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시트>(2019)
1.
이것은 재난영화인가. 만약 홍보를 위한 설명 한 구절이 필요하다면, 나는 그렇게 말할 것이다. 하지만 생각하는 그대로를 말해보라 권한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당신은 여태까지 살면서 얼마나 많은 재난과도 같은 상황을 겪었는가. 말하자면 당신의 삶에서 하나의 거대한 재앙이 된 사건 사고는 무엇이었는가. 누군가는 퇴근길 지하철에서 스마트폰 배터리가 다 달았을 때라고 답할 테고, 누군가는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화장실이 급할 때라고 답할 테다. 이 실없는 농담을 당신에게 권하면서 내가 곁들이려 하는 이야기는, 그 재난이 당신의 눈앞에만 머무르는지에 관한 물음이다. 왜냐하면 지구온난화와 같은 재난도 재난인데, 당신은 분명하게도 그것을 재난이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우리가 아는 재난이란 특정한 모습으로 특정한 지역에 나타나야, 그중에서도 내가 속해 있어야만 비로소 재앙이 된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이기심이라던가 하는 시시콜콜한 말은 아니다. 이것은 동시대이다. 우리가 같은 세상, 하나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음에 대한 자각행위이다.
분명, 우리는 하나의 지구 아래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절대로 이타심이거나 생태주의가 아니다. 나는 적어도 눈앞의 영화를 관람하는 당신들이 이 영화가 그런 세계의 일부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우리는 영화를 두고서 다음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그를 타인으로 지나칠 것인지, 아니면 더 나아가 완벽한 타인이 될 것인지. 어찌 되었든 간에 우리가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영화라는 타인에 관하여, 그것은 지하철 안에 오가는 사람만큼이나 무관심하면서도 눈앞에 있을 때는 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존재이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그것은 당신이 들여다보는 스마트폰 안의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만큼이나 세계를 부유하는 존재이다. 이 이미지들은 실시간으로 나타나면서도 사라지고, 흥미를 유발하면서도 무심해지기도 한다. 말하자면 우리가 책을 읽던 시기에는 무조건 선형적인 순차적 탐독만을 해야 했지만, 영화와 같은 영상의 시대에는 눈을 두는 곳이 곧 소실점이 된다. 이것은 영화에서는 미쟝센이며, 미술에서는 구도이고, 광고에서는 기호이며, 우리의 현실에서는 재난이다.
재난이라는 신기루에 관하여 말하는 영화가 있다. 이 재난이란 것은 결국, 우리의 눈앞에 보이는 가장 선명한 현실이다. 그래서 테렌스 멜릭은 <황무지>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한 남녀 커플이 보이는 족족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는데 그곳은 바로 황무지이고 살해의 이유는 ‘그냥’이라는 점이 주제이다. 대외적으로 이 영화는 미국의 방황하는 청춘들, 그들을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걱정과 불안이 섞인 니힐리즘에 대한 나지막한 속삭임으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이 영화는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에 대한 배경적인 지식이 전제되어 있지 않다면 바르게 볼 수 없다. 영화를 보기 위해 미국을 공부하라는 게 아니다. 할리우드가 자리한 미국이라는 나라에 있는 드넓은 평원과 그곳에 소수의 총잡이들이 생존의 사투를 벌이고 있었음을 명심하라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그때 그 시절의 미국으로 다시금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2.
미국과 한국의 지형적 차이점은 산의 비율이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산지 지형 면적만을 놓고 보면 미국이 훨씬 넓을지도 모르지만, 비율로 따져보았을 때는 한국의 좁은 땅덩이 덕분에 국토의 70프로가 산지라는 결론이 나온다. 단적으로 서울. 우리는 수도 한가운데 거대한 산, 그것도 등산하여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는 산이 있는 나라에 살고 있다.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한 이 사실은, 다른 나라에서는 조금은 생소하게 느껴지는 이야기이다. 그러니 일본의 후지산이 도심 한가운데에 있다는 것만으로 한국의 서울로 번역되는 것은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 반면 파리는 도시 전체가 평평해서 아무 데나 둘러봐도 높은 건물 하나 없다는 점을, 여행자들은 놀라워하고는 한다. 이는 파리가 의도적으로 건물을 높게 짓지 못하게 하는 탓도 있지만, 결정적으로는 에펠탑을 필두로 한 도시의 전통을 지켜내기 위한 노력 덕택이다.
