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는 일상을 더는 생각해볼 수 없다는 것

<날씨의 아이>(2019)

by 수차미



영화 <날씨의 아이> © 미디어캐슬



신카이 마코토가 돌아왔다. 나는 지금 신카이의 새 작품이 개봉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신카이의 영화가 좋은 의미에서 초심으로 돌아갔다고 말하는 것이다.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그 초심에 대해 설명하고 싶다. 신카이가 처음으로 만든 애니메이션이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해냈다는 점에서 일종의 우위를 점한다면, 반대로 그 안의 내용물이 몹시 마이너하다는 점은 상투적으로 여겨질 수 있는 부분이다. 세카이로 불리는 갑갑하고 폐쇄된 세계가 오타쿠적 감성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을 대중적이라는 말로 칭하긴 어려웠었고, 반대로 그러한 오타쿠적 감성을 아름답게 그려냄으로써 비교적 색채가 옅던 이들을 세카이의 영역에 포섭했다는 점은 장점으로 생각되었다. 예컨대 신카이의 공로는 세카이계(セカイ系)라는 잊혀진 장르를 이 시대에 다시 세웠다는 점이다. 혼자서 모든 것을 지휘할 만큼의 열정이 있었다는 점도 플러스 요인이었고 말이다.


반대로 말하면 신카이는 작품의 내러티브에 그렇게 큰 관심이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야기가 부실하다는 게 아니다. 애니메이션과 영화를 나눌 때 영화가 실사이기에 내러티브의 논리를 중요시한다면, 애니메이션은 그보다는 덜한 논리의 정교함을 요구받는다. 예컨대 애니메이션의 논리는 언어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애니메이션의 논리는 언어를 통한 서사가 아니라 이미지 그대로의 흐름을 따른다. 즉 이미지의 논리이다. 이미지의 논리라는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것을 다음처럼 설명할 것이다. 이미지란 ‘보았음’에 대한 잔존이다. 우리가 영화를 보거나 상대를 보거나 할 때 안구와 마음에 남는 이미지의 결정체, 또는 그 유성우의 꼬리가 바로 잔존이다.


그리고 신카이는 빛에 대한 집착이 있다. 첫 장편 <별의 목소리>(2002)부터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2004)등에는 늘 빛이 다양한 형태로 도드라졌다. <너의 이름은>(2016)에서 유성우 꼬리를 따라 묘사된 빛의 줄기와 같은 이미지가 신카이의 영화에는 무수히 많은데, 이것이 신카이 영화의 아름다운 면으로 호평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미지의 잔존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용례이다. 별이라는 존재가 있다. 우리가 별에 대해 무언가를 생각하고 나면 신카이는 그것을 부여한다. 이야기가 진행되고 별을 길게 늘어뜨린 무언가를 우리가 목격하게 되는데, 그때 그것은 기호의 연장선에서 계열체로 작동한다. 그리고 그렇게 늘어진 별빛에 대응하는 여러 산란체, 떠오르는 태양이나 내리쬐는 햇살과 같은 빛의 향연을 통해 신카이는 이미지의 계열을 성립하려는 듯 보인다. 그러니 어떤 면에서 이것은 이미지의 함축으로 쓰인 하이쿠 정형시, 우리는 그 빈칸에 답안을 기입하려 하는 학생이 된다.


