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 어린아이와 임산부, 노약자는 이 만화를 보지 말 것. 작품의 줄거리는 이렇다. 인터넷 방송인으로 살아가던 25세 루세트 레몬고갤러는 어느 날 주개로니언 티어라는 요정에게 요정계 대출을 권유받는다. 매년 10퍼센트 복리의 이자를 내면서 50년 뒤에 만기 상환할 것을 조건으로 1천만 달러를 빌려주는 것이다. 여기에 사업이 망해도 시작 시점으로 되돌아갈 수 있고, 만기 전까지는 불로불사라는 조건이 따라붙는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약간의 벌칙을 수행하고 나면 계약 시점으로 돌아가 1천만 달러를 다시 빌려준다. 당연하지만 기존에 진 빚에 대출이 추가로 이루어진다. 자수성가의 꿈에 빠진 루세트는 행복에 젖지만, 돈 버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심지어 그녀는 만기 상황을 방해해 영원한 노예로 살게 하려는 티어의 갖은 중상모략을 이겨내야만 한다. 그녀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인가. 캐피탈리즘 호!
1.
<캐피탈리즘 호!>는 보색대비가 글그림을 담당한 웹툰이다. 이 작품은 대중에게 유명한데, 유명하지 않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작품을 본 이들은 ‘자신이 이 작품을 보았다는 사실’을 타인에게 선뜻 말하기 힘들어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 작품은 ‘재밌게 보았지만 타인에게는 추천해주기 힘든’ 그런 부류이다. 그리고 이유는 여타 다른 것들처럼 몹시 다양하다. 취향을 너무 타서이기도 하고, 주류 사회에서 용납되기 힘든 수위여서이기도 하다. 실은 주류 시장에서 정식으로 발간된 작품이 아니기에 그런 수위가 용납될 수 있기도 했다. 말하자면 이는 언더그라운드 만화에 가깝다. 어떤 면에서는 언더그라운드 영화처럼 실험적 성향이 그렇게 크지 않은 이 작품이 수위문제로 음지로 향해야 하는 게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 다수와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 몇몇처럼, 어느 선까지를 예술을 위한 수위로 남겨둘 것인지의 문제를 우리가 거론할 수 있으니 말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안이 두 개가 있다. 예술이라는 이름이 수위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점이 첫 번째이고, 언더그라운드 만화가 예술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 두 번째이다. 이때 그 두 가지 중에 먼저 풀어야 할 문제는 단연 후자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보통 만화를 예술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에 대해 짧게 추론하자면 아마도 다음과 같다. 분명 만화의 형식만을 두고 보면 오래전부터 그것이 존재해왔노라고 말할 수 있지만, 문화와 콘텐츠 측면에서의 만화가 1차 세계대전 시기의 전후로 등장했다는 점에서, 만화에 대한 인식은 유희와 휴식을 위한 도구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영화라는 매체는 카이에 뒤 시네마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예술로 발돋움하는 것에 성공했지만, 만화에 그런 지지를 보내는 이는 많지 않았다. 그래서 만화는 대중 예술이 된 영화와는 다르게 여전히 대중문화에만 머무르게 되었다.
누군가는 만화도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말할 테고, 그 말이 분명 맞기는 하나, 영화에 비하면 예술로 접근하는 연구 방법론이 부족한 게 사실이다. 단편적인 증거 하나를 들자면 만화에 대한 비평은 다른 시각매체에 비하면 그리 활성화되어 있지가 않다. 이는 게임도 동일하게 겪는 문제이지만, 우리가 게임이나 만화와 같은 문화를 접할 때 무엇이 예술로서의 접근 요소인지가 아직 제대로 정립되어있지 않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만화에 접근하는 방법은 예술로서의 그것이 아니라 상업으로서의 그것이 되곤 한다. 그런 이유로 만화를 보는 우리에게는 영화나 미술과 같은 곳에서 방법론을 빌려 올 여지가 남지 않게 된다. 이를테면 쿠엔틴 타란티노의 작품은 당대 미국의 하류 문화 코드를 주류 방법론으로 선택하곤 한다. 그래서 타란티노의 작품은 B급 코드를 지녔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B급이라고 해서 예술로의 접근이 허용되지 않는 건 아니다. 타란티노는 여러 영화제에서 다양한 작품으로 상을 받은 영화 작가이다. 그러니 우리는 상업성이라는 게 예술성이라는 것과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문제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만화는 왜 예술이 되지 못하는가?
