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이하 코로나)가 창궐하는 근래의 모습은 흡사, 인류 종말을 맞이하는 어떤 단계처럼 느껴진다. 죽음을 맞이하는 5단계*처럼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의 일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주 : 부정-분노-협상-우울-수용.) 물론, 여기서 나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세계에 종말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세상에 코로나가 퍼지는 모습이 첫 번째 이미지라면, 신천지가 드러나는 광경이 두 번째 이미지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다.
퍼지는 것과 드러나는 것이 한자리에 모임으로써 그것은 산개하는 외양이 된다. 방역을 위한 안개가 골목에 뿌려질 때 곳곳에 숨어있던 생쥐가 부산히 튀어나오듯이, 코로나가 세상에 뿌려지자 신천지가 세상으로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잠깐, 나는 이 신기한 풍경에 어떠한 정의를 내리고자 하는 게 아니다. 위에서 했던 말의 반복이지만 나는 신천지가 세상의 종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초점은 신천지가 아니라 그것의 대분류인 종교로 향해야 할 것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위협 속에서 구원을 갈구하는 경향이 있으니 말이다. (이 말이 구체적으로 연계되어 실언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구원에 관하여 생각해보던 중에 종교를 떠올리게 된 것은 네이버에서 한창 연재중인 웹툰 <지옥>의 최근 화에 그런 내용이 나왔기 때문이다. 연상호와 오래도록 협업해온 최규석이 그림작가를 맡고, 연상호의 단편에 기반을 둔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지옥>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어느 날 눈앞에 나타나는 천사에게 ‘고지’라는 것을 받는데, 이는 피선고인에게 몇 날 몇 시에 죽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 고지는 한번 선고받은 이상 되돌릴 수 없고, 대상자의 선별에 어떠한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며, 고지의 순간에는 지옥의 악마가 난입해 신체를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작품은 이러한 현상이 존재하는 세계를 바탕으로, 고지가 신의 뜻임을 전파하는 두 개의 종교를 보여준다. 하나, 고지가 있기에 인간은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며, 둘, 고지를 받은 인간은 선하지 않기에 심판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둘을 각각 온건파와 급진파로 부르고자 한다.
온건파의 수장 정진수는 고지라는 현상이 있으며, 그것을 막으려면 인간은 선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이비 취급을 면치 못한다. 이에 정진수는 고지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최근에 고지를 받은 한 여성의 고지를 생중계하기로 결정한다. 동시에, 정진수를 사이비로 생각한 형사가 나타나 뒷조사를 하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고, 오히려 그의 눈에 비친 정진수는 일반인들보다 청렴하기까지 하다. 이윽고 시간은 흘러 여성이 받은 고지의 날이 다가오고, 카메라가 주목한 현장 속에 지옥의 악마가 나타나 그녀의 육신을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그렇게 생중계된 신의 재림 현장이 미디어에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가고, 가장 극악무도한 형태로 재현된 신의 은총에 세상은 혼란에 빠진다.
이 주제만으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많지만 내가 들여다보고 싶은 건 정진수 의장의 외딴 고백이다. 자신을 체포하러 온 형사에게 정진수는 “자신은 20년 전에 이미 고지를 받은 바가 있다.”고 말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고지를 받은 후로 선하게 살아온 자신은 “왜 고지를 받았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게 결론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결론을 부정하기 위해 악한 짓을 일절 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악행 없이 살아온 자신에게 고지를 내린 신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평생을 선하게 살아야겠노라고 다짐했고, 끝내 이 계획은 형사 앞에서 정진수가 고지당함으로써 완성되고야 만다.
“무질서를 말하는 신”이라는 주제가 종교계의 오랜 화두였지만 이 만화는 그것의 다른 판본을 펼쳐 보이고 있다. 신이 있고 그가 말하는 무질서에 대해 논하는 게 아니라, 무질서를 발견했고 그걸 설명하기 위해 신을 빌려 온다는 점이 그렇다. 일단 정진수부터가 평소에 신을 믿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고지를 받은 후로는 줄곧 신에 대해 생각해왔다. 여기서 신이라 함은 벌어지는 현상에 이유를 제공하는 존재이다. 세상 만물에는 모두 원인과 결과가 존재하고, 눈앞에 벌어진 알 수 없는 풍경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고 말이다.
대체, 고지라는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현상에 어떤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의미가 된다. 그런데 이 현상은 인간의 범주를 넘어섰다. 인간의 뜻이 아니라면 신의 뜻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을 테고, 그렇다면 신은 이 현상에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야 한다. 신은 의미와 이유를 주는 존재이기에 그렇다. 신을 믿는 우리에게 의미 없는 존재란 없듯이 의미 없는 현상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이 현상에는 이유가 없다. 이런 과정 속에 인간은 자신이 아직 보지 못한 게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 그러면서, 믿음을 바탕으로 보이지 않는 영역을 차분히 설계해 간다. 인간이 신탁을 받아 종교를 생성하는 게 아니라 믿음을 바탕으로 종교를 설계하고 그곳에 신의 이름을 빌려 오는 과정이 이렇게 완성된다.
