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18일 작성함.
부족한 걸 알기에 그걸 채우려고 노력할 수도 있겠지만, 밑 빠진 독처럼 아무리 부어도 채워지지 않을 독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두고 자기반영성의 오류라는 말을 쓴다. 여기서 그 자기반영성이란 사물과 나 자신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목표를 세우고 나서 그에 다가서려 하는 이들 중에서는, 거울의 완벽함에 다가갈 수 없음을 두고 크게 좌절하는 경우가 종종 보이고는 한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결코 ‘나’의 안으로 반영되지 못한다는 점이 그들을 끝없는 좌절로 몰아넣는다. 나는 그러한 이유로 두려움을 느끼고 있고, 도망치고 싶지만 도망칠 수 없는 과제에 당면했다는 걸 잘 안다.
이 글은 자기반영성과 페티시즘의 관계를 다룰 예정이다. 정확하게는, 최근 기안84의 여성혐오 논란으로 인해 불거진 웹툰계 검열 논란에 대해 생각해봤다. 나는 우연한 기회로 이 논란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주호민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서 ‘위펄래쉬’라는 논평 프로그램을 듣다가, 그가 소소하게 꺼낸 검열에 관한 의견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 것이다. (<위펄래쉬2: 마지막 수업> 클립의 04:17:12초부터 시작.) 그가 방송에서 언급한 내용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여기에 소개가 안 된 만화들이 있어요. 오긴 왔는데. 두 가지인데요. 퀄리티가 너무 낮거나 아니면 지금 독자들, 보편적인 어떤 상식, 인권 그런 것들에서 너무 벗어나 있는 만화들이 있었습니다. (중략) 만화는 무엇이든 표현할 수 있지만 건드리면 안 되는 게 있어요. 그거는 이제, 데즈카 오사무 작가가 한 말이기도 한데. 보통 뭐 전쟁의 피해자라든지, 아니면 선천적인 장애라든지. 그런 것들을 희화화하면 안 되거든요. 근데 그걸 희화화한 만화들이 있었어요. 정신 차리세요. 그런 거 그리지 마세요.
그런데 그거하고는 구분을 해야 합니다. 지금 웹툰이요. 검열이 진짜 심해졌는데, 그 검열을 옛날엔 국가에서 했잖아요. 지금은 시민이, 독자가 합니다. 시민 독재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중략) 계속 그 생각을 해야 해요. “그려도 되나?”, “이거 해도 되나?”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지금 정상이 아닙니다. [참조 : 맥락에 맞게 일부 문장을 다듬었다.]
주호민의 이 발언이 그의 지인인 기안84를 옹호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기안84의 다음에 등장한 웹툰 <헬퍼>를 염두에 둔 발언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단순한 옹호에만 그치지 않는다. 최근 <헬퍼>는 여성에 대한 과격하고 선정적인 묘사로 논란의 중심에 섰다. <헬퍼>는 남성향 작품이지만, 바로 그 독자들이 작품이 ‘선’을 넘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페미니즘 진영과 연대할 정도로 파장이 컸다. 일반적으로 (특히 10~20대) 남성 독자들이 페미니즘 진영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연대는 가히 좌우합작이라 할 만큼의 입지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핵심은 두말할 것도 없이 ‘선’을 넘었다는 지적이다. 모 독자는 “보통 질 낮은 작품에 대해서는 ‘나만 당할 수 없지’라는 마음으로 타인에게 작품을 추천하기도 하는데, <헬퍼>만큼은 죽어도 뜯어말리고 싶은 심정이다.”라고 적기도 했다. 장난으로라도 추천하고 싶지 않은 작품, 선을 넘은 작품, 남자들이 먼저 나서 여성을 옹호하게 되는 작품, 이 세 가지 코드 모두를 주호민의 첫 번째 발언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보편적인 어떤 상식, 인권에서 너무 벗어나있는 만화들”이라는 대목과 “건드리면 안 되는 게 있다”는 대목이다.