그리고 그곳의 영화들. 파리의 지형도가 평평해서 <미드 나잇 인 파리>가 나왔다는 말은 어불성설이지만, <녹색광선>이 나왔다고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를 옮겨서 미국. 이 미국에서 항상 등장하곤 하는 2층집과 그곳에 딸린 정원, 이따금 뛰노는 애완견과 저녁때마다 식탁에 앉아 기도를 올리는 가부장적인 백인 아버지. 이곳의 공포는 <유전>이나 <겟 아웃>과 같은 2층집과 마을 공동체의 계급도이다. 이제 그리운 집으로 돌아와 한국. 이 도시에는 극한의 수도 집중으로 인한 인구 밀도, 가 만들어낸 아파트라는 도심 숲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한국의 사람들은 굳이 도시가 아니더라도, 지방이더라도 호화스러운 아파트에 머물며 수직적이면서도 수평적인 유대를 나누고는 한다. 나는 이 대목을 당신이 한 번쯤 의심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수직적이면서도 수평적인 유대란 게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과거의 복도식 아파트를 제한다면, 요즘 보편적인 아파트는 한 층에 한두 개 세대가 머물고 있다. 돈이 많다면야 한 층을 전부, 펜트 하우스식으로 사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우리는 한 아파트에 입주했다는 것 만으로 모두가 동등해지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당연한 일 아니냐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당연한 일이 아니었기도 했다. 이를테면 <하녀>. 이곳은 시골에서 올라온 시골 가정부가 1층에 머무르는, 미국으로 치면 마구간에 딸린 작은 손님용 주거지와도 같은 장소이다. 조선 시대로 가면 별채와 사랑방이 있고, 그 바깥에는 하인들이 머무는 장소가 따로 있었다. 이번에는 나라를 옮겨서 유럽. 이곳의 중세 성지에는 귀족이 중심지에 살고 있고, 주변부의 농사지대에는 소작농들이 집을 짓고 거주민으로 살아간다. 이제 나는 다시 한 번 당신에게 묻고 싶다. 아파트, 와 같이 높게 솟은 현대 사회의 건물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1층에 거주해도 100층에 거주해도 한강 조망권에 따라 가격이 달라질 수는 있지만 노골적인 차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임대인지 분양인지에 따라 대우는 노골적으로 달라진다. 하나의 아파트에, 하나의 아파트 단지에 임대와 분양이 있다면 그들은 서로 편을 갈라 싸운다. 물론 여기서 편을 가르는 건 아파트를 분양받은 쪽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분양이란 이곳의 한 지대를 자신이 소유하고 있음에 대한 확실한 증표이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해서 집 한 채를 전부 살 수 없는 아파트라는 통이 큰 건축물에 관하여, 그들은 결코 성주는 될 수 없고 대신 소작농이라도 될 수 있다. 그렇다면 2년에 한 번 집을 바꾸어야 하는 소라게와 같은 그들은 집시, 한국민이지만 한 국민은 아니라고 그들 스스로 여기는 부랑자 민족이다.
여기서 우리는 파리의 한순간으로 건너간다. 그곳은 등이 굽은 곱추 콰지모토가 종지기로 일하는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있는 장소이다. 이 작품, 소설과 영화에서 곱추 콰지모토가 등장하는 곳은 평지 파리에서 유일하게 높게 솟은 성당 ‘노트르담 드 파리’이다. 기독교의 둥지인 이곳보다 더 높은 건축물이 있어서는 안 되었고, 말하자면 이곳에서 먹고 자는 콰지모토는 그만큼 성스러운 존재인 것 같지만 사실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콰지모토의 조력자로 등장하는 것은 파리 외곽으로 몰린 집시들이다. 그곳에서 집시들은 노래를 부르고, 그에 콰지모토는 종소리로 응답하고, 그렇게 높낮이의 차이가 있는 이들은 하나의 선율로 맞닿아 이야기의 맥락 안에 뛰어들게 된다. 그리고 영화와는 반대로, 소설에서는 단지 일부에 불과한 이 이야기에서 콰지모토와 집시들을 위협하는 성당의 프롤로 부주교는 소설의 태반을 차지하고 있다. 이를 계급이 아니라 공간으로 다르게 표현하면, 공간의 지배자는 결국 외곽이나 상층부에 자리한 게 아닌 그곳을 분주하게 오가는 위와 아래의 인물이다.
