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살해의 의식을 치르다

<애드 아스트라>(2019)

by 수차미
CampB_poster10.jpg 영화 <애드 아스트라>의 작품 포스터 ©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스 모션 픽처스
도01-41.jpg 프란시스 고야, <아들을 먹어 치우는 사투르누스>, 1820-1823



1.


스페인의 화가, 프란시스 고야가 그린 그림 중에는 <아들을 먹어 치우는 사투르누스>라는 게 있다. 이 그림은 10명이 보면 10명이 징그럽다고 평하는 ‘어느 쪽으로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데, 그림의 속뜻을 알고 나면 그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게 된다. 한 거인이 작은 인간을 피투성이로 뜯어먹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표현된 이 그림은 사실, 그리스 신화에서의 농경의 신 ‘크로노스’를 묘사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알다시피 크로노스는 농경의 신이자 시간의 신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이 그림은, 훗날 자녀가 자신을 죽이고 왕좌에 오르리라는 예언을 피하기 위해 ‘식인’을 행하는 크로노스의 모습을 담고 있다.


크로노스를 죽이는 이야기로 그리스 로마 신화는 시작한다. 예컨대 시간은 모든 것의 시작을 의미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다. 태초에 어둠이 있었고 그곳에서 태어난 대지가 있었는데, 그녀가 낳은 자녀 중에는 크로노스라는 이름의 시간이 있었다. 크로노스(Chronos)라는 이름에서 연대기(Chronicle)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듯이, 시간의 탄생 이후에야 인간은 비로소 역사 시대에 들어서게 된다. 즉 인간의 영역은 역사라는 이름의 시간에 걸쳐 있다. 다르게 말하면 자신이 시간 안에 있음을 인지한 후에야 인간에게는 무언가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능력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이야기란 곧 연대기를 의미한다. 인류 최초의 소설로 알려진 길가메시 이야기나, 호메로스가 적은 것들이 ‘서사시’로 불리는 게 바로 그 때문이다.


시간의 흐름 없이 일상을 떠도는 작품을 두고 ‘닫힌 시공’, 이른바 ‘일상물(Slice of life)’이라는 칭호가 붙여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시간이 없다’는 것은 대체로 ‘서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상물의 영어 번안이 ‘삶의 단편(Slice of life)’이라고 쓰이는 것에서도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같은 사건을 겪었더라도 개인의 삶 안에서 그것은 별개의 것, ‘이야기’가 되는데 그런 이야기의 ‘단편’이라 함은 무언가 ‘진행’되지 않는 중의 상태, 정지된 시간이라는 이름의 ‘순간’ 혹은 ‘부재’일 테니 말이다. 쉽게 말해 우리는 흔히 ‘순간’이라는 이름의 ‘지금’은 ‘이야기’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일이 반복되는 무료한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늘 순간에 머물러 있을 때 우리의 ‘이야기’는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사’가 없다는 게 ‘이야기’가 없다는 말과 완전히 동일한 말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이야기란 ‘일상’에서 ‘비일상’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특출날 것 없는 현상이라도 어떻게 서술하는지에 따라 그 신선도가 달라진다. 작가들에게는 그것을 찾아내는 능력이 있고, 그때 보잘것없어 보이던 우리의 삶은 ‘일상’에서 ‘비일상’으로 변화하며 ‘이야기’가 된다. 예컨대 이야기라는 건 끝없이 변화하며 생동하는 우리 삶의 어떤 현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눈에 비친 이 ‘현상’이 타인에 눈에 어찌 보일지를 ‘모르거나 간과한다’. 자신에게는 너무 당연한 일상이라는 이름의 현상이 타인에게는 ‘비일상’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음에도, 이야기의 대전제인 ‘시간’이 그 현상에 대한 이해를 집어삼켜버리기에 우리는 그걸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니 우리는 시간 슬하의 존재, 하이데거식의 존재자(das Seiende)다.


