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돌리면 찾아오는 봄

<윤희에게>(2019)

by 수차미


영화 <윤희에게>의 한 장면 © 리틀빅픽쳐스




<윤희에게>는 하고 싶은 말이 명확한 영화다. 본래 이야기라는 게 무언가를 전하려는 의도로 창작된 것이기는 하나, 그것과는 다른 측면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보인다. 이를테면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지적해볼 수 있겠다. 작품 내에서 은유와 상징을 지시하는 것에는 필수적으로 응답이 따라붙는다. 술자리에서 선창이 가면 후창이 와야 하듯이 그 둘은 모종의 약속이거나 규약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다르게 말하면 그것은 마작에서의 짝 맞추기나 공간에서의 입구와 출구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인간의 측면으로 본다면 그것은 커플이다. 일란성 쌍둥이라는 모티브로 극을 진행하는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이나 그에 영향을 받은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를 떠올려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 영화를 보고 <러브레터>를 떠올린다면 그런 모티브 때문인 것이지 오타루라는 공간적 배경 때문이 아니다.



물론 착각의 여지는 있다. 영화가 시작하고 가장 처음으로 등장하는 풍경은 눈에 덮인 일본의 어느 마을이다. 이때 카메라는 길 위를 지나가는 노부인을 보여주는데 그녀와 발걸음을 맞추지 않는다. 그래서 노부인이 화면 밖으로 사라졌을 때 카메라는 텅 빈 공간을 응시하게 되는데, 그 공간 아래쪽에는 ‘오타루’라는 지역 간판이 파랗게 놓여있다. 이윽고 극이 진행되고 나서 중간 종전에 다다르면 인물의 대사를 통해 ‘오타루’라는 지명이 확실히 언급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동안 어떤 영화를 보아왔든 간에 오타루라는 장소와 설원의 풍경을 보고서 <러브레터>를 떠올리지 않기란 무척 힘든 일일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자신이 말하려는 건 당신이 떠올린 그것이 아니라는 점을 중간에 삽입한 장면을 통해 말한다.



영화가 시작하고 나서, 시나리오는 윤희(김희애>를 찾아온 남편을 통해 그녀의 현 상황을 말해준다. 윤희가 퇴근하고 집 앞에 들어설 때, 그곳에는 비루한 차림의 한 남성이 윤희를 기다리고 있다. 윤희는 자신을 찾아온 이혼한 남편에게 “술만 마시면 찾아오는 거 지긋지긋하다.”고 말하며 문전박대한다. 이후의 시퀀스, 윤희가 딸과 함께 침대에 누워있는 장면에서는 딸이 윤희에게 그런 말을 하기도 한다. “내가 왜 아빠한테 안 가고 엄마랑 같이 산다 했는지 알아? 나는 엄마가 외로워 보였어. 그래서 엄마랑 같이 산다고 한 건데 내 착각이었나 봐. 나 없이도 잘 살 것 같아.”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윤희라는 인물은 누구에게 의존할 만큼 나약하지 않다. 다만 알 수 없는 외로움이 그곳에 자리할 뿐이다. 영화가 풀어야 하는 게 이 숙제이다.



윤희가 남편을 문전박대하는 장면은 이 영화가 윤희의 영화라는 점을 공고히 하기 위한 장치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서 남편이 실제로 나오지 않아도 윤희가 어떤 상황인지는 심정적으로나 맥락적으로나 온전히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이 장면은 서사적으로는 불필요하다. 그리고 불필요한 장면을 굳이 넣었다면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게 바로 선언지의 역할이다. <윤희에게>라는 제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영화의 히로인은 윤희이다. 이 영화가 윤희의 시점으로 쓰인다고 선언한 이후에는, 불필요하거나 맥락을 알 수 없는 듯한 장면 모두가 윤희의 행동에 대한 응답으로 자리하게 된다. 반대로 말하면, 이 영화는 윤희라는 주격을 생략하고 나면 모든 것이 흐지부지로 보일만큼의 의존성을 담보로 한다. 즉, 맥락을 알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 윤희라는 주체를 감싸고 돌 때, 그곳에는 생기가 돌게 된다.