<캐피탈리즘 호!>가 인터넷 문화에 수원을 둔다는 점을 제하더라도, 표현을 위해 수위를 높이는 것은 분명 논란이 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이 2015년에 나왔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여성 혐오적이거나 폭력적이고 선정적이라는 지적을 피하기 힘들다. 그리고 그 점을 근거로 ‘용서받지 못한 자’라는 낙인을 찍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작가 본인이 ‘캐피탈리즘 호!’라는 문구의 다양한 해석 중 하나가 ‘Capitalism Whore’임을 언급하기도 하고, 그것이 다양한 측면으로 원용되는 이 작품을 두고서 라스 폰 트리에의 <님포매니악>이나 가스파 노에의 <돌이킬 수 없는>과 같은 작품을 떠올릴 사람이 분명 있을 테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예술과 상업을 구분지어 바라보려는 시도에서, 예술을 위해 윤리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의 문제와, 예술을 상업의 측면으로 바라볼 것인지의 문제는 다르게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예컨대, <캐피탈리즘 호!>를 정면으로 응시하고자 한다면 비판점은 소리 높여 비판하면서도 내용에 대해서는 편견 없이 바라보는 게 중요하다.
2.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주인공의 이름처럼 당대 ‘고갤(고전게임 갤러리)’의 문화에서 코드를 따온 이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고갤의 문화를 알아야 한다. 하지만 지금 고갤이라는 곳은 없다. 그곳은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고갤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시대를 간접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면, 이전 시대를 다룬 작품을 보며 그에 이입할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세르조 레오네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아메리카>와 같은 작품이 미국의 옛 시절을 다루었지만, 당시를 살지 않던 이들도 영화를 재밌게 즐기는 것처럼 우리가 <캐피탈리즘 호!>를 즐기는 것에는 큰 무리가 없다. 어쩌면 주류 문화의 바깥이라는 점에서 <레디 플레이어 원>과 같은 것을 골라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본작의 주제의식이 ‘캐피탈리즘 호’라는 점에서도 우리가 전부 다 세세하게까지 알 필요는 없다.
캐피탈리즘 호라는 단어 자체는 [루세티아(루세트+티어)]이라는 게임 시리즈의 해외 소개문구이기도 하지만(자본주의 만세!라는 단말마), 선박의 이름을 칭할 때 사용하는 호를 사용해 ‘자본주의로 향하는 길’로 읽을 수 있고, 작품 속의 설명처럼 돈벌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 하는 ‘자본주의 창녀’를 뜻하기도 하며, 작품의 도입부에서 언급되듯이 ‘캐피탈리즘 호!’라는 행복을 염원하는 마법의 주문으로 (마치 비비디 바비디 부와 같은)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제목이 중의적인 셈인데 이 작품의 근간이 [캐피탈리즘]이라는 게임의 플레이 방법을 설명하기 위함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설정들은 가히 초월적이다. 이를테면 게임의 플레이 방법을 설명한다는 점에서 설명서의 역할을 지닌 이 만화는, 외부적으로 볼 때 게임의 형식을 원안으로 삼는 것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게임이라는 매체의 특징은 세이브와 로드가 된다는 것, 다르게 말하면 여타 매체와는 달리 비가역적인 진행을 허용한다는 점인데, <캐피탈리즘 호!>의 무대는 그런 설정을 전제로 둔다. 즉 이것은 게임적 리얼리즘이다. 또한 돈을 빌려 사업을 하고 사업이 실패하면 한강에 몸을 던지는 방식으로 시간을 원점으로 되돌릴 수 있는 이 만화의 설정에서, ‘한강의 기적’이라 이름 붙은 시간 돌리기의 행위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제적 성과를 이륙했음과 동시에, IMF 이후로 완전한 신자유주의 체제로의 변환을 겪은 한국 경제에 대한 이타적이고도 반어적인 유머이다. 그리고 여기서 한강에 몸을 던지는 것은 말 그대로 자살이라는 뜻인데, ‘퐁당’과 같은 한강 수온 측정 앱이 나오던 작품의 연재시기를 이해하면 조금 더 재밌게 볼 구석이 생긴다.
