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여다보고 투입하는 카메라

<암전>(2019)

by 수차미
movie_image5(22).jpg 영화 <암전>의 작품 포스터 © TCO(주)더콘텐츠온


1.

<암전>은 김지원 감독 본인의 취향이 듬뿍 담긴 영화다. 이를테면 공포영화를 통해 영화에 입문했다고 말하는 대목은 영화 속 주인공 미정(서예지)의 모습과 닮아있다. 즉 영화에 대한 사랑의 출발선이 같다. 물론 이것만으로 감독의 애정을 운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간접적인 영향이 있을지언정 그것을 직접 노리고 만든 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공포영화라기 보다는 그 자신의 사랑 고백이 더 도드라지는 면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차분히 설명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미정(서예지)이 이제 막 입봉을 앞둔 신인 감독인 것처럼, 그 또한 장편 상업영화에서는 <암전>이 처음이다. 그러므로 <암전>을 두고 김지원의 상업계로의 입봉 작품이라 해도 좋겠다. 그러니 이 영화는 ‘김지원이라는 사람이 앞으로 무엇을 만들 것인가’, 를 설명하기에 하나의 단서가 된다. 즉 이것이 그의 첫 번째 상업영화라는 점에서, 작가로서 자신을 표현하는 지표를 하나 만들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보통은, 첫 번째 영화에서 신인감독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꽉꽉 눌러 담는 경향이 있다. 일종의 싫지 않은 열정 과잉인 셈이다.


이제 작품의 도입부로 들어가자. 작품의 오프닝 시퀀스는 만석인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미정의 모습이다. 그런데 화면이 어두워졌다가 다시 들어오자, 잠에서 깨어난 듯 보이는 미정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이 장면의 의도는 아마, 작품의 시작을 작품의 결말에 자리한 상영회와 수미상관으로 잇기 위한 것일 테다. 여기서 수미상관은 홀로 남겨진다는 관객의 공포에서, 만석이 채워진다는 감독의 기쁨으로 이어진다. 말하자면 이것은 관객의 입장에서 감독의 입장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후자는 그럴싸하지만 전자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관객이 홀로 극장에 남겨지는 게 그렇게 두려운 일이던가. 물론 어두운 장소에 문이 잠긴 채로 혼자 남아있으면 무서울 만도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작품의 본 서사에 공포를 보탤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장면이 본편에서 폐극장 안에 갇히는 미정의 모습과 대응하는 것이 분명함에도, 당장 스크린 바깥에서 영화를 지켜보는 관객에게는 주변에 이것을 함께 관람하는 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실제 관객인지 아니면 심리적인 상상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요컨대 스크린 안쪽이 미정의 내면을 보여주는 정신분석학적인 장소인데 반해, 스크린 바깥에서 스크린의 안쪽은 그저 몰입의 대상에 불과하다. 그래서 관객의 극장에는 그들이 의도하는 공포가 넘어오지 못한다.


그러니까 오프닝 시퀀스는 작품 전체를 견인하는 요소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영화의 입구와 출구를 만들어 둘 용도로 삽입된 시퀀스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 시퀀스를 두고서 본편에서의 미정의 모습을 설명할 수는 없다. 이 시퀀스는 단지 미정의 심리적 상태, 그 출발점을 미리 전제해두는 데 필요할 뿐이다. 그렇게 영화는 막이 오른다. 이 시퀀스 다음에는 악몽에서 깨어난 미정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말하자면 관객으로서의 미정은 꿈속에서만 존재한다고도 할 수 있다. 즉 현실에서 그가 감독이라면, 꿈속에서는 관객이 된다.


따라서 어쩌면, *영화 속 <암전>을 그토록 보고 싶어하는 미정의 모습은 ‘관객으로서’ 존재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영화 속 <암전>을 욕망하게 되는 순간, 미정은 꿈속에 빠지게 된다. 나는 바로 이 대목이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본디 영화라는 게 꿈을 표현하는 매체로서 잘 알려졌지만, 작품 속에서 영화란 감독을 꿈꾸는 이들에게 ‘다른 의미로의 꿈’이기도 하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미정이 *영화 속 <암전>에 얽힌 소문을 찾아가는 첫 번째 단계에서, 술자리에서 만난 대전대 학생들은 크리스토퍼 놀란이나 드니 빌뇌브와 같은 명감독의 이름을 읊어대면서 ‘어떻게 해야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있다. 즉 그들은 영화를 그대로 ‘꾸거나’, 혹은 영화를 ‘꿈꾸고’ 있다.