이 영화의 원래 이름은 ‘만월’이었다고 한다. 만월이라는 제목이 작중에서 주로 사용되는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직시였다면, <윤희에게>라는 새로 바뀐 제목은 이것이 두 사람의 관계라기보다는 윤희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보이고 싶었음을 말해주는 것 같다. 먼저 달에 관해 의미를 묻자면,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바라보는 달의 모양이 언제나 같다는 점에서 그것은 공간을 초월하는 일치점으로 사용된다.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고 있으니 언젠가는 만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일 것이다. 의미를 확장해서 읽자면 달이라는 건 여성에 대한 은유와 상징이기도 하다. 음양의 조화라는 다소 옛스러운 이야기도 꺼내볼 수 있겠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월경을 떠올려볼 수 있다.



월경의 주기가 어떠하든 간에 그것이 신체에 귀속되는 현상이라는 점에서 이 맥락은 근본적인 무언가로 읽을 수 있다. 말하자면 달이 차고 기우는 과정은 감정의 기복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이 영화의 두 인물, 윤희와 쥰(나카무라 유코) 주변에 맴도는 알 수 없는 외로움은 그 근원을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공허하지만, 그런 공허함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두 사람 간의 일치점이 생겨난다. 이 일치점은 극의 초반에 제시되기에 윤희와 쥰의 관계를 눈치채지 못할 사람은 없다. 예컨대 이 영화에서 윤희와 쥰의 관계는 (비록 그것이 후반에 제시된다 하더라도) 반전의 성격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다. 만월처럼 완성형의 시나리오로부터 시작해 중간지점으로 여물어가는 이 이야기에서는, 감정의 기복을 이해하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영화가 시작하면 나레이션은 쥰이 윤희에게 편지를 수도 없이 많이 썼지만, 망설여지기에 부치지 못했다는 말을 우리에게 전한다. 물론 그 나레이션은 쥰이 한 것이지만, 방금의 문장에서 나레이션과 쥰을 분리해서 서술한 이유가 있다. 이 영화에서 윤희는 신체적으로 주체이지만 감정적으로 근원을 잃어버린 심정적 타자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몸과 말 사이에서 말이 어느 신체에 깃들 것인지를 고민하는 게 어떤 의미에서의 유령처럼 보인다. 이는 라깡의 말처럼 편지의 내용물보다는 편지 자체가 그들의 대리자임을 자청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 그 편지는 전달되지 않는다. 만월은 영원하지 않으니 충만한 마음도 그 시기를 버텨내지 못한다. 이 편지는 망설임의 행위가 된다. 그런 이유로 영화가 열리고 나서 가장 처음으로 제시되는 행위가 우편함에 편지를 넣는 행위인 것이다.



영화가 시작하고 나서, 어느 노부인이 파란 오타루 간판을 지나가는 장면 다음에는 노부인이 우체통에 편지를 넣는 장면이 따라온다. 아직 극이 진행되지 않아서 이 장면을 보는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없다. 극이 진행되고 나서, 결말에 다다를 때쯤에야 노부인의 이 행동이 쥰의 편지를 부치는 것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쥰은 동거인인 노부인에게 “내 방에 들어왔었어? 책상 위에 있던 편지가 안 보이네.”라고 말하는데, 이 대사는 멋쩍게 웃으며 시치미를 떼는 노부인의 얼굴을 하고서 영화의 도입부로 회귀할 것을 우리에게 명령한다. 예컨대 이 편지는, 편지를 부치는 행위는 다카포라는 ‘시간을 되돌림’의 명령이다. 물론 극 중에서 흐르는 실제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바로 그런 이유로 이 명령은 등장인물이 아니라 관객인 우리에게로 전달된다.



