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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n 12. 2020

한국 만화의 어떤 경향 : 여성 서사


1.


2019 올해의 우리 만화로 <정년이>가 선정되는 자리에 나도 있었다. 다른 분야의 수상자로 갔던 것이었고 덕분에 만화를 만드는 이들을 눈앞에서 볼 수 있었다. 그중에 개인적으로 만나보고 싶었던 하일권 작가는 아쉽게도 공황장애로 인해 시상식에 참가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국 만화의 어떤 경향을 확인할 수 있는 [오늘의 우리 만화상]을 눈앞에서 본다는 건 귀중한 경험으로 남았다.


귀중한 경험을 꺼내 들게 된 것은 우리가 느끼는 ‘어떤 경향’ 중에 여성 서사의 대두가 있기 때문이다. 여성 서사의 대두는 사회 전반적인 흐름이기에 만화판이라 해서 예외일 수가 없고, 그래서 특별한 현상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렇지만 만화를 만드는 방법과 소비하는 방법 쪽으로 접근해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다. 1) 여성 서사를 통해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가? 2) 여성 서사를 소비하는 것이 여성의 인권 성장에 도움이 되는가?


여성 서사를 통해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가?


첫 번째 물음에 답하는 것은 무척이나 쉬운 일이다. 여성 서사를 통해 전하려는 것은 여성이라는 존재를 지우는 것이다. 이상한 말처럼 들리지만 우리는 여성이 남성 서사 안에서 도구적으로 사용됐음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주로) 남성 서사 안에서 남성을 지칭할 때 ‘존재감’이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는다. 이는 작품의 서사를 끌어가는 게 남성이고, 그렇기에 남성이라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을 떠올리게 된다는 점에서 연유한다. 즉 영단어 Man이 남성이자 사람을 뜻하는 것처럼 남성을 따로 존재라고 지칭할 이유는 없었다.


반면 여성은 이름을 부르는 행위를 통해 그들의 존재를 확립해주어야만 비로소 세계에 존재할 수 있었다. 따라서 남성 서사 안에서 여성은, 이야기 안에 배치되기 위해 존재를 확립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이 정해진 결론을 도출하는 공식을 수정하고자 하는 게 근래의 여성 서사이다: 여성이라는 존재를 지우고 사람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사람임을 천명한다는 말이 거창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임을 천명한다는 것은 인권운동처럼 거창한 일도 아니고, 무언가 강력한 힘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사고체계의 운용도 아니다. 외계인이 나오는 영화에서 외계인이 으레 이방인(Alien)인 것을 쉬이 알아차릴 수 있듯이, 반대로 외계인이 나오는 영화에서 인류는 모두 인간 종족임을 알 수 있듯이, 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에서 서로에 대한 소외(Alienate)를 없애고자 함이다. 외계인이 나오는 영화에서 그에 대항하는 인간이 흑인과 백인, 여성과 남성 등으로 딱히 나뉘지는 않는다. <맨인블랙>과 같은 영화가 그러했고 여기서 인간은 하나의 종일 뿐 자체적으로 어떤 분류를 갖고 있지는 않다. 이와 동일하게 남성과 여성은 같은 사람이고, 모든 인간은 ‘사람’으로 대우받으므로 딱히 여성을 ‘존재’라고 부를 일이 없도록 인식을 개선해나가는 게 여성 서사의 정의이다.


여성 서사를 소비하는 것이 여성의 인권 성장에 도움이 되는가?


그렇다면 두 번째 물음은 어떠한가. 먼저 ‘여성’이라는 단어에 다른 어떤 것을 넣어도 문장은 성립한다. 흑인이라는 단어를 넣어도 그다지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그 과정에서 따라붙는 지칭과 지명의 방법이다. 여성은 말 그대로 성별의 한 분류이고 흑인은 인종의 한 분류이다. 이 분류 자체에는 개념 정립 이외에 어떤 함축도 들어 있지 않지만, 그것을 지칭하는 것만으로도 ‘지명’이라는 ‘소외의 효과(Verfremdungseffekt)’가 생겨난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처지에 놓인다. 마치 홍길동처럼 여성을 여성이라 부르지 못하고 흑인을 흑인이라 부르지 못하게 된다.