위와 아래, 그리고 중앙. 이 대목에서 우리는 2층집을 떠올려야만 한다. 이 2층집은 그 집이 자리한 시대가 무엇을 중심으로 갈라지는지를 통찰하게 하는 요인이다. 예를 들면 1950년대 일본 영화의 2층집은, 전전과 전후를 중심으로 갈라지는 세대교차의 장이다. 그러니 어쩌면 <기생충>은 우리가 아직 모르고 있는 B1층의 존재를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습게도 바로 한 해전에 일본은 하나의 공동이 부질없다고 말하는 <어느 가족>을 만들었고, 우리는 그곳에서 수평 집의 몰락을 보았다. 그 수평 집은 서로 다른 세대가 한곳에 모인 다세대 가구였고, 이것은 흡사 한 아파트의 한 개 층에 여러 가구가 살던 마지막 아파트 시대의 종말을 말하는 것만 같다. 어쩌면 이는 전전과 전후로 나뉘던 2층집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서, 그곳에 다시금 종말이 도래했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 시대가 어느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에 대한 자기 통찰이다.
우리는 2001년의 미국으로 넘어간다. 그곳에는 거대한 슬픔이 있다. 미국은 2001년 9월 11일에 알카에다의 비행기 테러를 겪었다. 여기서 잠깐. 나는 정치적 구도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는 슬픔의 장에서 떠오르는 몇몇 이미지를 떠올려보아야 한다.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건물에 자욱한 화염의 연기가 둘러싸일 때, 그것은 두바이의 마천루가 일상적으로 만들어내는 안개에 쌓인 풍경과 거의 유사해 보인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곳의 슬픔과 기쁨은 정반대의 성격이고, 이 아이러니는 우리로 하여금 마천루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마천루란 무엇인가. 누군가는 곧바로 현대 사회의 바벨탑이라고 말을 덧붙일 것이다. 분명 그 말은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마천루가 인간의 욕심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이들이 하나였던 시절의 상징이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마천루가 여러 층을 지녔으면서도 근본적으로 인간을 하나로 갈라놓지는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가 있다.
내가 아는 한, 마천루의 출입금지 구역이 남녀노소를 딱히 갈라놓지 않는다는 점은 확실하다. 그곳은 그저 출입할 수 없는 곳이기에 출입 금지일 뿐이다. 반대로 말하면 출입할 수 없는 곳에는 출입할 수 있는 특정 인물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도심의 마천루 최상층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곳에는 방공망 형성을 위한 포대가 설치되어있다. 이 사실은 잘 알려져있지만, 반대로 실체는 목격되지 않은 괴담과도 같은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이고, 우리가 이것을 믿을 수 없다면 아마도 그 이유는 평화의 상징이라고 여겨졌던 도심 한복판에 군사시설이 있다는 점일 테다. 허나 무엇보다 우리는 도심에 다가오는 재앙 같은 상황이 곧바로 전쟁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 도심의 재앙이란, 고질라나 외계인 침공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완벽한 타자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도시의 내부로부터 공격이 시작되는 상황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건물이 불에 타는 것보다 방화범이 있는 상황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지진이 나는 것보다는 폭격을 맞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