<너의 이름은>에서 밤하늘을 가르는 유성우가 몰고 올 거대한 파란을 예고할 때, 해당 시퀀스에는 유성을 보며 소원을 비는 이들과 유성이 내리면 파국을 맞는 과거의 한 마을이 교차로 보여지는데, 말하자면 이 두 시퀀스의 조합은 유성의 앞쪽에는 소원을 이루는 전진의 힘을 배치하고 유성의 꼬리에는 파란을 예고하는 시간의 끝을 배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유성에 대한 설명은 언어의 논리가 아니라 무녀와 신화라는 신토(神道)적인 것, 즉 신화적 이미지의 형상을 통해 언어적 논리의 바깥에서 등장해온다. 타키와 미츠하는 언어적 설명이 아닌 몸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영혼의 교환을 처음으로 인지하고, 황혼의 시간이라는 시각적 이미지의 순간에 술이라는 이미지 매개를 통해 서로의 시간으로 진입한다. 일례로 일렁이는 술 안에서 타키는 미츠하의 모습을 목격하는데, 이는 우리가 인지하는 이미지 선상이 아니라 과거의 미츠하가 술을 빚으며 들여다보았던 그 이미지의 맥락에서 귀인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너의 이름은>에서 이미지는 작품 내적으로 그들의 맥락을 갖고, 잇고, 재현하고, 이에 관객은 그 안으로의 동참을 요구받는다. 작품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실제로 겪어본 이가 아무도 없지만, 그에 준하는 개인적 이미지를 영화의 이미지 안에 계열체로서 편입하게 된다. (무스비라는 이름의 천이 직조의 형태로 그려진다는 점이 그에 대한 설명이 된다.)


신카이의 최근작을 예로 들었지만 이런 식의 활용이 그의 작품 전반에서 묘사된다는 점에서 사실상의 표준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물론 형태는 다르다. 그런데 반대로 신카이의 영화는 언어의 논리를 언어 그대로가 아닌, 이미지의 형태로 치환하여 종국에는 이미지의 논리로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이를테면 <초속 5cm>(2007)에서 다시 만나자는 남녀의 약속이 나풀거리는 벚꽃의 이미지로 연결될 때, 언어는 봄이라는 심상과 바람의 운동 이미지에 결합하고, 이후 계절이 겨울의 찬바람으로 바뀌면서 뜨거운 사랑이 차가운 사랑으로, 살랑이는 바람이 거센 바람이 되어 만남의 편지를 하늘로 날려보내고야 만다. 여기서 편지라는 언어의 기록장이 소실된다는 점은 곧 언어의 소실, 혹은 언어라는 게 거의 무의미하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에 대한 증거로 편지는 전해지지 않지만 두 사람은 만나게 되며, 미리 준비해놓았다고 할 수 있는 기술된 감정-편지 없이도 두 사람의 마음은 통한다.


이처럼 신카이의 작품에서 언어의 논리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별의 목소리>에서 언어처럼 보이는 문자메시지는 그 내용보다 송신과 수신에 걸리는 시간, 그 무한한 거리의 이미지가 우주를 묘사한다는 점에서 이미지의 논리이다.) 물론 이는 비단 신카이뿐만이 아니라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 전반에 적용되는 말이지만 신카이에게는 빛의 잔상을 활용한 아름다운 작화가 있기에 사람들이 현혹되는 것 같다. 영화에서 보통 빛은 무언가를 직시하는 언어의 표상, 그 지시도구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는데 신카이에게는 반대라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로우키와 하이키, 연극 무대 위에서 주인공에게 내리쬐어 인물을 지명하는 조명 효과가 인물을 지명하는 언어적 특성을 띠는데, 신카이에게 빛은 지명이 아닌 그 뒤의 잔존으로 남아 언어 바깥의 이미지를 흩뿌린다. 그리고 이번 작품에서도 그런 부분이 몇 군데 존재하는데, 그런 이미지 자체보다는 그곳에 끌려오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다.


신카이의 이번 작품에 대한 평가가 소포모어 징크스로 논해지는 현 상황에서, 전작인 <너의 이름은>이 흥행했기에 본작이 상대적으로 떨어져 보인다는 식의 옹호는 다소 부실한 논의라고 생각한다. 어떤 면에서는 “내가 잘하는 게 이거야.”라는 신카이의 목소리가 은연중에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그가 <언어의 정원>(2007)에서 보여주었던 물의 질감과 <너의 이름은>에서 보여주었던 빛의 질감이 혼합된 이 영화는 가히 작화의 어느 지점에 다다랐다. 그렇지만 이를 두고 영화를 평가하는 건 영화 전반의 이야기를 다 끌어내지 못한다. 이 영화에서 작화는 감독 본인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했음에 대한 증표일 뿐,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그것이 보여주는 이미지의 논리 안에 있다. 커다란 비구름 위에는 맑은 하늘이 있듯이 우리는 그곳을 바라보아야 한다.