조금 더 세심하게 영화의 도입부를 살펴보자. 이 영화의 개막은 달리는 열차 안에서 창문 밖으로 설원의 풍경이 지나가는 장면이다. 이 장면 위에 <윤희에게>라는 제목이 떠오르고 나서 오타루의 노부인에게로 장면이 넘어간다. 팔짱을 끼고 영화를 조금 더 지켜봐도 이 장면이 어느 맥락에 자리하는지를 알 수 없다. 즉 이때까지 이 장면은 작품 전반의 분위기를 그려내는 설정 쇼트로만 여겨진다. 그러고 나서 극이 어느 정도 진행이 되었을 때쯤에야 우리는 비로소 이 장면의 역할을 알게 된다. 윤희의 딸이 윤희에게 일본 여행을 제안하고 나서, 윤희가 직장을 그만두는 장면 다음에 별도의 설명 없이 곧바로 열차 안의 풍경이 그려진다. 여기서 맥락적으로 생략된 장면을 보면 이 작품은 자신이 말하려는 이야기를 위해 필요하고 불필요한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스타일이라는 점을 알 수 있고, 그게 곧 우리가 이 작품에서 무엇이 필요하고 불필요한지를 눈여겨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그러니까 열차 안의 장면이 왜 영화의 개막장이 되어야 했느냐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개막장의 열차 안은 창문 쪽을 클로즈업해 인물을 보이지 않게 해두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부분이지만, 다만 그런 가정하에서 이 장면은 윤희가 느끼는 외로움의 근원이 열차의 끝자락에 있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예컨대 그 열차가 떠나온 곳으로 향하면 윤희의 현 상황에 대한 (적어도) 진단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윤희와 딸의 일본 여행이 실제로 쥰을 만나러 가는 것(윤희는 몰랐지만)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추론은 얼추 들어맞는다. 그러니 개막장의 열차는 윤희와 딸이 일본 여행을 떠나는 시점과 다른 시간대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영화가 주요하게 언급하는 것이 바로 사진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날로그 사진기다. 영화의 배경상 사진기가 아날로그여도 이상할 것은 없지만, 아날로그 사진기가 주는 질감은 시간이나 그리움의 정서에 더 가깝다는 점에서 이 설정은 열차 안의 그것과 유사하다. 사진은 찍힌 순간부터 과거로부터의 이어짐에서 이탈하게 되고, 그게 지난 삶의 어느 한 지점을 대변하게 된다는 점에서 윤희가 버린 사진기는 그런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짐을 뜻한다.



그런 면에서는 작품에서 편지를 사진과 더불어 사용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오타루의 파란 간판이 보이는 도입부의 장면에서 노부인이 우체통에 편지를 넣는 모습을 보면, 그 편지가 언제쯤 도착하게 될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그러니까 이 편지는 아날로그 시대의 산물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편지란 누름과 동시에 도착하는데, 우체통에 넣은 편지는 집배원이 와서 수거하고 분류작업을 거칠 때까지 일련의 시간이 소모된다. 언제 도착할지도 알 수 없다. 그것에는 추적 번호가 부여되어있지 않다. 다르게 말해서 아날로그 시대의 마음이란 추적할 수 없고, 언제 도착할지를 알 수 없다. 그러니 이 작품에서 윤희가 타인을 사랑하는 방식과 그녀의 딸 새봄(김소혜)이 타인을 사랑하는 방식은 그런 식으로 다르다. 두 사람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이라는 방식으로 세대 차이가 난다.



새봄은 남자친구가 좋으면 곧바로 손을 잡거나 뽀뽀를 한다. 이 애정표현은 즉각적이다. 하지만 윤희는 그렇지 않다. 윤희와 그녀의 전남편, 윤희와 새봄 사이에는 직접적인 애정 표현이 거의 없다. 새봄에 비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도 어른의 방식으로 감정으로 나누지만, 멀리서 거리를 지키며 대화할 뿐 팔을 벌리면 안으로 들어올 정도의 거리는 아니다. 이 거리감은 작중에서 쥰이 장례식을 치르고 돌아오는 자동차 안에서도 발견된다. 쥰의 친척은 쥰에게 결혼을 언제 할 것이냐면서 “휴대폰에 내가 아는 좋은 남자 사진 하나 있으니 갤러리 열어서 한번 봐.”라고 권하지만, 쥰은 매정하게 손을 뿌리쳐버린다. 이 장면 이후 쥰이 자동차에서 내려 혼자 걸어가겠다고 선언하는 장면에서, 사과하는 친척과 사과를 받는 쥰 사이에는 겨울처럼 차가운 거리감이 있다. 그리고 이 거리감은 그들이 서 있는 거리의 풍경처럼 몹시 하얗거나 고요하다.



