 우리 삶이 끝나기 전에는 그러하다.
8.
대지를 살아가는 생명체 중에 인간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죽음을 마주한 순간부터 이미 우리는 죽음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상은 우리가 체르노빌에서 떠올리는 붉은 숲의 이미지나, 살처분 당하는 동물들의 이미지로 흘러가게 된다. 또는 그것이 대지, 어머니 자연에 빗대어진다는 점에서 신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에 따르면 거대한 숲을 가로지르는 것으로 끝나는 본작의 이야기는, 그곳이 훗날 붉게 변해버린다는 점에서 소련의 국기에는 더 가까워지지만, 실은 나무가 모두 고사한 것이므로 이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의식 하나가 떠오를 수 있다. 국가를 신처럼 모시는 소련 사람들에게 신의 존재란 과연 무엇인가? 다르게 말하면 국가를 의식하지 않고 사는 이에게 국가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체르노빌 사건을 수습한 후에 방사능 확산 방지를 위한 동물 살처분 작전이 시행될 때, 작품은 그전 시퀀스에 주민을 대피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둑한 집 안에는 젖소의 젖을 짜는 어느 노인이 있고, 군인들은 소개령이 내려졌으니 어서 나가자고 재촉한다. 그러나 노인은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죽고 싶다며 그 말을 거절한다. 이때 노인은 자신이 살아온 이 집에, 당신과 같은 군인이 수도 없이 들이닥쳤지만 나는 자리를 지켰노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눈에 보이는 위협에도 살아남았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따위로 자리를 뜰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군인은 명에 따라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끌고 가야 하는 상황이다. 다른 무엇도 아닌 방사능으로부터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군인은 그녀가 어루만지던 젖소를 총으로 쏘아버린다.
이 노인이 자신이 어느 국가에 소속되었노라고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저 그곳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대지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국가다. 그런데 그런 대지에 방사능이라는 권력이 덮쳐올 때, 그들은 그곳을 떠나야만 했다. 이 부분은 위에서 언급한 동물 살처분을 미리 예견하는 이미지이면서도, 인간과 동물에게 찾아오는 죽음의 무게가 과연 다른 가치를 갖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지기도 한다. 전장에서 숱하게 사람을 죽여본 이들도 처음에는 동물을 살해하기를 망설였다. 그렇다면 동물의 가치는 사람과 같거나, 또 다르다고 할 수 있을 테다. 예컨대 단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죽임을 당해야 한다면 산 자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개나 돼지를 살처분하는 것과 인간을 총살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9.
죽음의 반대편에는 사랑이 있다. 아이러니하지만 타나토스와 에로스의 관계가 그렇다. 예를 들어 체르노빌이라는 사태 수습에 힘쓴 이들은 조국을 사랑하기에 죽음 안에 뛰어들었다. 작중에서 소방관의 아내가 피폭을 무릅쓰고서 남편의 임종을 지킨 것도 그런 이유였을 테다. 이때 그녀의 배 속에 있던 딸은 어머니를 대신해 방사능을 홀로 삼켜버린 후 사산된다. 이는 실제와는 다르지만, 그 나름대로 죽음을 각오하는 사랑이라는 의미가 있다. 체르노빌이라는 장소가 죽음을 흩뿌려댔다면,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건 사랑이다. 그들은 사랑하기에 죽었고 죽었기에 사랑하게 되었다. 정확하게는 죽음 안으로 들어갔다가 생환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볼 수 없는 사랑의 본질을 목격했다는 점이 존경스럽다. 생환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숭고한 희생을 두고 그들을 사랑하게 된다.
발레리 레가소프가 녹음한 테이프와 법정에서 한 증언은 분명 조국을 사랑하기에 결정한 일이었다. 처음에 그는 조국을 위하는 길이 위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위증이 같은 방식으로 지어진 다른 16개의 RBMK 원전을 고치도록 정부를 종용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는 조국을 위해 진실을 밝혔다. 이 부분 또한 실제 역사와는 다르지만, 드라마에서 그는 KGB에 의해 체포되었고 그 과정에서 유서 깊은 공산당 집안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예컨대 이 사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의 본질이 신념과는 무관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무언가를 믿는다는 게 곧 사랑의 본질은 아니다. 다르게 보면 신을 믿는다는 게 곧 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랑한다면 죽음을 직시할 줄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죽었다고 칭하는 로봇조차 살아남을 수 없는 땅이 체르노빌 원전이었다. 또한 진실이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죽음을 당해야만 했다. 어쩌면 죽음을 당한 게 아니라 죽음을 ‘당긴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방아쇠이다. 또는 스위치이다. AZ-5라는 문제의 스위치가 기폭장치로 작동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그 누가 알았을까. 그 스위치가 터트린 것은 체르노빌을 필두로 한 소련의 멸망이었다. 총알이 빗발치는 곳이 전장이지만, 총알이 빗발치지 않는 곳도 전장이기도 하다. 체르노빌은 방사능이 총알에 빗대어진다는 점에서 양쪽 모두에 해당한다. 그것은 대공첩보, 전장 밖에 자리한 스파이들의 이야기이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이들이 현장에 투입되고 있다. 그것은 진실을 밝히기 위함이기도 하고, 은폐를 위함이기도 하다. 이곳은 체르노빌, 죽음이 진실을 밝혀내는 권력 암투의 장이다.
10.
작품이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리 위에 올라 폭발한 원전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때 원전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굉장히 아름답게 묘사되는데, 그건 사실 죽음의 구름이다. 말하자면 멀리 있을 때 아름답지만 가까이서는 치명적인 게 바로 방사능인 것이고, 거기에 죽음이나 권력을 대입해도 문장은 맞아 떨어진다. 그러니 아마 이게 우리가 죽음을 숭배하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네 현실도 멀리서는 희극이지만 가까이서는 비극이 되니 말이다. 예컨대 ‘산다는 것은 죽음으로의 여행’이라는 점, 어떤 면에서는 소련이라는 나라가 그만큼 안개처럼 자욱했다는 것이기도 하다. 서방국가에게 소련은 신비에 싸인 곳이었으니 말이다.
사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체르노빌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 대신 체르노빌이라는 이름이 신격화되어 그것을 ‘죽음의 땅’이라는 고유명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작 현장으로 가보니, 신격화되어야 할 건 사건이 아니라 사람이었노라고 작품은 선언한다. 이런 면에서는 고증 오류라고 할만한 것도 다르게 보이는 듯하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드라마는 다 죽었다고 말하지만, 사실 체르노빌 사건을 지켜보던 다리 위 사람들은 대부분 생존했다. 마찬가지로 밸브를 열러 갔던 이들 모두 생존했다. 말하자면 이 드라마는 명백하게 허구이지만, 그런 허구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해준다. 진실이란 게 과연 뭘까? 우리가 지금 본 드라마가 진실일까 아니면 교과서에 적힌 결과가 진실일까. 진실이 은폐되는 체르노빌에서 우리가 과연 무언가를 제대로 보았기는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