아마 당신은 지금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느냐고 묻겠지만, 인간에 의한 재앙,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는 죄책감보다는 그런 죄책감을 떠맡길 명확한 책임자를 필요로 하는 게 인간이다. 만약 책임자가 없다면 우리의 슬픔은 정착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 것이며, 헤아릴 수 없는 울분은 도심 전체를 메우게 될 테다. 요컨대 이것은 정치이다. 그리고 영화는 정치이다. 무슨 무슨 당을 말하는 게 아니라, 당신을 만족시키기 위한 욕망의 투입이 관리되고 이루어지는 정치’학’이다. 이 사실에 당신이 ‘학’을 땔지도 모르지만, 우리의 영혼은 신체를 통치하기 위해 설득을 겸하는 것보다는 주변 상황을 끌여들어 정치를 하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한다. 만약 당신이 취준생이라면, 당신이라는 원석을 알아보지 못한 회사의 인사팀이 나쁜 것이다. 만약 당신이 음주 운전 사고를 뉴스로 접하는 시청자라면, 피해자가 나 자신과 가족이 되지 않은 사실에 안도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친구의 연애상담을 들어주어야 한다면, 연애는 타인이 아니라 자신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면서 사랑을 설파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당신이 아는 정치의 참된 의미가 이곳에 부합하는가? 아니면 이것이 정치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궤변이라고 생각하는가? 정치는 본래 가치의 공평한 배분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빗댄 말이다. 이때 이 문장의 영화적 번안. 영화는 바른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쇼트를 골고루 배분하려고 노력한다. 잠깐 말을 멈추어서 당신에게로 질문을 던져보면, 이처럼 영화를 잘 만들기 위한 노력은 정치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렇다. 이것은 영화를 제작이 아닌 소비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이들에게는 가슴에 닿지 않는 말일 수도 있다. 그래서 준비한 다음 문장. 영화는 어떻게 당신의 편이 되어 주는가. 다시 말해서, 영화는 어떻게 당신 내면의 결여를 채워주려고 노력하는가. 이 문장에서 방점은 결여가 아니라 ‘채우다’라는 동사이다. 그 동사는 명사가 아니라서 움직일 수 있는, 노력이 아니라 노력하는 중인 거고 삶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은 영화가 당신을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을 두고 감동한 적이 없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3.
<황무지>가 미국이라는 드넓은 땅의 공포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한국에서는 빼곡히 들어선 빌딩 숲의 고독에 관한 영화가 나와야 마땅하다. 이는 자크 타티의 신나는 작품들, <플레이 타임>처럼 절대로 신나는 영화가 나올 수 없다는 점을 방증한다. 도시 전체가 살아 움직이는 공포는, 밤에는 사라져버리는 신기루 도시. 서울에서 수도권으로 빠져나가고 나면 텅 비어버리는 유령도시에는 어울리지 않는 타이틀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역으로 이용한 <목격자>라는 영화를 최근에 마주한 바가 있다. 이 영화에는 여러 개의 층에서 여러 구도로 목격되는 하나의 사건을 동시에 외면하는 이들의 모습이 나온다. 말하자면, 이들은 분명 하나의 세계이지만 하나의 세계에 속해있지는 않다. 이것은 마치 그들 사이에 투명한 벽이 있는 것처럼 작용해서 아파트라는 공간이 어떤 곳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도그빌>처럼 벽은 존재하지 않지만 벽이 존재하는 이상한 세계가 바로 이곳이다. 어떤 면에서는 한약을 마시면 바이러스 보호벽이 생긴다고 광고했던 어느 업체의 영상이 떠오르기도 한다.