이것들은 어떤 면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발언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검열’이라는 주제와 결합하게 될 때 눈덩이처럼 문제의식이 불어나게 된다. 이를테면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에서, 무엇이 표현 가능한 지점이고 무엇이 표현해서는 안 될 영역인가? 할리우드로 가본다면 우리는 여성과 아이는 구해져야만 한다는 청교도적 가족 가치관을 떠올려볼 수 있을 테다. 한국의 경우는 반공주의 이데올로기 등을 떠올려볼 수 있다. 이 두 가지 사례 모두에서, 금기를 넘은 작품에 대해서는 무차별적인 공격이 가해졌고, 그것은 단순히 검열로만 볼 게 아니라 어쩌면 성역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표현의 자유라는 고전적인 논의 안으로 편입해볼 수 있을 것이다. 표현의 자유는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 것일까? 바꾸어 말해, 예술의 영역에 ‘금기’라는 건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씨네 21의 로만 폴란스키 논쟁과 같은 곁가지를 꾸려볼 수도 있겠지만, 이 글이 말하고자 하는 웹툰계의 문제에서 금기라는 건 다소 한국적인 맥락 안으로 편입된다. 바로 주호민이 전제한 것처럼, 한국 만화의 역사는 검열과 탄압의 연속이었으며, 이것은 독재 정치 아래에서의 예술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연결된다. 영화가 그러했고, 가요가 그러했듯이, 맥락은 다를지언정 표현의 자유가 침해되었다는 점만은 이들의 공통분모라 할 수 있다. 대중에게 유익하지 않은 불건전 작품이라는 딱지 또한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아주 분명하게도, 근래에 있었던 두 가지 사건(기안 84, <헬퍼>)은 검열의 계보를 그릴지언정 독재정치 시절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주호민은 근래 한국 만화에서 있었던 사건을 망라하는 검열 담론을 한국의 독재 정치 시대로부터 시작한다. 비록 기안 84의 사건에 더 포커스가 맞춰져 있기는 하지만, “검열을 옛날엔 국가에서 했잖아요. 지금은 시민이, 독자가 합니다. 시민 독재의 시대가 열렸습니다”라고 지적하는 대목은 검열의 주체를 설정함에 있어 독재 시대의 사례를 먼저 거론한 후에, 그 반대편에는 ‘그 시절’을 닮은 독자들의 모습을 열거함으로써 ‘거울상’과도 같은 두 집단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주호민은 독재라는 키워드에 담긴 지난 한국 정치의 흔적을 현대의 만화 독자에게 자기반영적인 형태로 불어넣고 있다.
주호민의 발언이 어떤 의도로 이루어진 것인지는 잘 알고 있다. 원로 작가 원수연이 발언대에서 호소한 것처럼, 검열이 사라진 자리에 또 다른 검열이 자리 잡게 되는 것은 다시금 한국만화 시장의 위축을 불러올 우려가 있고, 예술적 표현의 자유가 억제됨으로 인해 거기서 거기인 작품만이 양산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주호민이 끝에 덧붙인 “시민 독재의 시대가 열렸다.”는 말은 위에서 언급한 자기반영성의 취지로 인해 여러 다른 맥락을 이 담론에 끌고와 버린다. 가장 먼저 말해볼 수 있는 건 ‘시민’이라는 단어가 ‘독재’라는 단어의 앞에 붙었다는 점이다.
이십여 년의 독재를 겪은 한국 사회에서 독재라는 단어는 그 무엇보다 불편하고 민감한 주제이다. 이때, 독재 정권에 적극적으로 대항했던 것은 각계 계층의 시민들이었고, 이로서 한국 사회에서 시민의 의미는 자유를 추구하는 해방의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 시민이라는 단어가 ‘독재’의 주체로 설정된다면 우리는 타도의 대상을 닮아버린 어느 외딴 주체를 목격하게 된다. 시민이 독재를 하는 사회, 물론 이 말은 시민이 ‘검열’을 하는 사회라는 말과 곧바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민이 검열을 하는 사회가 꼭 정의로 연결되는 것만도 아니다. 우리는 이미 해방 직후에 벌어졌었던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시민 검열 사태를 겪어보았기에 그것을 잘 안다.
또한 본문의 인용에서는 생략했지만 주호민이 다소 과격하게 표현한 ‘중우정치’의 맥락에도 조금이나마 부합하는 면이 있다. 명확하고 구체적인 논리 없이 감정적인 접근만을 한다면 아무런 해결책도 없이 그저 위축만이 되는 현상이 계속될 테니 말이다. 이른바 마녀사냥, 위의 맥락대로 표현한다면 ‘인민재판’으로 바꾸어 쓸 수 있을 이 시민 재판에 대해서는 시민에 의한 사실상의 독재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다만 우리는 이것이 예술이라는 분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문제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는데, 예술은 전적으로 예술가의 표현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그 표현을 위축시켜버린다면 예술은 존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검열 아래에서 예술은 정말로 존립할 수 없을까? 부분적으로는 가능할 것이다. 검열하는 이의 입맛에 맞는 작품을 양산해내는 것으로 말이다. 말하자면 명확한 근거 없이, 사실 그 근거라는 것도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에 무엇이든 정당화될 수 있는 방패 아래에서 다소 미화되는 감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만화에서 검열을 자제해야 한다고 말하게 된다면 지난 독재 시대의 암흑에서 막 빠져나온 만화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니겠느냐는 논리를 들게 될 것이다. 우리 만화의 성장이 이제 막 표현의 자유 보장을 통해 이루어지게 된 상황에서, 그 상업적 시장을 지키기 위해 예술을 검열한다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격이 아니냐고 말이다.
