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꼰대>와 <내 안의 그놈>
*이 글은 디지털만화규장각에 게시되었다.
http://dml.komacon.kr/webzine/review/27450
매 순간 영화와 만화에서 신작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고, 그 모든 것을 보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왕 볼 것이라면 최대한 취향에 맞는 작품을 고르려 한다. 예컨대 우리가 어떠한 콘텐츠를 즐길 때는 정해진 시간에 얼마나 많은 재미를 줄 수 있는지를 고려하게 되는데, 그런 선택지 중에는 원작이 알려진 ‘원작 기반의 ~’ 작품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한번 보았던 것이기에 어떤 재미가 있는지가 미리 검증되어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관람할 작품 선택에 따르는 위험이 적다.
물론 원작을 얼마나 잘 옮겼는지에 따라 그 평가가 달라질 것이다. 그렇기에 여기서 도출되는 평가 기준은 다음 두 가지다. 첫 번째로 말 그대로 원작을 다른 매체로 잘 옮기는 게 있는데, 이 경우를 두고서 우리는 ‘싱크로율’이라는 표현을 쓴다. 만화와 영화에서 배우의 외모나 외양이 얼마나 닮았는지, 다른 배경적 요인은 얼마나 닮았는지 등을 따져 묻는 행위이다. 두 번째로는 원작을 변형해서 더 좋은 결과물을 내놓는 게 있는데, 이는 각색이라는 행위로서 사실상 원작의 색깔이 적거나 옅기에 ‘원작’의 존재가 구태여 도드라지지 않는 경우이다.
각색의 경우에는 이전부터 문학이나 희곡을 다른 매체로 옮기는 일이 흔했기에 비교적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2000년대 들어서부터 대두된 ‘싱크로율’ 기반의 작품 변형은 우리로 하여금 작품과 원작을 일대일로 비교해 놓고 보게 하였다. 이를테면 한국의 만화 『치즈인더트랩』을 드라마로 각색해 방영한 tvN의 <치즈인더트랩>은 여자 주인공 홍설(김고은)의 캐스팅을 두고서 누리꾼들의 의견이 분분했다. 작품이 아직 시작되기 전에 캐스팅만 발표되었을 뿐임에도 그런 논란이 벌어진 것이다. 말하자면 누리꾼들은 작품의 내용이 얼마나 잘 각색되었는지에 앞서 자기들이 생각하는 원작의 이미지를 얼마나 잘 ‘싱크로’했는지를 먼저 고려했다.
이러한 사례는 만화에서의 캐릭터 구축이 성격이나 행동뿐만 아니라 이미지에도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소위 말하는 ‘캐릭터성’의 구축이 전통적인 매체, 영화나 희곡에서는 배우의 연기와 인물의 성격에 따라 좌우되었던 것에 비해서, 만화에서의 캐릭터성이란 전체적인 화풍과 매력적인 외모와 그림체와 같은 질감에 따라서도 결정된다. 물론 배우의 외모에 따라 흥행 여부가 결정되기도 하는 몇몇 장르가 영화나 드라마에도 있으므로, 만화의 캐릭터성에서 그런 이미지만이 중요하다고만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화는 작가에게 인물과 배경의 외모에 대한 완전한 전권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영화와 드라마와는 다르다. 영화나 드라마가 현실을 기반으로 또 다른 현실을 축조하는 것이라면, 만화란 현실의 완전한 재구축에 방점이 찍힌다. 쉽게 말해 만화라는 세계의 법칙은 우리네 현실과는 얼마든지 달라도 좋다. 그 때문에 만화를 두고서 어떠한 현실의 문제를 논한다는 것은, 자칫하면 현실에 대한 조롱이나 희롱처럼 보일 때가 있기도 하다. 예컨대 이는 작가가 현실을 잘 모르기에 어긋난 묘사를 했던 게 아니고, 작가의 시선으로 재구축된 세계를 ‘원작’인 우리네 현실과 일대일로 비교함에서 벌어지는 ‘싱크로’에 대한 비교인 셈이다.
현실 원작, 만화 싱크로, 라는 이름의 원작과 본작에 대한 비교우위가 만화 시장에서 도드라지고 있는 듯 보인다. 예를 하나 들자면, 웹툰의 주요 소비층이 10대인 네이버 웹툰 플랫폼에서 학교폭력을 소재로 한 작품이 다양하게 변형되는 것을 들 수 있다. <싸움독학>이나 <부활남>은 주인공도 소재도 다르지만 기본적으로는 학교폭력이라는 사건을 하나의 현상으로서 바라보고, 그것을 독학과 부활이라는 두 개의 테마로 변형시킨다. 반대로 <그날 죽은 나는>은 학교 폭력을 소재로 하지만, 의문의 인물로부터 지령을 받고 그에 따른 추리와 함께 자아의 성장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분위기와 소재의 작품인 <연의 편지>와 맥락이 닿는다.