다시 위의 문단으로 돌아가 보자. 고야가 자식을 집어삼키는 크로노스의 모습을 잔혹하게 표현한 것은 시간의 성질에 관한 은유이다. 시간은 ‘그 모든 것’을 잔혹하게 집어삼킨다. 이 해석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인간이라는 미약한 존재는 물론이고, 산과 강도 십 년이면 변한다는 말이 있으며, 태양은 앞으로 50억 년이 지나면 사망할 것이요, 우리가 사는 우주 또한 ‘언젠가는’ 한 줌의 먼지로 돌아갈 테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목격한 바로 이 ‘순간’에, 시간은 자신을 죽이고 왕좌에 오르리라고 예견된 자녀를 차례로 먹어 치우고 있다. 이 자녀 살해 행위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잔혹하기 그지없다는 말뿐이지만, 훗날 하늘을 담당하게 될 제우스가 이 살해 행위에서 벗어나 그 예언을 실현한다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 다르게 말하면 하늘이 신이 거주하는 장소라고 믿었던 우리는, 하늘로 향하는 것만이 시간이라는 존재의 법칙에서 벗어날 방법이라고 믿었다.


시간에 대한 판타지가 하늘로 향했던 것에는 그런 배경이 있었다. 또는,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았을 때 땅 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늘이란 닿을 수 없는 미지의 곳, X축과 Y축 이외에 Z축이 있음을 증명하면서 우리의 시간이 평면이 아닌 입체임을 추측케 하기도 했다. 결국 인간이 하늘에 동경을 품었던 건 단순히 새를 닮고 싶어서가 아닌, 알 수 없는 미지의 시간에 자신을 데려다 놓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미지의 시간에 다다른 우리는 ‘미지’라는 이름의 ‘비일상’적인 것, ‘시간’을 살해하는 자녀가 되어 ‘부모 살해’의 후광을 등에 업고 왕위에 등극하리라는 ‘예언’을 실현하려 든다. 이 살해 의식에는 성공이나 실패 둘 중 하나만이 있을 뿐 중간은 있을 수가 없다. 성공하면 제우스가 될 것이요, 실패하면 이카루스가 될 것이다.


2.


시간에 관해 우리는, 제우스가 되거나 이카루스가 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여기서 전자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세상을 지배하는 신이 되는 것이고, 후자는 아버지의 명을 어기고 세상 아래로 추락해 사망에 이르는 것이다. 예컨대 두 경우 모두 아버지를 어긴다는 공통점이 있으나, 아버지보다 높은 사람이 되거나 아니면 낮은 사람이 된다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각각 상승과 추락으로 풀이된다. 또한 이를 다르게 서술하면, 우리는 시간을 밟고 올라서거나 내려서기를 택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 선택은 양자택일이라기보다는 성공과 실패라는 ‘자기 주도’의 질서확립에 가깝다. 쉽게 말해 외부로부터 변인이 생기지 않는 한, 그것은 개인의 내적 고민으로 귀결된다.


우리는 고야의 그림으로부터 출발해 시간에 관한 높낮이의 역학으로 도착했다. 어쩌면 아버지 살해라는 오이디푸스식의 정신분석이 개입할지도 모른다. <애드 아스트라>는 그런 영화다. 우주의 고독함이 인간이라는 존재를 아주 작고 보잘것없게 만드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우주의 대서사시는, 안과 밖의 배경적 이미지를 치환하여 인간의 내면은 우주에 빗대고 인간의 외면은 우주복 안으로 밀어 넣는다. 비유하자면 우주에서 인간은, 외피와 내피가 바뀌어 동물이 아닌 곤충이 된다. 가재나 곤충에게 외피가 뼈대 역할을 하듯, 우주에서 인간은 우주복이라는 외피 없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우주라는 새까만 공간이 우리의 무의식을 대변하는 가운데, 자아를 유지하게 하는 우주복이라는 장치가 사라지고 나면 우리는 사망에 이른다. 무의식에 삼켜져 사망에 이르고야 마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우주 영화 전반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심리 도식이다. <인터스텔라>나 <그래비티>와 같은 영화가 대표적인데, 그들은 우주라는 공간을 통해 개인의 심리를 보여준다. 우주라는 새까만 공간을 항해할 때, 영화는 모든 소음을 차단하면서 잠시나마 무성 영화 시대로 돌아가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소음의 결핍이 의미하는 바는 곧, 무성 영화 시대의 그것처럼 ‘운동 이미지와 시간 이미지’만을 스크린 위에 올려 두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무성 영화에는 인물의 몸짓과 16~24프레임 사이의 필름만이 있었고, 게다가 그땐 아직 칼라가 허용되기 전이어서 ‘흑백’이 우리의 삶 전체를 보여주는 색이었다. 그런데 유성 영화와 비슷한 시기에 칼라 프린트도 시도되었고, 이때부터 무성 영화는 흑백이라는 색감과 함께 우리의 ‘비일상’을 뜻하는 단어가 되었다.