악역으로 나오는 티어의 풀네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주갤(주식 갤러리)’의 형상화다. 지금은 조금 달라졌지만 당시에는 주식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곳이었고, 투자한 주식의 가치가 하락한 이들 또한 있었다. (이는 현재 비트코인 투자자에게로 모습이 넘어갔다.) 이때 그들이 하던 말이 바로 ‘한강 가자’이다. 쉽게 말해 돈을 잃었으니 죽으러 가겠다는 뜻이다. 물론 자조 섞인 농담에 가까운 말이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자살을 암시하는 문구이기에 가만히 두고만 볼 수는 없다. 여기까지가 티어의 이름에 담긴 재미있는 설정이다. 다만 티어가 제공하는 시간 돌리기의 방법이란 게 한강의 기적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주식 투자에 대한 교훈을 안겨주는 주식 시뮬레이션 게임이거나, IMF 시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한강 다리에 얽힌 여러 자살 사건에 보내는 추모 행위일 것이다. (어쩌면 자살을 방조하는 사회 분위기라는 비판보다, 그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를 비판하는 게 더 빠를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한강 바닥에는 이세계로 향하는 포탈이 있으니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리면 그곳에서 새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농담이 있다. 좀 터무니없지만 이것도 자조 섞인 농담 중 하나이다. 허나 중요한 것은 한강이라는 게 한국의 심장부에 흐르는, 세계로 눈을 돌려보아도 유례없이 큰 크기의 ‘도심 속 강’이라는 점이다. 봉준호가 <괴물>의 무대로 한강을 설정한 이유와 그 맥락이 비슷하다는 뜻이다. 한강은 한국민의 젖줄이다. 동시에 그만한 한이 맺힌 강이기도 하다. 그런 강에서 사람들이 삶을 떠나보낸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강의 기적’이라는 게임적 설정은 게임적 리얼리즘이 된다. 아즈마 히로키는 게임적 리얼리즘이라는 현상을 두고서 죽음을 방조해서 문제인 게 아니라, 죽음을 바르게 마주하지 않기에 문제라고 말한다. 예컨대 <캐피탈리즘 호!>에서 한강의 기적이란, 자살방조라기보다는 죽음의 타자화에 더 가깝다.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는 죽음 방조의 현상에서 생의 의지가 자리할 곳은 없기에 이는 문제가 된다.
3.
주식 시장의 그래프가 요동친다. 그 위에 바이탈 사인이 겹쳐진다. 주식이 바닥을 치면 바이탈 사인도 바닥이 된다. 그러다가 상장 폐지가 되면 삶은 종말을 맞이한다. 이것이 자본주의 안에서의 삶에 대한 직접적인 이미지이다. 그리고 여기에 게임의 요소가 개입한다. 하락하는 그래프를 되살리는 방법은 인위적으로 그래프를 바닥에 보내는 것이다. 작품에서 루세트가 한강의 기적을 실행할 때마다 만화는 스크롤의 형태를 빌려 깊은 추락을 보여준다. 표면에서 심층까지 도달하는 과정은 바벨탑을 쌓던 인간이 단테의 지옥으로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먼저 바벨탑, 높게 쌓으면 천하는 통일된다. 그리고 신에 가까워질 테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라는 건 무엇이든 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이니 말이다. 그러나 바벨탑이 무너질 때 그는 영원한 심연으로 빠질 테다. 이 하락의 이미지는 갈등의 골이 깊어진다는 감정의 사망선고이자, 주식이 하락한다는 파산의 예고이며, 한강의 기적에 가까워진다는 염원의 형태이기도 하다.