말하자면, 정진수는 신을 배신한 게 아니라 신의 바깥에서 세상을 설명해보려 했다. 그래서 정진수에게 종교란 무질서를 입증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그는 단지 무질서를 입증하기 위해 신의 이름을 빌려 온 사이비에 불과하다. <지옥>이 던지는 굵직한 주제가 종교 바깥의 문제이면서도 종교와 연루되는 지점이 그것이다. 이 작품에서 사이비라는 말은 신의 이름을 사칭한 집단이라는 점을 전복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처음에 정진수를 사이비로 여기던 이들도 고지를 목격하고 나자 그를 선지자로 여긴다. 하지만, 일련의 과정은 정진수를 선지자로 만들어줄 뿐 사이비에 대한 본질적인 변화를 끌어내지 못한다. 고지를 목격한 이들은 자신이 알던 신을 내치고 그곳에 새로운 신을 올려 두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신은 흐름을 벗어나지 않게 된다. 그들에게 무질서라는 이름의 신은, 질서이라는 이름의 무질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정진수는 고지를 내리는 신이 있다는 걸 믿지 않았다. 무질서하게 벌어지는 이 현상에 질서를 부여하려 했으나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를 계승하든, 부정하든 간에 그런 공식이 성립하려면 그곳에 아버지가 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살해가 늘 정답인 것만은 아니지만 아버지 없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자식이 우리이기에 정진수는 혼란에 빠졌다. 무성생식이란 가능하던가? 여기서 고지를 대하는 두 개의 태도가 생겨난다. 위에서 말한 온건파와 급진파다. 온건파는 개체의 보존을 위해 세상에 받아들여질 수 있게 노력하자는 쪽이다. 급진파는 개체의 보존을 위한다면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이들을 삭제해야 한다는 쪽이다.
정진수의 온건파가 종교 이전의 삶, 아버지가 없으니 자신이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보여준다면. 온건파에 기생하는 급진파는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까지 미리 터를 닦아 놔야 한다고 말한다. 온건파가 고지라는 게 있기에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급진파는 고지를 받았기에 악한 사람이라며 고지를 받은 이들을 죽이려 든다. 여기서, 우리가 알던 사이비의 모습은 전자이다. 하지만 온건파와 급진파를 비교해볼 때 온건파가 더 나은 선택으로 보이는 게 사실이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해주는 것과 무턱대고 가서 사람을 죽이는 건 무게부터가 다르니 말이다.
무엇보다, 고지를 받은 이상 이미 죽은 이를 살해하는 건 그렇게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다소 괴팍하게 표현하자면 죽음을 앞당김으로써 공포를 해소해준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의식이 피고지자에게 집중됨으로써 주변인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 모습은 마치 점으로부터 얼룩이 번지는 것처럼 보인다. 사회 안에서 고지를 받은 이를 선별하고, 점 찍고, 고지자를 중심으로 사건이 번져 나가며 주변은 초토화된다. 고지자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주변 사람은 자신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공포를 느끼게 되는데, 그것은 급진파가 말하는 의미의 낙인이다. 죄가 있기에 고지를 받았으리라는 생각이 자신도 고지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번지면서, 피고지자와 함께 했다는 죄는 고지에 대한 예언이 되고, 급진파가 그런 죄의식에 칼을 꽂아 넣는 식의 악순환이 벌어진다.
온건파는 죄를 짓지 않아야 고지에서 자유로울 수 있음을 강조한다. 정진수가 그러했듯이, 우연히 피고지자가 되었을 때 그런 우연을 탓하지 않으려면 자신의 삶을 순결하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고지에는 딱히 별다른 이유가 없다. 천재지변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지경이다. 그런데 천재지변에 대비해 자신을 순결하게 해둘 필요가 있다는 말은 어딘가 이상하다. <지옥>의 사람들이 온건파 보다 급진파에 끌리게 된다면, 그런 이상함 때문이리라. 대비할 수 없는 것을 대비하는 방식이 종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급진파는 말한다. 급진파의 논리는 인간이 고지에 대응할 수 있고, 그것으로 신의 무결성에 흠집을 낼 수 있다는 점을 근거로 한다. 무질서라는 이름에 칼을 꽃아 질서를 만들면 그것으로 신은 설명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그렇게 설명된 신이 내리는 고지는 인간이 납득할 수 있는 정도(正道)로 변화한다.
그렇다면 둘 중 누가 더 사이비에 가까울까. 이 물음 자체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영양가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작품은 그런 질문을 던지며 사이비의 두 가지 정의에 대해 말하려는 듯 보인다. 온건파는 사회적으로 사이비 대접을 받지만 종국에는 난세의 영웅으로 변모한다. 반면, 그에 파생된 급진파는 오만 광기를 흩뿌리는 것으로 묘사된다. 작품의 묘사에 따르면 온건파는 원주민들의 사냥의식에 사용하는 분장을 하고서 피고지자에 대한 혐오와 선동을 서슴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사용되는 인터넷 방송과 유튜브라는 매체는 우리가 가짜뉴스의 진원지로 지목하는 뉴미디어를 떠오르게 한다. 사족이라거나 논의의 범주를 넘어섰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런 묘사에서 급진파를 인터넷 시대의 역병으로 여기는 작가의 시선을 찾아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시선 속에서 인터넷이 낳은 역전의 광풍 또한 찾아낼 수 있다.