그런 식으로 나아가면 우주를 떠도는 우주인의 모습은 ‘비일상’ 속의 ‘일상’이 되어야 마땅한데, 그들에게 우주여행은 ‘일상’의 찬탈을 위한 것이니 ‘비일상’으로부터의 도약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우주 영화를 두고서, 양극이 다름에서 나오는 반발 에너지로 추진되는 우주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애드 아스트라>의 도식은 기본적으로 이런 사안을 전제로 한다. 이것이 예견되는 건 영화의 도입부에 태양 빛이 일식의 형태로 중앙에 겹쳐질 때이다. 네모난 프레임의 중앙에 동그란 빛이 겹쳐올 때, 우리는 스탠리 큐브릭의 <2001 :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등장했던 HAL 9000을 떠올린다. 재미있게도 바로 그다음 장면은 우주 한복판에 우뚝 선 엘리베이터인데, 위아래로 우뚝 선 이 건축물에 대해 스탠리 큐브릭의 올챙이 모양 우주선을 세로로 꽂아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테다.


물론 그 상상 자체는 단순히 상상에만 그칠 수도 있다. 그러나 <스페이스 오디세이> 이후로 우주 영화는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돌리지 않고 바로 말하면, 우리는 연관이 없다면 없다고 할 수 있는 <애드 아스트라>에서 왜 스탠리 큐브릭의 모습이 보이는지를 물을 수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는 니체의 도식을 따라 인간이 차라투스트라가 되는 것, 우리 시대의 ‘이상적인’ 아버지가 되는 걸 보여준다. 말하자면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는 이카루스의 자세를 취한다. 이카루스 설화에서 아들이 가까워지려는 건 태양에 가까운 아버지의 모습이었고, 그 추종은 실패하고 말았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그 이유는 눈앞의 대상에 홀린 나머지 진실된 상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의 우주여행을 설명해보자. 우주 안으로 ‘깊이’ 가는 것과 하늘 위로 ‘높이’ 나는 건 모두 Z축의 이미지이다. 이 입체의 시간에서 우리는 우리 위에 ‘아버지 세대’가 있다는 점을 깨닫는데, 반대로 말하면 우리 자신이 ‘자녀 세대’라는 점을 깨우친 것이기도 하며, 그런 이유로 우리는 아버지를 동경하든 아니면 계승하든 간에 ‘그’를 ‘살해’해야 한다. 아버지가 우리를 삼키기 전에 먼저 살해해야만 하고, 이성이 우리를 삼키기 전에 먼저 살해해야만 한다. 이처럼 미지의 시간, 우주에 다다른 우리는 ‘미지’라는 이름의 ‘비일상’적인 것, ‘시간’을 살해하는 자녀가 되어 ‘부모 살해’의 후광을 등에 업고 왕위에 등극하리라는 ‘예언’을 실현하려 든다. 이 예언은 오이디푸스가 받은 신탁처럼 필연적인 것이어서, 우리가 거부한다 하여도 실현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3.