이 장면에서 핵심은, 그런 거리감이 한국과 일본이라는 가깝고도 먼 나라 사이의 지리가 아니라 윤희와 쥰이라는 두 여성 사이의 감정에 적용된다는 점이다. 영화의 설정으로 봐도 좋겠지만, 어렸을 적에 한국에 살다 온 쥰을 배려해 (일본말 잘하는) 한국인 남성을 소개해주겠다는 말은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게 언어가 아니라는 점을 말해준다. 영화의 중반에 새봄이 쥰에게 만남을 청하러 가는 장면에서도 한국어나 일본어가 아닌 영어가 (손짓과 발짓도 포함해서) 주된 소통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 설정이 그런 점을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이 장면에서 우리가 받는 느낌은 마음을 전함에 있어 언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그 언어라는 것은 영화 전반에 걸쳐 ‘전하지 못한 편지’라는 은유로 표현되기도 했다. 편지를 쓰려면 글자를 써야 하니 당연히 그건 언어이다. 그러니 그 편지를 전하지 못하는 건 언어의 부재이다. 하지만 편지를 주고받지 않아도 두 사람은 서로를 그리워했다. 이때 두 사람이 서로를 그리워하면서 회상의 성격을 부여하는 대상이 바로 달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달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같은 이미지를 보여주는 대상물이기에 그것은 시공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영화의 도입부와 결론부에서 나레이션으로 두 사람이 주고받는 “네 꿈을 꿔.”라는 말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꿈이라는 심상처럼 언어가 아닌 이미지의 세계로 두 사람이 소통함을 보여준다. 이미지 안에서 시공은 부재하기 때문이다.



작중 일본에서 등장하는 두 명의 고양이가 그런 점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개체에 따라 다르겠지만 고양이는 보통 솔직하다. 기분이 좋으면 갸르릉 거리고, 그러다가도 금세 토라지고는 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윤희와 쥰이 하지 못하는 일이기도 하다. 양자의 발언에 따르면 쥰은 자신의 본심을 숨기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점을 숨기면 모든 것이 행복해진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즉 그녀는 솔직하지 못하다. 그런데 그녀가 돌보는 고양이는 솔직한 동물이다. 그러니 동물병원 의사인 쥰이 고양이를 신체적으로 돌보아준다면 고양이는 쥰을 심리적으로 돌보아준다고 말할 수 있다. 심지어 쥰은 동물병원을 찾아온 손님의 고양이 이름인 ‘월’을 두고서, 그것이 한국에서는 ‘달’을 뜻한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이 대목이 이상하게 들리는 것은 한국에서 한자가 많이 사용되기는 해도 ‘달’은 ‘달 월(月)’이라는 한자 말고 ‘달’ 그대로 읽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쥰이 ‘월’을 ‘달’이라는 발음 그대로가 아닌 ‘달’이라는 단어적 의미로 말한 것은 ‘달 월(月)’이라는 한자가 기본적으로 그림을 문자화한 이미지의 형태여서다. 즉 쥰에게 심리적으로 위안을 주는 고양이란 그녀가 아는 윤희의 모습과 동일하거나 비슷한 무언가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윤희에게는 자신을 심리적으로 돌보아줄 무언가가 없다. 한국을 그린 장면에서 고양이와 같은 것은 등장하지 않는다. 허나 윤희에게는 고양이보다 훨씬 값지고 사랑스러운 딸이 있다. 작중에서 윤희가 전남편과의 결혼에 대해 후회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딸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딸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딸 없이도 혼자 잘 살 것만 같은 독립적인 여성이다. 예컨대 일본에서 쥰과 고양이의 관계는 한국에서 윤희와 딸의 관계에 대응한다. 쥰과 윤희는 솔직하지 못하기에 솔직한 것을 좋아하고, 반대로 고양이와 새봄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점에서 극의 진행자가 된다. 무엇보다 이 모습은 윤희가 딸의 연애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윤희가 독립적인 성향이라는 점에서 쥰이 고양이를 아끼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고양이는 독립적인 생물이다. 그리고 도도하며, 가끔은 귀엽기도 하다. 사춘기 딸을 바라보는 윤희의 마음 또한 그럴 것이다. 즉 그들은 서로 반려관계를 필요로 한다. 여기서 쥰과 윤희는 그들의 반려가 때가 되면 알아서 다가와 주기를 바라고 있다. 쥰은 고양이가 먼저 다가오기를 기다리며, 윤희는 딸이 말하고 싶을 때 알아서 다가오기를 기다린다.)