상대를 쳐내면 자신은 안전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존재가 그들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둘은 명백하게 다르다. 상대를 밀쳐내는 것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보내는 물리적인 신호이고, 보이지 않는 기류에 휘둘리는 것은 일종의 바이러스를 피하는 행동과도 같다. 공기 중을 떠돌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불화의 신호, 따사로운 햇살 속의 자외선, 평범한 대화 속에 담긴 악의. 이것들은 모두 당신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당신을 살해할 것이며, 우리는 그걸 뒤늦게 눈치채고서야 대응할 것이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우리는 이미 갇혀버렸다. 그것은 도심 속에 우뚝 솟은 타워가 사람들을 내려가거나 올라가거나 둘 중 어떻든 오랜 시간을 소모하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타워에 불이 났을 때, 또는 바깥세상에 물이 차올랐을 때 그들은 결국 타워 안에 갇히게 된다. 하강의 이미지와 상승의 이미지가 교차하고, 그렇게 그들은 벽을 중심으로 바깥세상과 단절된다.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바깥세상은 재난을 겪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바깥을 바라보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생존자들은 자욱한 안갯속에 갇힌다. 내가 생각하기에 <황무지>의 모래 먼지가 서부개척 시대의 낭만을 분쇄한 것처럼, <미스트>의 안개는 현대미국의 과잉 알러지 반응에 관한 자조적인 물음을 담고 있다. 여기서 전자는 <매드맥스>의 쾌감으로, <델리카슨트 사람들>의 기괴함으로 변주된다. 그러나 후자는 변주를 허락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끔찍한 지점으로 파고든다. 그 근처에 자리한 <사일런트 힐>은 그보다 일 년 전에 나왔지만, 천국도 지옥도 아닌 연옥에도 망자가 드나들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너무나 무서운 영화다. 여기서 좀비라는 주제를 가지고 다음으로 넘어간다.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는 황량한 도시 한가운데에 뱀파이어들이 사는 영화이다. 이 도시에는 안개 같은 것은 없지만, 안개보다 더한 자욱한 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이 떠나고 남은 황무지는 그야말로 21세기의 서부라고 말할 수 있을 테고, 그곳에서 살아있지만 피가 흐르는 시체 ‘뱀파이어’는 산 자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
당신이 허락한다면 거대한 변주를 시도해보고 싶다. 뱀파이어, 밤에 자지 않는 것들, 자욱한 안개. 이것은 야근에 시달리며 점점 판단력이 흐려져 가는 직장인들의 비호이다. 그들은 브라운 포션이라 불리는 음료, 커피를 마시며 간간이 버텨내고 있다. 그 과정에서 카페인 중독은 눈앞을 흐리게 할 것이며, 점진적으로는 카페인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업무를 못하게 할 것이다. 이 말을 보면서 무슨 소리냐고 물을 당신에게 나는 이렇게 답을 돌려준다. 아침에 일어나 술이든 야근이든 머릿속이 자욱한 당신에게, 이 세상은 안개로 가득 차 어디로도 탈출할 수 없는 재난 상황이 아니던가. 그러나 당신은 당신의 내면에서 결코 도피할 수 없다. 당신이 당신에게서 탈출하는 방법은 죽음을 택하던가, 혹은 죽음에 비견할 만한 것. 잠, 유희, 마약, 사랑, 돈. 그것이 합법이든 불법이든 간에 어딘가로 자신의 에너지를 소모해 안개를 지우고 길을 뚫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 요컨대 욕망은 곧 방독면이다. 방독면은 곧 생으로의 의지이다.
4.
<엑시트>를 보면서 상당히 놀랐다. 그리고 나는 애초에 이것이 재난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들이 사는 현실이야말로 참된 의미에서의 재난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아마도 그들이 뛰어다니는 공간은 현실이 아니라 내면세계일 것이다. 이 내면세계에서는 무슨 일을 하든 허용된다. 그러나 죽음은 허용되지 않는다. 인간의 죽음충동은 인간을 쉴 새 없이 달리게 하고, 그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영화 도입부에 짤막하게 소개되는 클라이밍 동아리라는 말이지만, 간략하게 소개되고 남은 것은 조정석이라는 배우 한 명의 얼굴이다. 그리고 영화는, 그를 위해 존재된 낙원에서 아담과 이브에서의 이브 포지션에 해당하는 짝꿍 임윤아를 데려온다. 여기서 아담과 이브라는 말은 아담에서 이브가 나왔다는 존재론이 아니라, 그냥 말 그대로 이브를 소환하기 위해 아담을 사용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들의 모습은 거의 사슬처럼 연쇄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이들이 처한 상황은 어느 하나가 무너지면, 다른 하나도 우르르 무너지는 도미노적인 불안감을 자아낸다.