게임적 리얼리즘은 개인에게 죽음을 선고하지 않는다. 그래서 루세트는 누구보다 죽음을 갈망하게 된다. 죽음과 마주하는 걸 회피한 대가는 영원함에 갇히는 것이다. 예상 시간보다 빠르게 빚을 수복했다 하더라도 50년이라는 만기를 버티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간다. 이는 [캐피탈리즘]이라는 게임의 설정을 50년 동안 플레이하는 것으로 해두어서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현실의 시간이 될 때 불멸은 불로(소득)를 채득한다. 중도하차 없이 파산이라는 선택지만이 존재하는 이 게임에서 삶은 곧 타인에게 빚을 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말하자면 빚을 갚는다는 행위는 단순히 돈을 갚는 것만이 아니라, 개인의 시간을 은행에 담보로 맞기는 것을 포함한다. (마치 <인 타임>처럼) 그리고 그런 시간의 체납은 삶의 상실이라는 영년을 선고한다. 말 그대로 그것은 새해이거나 또는 긴 삶이다. 요정계 대출을 성실히 이행하지 못하면 최저 시급으로 계산된 시간만큼 집창촌에서 일해야 하는 게 이곳, <캐피탈리즘 호!>의 법칙이기도 하다.
바다를 떠도는 배 한척이 통째로 집창촌이라는 점과, 죽지도 못한 채로 영겁(이자 엉겁)의 세월을 최저 시급을 받아가며 대출을 상환해야 한다는 점은 <캐리비안의 해적>에 나오는 ‘플라잉 더치맨’을 소재로 한 게 분명해 보인다. 알 사람은 알겠지만 플라잉 더치맨은 곧 죽을 사람에게 생존을 대가로 영원한 노동을 강요하는 유령선이다. 그러니 돈을 빌린 이상 불로불사이게 된 이들이 마지막에 가는 곳이 이 선박이라는 점은, 꽤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파산이라는 죽음을 회피한 대가로 가는 곳이 유령으로서의 삶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물론 돈을 갚지 못하면 집창촌으로 끌려가는 게 윤리적으로 그리 바르게만 보이지는 않으나, 파산에 이른 이들의 다수가 삶의 막장에 다다른다는 점에서 이 설정은 틀리지 않았다. 이 집창촌은 남녀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망한 게임 캐릭터가 자리한다는 점에서도 ‘고갤’의 문화로서 의무를 다하기도 한다.
작품 중간에 루세트가 삶의 의지를 잃고 파업을 선언했을 때 잠시 끌려간 집창촌은 버려진 게임 캐릭터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실은 작중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다른 여러 게임에 등장하는 캐릭터이다.) 대강 살펴보면 알 사람은 알법한 배경 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소닉] 시리즈에 나오는 테일즈이다. 여기서 테일즈는 게임이 망해 충격을 받고 사망한 소닉의 아내로 나오는데, 이는 사람들이 테일즈의 디자인만을 보고 남성이 아닌 여성으로 착각하는 것을 패러디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테일즈에게 찾아오는 단골손님은 마리오이다. 이 작품에서 마리오는 성격이 좋지 않은 악덕 경영주이자 루세트의 라이벌 기업 중 하나인데, 이는 우스갯소리로 떠도는 ‘블랙 닌텐도’ 이야기를 캐릭터에 접목한 유머다. 그 유머 포인트는 가족도 함께할 수 있는 게임을 만드는 닌텐도가 실은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다는 점, 어두운 게임을 만드는 악덕 기업 (블랙 기업)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점을 몰라도 작품을 감상하기에는 큰 지장이 없지만, 게임을 다루는 갤러리 내에서 게임에 관한 유머가 어떻게 소비되는지를 고려하면 굉장히 묘한 느낌을 준다. (이 구도는 닌텐도와 세가의 라이벌 시절이 지나고 나서 다다른 현재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4.