날씨를 조절하는 소녀가 있다.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아이도 있다. 소년은 소녀를 만난다는 전형적인 보이미트걸(Boy meet Girl)의 클리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이야기의 선형성이 아니다. 이례적으로 우중충한 날씨의 도쿄라는 세계가 성립된 이 세카이에서 소년의 의무는 마왕 성에 갇힌 공주, 하지만 실은 마왕 본인이었던 소녀를 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소녀를 구해야 하는 논리적인 이유나 그를 보조할 친절할 설명이 없다. 이는 세카이계의 주된 특징이기에 우리가 이에 보탤 말이 거의 없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신카이가 <너의 이름은>의 대척점으로 만든 이 영화는, 기적의 힘을 빌린 회복의 서사에서 기적이라는 이름이 세카이계의 변종으로만 취급되었던 전작의 결점에 대한 응답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너의 이름은>이라는 의외의 히트를 기록한 신카이가 다시금 초기작으로 돌아갔다는 느낌을 주는 이 작품에서, 그에 대한 이유를 꼽으라면 좋아함에 대한 이유가 상세히 설명되지 않는 상세불명의 사랑증을 들 수 있다. 특정한 법칙이 통용되는 이세계가 있고, 그곳에서 두 남녀는 사랑에 빠진 상태다. 영화는 그들이 왜 사랑에 빠졌는지 설명하지 않고 일단은 사랑에 빠진 상태로 극을 진행시키다가, 설명이 필요한 대목에서 디딤돌 형태로 간략하게 말해준다. 설명이라면 설명이 되지 않고, 없다면 없다고 비판을 받을 이 일련의 회상장면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세상을 가득 메운 비가 자리한 이 도쿄라는 공간이 소년에게는 빛줄기의 끝자락, 소녀에게는 어머니가 부재한 결핍의 장소라는 점이다.


영화가 비선형적으로 말해주는 소년의 가출 사유는 빛에 대한 동경 혹은 비에 대한 동경이다. 섬이라는 도심지로부터 떨어진 독립 공간에 살던 소년은 비구름 사이에 내리쬐는 태양 빛이 계속해서 이동하는 걸 보다가, 구름 사이의 구멍으로 떨어지는 태양 빛이 지명하는 장소가 바로 도쿄, 그곳으로 향하는 유람선이라는 점을 발견한다. 사람들이 소년을 두고 가출을 한 게 아니냐고 의심하고 실종 신고도 접수되었다고 경찰이 말하기도 하지만, 종국에는 소년이 왜 가출을 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여기서 도출되는 세카이계의 설정 하나. 소년과 소녀는 사랑에 빠지지만 양측의 부모님은 실제로 없거나 아니면 작중에는 부재해야만 한다. 어른들의 세계는 현실적 논리가 지배하고, 그렇기에 보다 순수에 가까운 아이들의 세계를 보여주려면 어른의 부재는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 문장의 세카이적 적용, 현실적 논리가 지배하지 않는 이 공간에서는 어떠한 판타지가 벌어지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 한다. 즉 우리는 진지한 태도로 임해야 한다.


너무 당연한 말이 아닐까? 그런 의심이 든다면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가 할 수 있는 일, 하지 못하는 일을 잠시 논해보아야 한다. 신카이의 작품은 점점 더 실사에 가까워지려 한다. 사진을 찍고는 그것을 컴퓨터로 옮겨 2D 처리를 하는 이 작업에서 컴퓨터 기술의 발전이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애니메이션의 배경에서 극도의 실사체를 보여주려는 그의 의도에 대해 생각해볼 수는 있다. 이게 단순히 눈요기를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실사 영화에서의 리얼리즘이 포토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의 현장성을 주로 지칭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애니메이션에서의 리얼리즘이란 과연 무엇이 되어야 할까. 애니메이션에서의 리얼리즘이란 정말로 현실 세계에 가까운 외양을 한 것, 이전처럼 포토 리얼리즘이라 불리지만 맥락은 다르게 사용되는 그런 노력에 관해 말해보자.