안개에 닿으면 안 된대. 왜? 유독가스래. 누군가는 이것을 두고 게임 같다고 생각할 테고, 실제로 영화는 게임의 내러티브를 많이 차용했다. 이에 따르면 이 영화에 가장 근접한 게임은 <미러스 엣지>이거나 <슈퍼 마리오>이다. 안개에 닿으면 안 된다는 설정은 어느 공포영화처럼, 그곳에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고 나지막이 암시해주는데. 이를 인간의 내면에 대입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두 통제하지 못한다는 불안감에 늘 시달리고 있다는 것과도 같다. 요컨대 우리 안에는 우리라는 괴물이 우리를 안개의 영역으로, 망각의 영역으로 끌어내리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 이른바 망각. 그 스틱스 강. 안개가 자욱해 하층부가 보이지 않는 스틱스 강은, 마그마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가 눈앞을 가르는 하데스의 저승과 큰 차이가 없다. 어차피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죽음이나 마찬가지이기에, 기억을 포기한다는 것은. 나이기를 포기한다는 것은 나로서 살기를 포기했다는 말과도 같다.
그러니 우리는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다. 우리를 기억해주는 건 누구인가. 혹은, 우리는 무엇으로 기억되고자 하는가. 이 질문들의 배후에는 망각이 곧 죽음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런데 이 영화는 현대 사회의 어떤 면을 발견했으면 좋겠다는 의도에서 삽입하는 버즈 아이 숏을 영화의 도입부에 놓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들의 목표는 현대 사회의 어떤 면을 비판하려는 게 아니다. 그러니 이 영화를 청춘의 성공욕, 취업과 같은 것으로 치환하면 곤란하다. 오히려 영화는 그 설정 쇼트를 영화의 중간, 헬리콥터가 그들을 구출해 오는 장면이나 도시를 뛰어넘기 위해 조명을 관측하는 두 남녀의 모습 사이에 ‘은밀하게’ 끼워 넣고 있다. 나는 이것이 이 영화가 우리에게 취하는 최소한의 예우라고 생각했다.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와 그 모조품인 한국영화 <돈>의 도입부에 도심을 관망하는 설정 쇼트가 나오지만, 그것은 단지 이곳이 빌딩 숲이라고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이것은 실패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나는 당신이 이 영화를 보면서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싶다. 영화는 당신이 위기에 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내심 배려하고 있다. 이 위기는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상황의 치정극이나, 어둠 속에 갇힌 폐소공포증에서 오는 담론의 활로가 아니다. 우리는 그냥 달려야 한다. 몇 년 전 유행했던 모바일 게임 <놈>처럼 그냥 달려야 한다. 그러나 그냥 달리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내일을 향해 쏴라>의 그들처럼 자신의 내면이 좁혀져 가는 것을 피해 달아나라는 것이다. <달려라 하니>의 하니처럼 부모님을 위해 달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시대와 상황이 교차하는 당신이라는 지금-이곳의 좌표를 벗어나 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해보라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노력이라고? 나도 그렇지만, 영화는 당신에게 노력하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만약 당신이 그에 반대한다면 <델마와 루이스>의 마지막 장면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또는 <황무지>에서 소년이 경찰에 검거될 때 범행 이유로 무엇을 말했는지 떠올려 보는 것도 좋겠다.
