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디지털만화규장각에 게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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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차이가 뭘까. 간단하다. 만화를 움직이게 하면 애니메이션이 된다. 그렇지만, 만화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무언가에 생기를 불어넣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애니메이션의 역동감을 만화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를 우리는 고민하게 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애니메이션이 만화가 되려면 동영상이 주던 생동감을 포기해야만 한다. 한정된 지면에 칸 수를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 어떤 장면을 넣을 것인지 등을 고려해야 하기에 그렇다. 그러니 애니메이션이 만화가 될 때는 정말로 중요한 것만 배치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여기에 만화를 만드는 애니메이션 감독이 있다. 연상호는 자신의 이전 작품을 소재로 해 <지옥>이라는 웹툰을 네이버에서 연재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돋보이는 또 다른 사람은 최규석인데, 그는 이 작품에서 그림작가를 맡았다. 최규석이 <송곳>에서 보여준 작화가 작품의 분위기에 잘 맞았음을 떠올려볼 수 있겠지만, 이 작품에서는 같은 작화라도 전반적인 분위기는 다르게 느껴진다. 왜 그럴까. <송곳>과 <지옥>이 바라보는 곳은 세상의 다른 지점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이 작품에서는 그림의 최규석만큼이나 이야기의 연상호도 중요하다. 연상호가 바라보는 세상을 최규석이 그려내고 있다.
이 둘은 마치, 예언을 받은 이와 그것을 종이 위에 그려내는 서기의 관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연상호가 있고 만화를 그리는 최규석이 있다. 연상호가 추상적으로 신탁을 받는다면, 최규석은 그것을 명료하게 받아 적는다. 그러니 곧바로 비교될 수는 없겠지만, 연상호의 세상은 동적이고 최규석의 세상은 정적이라고 말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예컨대 이 둘이 협업해 만드는 웹툰은 애니메이션이 만화로 변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과정 그대로가 아니라, 그 이미지에 유사점이 있다.
연상호는 세상의 많은 것을 보려 한다. 반면 최규석은 그런 세상의 틈새에 무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지로 비유하자면 연상호는 세상을 향해 달려가는 열정적인 사람이고, 최규석은 가끔은 멈추어서 응시하는 냉소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그 둘을 두고 각각 이렇게 칭하고 싶다. 연상호의 <부산행>은 한국 사회를 횡단하는 영화이다. 최규석의 <송곳>은 사회의 부조리한 면을 찌르는 만화이다. 달려가는 것과 찌르는 것, 부드러운 선과 날카로운 선의 조합이 두 사람의 신작 <지옥>에서 펼쳐진다.
2.
<부산행>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연상호의 데뷔작은 애니메이션이었다. 이후에도 많은 작품을 만들었는데 그중에는 <지옥 : 두 개의 삶>이라는 두 개의 단편도 있다. (지금 소개하는 웹툰 <지옥>의 원작이다.) 이 작품은 단편이라는 특성상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연상호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말해주었다. 지옥으로의 선고라는 주제로 진행되는 이 작품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남은 수명을 선고받는다. 천사가 나타나 “너는 몇 날 몇 시에 죽는다.”고 말해주는데, 이 선고에는 ‘왜 그때인지’ 혹은 ‘왜 자신인지’에 대한 설명이 빠져있다. 그래서 세상은 혼란에 빠진다.
천사가 선고한 그날 그때가 오면 어딘가에서 홀연히 나타난 악귀가 대상자를 지옥으로 끌고 간다. 하지만 이 집행이 두려운 것은 사지 멀쩡한 채로 연행하는 게 아니어서다. 그들은 말 그대로의 죽음을 선고한다. 저승사자격에 해당하는 악귀는 피선고자의 육신을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게 되는 사실 하나는, 그렇게 갈기갈기 찢어지는 모습 자체가 기억 자체에 대한 거부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기억이라 함은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진다. 즉, 뒤에서 앞으로 나아간다. 이 부분이 연상호가 추구하는 횡단의 이미지와 닮았다. 그런데 <지옥 : 두 개의 삶>에서 기억은 떠올려지지 않는다. 작중의 인물들은 자신이 ‘선고’받은 이유를 알아내려 기억을 더듬어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다. 만약 연상호가 선고라는 현상을 통해 지난 삶의 속죄라는 것을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다면, 작품에서는 기억을 떠올리는 게 주된 행위가 되었을 테다. 허나 이 작품에는 기억하는 이가 없다. 속죄하거나 도피하는 이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 행위의 마지막은 악귀에게 걸려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게 기억하지 않음에 대한 대가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직접적으로는 별개의 사안이지만, 작품의 맥락으로 보면 자신이 왜 선고받았는지에 대해 그 이유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내려지는 형벌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갈기갈기 찢긴다 하여도 그 속에서 남은 기억 따위가 튀어나오지는 않는다. <부산행>에서 연상호의 열차가 서울로 돌아가지 않듯이, 그 기억이 중간에 사라져버렸다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즉 연상호가 말하는 기억이라는 것은 돌아보거나 돌아갈 수 없고, 그 끝에는 기억의 파편화가 있다. 그렇지만 이 작품이 묘사하는 것은, 천사와 악귀를 통한 선고라는 현상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사람들의 태도이다. 인간은 언젠가는 죽지만 그 언젠가가 먼 나중의 일이라고 생각하며 우리는 살아가는데, 그런 죽음이 당장 눈앞에 나타나게 되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그렇게 보면 이 작품이, 자신이 죽을 날을 알게 된 이들이 보이는 행동을 통해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3.