회화에서의 포토 리얼리즘이 사진에 가까워지려는 것이라면, 애니메이션에서의 포토 리얼리즘은 실사 동영상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하지만 가까워지려는 것일 뿐 정말로 그게 되려 하지는 않는다.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건 기술적 타협이 아니라 그냥 그것이 정말로 대체되어버리면 안 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애니메이션 세상이 현실을 닮았을지언정 그곳은 현실과 다르다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 일말의 이질감도 없다면 우리는 애니메이션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할 테다. 이때 이 말의 신카이 마코토적 변형은 다음과 같다. 애니메이션은 여전히 세카이에 머물러야 한다. 그런데 그곳은 현실과 닮았지만 다른 무언가여야만 한다. 예컨대 이는 현실의 여러 면을 가져오면서도 그러한 실재가 주는 제약을 벗어던질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닮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아니라고 잡아뗄 수 있기에 그것은 일종의 면죄부이다. 다시 말해서 이곳은 세카이, 그들은 있을 수 없는 그림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물을 현실에 있을 수 없는 이상적 존재로 그리면서도 그들이 몸담은 세카이는 어떤 면에서 현실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된다.


신카이의 영화에서는 특유의 실사 배경작화로 인해 인물과 배경이 따로 놀 것 같다는 인상이 있기도 한데, 그렇지 않다. 이런 오묘한 절합은 의도된 사안이 아니더라도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현실 같지만 가짜 세계라는 것을 확실히 말해줄 수 있는 건 이런 종류의 애니메이션이 할 수 있는 장점이다. 영화가 가끔은 정말로 현실처럼 느껴질 때가 있고, 또한 현실의 이야기를 극으로 끌고 와서 현실과 스크린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려는 몇몇 작품이 있기도 한데, 이런 모습이 보여주는 건, 스크린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게 영화를 보는 중간에는 정말 어렵다는 것이다. 스크린의 마력, 그 몰입 효과가 우리를 계속해서 끌어당기는 와중에는 카메라라는 눈앞의 대변자조차도 깜빡 잊게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신카이의 애니메이션은 아니다. 이곳은 명백한 애니메이션이다. 그걸 잊지 않으면서 우리는 현실을 생각할 수 있다. 예컨대 대전제가 확실하다.


그리고 그 대전제란 게 <너의 이름은>에서는 아무쪼록 영화가 개봉하기 전전의 몇몇 사건들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도 있었던 몇몇 사건을 떠올려 보면 영화가 사건을 다루는 방식이 마법 같은 무언가에 그쳐서만은 안 된다는 점을 우리는 생각해볼 수 있다. 이유는 간단한데, 현실은 애니메이션처럼 마법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너의 이름은>이 기본적으로 죽었던 이들이 살아 돌아오는, 그리고 그 과업을 주인공 소년의 손에 맡긴다는 점에서 직접적인 구원의 형태를 띤다면 이는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몸이 바뀌는 일이 자연스럽게 용인되는 세카이라는 점에서 우리네 현실이 될 수 없는 그곳은, 돌아올 수 없는 이들에 대한 슬픔을 자극할뿐더러 그렇게 분리된 애니메이션이라는 세상이 결코 우리네 현실은 아니라는 점을 재확인해줄 뿐이었다. 예컨대 그들이 <너의 이름은>에서 목격한 것은 살아 돌아왔다고 말하는 잊혀진(또는 과거의) 현실, 그러나 관람 중에도 명백하게 확인되는 차단막이었다. 그래서 혹자는 이 작품을 두고서 남겨진 이들을 기만하지 말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신카이 스스로가 말하기를 어느 정도 그런 부분을 생각하면서 아무런 걱정 없이 사랑하는 이 하나에만 매달리는 주인공을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한국일보, ‘너의 이름은.’→‘날씨의 아이’ 감독 “흥행 부담 NO, 위로 됐으면”, 2019. 10. 30, 이호연 기자.) 이 발언이 어떻게 해석될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다음 세 가지일 터이다. 첫 번째로 세카이계의 법칙. 두 번째로 전작에서 제기된 문제 해결. 세 번째로는 새로운 화두 제시이다. 여기서 전자는 그냥 장르의 법칙이지만 후자는 신카이가 말하는 이미지의 논리가 영화 바깥에서 언어의 논리로 변질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한 우려였었고, 그 부분이 요즘 시대의 헤이트 스피치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다시 세 번째로 연결된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영화가 제작되기 이전과 제작되는 과정에서 작품에 나오는 여러 이야기가 되풀이되었다. 먼저 이 영화는 인간의 감정을 날씨에 빗대는 전통적인 이미지상을 그대로 옮겨와서, 날씨를 치료한다는 개념을 감정을 치료한다는 것으로 치환하여 이른바 걱정 인형으로서의 역할을 주인공에게 부여한다. 즉 날씨를 맑게 만든다는 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행위이다. 반대로 그런 이상기후가 도래한 도쿄는 세상 어느 때보다 슬픔과 비탄이 가득한 곳이다. 그런데 날씨의 무녀에 관한 신화를 들려주는 어느 신사 지기는 이런 일은 과거에도 수도 없이 있었다면서 날씨 관측의 역사에 대해 말한다. 기상 관측을 시작한 지 백 년, 적어도 그 안에는 이런 현상이 없었다는 말이 그 밖에는 수도 없이 있었다는 말로 풀이되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우리가 아는 그 바깥에서는 슬픔과 비탄의 기후가 수도 없이 있었으리라는 점을 추측해볼 수 있다.