많은 작가들이 이 모순을 피해가는 방법으로 세계의 폐쇄를 택한다. 여성만의 세계를 만들거나 남성만의 세계를 만들어 타자의 개입을 전적으로 차단하는 것을 통해 오해를 막는다. 이 방법은 힘을 하나로 모을 수 있기에 인식을 개선해나가는 일에 효과적이지만, 그렇게 모인 힘과 그로 인해 도출되는 결과물이 타자를 원천적으로 포섭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여성 서사 속에서 여성의 존재를 지우는 방식은 남성 타자의 부재로 인해 존재가 떠나간 자리에 초대할 사람을 사라지게 한다. 초대할 사람이 없는 극장 안에서는 무대 위에 올라온 배우(Actress)들만이 행동(Action) 할 뿐이고, 그렇게 이 극장은 그들만의 것으로 남아버린다.


흩어져 있는 개인을 한 곳으로 모은다는 점에서 이 극장이 갖는 의의는 여성 해방 운동의 거점, 혹은 안락한 쉼터나 도피처가 될 수 있다. 이 방법론에 대해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로서 무언가 바꾸어야 한다거나 하는 수정이 가해질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남성 서사 중심으로 짜인 판도를 뒤집는 것을 목표로 삼은 것이라면, 어떠한 진영을 구축해 공고한 성을 쌓는 것과 같은 무력보다, 부드럽게 어울려 상대를 설득하고 계몽시키는 방법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생태계 안에서 세대가 일정 정도 지나게 되면, 어느 순간 외부를 망각해 자체적인 경쟁력을 상실하게 되는 일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섬으로 들어가는 일은 어디까지나 전초기지로의 역할일 뿐이다. 섬을 거점으로 삼아 대륙으로의 진출을 꾀해야만 한다.


2.


그런데 근래에 여성 서사를 작동하기 위한 원동력을 오인하는 일이 자주 목격되곤 한다. 여성이라는 존재를 지우는 방식이 여성성의 부정으로 나아가는 게 그것이다. 이는 여성에게 주어지는 성 역할을 성고정관념으로 확대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인데, 여성 캐릭터의 외모를 남성 캐릭터처럼 그려놓는 일이 이에 해당한다. 이는 중성적 외모와도 다르고, 남성 캐릭터를 여성 캐릭터처럼 그려놓는 것과도 다른 맥락을 지닌다. 전자는 인물에 대한 신비감을 조성하기 위한 목적 혹은 성별에 따른 성고정관념의 부여를 방지하기 위해 사용되곤 했다. 그리고 후자는 몇 가지 사례들을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키치 혹은 모에이다.


불필요한 오해를 막기 위해 여기서 분류를 세부적으로 나누어 보자면, 여성 캐릭터를 남성 캐릭터로 그려놓는 일 중에서, 성 역할은 그대로 내버려둔 채 성고정관념을 제거하기 위해 여성성을 탈락시키는 일이 우리의 논의대상이다.


성 역할은 성고정관념에 앞서는 개념이다. 전통적인 성 역할이 지금은 어느 정도 무색한 감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산과 같은 것은 아직 여성의 전유물이다. 언젠가 기술(technique)이 발전해 인공자궁 같은 게 생겨난다면 모를까 지금으로서는 출산이 여성의 역할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이에 따르면 여성만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말은 성고정관념이 아니라 성 역할이다. 즉 출산은 여성의 성질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바꿀 수 없는 것을 성 역할로, 바뀔 수 있는 것을 성고정관념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니 언젠가는 바뀔 수 있겠지만 지금 당장은 불가능한 일이 성 역할이라는 가정을 해볼 수 있다. 그것은 관측법을 달리한다고 하여 해결될 문제가 아니고, 연구를 해서 새로운 물질을 발견하고 기술(description)을 발명해야만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


