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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pr 09. 2020

위대한 부활 ~ 웹툰으로 넘어온 마법사

*이 글은 디지털만화규장각에 게시되었다.

http://dml.komacon.kr/webzine/review/27460



최근 네이버 웹툰에 새로 연재를 시작한 만화 중에는 <아르세니아의 마법사>라는 작품이 있다. 이렇게 제목만을 적어두면 이게 무슨 만화인지 다들 모를 것이다. 그렇기에 설명을 덧붙이자면, 이 작품은 박성호 작가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판타지 만화이다. 단순히 판타지 만화인 것이 아니라, 소위 말하는 ‘이세계’ 설정을 주제로 삼았다. 이때 혹자는 이세계 장르가 그리 유별난 것도 아니고, 심지어는 식상하게까지 느껴지는 현 상황에서 이 웹툰을 왜 소개하느냐고 물을 수 있겠다. 그리고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갑자기, 주인공이 사고를 당한 후에 이세계로 넘어가 모험을 시작하게 된다는 통칭 ‘이세계’ 장르가 일본에서 유래했다고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런 이세계 장르라는 분류가 한국으로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한국의 판타지 소설 시장에도 이세계 장르가 새로이 발을 딛게 되었다. 그러므로 네이버 웹툰에 이세계 장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웹툰이 올라와도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네이버 웹툰 ‘플랫폼’에 그게 올라왔다는 점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네이버 웹툰의 모회사인 네이버가 한국 인터넷 벤처 신화의 주역이라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네이버 웹툰에는 일본의 분위기가 나는 것, ‘왜색’이 짙은 작품이 올라오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버닝헬>같은 사례는 조금 다르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는 한국에서 네이버가 갖는 지위를 고려하면 당연한 일일 테지만, <아르세니아의 마법사>가 네이버 웹툰 플랫폼으로 올라왔다는 점은 그것과 다른 맥락으로 읽혀진다.



△ 왼쪽은 웹소설로 연재된 [아르세니아의 마법사]이고, 오른쪽은 웹툰으로 연재하는 <아르세니아의 마법사>이다.




먼저, 왜색의 정도만 다를 뿐 ‘일본풍’의 설정이나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은 지금까지 많이 연재되어 왔다는 점을 지적해볼 수 있다. 그러니 <아르세니아의 마법사>를 예외적인 경우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의 웹툰 시장이 일본의 만화 시장으로부터 영향받았음을 부정할 수 없기에, 이세계물 장르의 네이버 입성을 문화적 침략처럼 보는 시선이 있을 수 있다. 예컨대, 후발주자인 우리가 그들을 모방한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제 와서야 웹툰이 일본의 ‘망가’와 다른 길을 걷고 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말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웹툰이 인터넷 시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지만, 그게 과연 한국이라는 나라의 만화라는 매체를 대변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문화적으로나 시장적으로나, 기존에 잘 알려져 있던 만화 시장인 ‘망가’와 무엇이 다른지에 대해 고민해야만 했다.


이 대목에서 눈치챘을 사람이 있겠지만 한국에서 웹툰의 존재는 ‘한국만화’라는 정체성과 무관하지 않다. 인터넷 시대에 들어 신성처럼 떠오른 웹툰이라는 존재는 출판만화 시장을 생략한 우리에게 한국만화 그 자체였던 것이다.(얼마나 많은 만화가 검열장의 이슬로 사라졌던가!) 그러니 웹툰이 망가에 어떠한 열등감을 지니고 있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열등감이라는 표현이 다소 부끄러울 수는 있어도, 현 상황을 이해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감정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만화의 본분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며, 사람들이 행복하다면 그걸로 만화의 본분은 다한 셈이다. 그러니 우리가 만화에 어떠한 의무를 짊어 지운다면 그건 큰 부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네이버는 한국의 자존심과도 같은 사이트였고, 그런 플랫폼에서 연재되는 웹툰들은 자연스럽게 한국을 대표하는 위치가 되었다. 그런 이유로 네이버는 성장하는 웹툰 사업 속에서도 보수적인 자세를 취했었다.


네이버 웹툰의 주 타겟층이 10대 20대이고, 청소년과 청년층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으려고 보수적인 자세를 취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네이버에서 순위권에 드는 작품들의 다수가 ‘일진물’이라는 장르를 택하고 있다는 점을 보면 그렇다. 일진을 미화한다거나 학교폭력을 방조한다거나 하는 비판을 꾸준히 듣고 있음에도, 일진물은 네이버라는 보수적 성향의 플랫폼에서 퇴출되지 않고 있다. 주 타겟층이 10대 20대인 것을 고려하면 충분히 악역향을 끼칠 법한데도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 2020.02.27을 기준으로, 요일별 조회수 상위에 드는 작품 28개 중 7개가 일진물이다. 상위권 작품의 25퍼센트가 일진물이라는 뜻이다.  