2016년대 한국에서 가장 인상 깊은 사건을 하나 꼽으라면 대부분은 촛불 시위를 손에 꼽을 것이다. 이 촛불 시위는 시민 참여에 대한 정치적 교훈을 주기도 했지만, 뉴미디어 시대의 풍광이 긍정적으로 재현될 수 있음에 대한 좋은 사례가 되기도 했다. 기존에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오프라인에서 나온 정보를 공유하는 장소였다면, 촛불 시위에서 인터넷은 오프라인으로 정보를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어쩌면 가짜뉴스를 피해 현실로 도피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모습은, 좀 전에 있던 국정원 댓글 조작 사건에 대한 전복이자 광우병 사태에 대한 반성이었다. 그때와 지금의 인터넷과 광화문이 각기 다른 맥락으로 바뀌게 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지적하는 공간의 범주에 ‘인터넷 공간’이 포함되는 시대가 왔다는 걸 몸으로 깨닫게 된다.
나는 <지옥>의 논의가 그곳까지 미치기에는 너무 좁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런 주장은 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지옥>이 보여주는 온건파와 급진파의 관계가 2020년대 한국에서 벌어지는 코로나 창궐에 대한 되풀이(Reprise)처럼 보인다. 첫째, 코로나에 걸리게 되면 n번째 확진자의 이름으로 지정되어 온라인에 동선이 공개된다. 그리고 그걸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대체로 다음 두 가지에 속한다. 걸릴 만해서 걸렸다는 것과,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저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이 동선 공개는 확진자가 다녀간 장소에 가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의 성격과 더불어 살아있는 바이러스라는 낙인을 찍는다.
노파심에 미리 말해두건대 나는 지금 동선 공개에 반대하는 게 아니다. 동선 공개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동선만을 향해 있을 뿐 그것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고 있지 않다. 확진자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묘사되며, 실제로 코로나는 아무리 조심해도 걸릴 수밖에 없는 전염력을 지니기도 했다. 그러니 사실, 코로나는 천재지변이라는 말에 가까운 질병이고 어쩌면 현상이라고까지 할 파급력을 지녔다. 바로 이 점이 <지옥>에 나오는 고지처럼 보인다.
그 누구도 코로나에 걸리고 싶어서 걸리는 건 아니다. 코로나에 걸리기 쉬운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물론 코로나에 대응하는 것은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배려에 속하기도 하기에 필수적으로 지켜야 할 사안임은 분명하다. 그 점에 있어서 코로나는 고지와 다르다. <지옥>이 말하는 고지는 종교적 바탕으로 논의되지만 코로나는 그냥 천재지변이다. 막을 수 있었다 없었다를 논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고, 모든 사람이 FM대로 행동하지 않거나 못한다는 점에서 영문을 알 수 없는 감염이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가장 중대한 위협은 바이러스의 신체 침투보다 확진자에게로의 사회적 시선처럼 보인다. 시민 의식과 같은 점을 지적하는 게 아니다. 다른 나라와는 달리 한국에서 코로나는 신천지라는 종교적 맥락과 궤를 함께하게 되었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신천지에 어떤 평가를 내리기 이전에, 코로나바이러스와 신천지는 실질적으로는 다르지만 은유적으로는 같은 말처럼 들리게 되었음을 전제로 두고 싶다. 그 결과 코로나는 신천지가 갖는 사이비 프레임을 그대로 계승했다. 코로나는 고지를 내리는 종교처럼 변했고, 고지를 받은 이들은 확진자가 되어 자가격리라는 지옥으로 간다. 이때 피고지자의 동선은 인터넷에 공개되어 코로나(의 위협)를 믿지 않으면 당신도 고지를 받을 수 있다/확진자가 될 수 있다는 경고/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그러니까 오히려 신천지가 코로나처럼 보이고 코로나는 사이비처럼 보이는 이상한 광경이 우리에게 펼쳐지고 있다.
물론 박멸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신천지와 코로나를 딱히 구분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신천지가 코로나처럼 여겨지는 게 아니라, 코로나가 사이비처럼 여겨지는 상황은 그리 달갑게 보이지 않는다. 고지를 사이비라고 여겼던 이들, 정진수를 몰아세우던 이들은 고지 앞에 무릎을 꿇었고 그곳에서 급진파는 탄생했다. 이 급진파의 특징은 코로나에 대응하는 게 인간의 저력을 보여줄 수 있다고 믿는 왜곡된 신앙심이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코로나에 잘 대응하지 못하는 건 인간 이하의 수준이라고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만약 누군가 나에게 온건파와 급진파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나는 망설임 없이 정진수라는 사이비를 택할 것이다. 우리는 정진수의 말처럼 죄를 나누고, 죄를 짓지 않도록 늘 행실에 조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