문제는 ‘언젠가는 바뀔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당장은 불가능하다’는 것에 초점을 맞출 때 벌어진다. 성 역할은 성고정관념과는 달라서 각자에게 주어진 장점 등으로 논해진다. 말하자면 성 역할은, 누군가의 강요와 압박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서로의 협의 혹은 효율을 위해 나누어지는 ‘분류’의 개념이다. 즉 이미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할지의 문제인 것이다. 한정된 자원을 잘 사용하려면 시간과 인력을 적재적소에 배치해야만 한다. 이 과정에서는 개인의 능력보다 주어진 것이 더 우선시되므로, 주어진 것을 갖지 못한 이들에게는 해당 분과로의 진입이 어려워지는 게 사실이다. 그리고 그렇게 주어진 것에 대한 보완을 우리가 대략 수행 중인데, 유치원의 남자 선생님이나 전장의 여군 같은 경우를 뜻한다. (언젠가는 바뀔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서 말이다.)


우리가 방금 언급한 보완은 아니마 아니무스와 같은 성고정관념의 해체이지 성 역할의 간섭은 아니다. 우리가 여성성과 남성성이라는 단어 사용에 동의한다면. 유치원의 남자 선생님은 여자 선생님과 같은 여성성이 있고, 전장의 여군은 남군과 같은 남성성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해당 분과에 어느 특정한 성 역할이 요구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에게 남성성과 여성성만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성고정관념이고, 성 역할은 우리가 기술적으로(descriptive) 논의해야할 단계이다.


여성성이 아이들을 더 잘 돌보기에 유치원 선생님에게 여성성이 필요하다는 말은 우리가 여성성이라는 것에 대한 기술적인 검증을 시도해야 함을 말해준다. 같은 맥락으로 아이의 출산에 꼭 자궁이 필요한지에 물음을 던지는 행위는, 인공자궁에 대한 가능성을 타진함으로써 근본적으로 여성의 역할과 여성성을 분리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예컨대 여성의 역할은 여성성과 같지 않고, 남성의 역할은 남성성과 같지 않다는 식으로 여성의 존재와 남성의 존재를 지우는 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근래에 여성 캐릭터의 외모를 남성처럼 그려놓는 일은 성 역할 자체와 연관되는 일이 잦다. 아마 이는 여성 캐릭터를 묘사하는 것에 사용되는 여성성이 성 역할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여성성을 성 역할과 연관지을 때는, 여성의 존재를 지우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여성 서사가 성 역할 자체를 삭제해버린다. 이렇게 사라진 여-성 역할은 여성성을 지닌 여성들이 투입될 ‘적재적소’가 사라짐을 의미한다. 그렇게 된다면 여성성을 지닌 여성들의 역할은 사라지게 된다. 이는 여-성 역할의 붕괴로 이어지며 남-성 역할밖에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만든다. 반대로 말하자면 사람(Man)이란 곧 남성성을 뜻한다고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결과적으로 이 경우에 사람다움이란 남자다움이라는 말처럼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반대로, 소수를 위한 행동이 평등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남성성을 지닌 여성’들을 위한다고는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의 자리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남성성이 남성의 역할에 대입되지 않기에 사라지고야 만다. 여성성이 여-성 역할과 연관되는 상태에서는 남성성도 남-성 역할과 연관되는데, 여성성이 삭제되고 남성성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남성은 이도 저도 아닌 게 되어 버린다. 여성성도 사람다움이고 남성성도 사람다움을 표하지만, 여성의 존재가 지워지는 반면에 남성의 존재는 특정되어 버리므로, 우리가 말하는 여성 서사는 사라지고야 만다.


성 역할은 그대로 내버려둔 채 성고정관념을 제거하기 위해 여성성을 탈락시키는 일은, 고정관념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여성 서사를 지우는 일이다. 여성에게서 여성성을 탈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여성성을 여성의 존재 이유로 만들지 않는 것이야말로 여성 서사의 올바른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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