그렇지만 이것들이 모두 만화와 만화로의 비교라는 점에서 어떠한 한계가 있다고 지적할 수도 있다. 앞서 말했듯 만화는 세계의 재구축이며, 그렇기에 그들의 세상을 비교하는 건 무리이거나 의미가 없을 수도 있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현실 원작, 만화 싱크로를 보여주는 작품 하나를 선정해 살펴보고 싶다. 네이버 웹툰에서 연재가 진행 중인 강선율과 Jencil, 창더쿠의 <어쩔꼰대>가 바로 그것이다. 이 작품은 일진들에게 학교폭력을 당하던 한 아이(김동현)가 실수로 옥상에서 떨어졌는데, 그 아래에 마침 지나가던 조폭 두목(장판수)과 머리를 부딪치면서 두 사람의 몸이 바뀌게 된다는 바디체인지 장르이다. 즉 학교폭력에 바디체인지 장르를 조폭물과 결합한 장르의 삼중주이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위에서 언급한 작품들보다 장르의 변형이 더 이루어졌을 뿐, 크게 도드라지는 점이 없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어쩔꼰대>는 원작이 아니라 본작이다. 무슨 말인가 하니, <어쩔꼰대>의 원작은 영화 <내 안의 그놈>이다. 예컨대 이는 일반적으로 만화를 원작으로 삼아 영화로 만드는 것과는 달리, 영화를 원작으로 삼아 만화를 만든 사례이다. 따라서 영화가 현실을 바탕으로 하기에 어느 정도 현실의 개연성을 따라야 한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영화를 만화로 만든다는 것은 만화를 영화로 만드는 것보다는 보다 더 자율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만화는 작가가 재구축한 세계이기에 영화로 만들려면 다시금 현실의 법칙에 맞추어 각색해야 하지만, 영화를 만화로 각색하는 건 그냥 영화를 재구축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내 안의 그놈>과 <어쩔꼰대>를 비교해보자. <내 안의 그놈>은 영화라는 형식에 맞게 2시간 안에 기승전결이 끝날 수 있도록 우리가 익숙히 아는 관습들을 영화 축조에 사용한다. 소위 말하는 막장 드라마, 로맨스 영화의 관습을 교차하며 잘생긴 얼굴의 주연인 그룹 B1A4의 진영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우는 것도 빠뜨리지 않는다. 이와 동시에 얼굴마담으로서의 부각, 하염없이 멋져질 수 있는 장면 연출을 위해 현실에서는 다소 무리일 수도 있는 사건을 들여오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강조되는 건 본래는 소심하고 뚱뚱해서 왕따였던 동현의 몸에 들어온 장판수가, 운동을 하고 본래 지닌 싸움 기술을 응용하는 것으로서 잘생긴 외모, 멋진 싸움 능력을 통해 힘과 외모라는 야생의 논리로 지배되는 학교 사회에서 권력을 잡는 모습이다. 말하자면 <내 안의 그놈>이 복사해온 현실은 일진과 찐따라는 학교 사회에서의 계급도에 관한 로맨스-판타지의 세계이다.
반면 <어쩔꼰대>는 <내 안의 그놈>에서 기본적인 설정만을 가져왔을 뿐 전반적인 이야기 전개를 따라가지 않는다. 물론 이는 아직 작품이 연재 중인 상황에서 속단하기에는 이른 것일 수도 있다. (원작을 기준으로 한다면 아직 원작의 절반도 채 지나지 않았다.) 허나 그럼에도 <어쩔꼰대>는 작품의 전체적인 방향을 <내 안의 그놈>과는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다. <어쩔꼰대>에서의 동현은 영화에서처럼 연기하는 배우의 잘생긴 얼굴을 강조할 필요가 없고, 그렇기에 작품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학원물로서의 장르적 접근에 집중한다. <내 안의 그놈>에서 간략하게 지나간, 왕따였던 동현이 일진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난 후의 이야기가 학교 안에서의 학교생활이라는 이벤트로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그 과정에서 작품은 일상이라는 이름의 연재 기간을 확보하게 된다. 쉽게 말해, 만화는 연재 기간이 상대적으로 길고 이는 곧 작품 안에서 사건을 진행할 여유 시간이 많으므로 2시간 내외의 러닝타임을 요구했던 영화보다는 더 널널한, 다른 부분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바디체인지라는 장르를 로맨스-판타지의 요소로 사용하면서 잘생긴 배우의 얼굴을 강조했던 영화가 B1A4라는 현실의 그룹으로부터 그 인기를 차용했다면, <어쩔꼰대>에서는 배우의 외모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바디체인지라는 장르가 학원물로서 ‘장르적 쾌감’을 주기 위한 요인이 되었다. 즉 영화에서는 나이 어린 소년의 몸에 들어간 조폭 두목의 성격을 통해 몸은 어리지만 마음은 늙은 ‘젊은 꼰대’를 만들어내고, 그런 꼰대 역할을 하는 배우를 잘생긴 이로 캐스팅함으로써 우리가 익숙히 아는 꼰대의 이미지를 전환시키며 관습과 인식의 전복을 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어쩔꼰대>는 젊은 꼰대라는 발상의 전환에 집중하면서 작중의 무대인 학교가 일종의 사회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예컨대 <어쩔꼰대>라는 만화가 만들어내는 판타지적 풍경은 <내 안의 그놈>이라는 영화가 제시하는 현실 사회-고등학교로부터 기반한, 고등학교라는 이름으로 변형된 현실 사회나 다름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