그러니 이 작품을 관통하는 문구는 의외의 지점에 있다. 소년이 소녀에게 줄 선물을 인터넷에 물어보는 장면에서, 게시물에 달린 댓글 중 가장 마지막에는 “이런 질문은 SNS에 올리지 말고 현실에서 답을 찾으라”는 말이 달린다. 그리고 그곳과, 이전에도 한 번 나왔던 SNS 댓글은 대체로 진지하지 않은 가벼운 무게를 지녔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SNS에 왜 글을 올리면 안되는가. 신카이는 이 부분을 영화 안에서 가장 중요한 공백으로 남겨두었다. 다만 이 공백은 태양의 중심부나 태풍의 눈과 같은 것이어서, 그 이미지의 잔상을 따라가다 보면 현실의 어떤 것이 계열체로 자리하게 된다. 예컨대 작품이 개봉한 2019년을 기준으로 한 현시점에서, 우리는 어떤 재난을 둘러싼 사람들의 반응이 현실과 인터넷에서 극과 극의 양상을 띤다는 점을 알고 있다.


인터넷은 인간에게 자유와 방종을 안겨다 주었고 그래서 그곳에는 아무 말이나 떠돌고 있다. 쉽게 말해 우리가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유성우의 <너의 이름은>과 낮 하늘을 가로지르는 태양 빛의 <날씨의 아이>를 대조한다면 밤의 인도자와 낮의 인도자라는 두 개의 이미지를 도출해낼 수 있다. 여기서 밤의 인도자가 저승에서 흘러나온 어떤 이미지를 부여잡는 망자의 세상, 디즈니의 <코코>(2017)와 같은 무언가를 뜻한다면 낮의 인도자는 현실에 존재하는 어두운 이면의 인도자, 어떤 죽음과 재난과 같은 무엇에 대한 사람들의 감정이 바로 그 하늘이라는 점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먹구름 낀 하늘, 그리고 그렇게 직시되는 감정이 실은 그동안의 여러 영상물에서 클리셰로 사용되었기는 하지만, 퍼붓는 비가 사람의 말을 잠식하고, 물에 젖었으니 가까이 붙지 못하게 하고, 삶의 터전과 주변 구역을 침수시킨다는 점은 이것이 단순히 기분상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기분의 물체화, 즉 구름이라는 허상이 사실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물 덩어리라는 점을 우리에게 이미지로 말해주는 것이다.