애니메이션에서는 그렇게 끝났다. 알쏭달쏭한 메시지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을 원작 삼아 만든 연상호의 만화 <지옥>은 원작과 동일한 설정과 세계를 보여주지만, 말하고자 하는 게 다르거나 확고하다. 아니, 선고라는 현상 자체를 둘러싼 사람들의 태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변한 게 없다. 애니메이션이 개인의 상황에 집중한다면, 만화에서는 사회의 전반적 반응을 묘사하는 것에 중점을 준다는 점 정도를 지적할 수 있겠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부분이 애니메이션과 만화의 매체적 차이를 응용했다는 생각이 든다.
애니메이션을 만화로 만들 때 고민하게 되는 건, 그렇게 이어지는 이미지 중에서 어느 것을 골라야 하느냐는 것이다. 즉 만화는 애니메이션의 축약본이다. 비유하자면 각각 소설과 시쯤에 해당한다. 그래서인지 연상호의 선택은 최규석의 스타일을 지지해주는 게 아니었는가 싶다. 연상호는 애니메이션 감독이고 횡단에 능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게 왜 만화 작가이자 찌르기에 능한 최규석과 협업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일 테니 말이다.
연상호의 작품은 한국 사회를 관통한다기보다는 횡단한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데, 이는 관통이라는 게 지나가면서 주변을 파괴하는 반면에 횡단이란 그저 건너기만 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횡단이란 관찰자의 성격에 더 가까운 단어다. 연상호는 그렇게 한국 사회를 관찰하고 조망한다. 그러므로 이 대목에서, 연상호의 애니메이션이 보여준 기억의 끝이 악귀에게 갈기갈기 조각나는 것이라는 점을 떠올려볼 수 있을 듯하다.
모두가 죽음에 호들갑을 떠는 것은 아니지만, 악귀가 산 사람을 찢어놓는 충격적인 모습을 보면, 적어도 작품을 보는 독자만큼은 충격에 빠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마치 독자들을 위해 준비했다는 듯이, 그들의 죽음은 다른 이들이 목격하지 않는 장소에서 이루어진다. 자택에서 죽음을 기다리거나, 죽음을 피해 하수구로 달아나다가 죽음을 맞이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점은 연상호의 이 작품에서 죽음의 마지막 부분을 목격하는 이는 독자인 우리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컨대 연상호의 판단은 우리에게 문제를 직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니 만약 우리가 목격한 것, 연상호가 보여주려고 했던 게 그 끝이었다면, 연상호와 최규석이 협업한 이 만화는 그렇게 조각난 것들이 각각의 이미지로서 배치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연상호가 한국 사회에서 죽음과 기억을 둘러싼 개인의 반응을 보았다면, 최규석은 그런 개인을 바라보는 사회가 무엇을 떠올리는지를 이미지로 표현한다. 물론 애니메이션처럼 만화 <지옥>에서도 연상호가 이야기를 담당한다는 점을 고려해볼 수 있겠지만, 우리는 글 작가와 그림작가의 관계를 영혼과 육체에 빗대어볼 수 있다.
예컨대 연상호가 인물이라는 몸을 본다면, 최규석은 인물이 몸담은 우리 사회를 그려낸다. 그리고 그 형식에 관하여 말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연상호가 유동하는 애니메이션의 형식으로 인간의 흐물흐물함, 그 나약함을 그려낸다면, 최규석은 단단한 만화의 형식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중요한 것들, 그 이미지를 말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연상호와 최규석의 <지옥>은, 애니메이션에서 만화로 이어지는 우리 사회를 말한다고도 볼 수 있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