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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n 19. 2020

카연갤에 올라오는 자전적인 만화에 대한 고찰

*이 글은 문화비평 웹진 크리틱-칼에 투고되었음.

http://www.critic-al.org/?p=5838


1.


작가 지망생들에게 가장 큰 화두는 아마도 입봉이다. 대학원생에게 졸업논문이 연구자로서의 첫 발걸음을 뜻하듯이, 작가에게 입봉작이란 앞으로의 자신을 어느 정도 예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원래대로라면 입봉작은 신중하게, 정성스럽게 준비하는 게 옳다. 하지만 당장 살아가는 게 고달픈데 어찌 먹이를 가릴 수 있을까. 많은 작가들이 그런 고민에 빠진다. 소위 말하는 예술성과 상업성의 문제다.


예술성과 상업성은 양립하기 힘든 것으로 여겨진다.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는 뜻이다.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몇몇 작품이 있긴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예외일 뿐이다. 세상에는 예술과 상업이라는 두 개의 규격이 있고, 정도를 걸으려면 규격 외의 사람이 되어선 안 된다. 누군가 알려준 사실은 아니지만, 우리는 은연중에 그렇게 배워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여기서 또 한 번의 분화가 일어난다. 정식으로 데뷔하는 걸 노리지 않는 부류도 있다. 정식으로 데뷔할 생각이 없으니 예술성이나 상업성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만의 할 일을 한다. 좋아서 작품을 만든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양지로 올라가기 위해서가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에너지를 쏟는다는 점에서 다르다.


세세한 점까지 다루면 이유야 다양할 것이다. 자신의 실력이 양지로 올라갈 정도로 탄탄하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일 수도 있고, 양지로 올라가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없기에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하게 말해둘 수 있는 건, 음지에는 음지만의 매력이 있다는 점이다.


음지라고 표현하니 무언가 으슥하고 불령한 느낌이 나기도 하지만, 나는 이것을 언더그라운드나 마이너리그의 대안어로 사용했다. 언더그라운드라고 하면 남겨진 사람들이라는 느낌이 나고, 마이너리그라고 하면 2등이라는 느낌이 나므로, 볕이 강해 음지로 왔다는 말이 가장 어울릴 것 같아서다. 그렇다면 이제 음지 생물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해보자.


음지 생물은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를테면, 바닷속 심해 생물의 모습은 양지의 그것과 확연히 다르다. 동굴 안의 생명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도 좋겠다. 그렇게 음지에 사는 것 중에 몇몇은 귀여운 외모로 주목받기도 하지만, 징그러운 외모로 주목받는 것들도 있다. 그 과정에서 음지 생물의 귀여운 외모는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게 되고, 징그러운 외모는 “음지에 살기에 저렇게 생겼다”는 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가 알지 못했던, 발견하지 못했던 ‘무언가’에 대한 인식으로만 그들을 이해하게 된다.


여태까지 발견되지 않았을 뿐, 그들은 예전부터 그곳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우리는 음지 생물이 왜 그런 모습을 하게 되었는지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음지 생물의 삶에 대한 이해 없이 단지 외견으로만 그들을 파악하는 것이다. 차별이라던가 편견이라던가 하는 말이 아니라, 양지와 음지의 경계는 외견이 아닌 환경적 요인에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고 나는 말하고 싶다.


2.


음지에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양지에 있는 것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개중에는 수위 상의 문제, 대중성의 문제로 인해 양지에서는 절대 볼 수 없을 것 같은 작품도 있다. 취향을 타므로 다른 사람에게 추천해주기 애매해서가 아니라, 음지 밖으로 나가면 태양 빛에 금방이라도 타버릴 것만 같은 이 작품을 위해 친구를 음지로 초대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음지 밖으로 나올 수 없다. 정말로 울타리가 나누어져 있다기보다는, 암암리에 존재하는 거리감이 그들을 그렇게 나누고 있다. 서로의 영역을 다녀가도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는 않지만, 음지에 특정한 이들이 모이는 것은 일종의 유대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 어쩌면, 용례는 다르지만, 딥웹(Deep web)이라는 은유를 빌려 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검색 엔진에 수집되지 않아 링크를 직접 입력해 접속해야 하는 인터넷 사이트를 딥웹이라 부른다. 주소를 아는 사람만 접속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 특수성으로 인해 범죄에 사용되는 경우가 많지만, 포괄적으로 보면, 타인이 접근할 수 없게 숨겨둔 개인의 일기장도 일종의 딥웹에 해당한다. 물론 종이 공책에 적은 일기는 인터넷의 요소가 아니기에 ‘웹’은 아니다. 다만 그 의미는 유사하다.