앞이 보이지 않아요. 분명 눈앞에 선명히 보이는 게 있는데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그런데 위나 아래는 보여요. 왜냐하면 이곳은 도심이거든요. 그리고 도시는 공동체가 아니라 빌딩 숲이거든요. 요컨대 빌딩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행복은, 무조건 앞만 보며 살 수 없다는 자조 어린 한숨이다. 이 대목에서 어쩌면 나는 그것이 담배 연기이거나 한숨 덩어리라고 생각했다. 위를 보면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이지만 결국에는 비가 내리는 게 그들의 미래도시이다. 영화는 예외적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는 말을 꺼내지만, 이 말은 곧 영화의 도입부로 연결되어서 깊은 한숨을 내쉬는 조정석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아마도 영화는 그들이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달리기를 원했을 테다. 하지만 차이점이라면 그들의 달리기가 과연 무엇을 위함이었는지를 이해하는 과정이 포함되어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머릿속에 들어찬 골 아픈 이야기를 피해 달아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면서도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지 못한다. 타인은 결국 지하철 안에 오가는 찰나의 인연일 뿐이고, 그런 비극이 만들어낸 현상은 누군가 농담으로라도 시골 공동체가 좋았다고 말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시골이 좋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수평으로 넓게 퍼진 집이었을 테다. 다시 말해서 도심의 빌딩 숲이 만들어낸 것은 높낮이가 아니라 수직으로 쌓인 수평적 관계의 연속이다. 이 연속이 영화 도입부의 설거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세제를 끼얹고는 그릇을 차곡히 눌러 담는 조정석의 모습이다. 거기에 갑자기 삐끗하는 소리가 들려오면서 거실에서 티브이를 보던 부모님들은 무슨 일 있냐고 물어오는데, 카메라는 조정석의 뒷모습만을 부모님의 시점 쇼트로 비추어줄 뿐이다. 아마도 이때 조정석은 내면의 자욱함을 빡빡 씻어내러 가는 중이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의 ‘if’는 조정석이 설거지를 끝마치는 순간이다.
나는 어쩌면 그 설거지 이후의 모든 장면이 허구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게 되었다. 예를 들어 조정석이 부모님의 고희를 위해 마련한 장소는, 베일에 쌓인 안개도시가 된 미래신도시, 라는 이름의 사실상의 송도이다. 영화가 진행되다 보면 이곳은 바다 건너에 있는 섬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물이 자리하고 위로는 유독가스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다. 요컨대 이건 정말로 안개도시가 되었다. 그러니까 사실 이곳이 우리네 현실과 단절된, 동떨어진 어딘가라는 느낌을 영화는 주고 싶어한다. 그래서 이곳으로 접근은 불허되어 있고, 하지만 공권력이 안으로 투입되지 못하고 하늘을 떠도는 가운데에, 민간 비행체에 해당하는 드론은 그곳으로 날아가 두 남녀를 조명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 드론들이 다른 영화처럼 공격용도 아니고, 군사용도 아니며, 방어용도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영화는 무엇을 중개하려 하는 것일까? 그 드론들은 어디에서 왔으며, 인터넷 방송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미지가 중개되고 있다. 사람들이 보지 못한 이미지가 티브이 바깥에서, 티브이 안쪽에서 목격되고 있다. 이곳에는 정보를 통제하거나 조작하는 언론의 모습은 없다. 오로지 생각하는 그대로 묘사되는, 보여지는 일대일 미디어의 모습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역으로, 그런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자신을 표현하기를 더욱 힘들어한다. 회사는 자기소개서를 구직자에게 요구한다. 미디어는 관찰 카메라를 설치해 카메라를 의식하는 연예인의 모습을 대중에게 보여준다. BJ는 자신의 모습이 컨셉이 아니기에 더욱 매력적이지만, 그만큼 방송과 실제의 간극이 좁기에 실재의 틈새가 더욱 위협적으로 작용한다. 이렇게 등장한 21세기의 스타 시스템은, 한번의 방송에서 수천 수억을 투자하는 사람을 만들어내지만. 반대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포토 리얼리즘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의 목소리가 생겨나면서 배우들의 목소리에 실망하던 대중이 있었다면, 이곳에는 자신이 생각하는 세계가 곧 실체라고 믿는 이들이 도심 한복판을 질주하고 있다. 그렇지만 당신도 나도 잘 알듯이 이곳에 탈출구는 없다. 이 게임은 이미 시작되었고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안개는 걷힐 것이며, 해는 뜰 것이고, 우리는 늙어갈 테다.
당신이 추락하는 것은 이미지가 추락하는 것이다. 그러니 살아남아라. 기필코 올라가라. 이것은 상승이 아니라 회복이다. 요동치는 그래프의 물결 속에서, 자욱한 안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저 자신을 믿고 뛰는 수밖에 없다. 그게 클라이밍과 인생의 공통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