2.


이 흥미로운 꿈의 중첩에 관하여 할 말이 있다. 우리는 영화의 도입부에서 ‘극장 안의 우리가 극장 안에 홀로 남겨진 미정을 보았다’는 사실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해당 시퀀스에서 영화 속 미정과 영화 밖의 우리는 관객 대 관객으로서 대응하는데, 그런 대응이 이루어지는 순간에 우리는 감독이 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위에서 말했듯이 스크린 밖에서 영화를 지켜보는 우리에게는, 그것을 전반적으로 통찰할 동료 관객(생각으로 떠도는 여러 욕망)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 영화는 꿈의 내부에서 관객으로만 존재하게 되는 대상물, 나라는 감독의 시점으로 바라본 나라는 대상물에 관하여 말하는 이중 피동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이중피동 형식은 여러 메타영화에서 발견되는 특징이다. 실은, 굳이 ~ 영화에 붙는 수식어일 필요가 없기도 하다. 단적으로 말해 그것은 두 번의 피동, 내가 무엇이라고 여기는 게 사실은 나라는 전체를 포함한 무엇이었다는 사실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까지만 보면, 이것은 상투적인 언어로 점철된 현학적인 말에 그치는 것처럼 보인다. 허나 이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어느 영화에서 발견된다. 이를테면 이 시퀀스는 마치, <시네마 천국>의 안티 오마주처럼 보인다. <시네마 천국>의 마지막 장면은 어린 시절에 검열을 당해 보지 못했던 남녀의 키스 장면을 한 데 이어 붙인 조각 필름을 극장에 홀로 남아 관람하는 어느 감독의 모습인데, <암전>의 도입부는 극장에 혼자 남은 미정의 모습이다. <시네마 천국>의 감독이 자신을 있게 한, 지금의 꿈을 이루게 해준 어린 시절의 ‘꿈-영화(하지만 상실되었던 그러나 지금은 조잡하게나마 편린으로 복구된)’을 보고 있다면, <암전>의 감독은 자신을 있게 하는, ‘꿈에게 삼켜지는 관객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공포/욕망’을 ‘꿈’ 꾸고 있다. 요컨대 <시네마 천국>이 꿈에 두 번 다가서는 이중 능동의 영화라면, <암전>은 꿈에 두 번 삼켜지는 이중 피동의 영화이다.


이에 따르면 *영화 속 <암전>의 감독인 재현(진선규)이 자신의 영화에 관하여 했던 말은 어떤 함의를 갖게 된다. 그는 “이 영화는 귀신이 찍었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귀신이 자신의 동료들을 죽였고 그 모습을 영화로 찍어놨는데, 자신은 단지 그것을 헐레벌떡 주워오기만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걸 들으며 생각했던 것처럼, 미정도 그 말을 하는 재현을 두고 미치광이쯤으로 취급한다. 하지만 이것이 공포영화인만큼 그건 진실이었고, 미정도 재현과 동일한 과정을 거치면서 ‘귀신이 찍은’ 양질의 공포영화를 만들어 성공적인 ‘데뷔’를 하게 된다.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폐극장에서의 장면들은 미정 역을 맡은 서예지 배우가 온몸을 뛰어 대역 없이 직접 소화했다고 한다. 트리비아에 불과하지만 이걸 언급한 이유는 따로 있다. 폐극장에 내쳐진 미정은 그곳에서 죽은 과거의 여배우 유령을 목격한다. 여배우의 생전 모습이 담긴 필름이 스크린에 영사되는 가운데, 그 스크린의 중앙에서 미정이 이리저리 몸을 헤매고 있다. 그러면서 미정은 과거에 *영화 속 <암전>을 만들었던 스태프들이 살해당할 때, 그들을 죽인 귀신에 빙의하여 그들을 죽이는 ‘체험’을 ‘현재’에 하게 된다. 즉 이것은 현재에서 체험하는 과거이거나, 과거의 그들을 죽인 게 현재의 미정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여기까지는 알 수 없다. 영화가 그 해석의 길을 모호하게 열어두었기 때문이다.