그러나 주호민의 발언에서 동의할 수 없는 점은 “시민 독재의 시대가 열렸다”고 단언하는 맥락이다. 주호민이 세세한 부분까지 염두에 두지는 않았겠지만, ‘시민 독재’라는 표현은 우리 역사에서 이어져 내려온 과거의 한 부분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 될 우려가 있다. 비록 그것이 정치적 올바름, 혹은 페미니즘과 같은 세계적 기류의 어떤 면모에 따르는 것이라 하여도, 한국 사회에서 독재라는 단어는 여전히 과거의 어떤 흐름을 전제하고 있으며, 이것과 완벽하게 단절할 수 없는 현재 상황에서 해당 표현은 최대한 지양되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그 표현이 독재로부터 빠져나온 만화 예술에 대한 결례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사실 우리는 조석 작가가 원로 만화가들에게 “웹툰 시장이 이렇게 클 때까지 한 게 뭐가 있느냐”고 발언했을 때, 꼰대나 예의와 같은 키워드에 주목할 게 아니라 ‘웹툰은 과거와 단절되지 않았으며, 그 두 가지 모두를 한국만화의 범주 안에서 파악해야 한다’라고 답했어야만 했다. 그 둘 사이를 이어놓지 않는다면, 우리는 만화 검열의 논란에서 독자에 의한 독재라는 키워드를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독재라는 표현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독재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했었고, 앞으로 무엇을 의미할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보다 더 시급한 문제는, 우리의 지난 역사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것이 현재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지 않음을 깨닫아야 한다는 점이다. 요컨대 자기반영적인 것이 완전한 망각보다는 더 나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재미있는 생각 하나를 꺼내볼 예정이다. 만약 웹툰의 스크롤 형태가 영화 매체의 물리적 필름롤 형태와 닮아있다면, 움직이는 이미지와 단절된 이미지라는 두 개의 주제를 가지고서 서로를 비교해볼 수 있지 않을까?
대부분의 영화는 만지거나 가지고 다닐 수 없다. 비록 실제의 필름의 릴은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화면에 투사된 영화는 불가능하다. [...] 영화는 페티시즘을 작동시킬 수 있지만, 사진은 그 스스로가 페티시가 될 수 있다. -크리스티앙 메츠, photography and fetishism, 88-90, 마틴 제이, 눈의 폄하, 646페이지에서 재인용-
위에서 크리스티앙 메츠의 말을 인용해두었듯이, “영화는 페티시즘을 작동시킬 수 있지만 사진은 그 스스로 페티시가 될 수 있다”. 사진 24장을 모아 빠르게 돌리는 것이 영화라고 가정했을 때, 영화 매체의 물리적 필름롤을 닮은 세로 스크롤 형태의 만화에 사진 매체의 특성을 적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만화란 스스로 페티시가 될 수 있는 것이며 그 운동의 동력은 아이러니하게도 영화가 가진 유동성을 갖지 못했다는 점이다. 본디 영화는 관객의 페티시즘을 스크린 위에 뿌려놓는 장치였고, 그렇기에 그것은 ‘페티시’ 자체가 아닌 ‘페티시즘’이라는 동사 형태였는데, 이 단절의 형태를 우리의 논의와 연결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첫째. 영화, 그 유동하는 역사로부터 단절된 우리가 만화라는 사진의 형태로 현재에 흩뿌려지고 있다면, 만화에 대한 검열의 조치는 독재+ism이라는 진행사가 아니라 ‘독재’라는 단절적인 형태로 변모했다. 요컨대 페티시즘이 아닌 페티시로서의 독재, 그것은 계속해서 들이밀어 지는 검열의 어떤 현황판이 아니라 그 즉석에서 응시를 통해 만들어지는 페티시적 발화이다. 과거로부터의 운동성을 잃은 이곳에서 어떠한 의견의 제기는 마땅한 운동 에너지를 지니지 못하고, 이는 그들의 페티시가 단지 즉흥적인 생성의 논리에만 머무르게 되는 이유이다.