<언어의 정원>에서는 언어의 차단막으로 폭우가 사용되었고 <초속 5cm>에서도 눈이 밤의 고요함을 만들어냈는데, 단순히 그게 벌어지는 현장에 그치지 않고 현상을 역으로 거슬러 올라서 언어의 논리가 이미지의 논리, 즉 신화의 형태로 변형된다는 게 <날씨의 아이>가 갖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중간에 신사에 취재를 나갔을 때 천장에 그려진 800여 년 된 천장화가 말해주듯이 신화는 주로 이미지의 형태, 또는 입으로 구전된다 하더라도 이미지의 묘사에 중점을 두는데 그것이 <너의 이름은>에서 무스비라는 말로 표현되었다면, <날씨의 아이>는 그런 신화가 사실은 어느 다른 공간, 그동안의 필모그래피에서나왔던 여러 세카이가 아니라 도쿄라는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이질적인 공간, 200여년 전에는 바다에 잠겼었던 이 공간이 인간과 자연의 합작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그도 그럴 것이 소년과 소년의 선택이 불러온 도쿄 대 침수 사태를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전에는 원래 이러했으니 이렇게 돌아가는 게 자연스럽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누군가는 이게 비라는 재난, 어느 나라에나 있을 법하고 최근 몇 년에는 한국과 일본에도 있었던 침수 사태에 대한 <너의 이름은>의 대척점적인 위로라고 말할 테지만. 여기서 한 사람의 희생으로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한 사람이 희생하는 게 맞지 않냐고 말하는 소년의 직장 상사의 말을 두고서, SNS에서 유명세를 탄 맑음 소녀라는 유명인이 "모든 고통을 감내하면 세상의 모든 슬픔과 혐오가 사라진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이것이 한 사람에 대한 무분별한 공격으로 대중의 기분이 풀리면 그걸로 된 게 아니냐고 말하는 식의 마녀사냥, 즉 걱정 인형이라는 이름의 마녀사냥이 신카이적인 밝은 빛의 이미지로 미화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영화의 주제의식은 간명하게 정리되는데 소년이 소녀에게 말하는 것, “세상이 어떻게 된다 해도 너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는 대목은 당신에게 비난을 짊어질 권리는 없다고 선을 긋는 것처럼 보인다. 테루테루보오즈(てるてる坊主)라는 미신, 어쩌면 신화와 비슷하게 읽혀질 수도 있는 제의적 행위가 ‘비를 대신 짊어지는 인형’이라는 함의가 있음을 고려할 때 날씨의 무녀와의 관계는 더욱 명확해진다. 제습제처럼 물을 빨아들이는 게 바로 날씨의 무녀라면 그녀가 하늘과 연결되어있다는 말, 날씨가 맑아질 때마다 점차 투명해져가는 소녀의 몸은 슬픔과 혐오를 빨아들이는 일종의 액받이인 셈이다. 그러니까 본작의 무대는 그동안의 신카이 영화 중에 가장 우리 현실을 닮아있다. 어떻게 보면 이세계가 아니라 우리 세계라고 바로 말해도 될 지경이며, 소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작품에서 세카이적인 요소를 지우고 나면 과연 그때도 날씨의 행복만이 보일 것인지는 의문이다.