둘 중 무엇을 택하든 간에, 꿈의 공간에 진입한 미정이 겪는 모든 상황을 ‘꿈’으로 엮어버릴 수 있다. 해석이 무의미하거나 자유롭다는 소리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꿈의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체험이라는 점에 주목해야만 한다. 스크린 바깥에서 안쪽을 바라보는 우리가 과연 그것을 체험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물음은, 애초에 스크린을 통과할 수 없다는 점을 전제로 한 것인데, 만약 우리가 그 안에 부드럽게 진입할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영화는 바르게 체험될 수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누군가는 귀신을 만나 미쳐버린 재현의 모습을 두고서, ‘내면의 결여가 자리한 실재계의 주이상스’와 접촉한 재현이 그곳으로부터 나온 후에 줄곧 리비도의 분출을 겪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생각해보건대 이 해석은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 맞는 말도 아닌 듯하다. 오히려 이 영화는, 그들의 폐극장으로 진입한 순간 ‘극장’이라는 그곳의 특수성으로 인해 꿈이 대체되어버린다. 왜냐하면 이 극장 안에는 우리가 잠시 잊고 지내던 그 이름, ‘국도극장’과 그곳의 여배우 순미(조아라)의 사진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3.


모르는 이들을 위해 잠시 부족한 첨언을 하자면, 국도극장은 일제강점기에 설립되어 1990년대 초까지 존재했던 극장이다. 1913년에 개장한 이 극장은 1990년에 철거되었는데, 짐작하시다시피 이곳은 우리나라 영화사의 한 자리를 차지한, 다소 과장을 하자면 성스럽기까지 할 상징성이 있다. 한국 최초의 감독이라 불리는 나운규도 이곳을 거쳐 갔을뿐더러, 일제강점기라는 특성상 ‘제대로 된 한국영화’가 나오기 힘든 상황에서 ‘한국영화’가 이곳에서 개봉했다는 점은 이곳을 특별하게 한다. 따분한 역사 공부는 여기에서 끝이니 자리를 떠나지 말아 주시길. (올해는 한국영화 100주년이고, 봉준호가 한국영화 최초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내가 이 부분을 눈여겨본 것은 이 영화가 꿈에 관한 영화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위에서 (충분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설명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폐극장이 어떤 곳인지는 명확하게 설명되지는 않지만, 내부에 이 극장에서 촬영되었다는 영화관계자들의 사진이 걸려있는데, 그곳에는 자살했다는 여배우 순미와 그 뒤의 국도극장 글자가 찍혀있다. 이 대목에서 나는 이 영화가 지금은 사라진 국도극장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살려내려 한다고 생각했다.


이곳이 정말로 국도극장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곳은 꿈의 공간이며, 이미 사라진 극도극장을 세트로 재현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국도극장이라는 시대를 풍미한 한국영화사의 유산과 그 안에서 여배우 한 명이 화재로 인해 숨졌다는 점이다. 여기서 잠깐, 나는 그 두 가지 사실을 하나로 이어 붙이려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 여배우가 제 꿈을 다 이루지 못한 채로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또는 그녀의 직업이 배우라는 점을 고려해볼 수도 있을 테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서 스크린을 두고 관객과 감독의 관계에 관해서는 언급했지만, 정작 그 꿈의 운반자로 지정된 배우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우는 카메라에 찍혀지는 자신을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그런 자신이 아니라 연기의 대상을 연기해야 한다. 이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최근 유행하는 관찰형 예능프로그램을 생각해보라. 관찰형 예능프로그램이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평소를 보여준다고 홍보하지만, 그들이 카메라를 인식한 순간 이미 그것은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니게 된다. 즉 그들은 카메라를 인식함으로써 연기자가 되고, 연기하는 직업인 배우는 자연스럽게 연기를 하지만 사실은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두 가지 자연스러움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꿈의 유무이다.


배우는 타인의 꿈을 연기하는 직업이다. 요컨대 배우를 꿈꾸는 것은, 타인의 꿈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것을 욕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평소 모습은 이중능동이 된다. 다시 말해서 배우는 누군가의 영혼을 뒤집어씀으로써 그들의 꿈으로 진입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꿈 안으로 직접 진입하는 능동적인 직업이다. 말 그대로 그들이 카메라를 ‘의식’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들의 평소 모습은 그들 자신의 꿈을 실현하고 있을 때다. 카메라가 그들을 포착하는 게 아니라, 카메라를 의식하고 그곳에 자신이 ‘찍히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배우라는 정체성을 지니게 된 이상,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즉 카메라에 자신을 투입하지 않으면 그들은 살아남지 못한다. 그런데 이 사실은 피동과 능동이라는 두 가지 상태 모두로 작동한다. 배우가 카메라를 향해 꿈을 들이미는 직업이라면, 반대로 카메라가 그들을 삼키려고 다가올 수도 있을 테다. 이 사실은 찍히고 싶지 않을 때도 찍혀야만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수잔 손택이 말하던 카메라의 특별성은 사라지고, 오히려 그것이 우리를 가두어놓는 흉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4.