이외에는 소소한 부분이지만 경쟁사의 라이벌이자 작품의 주된 해법으로 나오는 이지(lji는 게임의 이름이자 해당 게임의 주인공 이름이다.)가 소닉과 대비되기도 한다. 이지라는 게임은 평가가 좋지 못한 게임이었고, 그런 게임을 타인에게 권하는 유저들이 주로 하던 말이 ‘이-지붐은 온다.(언젠가는 크게 한번 터질 것이라는 뜻이다.)’였는데, 이는 운율적인 면에서 ‘소닉붐은 온다(소닉붐 현상을 만들 정도로 빠른 소닉이라는 캐릭터처럼, [소닉]이라는 게임 프렌차이즈가 되살아나기를 염원하는 문구다.)’를 연상케 한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이지붐도 소닉붐도 오지 않았지만, 둘 다 게임으로나 문화적인 인기로나 한물갔다는 점에서, 여기에 악당 역할을 하는 마리오(닌텐도)는 닌텐도 스위치라는 이름으로 여전한 인기를 누린다는 점에서, 게임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모종의 대체역사와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니 <캐피탈리즘 호!>은 단순한 게임 소개 만화가 아니라 할 수 있다. 이 만화의 형식은 기본적으로 게임의 플레이 방법을 알려주는 튜토리얼의 성격을 띠지만, 내부를 구성하는 요인은 게임 자체가 아닌 게임을 둘러싼 문화 전반이다. 혹자는 이걸 두고서 ‘게임을 하지 않은 이들도 즐길 수 있는 게임 문화는, 게임을 향유하지 않고 그 주변 문화만 향유하는 기생충을 낳는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스포츠로 치면, 해당 스포츠의 경기 결과가 아니라 ‘특정 선수의 팬’으로서 경기를 보러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이다. 확실히 이 비판은 일리가 있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본체가 아닌 주변의 파생을 향유하는 것도 해당 문화의 일원임을 증명한다는 점이다. 어떤 면에서는 <캐피탈리즘 호!>의 연재가 불러온 갤러리로의 유입 인구 증가가 고갤이 망하는데 일조했으므로, 이 작품은 안과 밖 모두로 자신의 내적 형식을 재현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 루세트와 티어라는 캐릭터가 작품의 주인공으로 설정된 이유가 원안이 된 게임에 얽힌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므로, 이곳에는 특정한 정체성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정체성이 없다는 건 주변부를 응집할 주체가 마땅히 설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혼재된 문화로서의 발전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예컨대 게임이 문화라는 점을 증명하는 것은 게임 자체로서의 가능성만이 아니라 총아로서의 혼류덕분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죽음을 맞이하지 않는 불멸의 루세트는 문화로서의 파급력을 지닐 때까지 죽을 수 없는 어떤 게임의 목소리가 된다. 물론 루세트가 당하는 각종 성적인 모욕이 작품에 꼭 필요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남는다. 성적인 모욕이 인간에게 최상급의 고통이라는 점에서 그 용례가 이해가 가기는 하나, 꼭 자극적인 것만이 극적인 효과를 주지는 않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루세트에게 가해지는 일들이 이해가 간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은 맥락에서 일 테다. 루세트에게 가해지는 여러 벌칙과 형벌 중에 타인의 의지로 행해진 가장 마지막의 것은 화형이다. 이 장면은 중세의 마녀사냥을 재현하고 있지만 형벌 그대로만 본다면 산채로 불에 타는 고통이다. 해고의 직접적인 의미로 목이 잘린 채로 몸뚱이를 찾아다니는 망자의 형벌로 시작하는 첫 번째 죽음으로부터, 산채로 불에 타는 고통을 마주하는 루세트에게는 눈물이 사라져버린다. 그러니까 맥락 그대로,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죽지 못한다는 고통이다. 