여기서 다시금 빛의 논의로 회귀하자. 이 영화에서 자주 묘사되는 먹구름 낀 하늘 한가운데에 맑은 날이 구멍처럼 개이는 모습이 마치 1939년에 나온 영화 <오즈의 마법사>를 떠오르게 한다. 이 작품은 최초의 컬러필름이기도 하지만 영화 초반에 도로시가 구박받는 현실세계로부터 탈출해 오즈랜드로 건너가는 장면에서 하늘 너머로 밝은 빛 하나가 내려온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빛과 칼라는 도로시의 암울한 현실이 밝은 현실로 바뀌는 것을 묘사, 그런데 그곳은 오즈랜드라는 이름의 이세계이다. 말하자면 이런 면이 어두운 날씨에서 활짝 갠 날씨로 향하는 날씨의 무녀, 섬에서 도쿄로 빛을 따라 상경한 소년의 모습과 닮아있다. 이곳은 도쿄라는 이름의 이세계, 또는 이상기후가 한창인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세카이이다. 이 세카이로의 진입은 <너의 이름은>처럼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매개를 거쳐야 하는 것도 아니고, 어느 미래에서 가상의 역사를 겪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날씨가 개면 될 뿐이다. 하지만 그게 참 어렵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작품의 결말이 애매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냥 모든 걸 물로 환원해버려서가 아니다. 사실 물은 인간의 내면을 말하는데 그 무엇보다 유용한 물질이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1950)을 비롯한 영화 전반에 거세게 퍼붓는 비가 인간의 내면을 가린다는 점이나, 오즈 야스지로의 <부초>(1959)에서 길 하나를 두고 건물 처마 아래서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는 부부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물은 우리가 자궁에 있을 적에 어머니의 심장 고동을 전해주던 매질이자 바깥세상에서는 의사소통을 차단하는 도구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이 슌지의 <4월 이야기>(1998)나 <러브 레터>(1995)를 보면 비와 눈이 세상을 가득 메운 세계는, 침묵이 도래할지언정 바로 그렇기에 곧바로 언어가 아닌 이미지의 세계로 직행, 사랑에 골인하는 큐피트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전제로는 그들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는 점,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직감의 영역 그 비언어적 의사행위가 깔려 있었다.


예컨대 <날씨의 아이>가 전작에서의 그런 비판이나 우려를 받고 만든 작품이라고 하면, 우리가 알던 원래의 작품들처럼 세카이라는 장소, 어른이라는 이름의 기성 체계가 작동하지 않는 세계에 떨어져 사랑을 말하는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로 회귀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게 초심이라고 가정할 때 우리는 그런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오려하는 이미지의 잔존물에서 여전히 순수한 것들, 잔해를 목격하고는 어딘지 모를 씁슬함을 느끼곤 했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부분이 도쿄라는 이공간, 우리 현실이 맞지만 아니라고도 우길 수 있는 그런 뻔뻔함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일본을 배경으로 했고 도쿄라는 장소를 배경으로 하지만, 이곳은 일본의 수도격에 해당하고 인구도 도시로만 보면 천만이라는 점에서 한국의 서울로 치환해볼 수 있다면, 왠지 모르게 봉준호의 <괴물>(2006)에서 보았던 한강, 비 오는 날에 대치한 어느 가족과 괴물의 모습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예컨대 그런 괴물이 인간을 향한 헤이트 스피치라는 관념이라고 말해도 그다지 이상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영화의 결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려우면서도 간단한 문제다. SNS를 맹신하지 말라는 것. 날씨 예보를 맹신하지 말라는 것. 이럴 때는 꼭 비가 올 것 같다는 식의 노인 특유의 직감이 일기예보의 예측률보다 더 높은 상황에서 네트라는 이름의 바다, 그 물의 이미지가 구름, 클라우드라는 인터넷 시대의 한 서비스를 떠오르게 하는 면이 있는데. 그 구름 위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화의 세계가 펼쳐져 있으니 그건 바로 네트워크라는 물, 유기체 또는 액체의 형질로 존재하는 현상이다. 그러니까 온종일 비가 내리는 이 도시는 대기 중에 들어찬 습기처럼 우리 곁에 빼곡히 들어차는, 물이라는 존재가 그만큼 우리의 일상에 밀접해온 네트워크라는 공간을 형상화한 것 같다.


물 위에 붕 떠서 안개가 끼는 날엔 사라지는 신기루 같은 장소, 침수가 된다면 그 자체로 존재가 사라지기도 하는 장소, 어쩌면 비가 내리는 일상을 더는 생각해볼 수 없다는 것, 인터넷 없이 생활하던 때를 상상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 SNS는 과거에 구전의 형태로 내려오던 구전담을 디지털 시대에 이식한 신화의 새로운 형태다. 그곳에서 맑음 소녀의 등장은 목격되며, 이것이 그들을 만나게 하는 단초가 된다. 이것은 물이라는 신화의 목격담이자 <너의 이름은>이 말하는 빛의 지시 대명사를 현실의 한 끝자락에서 벌려오는 신카이식의 연애담이다. 어쩌면 신카이는 이것을 제습제로 만들어서, 물이 가득 찬 도쿄로 스크린을 마무리 지으며 영화관을 나서는 관객에게는 비 한 점 없이 맑은 빳빳한 계절을 선사하려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날씨의 아이>는 한 줌의 제습제 같은 영화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910301648358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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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저는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문구가 영화 중간에 선물 고민하는 장면에 달린 인터넷 댓글이라고 생각합니다. "SNS에 이런 거 묻지 마." 이거요. 인터넷상의 이야기에 휘둘리지 말고 눈앞의 이야기를 믿으라는 게 가짜뉴스가 판치는 요즘 시대를 관통하는 일종의 해설이거든요. 테루테루보오즈나 800년 된 날씨 신화 같은 것도 결국에는 목격담이기도 하니까요. 말하자면 SNS는 신화의 디지털적 변형이라는 거에요.