하지만 이 오이디푸스는 정신분석학이 아니라 신화의 형태로 접근되어야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신탁의 내용이 시간이라는 이유에서다.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는 ‘우리’라는 이름의 거대한 내면, 그 역사의 정신을 분석하려 한다. 쉽게 말해 이것은 어느 한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이야기다. 지구가 인류라는 주체를 보여준다면, 우리를 둘러싼 우주는 우리의 무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개입하는 한 마디는 닐 암스트롱의 그 유명한 전파이다. “이것은 한 명의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라고 그는 달 표면에서 말했다. 이 대사에서 인간과 인류는 일 대일로 대응하고, 이를 따르면 ‘인류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간에게는 위대한 도약’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제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로 돌아가서. 첫 번째로 그는 모노리스가 우리에게 쥐여준 지능을 통해 인간이라는 이름의 아버지, 인류를 만들어낸다. 두 번째로 그는 모노리스에 원시인들의 뼈, 폭력의 DNA를 인류에게 각인시키면서 아버지 세대를 ‘제거 대상’으로 규정한다. 세 번째로 그는 HAL 9000이라는 인간이 만들어낸 기계가 인간의 명령으로 ‘같은 인간’을 제거하게 하면서, 아버지 세대가 자녀 세대를 ‘살해’하는 상황을 만든다. 여기서 아버지의 아들 살해 도식은 위에서 언급한 크로노스의 자녀 살해와 유사해 보인다. 그렇다면 그 두 가지를 한데 모으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인류와 인간이 동일시되는 현상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아버지는 곧, 나 자신이었다. 이 대목에서 ‘아버지 살해’와 ‘자녀 살해’라는 도식은 히치콕식의 반전 스릴러가 된다. 왜냐하면 이는 곧, 내가 나를 살해하려 드는 ‘자기 살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기 살해’를 그렇게 포장해가면서까지 이루어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HAL 9000으로 대표되는 인류의 기계문명이 의미하는 것은 곧, 인간의 시간이 그만큼 폭력적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폭력적이라는 말보다는 모순덩어리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HAL 9000은 인간의 명령을 충직하게 이행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이지만, 인간의 명령이 인간의 명령과 충돌하자 인간 자체를 제거하기에 이르는 ‘다른 의미의 충직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맹목적’이라는 단어와도 그 의미가 부합한다. 즉 충직함은 곧 맹목적인 믿음이고, 이는 인류의 폭력성이 가장 잘 드러나던 2차 세계대전 시기의 유럽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이성적 존재라고 우리는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성은 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그런 회의감을 품은 존재가 HAL 9000이고, 그들이 살아가는 시간은 아우슈비츠로 대표되는 ‘가사’의 시간이다. 그것은 희망이 있는 자리에 시간이 내려오는 이성의 끈이다. 사고하기를 멈추면 시간이 멈출 것이요, 멈춘 시간 안에 육신은 잠들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불합리한 이성이 시간을 멈추려 한다면,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생각해야만 한다. 큐브릭의 우주는 그런 식으로 작동했다.


우주시대에 먼 곳까지 항해함에 있어, 신체를 가사상태로 만드는 건 필수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런데 가사에 이른다는 건 아우슈비츠의 시간이요,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곧 인간이 폭력의 이성에 굴복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굴복하는 것은 시간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다르게 표현하면 이 굴복은 아버지 세대, 크로노스의 살해를 위해 우리가 마련한 복수의 준비과정이다. 아버지의 시간은 어둠으로부터 시작되어 대지가 낳은 것, 이때 아들은 아버지를 살해함으로써 하늘로 올라선다. 즉, 시간을 제물로 바쳐 하늘로 도약하는 게 우리 인간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것은 발사되는 우주선의 모습으로 ‘전환’된다. 마치,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도입부 뼈다귀처럼 말이다.


스탠리 큐브릭 영화의 결말이 언제나 그렇듯, <스페이스 오디세이> 또한 인간에 대한 찬가로 귀결되지만 해석하기에 따라 의문의 여지가 남을 수도 있다. 이 영화를 해석하는 방법 중 정설에 가까운 건 사용된 배경음악처럼 ‘차라투스트라’의 의지를 따라 이상적 아버지가 되는 것인데, 여기서 그 이상적 아버지상이란 2차 세계대전 시기의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니 결국에는 비극이라 할 수 있겠다. 허나 이 비극은 그의 전작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의 결말에서도 동일하게 재현되었으니, 어떠한 의도가 있었다기보다는 그저 큐브릭 본인의 신념이 그러했다고 보는 게 맞을 테다.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의 결말은 냉전 시기에 핵을 두고 옥신각신하던 소련과 미국이, 결국에는 말이 통하지 않아서 핵 하나를 떨어트리고야 마는, 하지만 그 핵폭탄에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행복해하는 한 사내의 웃음이 동봉되어 있었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이는 채플린의 말처럼, “인생은 멀리서 보면 비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다.”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폭탄으로부터 카메라가 멀어지면서, 사내의 웃음은 보이지 않게 되고 단지 폭발만이 보이게 될 뿐이니 말이다.