죽음을 맞이하고 나면, 천만 달러가 가산된 빚으로부터 죽을 수 없다는 고통과 중간에 일을 그르쳤다는 자괴감이 몰려온다. 그런 점에서는 루세트가 상실하게 된 순결이 <박하사탕>에서의 영호(설경구)가 잃게 된 인간성과 일치되어 보이기도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은 곧 (어떤 형태로든) 폭력을 불러온다고 말하는 이 작품은 영호가 총기를 집어든 이유이자 루세트가 술독에 찌들은 이유이기도 하니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가장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이다. 티어가 루세트에게 말하듯이 처녀성을 상실한다 하더라도 한강의 기적을 통하면 그 모든 게 없었던 일이 된다. 그러니까 반복된 시간 안에서 육체는 복구되더라도 마음은 복구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몇 번의 파산을 겪고 나면 자산 운용에 대한 노하우가 쌓이기 마련이지만, 그 과정에서 입은 산전수전 또한 쌓이게 된다. 설사 그것이 죽음과도 같은 고통이었다 할지라도, 이 죽음은 50년이라는 기한으로 예고되었고, 해마다 이자가 붙는다는 점에서 고통에 대한 가중처벌이 된다. 예컨대 이 작품에서 자본은 곧 고통에 등치된다. 다르게 말하면 고통 없이 돈을 버는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루세트가 작품의 도입부에 선택한 것은 노력 없이 큰돈을 빌려주겠다는 티어의 악마 같은 속삭임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일은 루세트의 선택에 대한 책임이자 돌아갈 수 없는 출발지점에 대한 게임적 리얼리즘의 산물이다.
5.
작품의 고비마다 티어는 ‘선택은 모두 개인의 몫’이었다고 말하며 자신에게는 해당 결과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말한다. 동시에 여러 투자사에서 투자자에게 매니저가 자주 하는 말이 그것이라는 설명이 덧붙여진다. 작품의 결말에서 티어가 개인의 잘못된 선택으로 몰락한다는 점에서도 다시금 강조되는 이 문구는, 작품을 보며 루세트에게 이입했던 독자에게 큰 카타르시스를 준다. 웹툰이 앞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이자 인간 세상에서의 고통을 의미했던 이 문구가 전복의 형상으로 재건될 때, 그곳에 남는 건 헛된 희망이 아니라 기쁜 폐허이다. 반전을 꾀하는 여타 매체에서도 마지막쯤에 자신이 강조했던 말로 몰락하는 악당과 그것을 위해 복선을 깔아두는 기법이 쉬이 알려져있기는 하다만, <캐피탈리즘 호!>에서의 환호는 자본주의로의 항해라는 비가역적인 모험과 돈을 어떤 수단으로 벌든 간에 그것은 기쁜 일이라는 역설이 담겨 있다.
물론 더럽게 번 돈은 인간을 더럽게 하기 마련이다. 허나 그런 더러움을 감수하면서도 죽음을 마주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던 루세트에게, 죽음은 돈보다 더 귀중한 가치였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우리를 그런 해석으로 빠져들게 하지 않는다. 루세트는 자신의 폭력적인 경영이 파국을 불러왔다는 걸 깨닫고는 복지 경영으로 노선을 바꾼다. 그 과정에서 더러움이 향하는 곳은 내부가 아닌 외부가 된다. 역설적이지만 정경유착으로 독과점을 행하는 루세트의 회사는, 바로 그것을 통해 회사를 망치려는 티어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티어가 말했듯이 내부의 적이 외부의 적보다 더 무섭다면, 외부의 악으로부터 삶을 지키는 건 내부의 악이었다. 그리고 루세트는 내부와 외부가 일치하지 않는 분식회계를 통해 통쾌한 복수를 달성한다. 이 대목에서 다시금 복기하자면, 이 작품은 문화만이 아닌 삶의 측면에서도 안과 밖 모두로 자신의 내적 형식을 재현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실은 루세티아라는 주인공의 회사 이름이 그들이 본래 있던 [루세티아]라는 게임이기도 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