여기서 문제. 감독은 <암전>의 주인공을 왜 감독으로 설정했으며, 왜 그 무대는 폐극장이고, 그 극장의 피해자는 국도극장의 여배우인가. 영화의 주인공인 미정이 사용하는 도구는 스마트폰과 노트북으로, 이것은 디지털 시대의 시네마를 보여준다. 반대로 미쳐버린 옛 감독 재현은 비디오 테이프 시절의 사람으로, 그가 찍은 *영화 속 <암전>은 비디오 테이프 안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를 두고 미래인이 과거의 유물을 ‘발굴’해낸다고 표현할지도 모른다. 허나 어찌 되었든 간에 이들의 모습이 현재와 과거를 나누는 확실한 표지라면, 그들이 서로 마주하는 폐극장은 영화라는 하나의 교집합으로 작동하는 거대한 꿈의 세계일 테다.


이 폐극장은 아마도 영화는 꿈이기에 논리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듯 보인다. 일차적으로는 그렇지만 부차적으로는 이 영화가 *영화 속 <암전>과 같은 제목을 공유한다는 점이 도드라진다. 너무 직설적인 게 아닌가 싶기도 한 이 미장아빔 구조는, 영화의 시작과 끝이 극장에 앉아있는 미정의 모습과 연결된다. 그러니까 사실 이것은 미래가 과거에게 보내는 일종의 구조신호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위에서 말한 바를 겹쳐보면, 감독이 관객에게 보내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즉, 이것은 아무쪼록 투입하는 쪽이 투입 당하는 쪽에게 힘을 전달하는 구도이다. 그리고 아마 이것이 이 영화를 통해 김지원이 하려던 행동이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수잔 손택의 카메라를 지적했던 문단을 복기해두고 싶다. 배우는 카메라를 향해 꿈을 들이미는 직업이다. 반대로 카메라가 우리를 집어삼키기도 한다. 이 두 가지 문장만으로도 우리는 굉장히 많은 변형을 해볼 수 있는데, 이를테면 카메라를 스크린에 대응하거나 하는 식의 번역이다. 먼저 이것을 스크린에 대응할 경우, 스크린을 향해 꿈을 들이미는 것은 관객-배우이다. 요컨대 우리는 영화를 보며 다양한 삶을 연기하는 배우가 된다. 이 맥락에 따르면, 거울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를 묻던 마녀는 꿈으로부터 배신당한 게 된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국도극장에서 사망한 옛 여배우가 바로 그렇다. 다시 말해서, 그 여배우는 스크린에 배신당했고, 카메라에 배신당했으며, 꿈으로부터 배신당한 것이다. 그러니 이 영화에서 무언가를 ‘들여다본다’는 것, ‘투입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폭력이 된다는 점은 두말할 것도 없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다음 문장으로 생각이 이어졌다. ‘들여다보고’ ‘투입한다’는 것이 카메라의 역할이라는 점에서, CCTV라는 공공기관의 카메라와 스마트폰이라는 개인의 카메라로 가득 찬 현대 사회는 그들의 영화를 각각 만들어내고 있다. 그렇다면 이 카메라는 우리가 공포영화라고 생각하는 <암전>의 바깥에 우리를 데려다 놓을 것이다. 우리 욕망의 중간 지대로 설정된 <암전> 속 폐극장은 꿈의 몽롱함을 자아내는데, 이곳은 여배우가 죽은 자리이자 한국 영화의 성지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보여주려 하고, 혹은 보임 당하는 것을 강요하고 있다. 그렇다면 <암전>에서 불이 꺼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정제된 어둠에 관하여 ‘어둠이 내린다’라는, ‘꿈이 내린다’라는 말을 사용해볼 수도 있을 테지만. 나는 적어도 그 속에서 벌어지는 암투, 꿈을 능동형과 피동형으로 고쳐 쓰려는 야생이 지금의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진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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