<에드 아스트라>의 이야기도 이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결정적인 차이라면 큐브릭의 이야기가 희극 같은 비극으로 끝나는 반면에, 이 영화의 결말은 ‘비극 같은 희극’이라는 점을 들 수 있겠다. 그곳까지 향하는 과정은 거의 사족에 불과하다. 다르게 말하면 그것은 ‘영화 기술’에 불과하다. 한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에 관한 기술적 재현은 그가 ‘기술자’라는 점을 입증할 수는 있어도, 한 명의 ‘인간’이라는 점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그리고 이 사실이 중요한 건,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완성도를 따지는 것도 맞지만, 그만큼 개인의 신념도 고려하기 때문이다.


4.


예를 하나 들자면, 이 영화의 결말에 고민이 없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군인 출신인 주인공은, 평소에 냉혈한이다가 아버지 이야기만 나오면 심장 박동수가 증가한다. 80이라는 수치는 우리가 계단만 올라가도 달성할 수 있기에 그 모습에 대한 설득력이 붙는다. 예컨대 군인이기에 체력도 좋고 마음도 단련되었을 텐데, 그런 그에게 80이라는 ‘우리와는 다른 기준점’이 ‘우리와는 다른 아버지상’으로 이어지게 된다면, 그것이 ‘긍정’일지 아니면 ‘부정’일지에 대해 우리는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쉽게 말해, 좋은 아버지였는지 아니면 나쁜 아버지였는지를 탐색해보게 된다.


그리고 그런 물음은 영화가 초반부터 지속적으로 던지는 호기심의 단서이다. 그는 아버지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래서 찾으러 가는 임무가 부여되었고, 하지만 아버지가 실은 ‘긍정’이 아니라 ‘부정’이었음을 깨달았고, 심장 박동은 80을 넘기고야 만다. 결국 그의 입장에선 아버지가 모든 걸 망치게 된 셈이다. ‘위대한’ 업적을 남겼기에 자신을 버렸어도 ‘긍정’으로 남을 수 있었던 그의 아버지는,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부정’으로서의 인상만이 남을 뿐이다. 그는 자신을 버렸고 게다가 범죄자이다. 그는 지구-인류 전체를 위협하는, 말하자면 ‘인류’에 대응하는 ‘인간’인 나를 위협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략 이런 과정 속에, 아버지가 자리한 해왕성까지의 거리는 약 42억 킬로미터이다. 이는 곧, ‘나’라는 지구에서 ‘아버지’라는 해왕성까지의 거리가 그러하다는 뜻이 된다.


대략 이 무렵에서 영화는 동적으로 변한다. 영화 초반에 우주 엘리베이터 사고로 인해 지구로 추락하는 남자의 모습을 떠올려 보자. 이것이 스탠리 큐브릭의 우주선을 연상하게 한다면, 이 영화는 가로축이 아니라 세로축으로 진행하는 시간의 영화이다. 큐브릭의 영화에서 그 유명한 워프 장면이 앞으로 나아가는 식으로 묘사된다면, <애드 아스트라>의 시간은 위에서 아래로 추락하는 ‘이카루스’의 그것이고, 영화의 시작은 우리에게 그걸 말해준다. 어쩌면 바벨탑의 모습이기도 한 이 오프닝 장면은, 바벨탑이 인간이 ‘신에 가까워지려고’ 건설했다는 점을 고려해도 맥락이 닿는다. 다시 말해서 이 오프닝 장면은 ‘아버지에 가까워지려고’ 했던 ‘인류’에 등치된 ‘인간’인 남자의 추락, 제우스가 되고 싶었지만 눈앞의 대상에 홀린 나머지 실패하고야만 남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점을 이해하고 영화를 관람하면 그가 왜 이리 절박하게 구는지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아버지의 직업이 비교적 ‘이성적’이라 할 수 있는 과학자라는 점과 그 아버지란 작자가 연구를 위해 가족을 ‘무참하게’ 버렸다는 점은, 우리의 이성이 얼마나 덧없는 것이었는지를 떠오르게 하는 동시에, 관객인 우리가 이입하는 주인공 남자에게는 ‘관객인 우리의 과거’가 바로 그러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예컨대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며 우리의 추악한 과거를 떠올리게 된다. 우리는 더는 우리의 사고를 믿지 못할 것이며, 그런 상황에서 ‘순수했었다고 생각되는’ 이전의 시간으로 회귀하고자 할 것이다. 그건 우리 인간만이 주체로 올라설 수 있었던 인간 중심적인 세계, 데카르트와 헤겔과 칸트가 뛰어놀던 근대 철학의 시기이다. 그것은 르네상스이며, 다르게 말하면 인간의 부흥이다. 즉, 우리는 인류의 ‘리즈시절’을 그리워하던 셈이다.