이 영화가 사건을 어느 정도 전제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물론 아닐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게 영화에서 발견된다는 점은 전작에서 지진에 관한 이야기를 했던 것과 유사한 점이 있죠. 완전히 사라진 과거를 다시 복원해내는 것과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는 신화를 다시 복원해내는 것. 각각 <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사이에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있거든요. 인간이라는 존재가 시간을 초월하는 운명을 만들고, 인간이라는 존재가 날씨라는 운명을 만드는 건데. 여기서 두 개의 논리가 각각 생겨나죠. "너를 포함한 모두가 살아야 한다."는 것과, "네가 없는 모두는 죽어도 괜찮다."는 거요. 말하자면 이건 포함과 부재, 편입과 탈출, 진입과 회귀의 맥락이에요. 저는 이 영화가 회귀의 맥락, 그러니까 800여 년 전의 도쿄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첫사랑에 대한 결핍의 감정을 도쿄라는 공간에 확대 적용했다고 생각해요. 신카이가 세카이계를 다시금 수면으로 올려둔 감독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이 세카이는 곧 지구촌이고 그 안에 도쿄에 대한 첫사랑이 있는 거죠. 첫사랑이 어때요. 대부분은 좋지 않게 끝나잖아요.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그런 순결 순정 같은 희망이 있고 어쩌면 도피의 성격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저는 이게 <너의 이름은>에서 배려하지 못했던 부분을 섬세하게 다듬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의도는 칭찬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해요. 신카이가 전작을 만들고 나서 일본 본토에서는 죽었던 사람 살려낸다고 욕을 엄청 먹었거든요. 한국에서도 우리가 겪었던 몇몇 사건들이, 스크린에서 재현될 때 막연하게 과거로 돌아가서 현재를 살려낸다는 식의 '판타지'로 접근하면 화가 나실 분들이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국가적인 재난이 트라우마가 된 사건이 한국에서 몇몇 있잖아요. 인터뷰를 좀 찾아보니 그런 이유로 막연하게 사랑하는 이를 찾아 내달리는, 작중 경찰의 말을 빌리자면 '정신적으로 이상해 보일 정도의' 인물을 그리고 싶었다고 하더군요. 무섭지만 작중에서 비구름이 발달하는 장소가 도쿄 주변의 바다이기도 하죠. 예컨대 이게 거의 쓰나미라는 물의 재앙과 비슷한 시퀀스를 거친다는 것, 그러니 작품이 말하는 헤이트 스피치라는 건 그런 식의 재난인 겁니다.


사족을 달면, 테루테루보오즈라는 비가 그치기를 염원하는 인형이 물먹는 하마, 제습제처럼 보이는 면이 있기도 하죠. 더군다나 이 인형은 다 만들고 나서 창틀에 거꾸로 매달아 놓는데 이게 꼭 작품에서 재현되는 추락의 이미지처럼 보이거든요. 자살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희망의 한 종류입니다. 예컨대 이 영화에서 이 인형이 전하려는 게 현실의 날씨가 아니라 그들 연애의 기후라고 생각하면, 소년과 소녀가 땅으로 추락하는 이미지가 날이 개는 것이기에 이 영화는 종국에 해피 엔딩인 거죠. 도쿄야 어떻든 연애만 잘 풀리면 그만 아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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