10대 20대가 일진물에 열광하고, 그렇게 쌓인 조회 수가 수익으로 직결되기에 네이버가 일진물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걸까? 물론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네이버라는 회사가 자사의 이미지를 깎아가면서까지 그런 일을 진행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반대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데, 한중일의 문화 콘텐츠를 비교해보았을 때 한국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일진물’이라는 점이다.


일진물이 청소년을 위한 장르라면 조폭물은 성인들을 위한 장르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성향의 차이일 뿐이고 그 둘을 딱 잘라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영화 「친구」 같은 작품을 보면 그런 점이 잘 드러난다. 이 작품의 배경은 학교이지만 학생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조폭이다. 예컨대 이는 조폭이라는 소재를 학교라는 장소에 부여함으로써 장르적 변형을 꾀한 것이다. 그렇다면, 「친구」를 두고서 일진물이 아니라고 할 만한 이유가 있을까? 조폭이라는 소재를 학교로 가져왔다고 해서 그것이 조폭물의 변주로만 해석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갈라져 나온 조폭물의 분파가 일진물이라는 장르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나는 <싸움독학>이나 <약한영웅>이 영화 「신세계」나 「범죄와의 전쟁」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소소하게는 다르지만 전체적인 틀은 비슷하다. 싸우고, 강해지고, 권력 다툼이 있고, 클라이막스에는 주인공의 발차기가 한번쯤은 나온다. 차이가 있다면 아이와 어른이라는 외양적인 면모만이 있을 뿐이다. 예컨대 우리가 그 둘을 바라볼 때, 일진과 조폭이라는 분류보다는 ‘한국’이라는 공통분모로 인식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한국 안에서의 장르로서 그들을 바라보자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한국에서 그런 장르가 인기를 끌었던 건 오늘 내일에 축약된 문제가 아니다. 임권택이 1990년대 중반에 감독한 「장군의 아들」 시리즈도 정확히 위와 같은 이유로 인기를 끌었었다. 요즘 세대에게 「야인시대」밈(meme)으로 유명한 김두한을 다룬 이 작품은 ‘정치 깡패’를 멋지게 표현했다는 점으로 비판받은 바가 있고, 이런 경과가 일진물과 조폭물에 대한 현시대의 비판과 유사하다. 당시에 유행하던 홍콩영화에 대항해 만들었다는 점 또한, 망가에 대항하는 웹툰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면이 있고 말이다. 말하자면, 일진과 조폭은 당대에 유행하던 것들에 대항하기 위해 선택된 ‘한국적’ 소재라는 것이다.




△ 왼쪽은 임권택의 <장군의 아들>이고, 오른쪽은 서패스와 김진석의 <약한영웅>이다.



이 한국적 소재에 관하여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우선, 그런 폭력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것이 곱지 않게 보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것으로 그런 집단, 폭력을 가져왔다는 점이 마음에 걸릴 수도 있다. 또한, 청소년들이 아직 올바른 판단력을 지니지 못했기에 그런 작품의 공급조차도 지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일진과 조폭을 장르로만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현실에서 모티브를 따왔기는 해도, 영화와 만화에 나오는 일진과 조폭들은 현실의 그것과 같지 않다. 그리고 한국을 대표하는 ‘장르’일 뿐, 현실 전반에 확대 적용하려는 시도는 다소 무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무엇보다 나는 청소년들이 그걸 구분하지 못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한 논리는 우리가 이전에 한국만화에 가했던 것과 현재에 게임에 가하고 있는 폭력성의 문제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본문의 첫 문단으로 돌아가 <아르세니아의 마법사>가 네이버 플랫폼에 입성한 것이 지금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말해보려 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네이버 플랫폼의 상위권을 독식하고 있는 일진물이라는 장르는 장르적 다양성을 해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망가에 대항해 한국적 장르를 구축한다는 것은 네이버라는 플랫폼이 한국 만화 전체를 위해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총대를 멨다’고나 할까.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 망가를 떠오르게 하는 이세계물 장르가 네이버 웹툰에 입성했다는 것은 우리가 망가의 영향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기 시작했음에 대한 증표와도 같다. 예컨대 ‘이세계물’은 망가의 전유물이 아니며, 우리에겐 그것을 한국적인 장르로 재구축할 능력이 있다.


부끄러운 말일 수도 있고, 행복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이제는 망가가 아닌 웹툰으로서 장르가 아닌 문화적 다양성을 추구할 때가 온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한국 만화의 어떤 가능성을 논한다는 것이 망가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그 반대 방향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동안의 망가가 장르의 수입 측면으로 논해졌다면, 이제는 문화의 포용 면으로 논해질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어쩌면 먼 훗날에는 일진물이 한국 만화를 대표하는 장르가 될지도 모를 일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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