영화의 도입부를 보면 새봄이 그녀의 남자친구(성유빈)와 놀러 다니는 모습이 나온다. 여기서 남자친구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은 윤희의 전남편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과 유사한데, 이는 이 영화가 <윤희에게>와 같은 여성의 영화라는 점을 미리 선언했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이는 모종의 선언일 뿐 이야기 진행에 그렇게 중요한 사실은 아니다. 중요한 지점은 새봄이 윤희를 보고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느냐고 물어보는 대목에서, 윤희가 새봄에게 “언제 말하는지 기다리고 있었어.”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이는 장면으로만 보면 자녀를 존중하는 부모의 마음으로만 읽히지만, 두 사람이 떠난 일본에서 윤희가 새봄에게 라이터를 달라고 하는 대사에도 그 맥락을 찾는다. 윤희는 새봄에게 라이터를 달라고 말하면서 그녀가 담배를 피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새봄이 의문을 표하자 윤희는 “나 니 엄마야.”라고 답한다. 그러니까 이 두 장면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윤희는 사실을 알든 모르든 간에 묵묵히 상대를 기다려주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게 이 영화에서 편지를 기다리는 쪽이 쥰이 아니라 윤희인 이유이다.



이 영화의 도입부에 달려가는 내레이션은 쥰이 쓴, 허나 보내지는 못한 편지의 내용이다. 그녀는 이 내레이션에서 “몇 번이고 편지를 썼지만 보내지 못했고, 그럼에도 늘 처음인 것처럼 편지를 쓰게 된다.”고 말한다. 영화의 도입부를 지나 내용을 거친 결말부에서, 한번의 재회를 거치고 난 후에 윤희도 쥰에게 편지를 쓴다. 물론 이 편지는 쥰의 그것처럼 망설임을 동반하기에 전달되지 못한다. 이 모습을 두고서 우리는 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 윤희와 쥰을 재회하게 하는 것이었음을 떠올리면서, 결론이 이렇게 나버리면 그들의 만남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의문에 이 영화의 본질적인 물음과 답변이 있다. 이 영화는 시나리오상에서 입구와 출구로 기능하는 은유와 상징으로서의 쌍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선창과 후창으로 구성되어있다. 그러니 쥰의 목소리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윤희의 목소리로 끝난 것만으로도 제 역할을 마쳤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물음을 던지고 말을 돌려주는 사이에 오가는 눈짓과 몸짓의 미묘한 교환이라는 뜻이다.



이 교환이 왜 하필 그들 서로에게로 향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은 작품 안에서도 이미 발표된 바가 있다. 새봄이 자신의 사진을 무료로 인상해주는, 사진관을 운영 중인 삼촌에게로 가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볼 때, 삼촌은 “무슨 일 있니. 왜 그걸 나한테 물어.”라고 말하며 윤희를 타박한다. 이에 새봄은 삼촌에게 “삼촌이 아니면 누구한테 말해요?”라고 답한다. 이 대사도 잘 보면 어딘가 이상한 부분이 있다. 우리는 그걸 눈치채야 한다. 삼촌은 새봄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털어놓는 일을 두고 의외의 사건으로 여기지만, 새봄에게 삼촌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어머니 이외의 유일한 사람이다. (전남편이 된 아빠를 제한다면 말이다.) 이때 이 이상한 관계의 지향성은 새봄이 그녀의 남자친구와 행하는 연애행위와 얼추 비슷해 보인다. 한쪽은 타인이 자신에게 의존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지만, 다른 한쪽은 자신이 타인에게 충분히 의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쉽게 말해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을 때, 자신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에 대한 물음은 타인의 생각과는 어느 정도 괴리가 있는 경우가 있다. 작중에서는 이에 대한 묘사가 팔을 벌려 품에 안기는 것으로 표현되고, 여기서 윤희와 새봄은 안기기를 망설이지만 새봄과 남자친구는 망설임이 없다. 예컨대 이 두 장면은 서로에 대한 신뢰관계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가 관심있는 건 윤희와 쥰의 관계이다. 영화의 주인공이 윤희이니 당연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위의 두 포옹을 차례로 나열하고 나서 가장 마지막에 자리하는 게 윤희와 쥰의 포옹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윤희를 위해 준비된 무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영화는 윤희와 쥰이 재회하는 장면에서 두 사람이 포옹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물론 이 포옹장면에 대한 예상은 우리의 추측이므로 그들이 실제로 어떠했는지까지 자세히 알 수는 없다. 허나 위의 두 사례로 짐작해볼 때, 그들의 포옹이 망설이는 방식일지 아니면 망설임이 없을지를 생각해보라는 게 작품의 의도일 테다. 쥰이 윤희에게 편지를 쓰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했다는 점이 윤희보다 쥰이 상대를 더 보고 싶어했다는 점에 대한 근거가 될 수 없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우리는 쥰의 편지가 우체통 안으로 들어가는 걸 영화의 도입부에 목격했고, 그 편지가 아날로그라는 점에서나 국제 우편이라는 점에서나 한국에 오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면, 이 영화는 쥰의 마음이 윤희에게로 전해질 것을 전재하는 상황에서 그 중간 내용을 생략하지 않고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다.