둘째. 장치로서의 영화가 검열 기구, 혹은 독재 정권과 같은 기관의 형태로서의 운동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그러한 기류, ‘~ism’이 아닌 ‘__’ 자체는 나아갈 곳 없이 단지 신기루처럼 흩뿌려지기만 하는 성격을 띠게 된다. 따라서 마땅한 운동의 좌표가 정해지지 않은 이 기류는 끝없이 밀려오면서도 파편적으로 분화되는, 잉여 에너지만을 충실히 자아내게 되고 그것은 기류의 반대편에 자리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 꽃가루가 날리는 원 지점은 항상 그 폭풍에서 멀쩡하듯이, 페티시의 발화 지점에 자리한 이들에게서는 마땅한 목적이나 방향성 없는 상태로 그저 제자리에 머무르기만 한다는 것이다.
고로, 우리가 주호민의 해당 발언에서 찾게 되는 교훈이 있다면 위의 두 가지 사례를 예시로 들며 발언을 이어나갈 수 있다. 첫 번째로, 만화 독자의 발언에 의해 자기 검열을 하게 되는 것은 독재 정권 시대의 만화 예술과 다른 맥락으로 보아야 하며, 그 이유는 그 두 가지를 일치시켰을 때 우리가 독자를 지적하는 것이 곧 역사와 무관하지 않게 되어서다. 만화 독자에게 검열이라는 단어를 대입했을 때 그것은 자기 반영성의 오류를 띄게 되며, 이는 선대에 검열 반대 운동에 힘썼던 원로 만화인들에 대한 모욕이다.
두번째로, 만화 독자의 검열 행위 혹은 검열 시도를 시민 독재에 빗대는 일은, 유동적이지 않고 단선적으로 그려지는 만화 매체의 특징을 페티시에 빗대어 순간적인 응시의 행위들로 치환해버릴 위험성이 있다. 이를테면 만화의 전체적인 내용이 아니라 매 화, 혹은 하나의 컷등을 두고서 어떠한 담론이나 흐름을 끄집어 내는 행위 등이 그러하다. 정지된 것으로의 만화는 응시를 자아내는 기관이 아니라 독자가 전적으로 시선을 응시하는 대상화의 과정을 겪으며, 따라서 만화를 두고서는 성적 대상화와 같은 단어가 작품의 내적인 맥락에서 성립할 수 없다.
그러나 만화는 마치 사진처럼 중립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지만 단절되었으면서도 유동적인 이미지의 연결을 통해 영화와 사진 사이의 특성을 지닌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만화는 완전히 중립적이지도 않지만, 완전히 가치 지향적인 것도 아니다. 따라서, 오히려 우리는 만화를 통해 작품의 안쪽, 작품의 바깥쪽 모두에서 작품을 바라보는 방법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바꾸어 말해 만화의 담론은 우리가 그것을 응시하는 방법론이 아니라 페티시 그 자체로부터 시작되며, 이러한 점이 영화 매체를 바라보는 방식과 차별화된다.
한국인은 평균적으로 일 년에 영화 네 편을 본다고 한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영화를 많이 보는 만큼 영화에 대한 관심도 많을 테다. 실제로 우리는 영화를 두고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하는데, 어쩌면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 만화 매체 전반에 그대로 옮겨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예술과 담론이라는 점에서 그것들은 공통분모를 지니지만, ‘영화’에서 ‘만화’로의 이행에 있어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영화가 우리에게 있어 조금 더 자기반영적인 매체라면, 만화는 그보다는 더 거리가 있는 판판한 매체이기 때문이다.
농담을 건네자면 그런 이야기도 있지 않던가. ‘웹툰’은 스낵컬처이기에 예술이 될 수 없다는 말 말이다. 그 논리를 따라가면 만화 검열은 불량식품 규제나 다를 바 없는 정도의 심각성을 지닌다. 그러나 만화는 결코 불량식품 수준에만 머무르는 매체가 아니다. 그걸 잘 알기에 우리는 만화를 둘러싼 여러 대화에서 만화의 본질 자체에 대한 물음을 던져보아야 한다. 불량식품으로 취급되었던 것들이 주로 어떠했는가? 달고 맛있었다. 마찬가지로, 만화는 우리에게 재미를 느끼게 해준다. 마찬가지로 만화가 단지 재미있으면 그만이라고 말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단지 그뿐인 것에 그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만화에 대해 단지 재미 수준이 아닌 그 이상의 것을 꿈꿀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