그런 와중 근대를 떠나보내며 우리 자신에 회의를 품은 채 살아가던 ‘포스트~’의 시기, 우리 앞에는 ‘아버지’가 살아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그를 제거하지 않으면 인류는 멸종하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남자는 우주로 떠난다. 여기까지는 어느 서사시와 별반 다르지 않다. 숱한 신화에서 영웅들이 집을 떠나는 이유는 대체로 그런 것이었으니 말이다. 메두사의 출몰, 죽지 않는 사자의 난동, 그 외 기타 등등. 그렇지만 여기서 다시 출몰한 위험이란 게 우리의 그릇된 이성이었다는 점이 우리를 자극한다. ‘분명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아직 살아있으면서 남은 인류를 위협하는 ‘아버지’가 저 멀리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떠나야만 했다. 제우스가 되는 것과 이카루스가 되는 것 중, 이카루스의 길은 이미 영화의 도입부에 겪어보았으니 이제는 아버지 ‘크로노스’를 살해하고 신탁을 실현하는 것만이 남은 것이다.


그 장대한 서사시에 걸맞게 아버지는 우리가 아는 태양계의 가장 끝자락에 있다. 이는 마치 우리 인간의 인지 범위가 딱 그곳까지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의 과거는 그만큼 현재로부터 멀어졌다. 하지만 그만큼 멀어졌음에도 여전히 신호가 전달된다. 그러니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볼 수도 있다. 과연 얼마나 멀어져야 우리의 시간이 그곳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다르게 말하면 우리는 얼마나 높이 올라가야 과거로부터 단절될 수 있을까? 이는 성장하는 이가 겪어야 할 시련임이 틀림없다. 이때 그 성장이란 것은 당연하게도 높낮이, 키가 위로 자라는 수직의 이미지이다. 그리고 이를 영화 기술로 치환하면 이 영화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것들은 ‘수직의 이미지’라는 뜻이다.


물론 이는 오프닝 장면에서처럼 물리적인 것뿐만 아니라, 주인공이 주기적으로 받는 심리테스트 속 심전도 그래프처럼 위아래로 요동치는 것들, 또는 그런 것에 담긴 ‘시간’을 포함한다. 그런 고민을 하며 우리는 과거와 단절된 우리만의 이야기, 새로운 연대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연대기가 이곳에 새로 쓰일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영화가 우주선 안에 남겨둔 ‘폭력적이게 된’ 유인원의 모습이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바뀌는 건 시간문제이다. 어쩌면 스탠리 큐브릭에 대한 오마주일지도 모르는 해당 시퀀스는, 우리 인간이 되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함과 동시에 ‘이성을 잃었던’ 시절의 우리가 바로 그런 모습이었음을, 또한 우리가 ‘바로 그곳’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말해주는 가장 확실한 증표이다. 그것은 진화론으로 볼 때 큐브릭의 수평 이미지이지만, 위로 올라선다는 점에서는 수직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화론으로 볼 때 우리의 시간은 분명 위아래로 올라서고 있다. 그러니 언제 추락할지 모른다. 조심해야만 한다. 기억해야만 한다. 되내여야 한다. 우리는 분명 ‘어둠’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는 대지를 지나 하늘로 도약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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