예컨대 <윤희에게>는 답장을 기다리는 모습에 관한 영화다. 바닥에 뿌리내린 감정이 사회의 시선으로 주박되어 있다면 그것은 주체만으로는 바뀌지 않을 상황이라고 영화는 선언한다. 그래서 두 사람은 새봄과 노부인이라는 두 명의 대리인을 통해 서로를 만나게 된다. 노부인이 윤희에게 보낸 편지는 새봄이 가로채어 새봄이 윤희를 일본으로 이끄는 배경이 된다. 그러니 새봄이 편지를 가로채지 못했다면 이 이야기는 성립하지 않았을 테다. 허나 새봄이라는 이름은 새롭게 찾아오는 봄이라는 점에서 작중의 배경인 겨울, 그다음에 자리하는 것이기도 하다. 스쳐 지나가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쥰과 노부인의 대화 중에 노부인이 “언제쯤 눈이 그치려나.”하고 물으면 쥰이 “오타루에 수십 년을 사셨으면서 아직도 모르세요.”라고 말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얼어붙은 관계가 언제 생기를 찾을 것인지에 대한 물음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편지에 대한 기다림이나 감정에 대한 설렘과도 마찬가지일 테다. 말하자면 그 영원한 겨울에는 새봄이 찾아가야 날이 풀리게 된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새봄은 사랑의 전령과도 같다.



이때 새봄의 목적은 윤희가 그녀의 첫 사랑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점, 왜냐하면 자신이 지금 사랑하는 중이기에 느끼는 기쁨을 고고하고 비루하고 외로운 현재의 윤희에게로 전해야만 자신의 솔직함에 충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솔직함의 다른 말은 직설적이라는 말이기도 한데, 주변 상황을 보며 행동해야 하는 어른들에게 그런 사랑은 솔직하지 못한 자신을 솔직하도록 강요한다는 점에서, 영화가 제시하는 화해의 해법은 사뭇 귀엽게 보이기까지 한다. 이 영화에서 새봄은 남자친구가 인서울 (서울권 대학)을 하느냐 못하느냐와 같은, 어른의 기준으로 보면 사소한 일로 내내 고민하지만 윤희는 당장의 밥벌이가 걱정이다. 그러면서도 윤희는 새봄을 위해 집안 상황을 솔직하게 말하지 않고, 새봄에 대해 아는 사실 (연애나 흡연과 같은)도 눈감아준다. 그러니 이 영화를 닫는 장면이 영화 내내 복선으로 예고되던 전남편의 재혼이라는 점은 이 모든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것에 손색이 없다. 남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재혼 소식은 새봄이 들어서는 안 되지만 윤희에게는 솔직하게 전해야 할 소식이다. 그래서 이 장면에서 서로 울며 껴안는 윤희와 전남편의 모습은, 쥰과 윤희가 재회한 장면에서 영화가 보여주지 않았던 포옹을 대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봉투에 담긴 청첩장이 윤희와 쥰 사이에 오가는 편지처럼 보이기도 하니 말이다.



눈(보는 눈과 내리는 눈 둘 다)을 외부로 돌려보면 새봄이라는 이름이 오즈 야스지로의 <이른 봄>과 같은 작명센스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만약 그에 관심을 쏟는다면 현재의 가족이 과거의 가족과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따져보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특히나 오즈의 영화에서 인물의 관계는 늘 중재자를 거쳐야만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두 이야기를 비교해보는 일이 더욱 재밌어진다. 마찬가지로 그런 비교를 해보면 중년의 여성이자 동성애자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가 우리 곁에 존재하는 영화 중에서 꽤 특별한 지위를 갖는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누군가는 그런 특별함에 주목한다는 게 특별한 영화임을 증명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이 영화에서 떠올린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이나 <러브레터>와 같은 영화도 실상의 동성애를 다루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그들은 쌍둥이이기에 동성애라기보다는 자기성애처럼 보이는 면이 더 크지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를 자신처럼 아끼는 것이라는 점에서 딱히 틀리다고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삶을 구성한 가족의 형태란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