개인의 일기장은 자기만의 공간을 형성하고 그 안에 감정을 기록하는 것에 사용된다. 말하자면 이는 감정의 배출구로서, 훗날 일기를 돌아보았을 때 당시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떠올려볼 수 있는 가정은 그것을 모두가 볼 수 있는 형태로 가공하면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다. 즉, 일기장을 기록하는 형태로 작품을 만든다는 것에 관하여 생각해보려 한다.


일기장을 모두에게 공개하는 건 필자에게 있어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행위이다.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담은 기록을 타인에게 공개한다는 건, 알몸으로 세상에 내쳐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부끄러움을 없애기 위한 수단으로 일기장을 세상에 내놓는 경우도 있다. 흔히 슬픈 감정은 형태가 없기에 극복하기 힘든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것을 눈으로 볼 수 있는 형태로 만든 후에 ‘격파’하자는 의도로 일기를 세상에 내놓게 된다.


즉, 개인의 내면을 타인이 알 수 없는 곳, 일종의 딥웹이라고 가정할 때, 딥웹의 썩은 부위에 주소를 부여한 후 그곳을 격파할 수 있게 만드는 게 바로 일기의 역할이다. 말하자면 자신의 감정을 떨쳐내려 하는 이들에게 일기장이라는 사물은 썩은 환부를 도려내는 메스와도 같다. 그래서 이런 작품들은 독자에게 거부감을 일으킬 수도 있다. 취향에 맞지 않아서가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바라본다는 게 슬픈 일이어서다.


하지만 그런 딥웹에 부여된 주소를 일부러 검색해서 들어올 정도의 사람이라면, 그곳에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일 테다. 이는 검색 엔진으로 쉽게 노출되는 것들보다 훨씬 능동적이고 확고한 마음을 요구하기에, 독자가 그만큼 작품에 이입하고 있음에 대한 증거가 된다. 섣불리 동의하기 힘든 말일 수도 있는 ‘감정에 주소가 있다면’이라는 가정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감정에 주소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 다시 말해서, 양지보다는 어둡기에 길을 잃기 쉬운 음지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명확한 주소를 부여하는 작품들에 대해 나는 말해보고 싶다.


디시인사이드의 카툰-연재 갤러리의 대문 사진.


3.


한국에서 소위 말하는 ‘언더그라운드 만화’가 올라오는 장소 중 대표격에 해당하는 곳이 ‘카툰-연재 갤러리’이다. 이곳은 갤러리 제목처럼 만화가 올라오는 곳인데, 꼭 연재작품만 올라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만화들이 올라올 때가 더 많고, 그렇게 즉흥적으로 만든 만화들이 쌓여 하나의 연재가 되는 경우도 있다.


이곳에서의 즉흥성은 주제가 빠르게 전환된다는 특징이 있다. 외부 사회와 내부 사회의 트렌드에 민감하기에 그렇다. 폐쇄적인 공간이기에 외부에 둔감할 것 같지만, 이곳에서 대중의 취향에 맞는 몇몇 작품이 링크의 형태로 다른 커뮤니티로 빠져나가기에, 외부 세계의 반응을 작가가 수용하고 그걸 다시 작품에 적용하는 방식으로 주제가 소통하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그렇게 소통하는 주제 중에 ‘자기 이야기(자전적인)’가 많다는 것이다. 만화에 다양한 종류가 있음에도 유독 자기 이야기가 많이 올라오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아마도 디시인사이드라는 장소의 특정 갤러리라는 점이 폐쇄성을 만들어내고, 그런 폐쇄성에 기반해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히 털어놓을 만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면 왜 폐쇄적인 공간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지에 대해 물음을 던져보아야 한다. 작은 공간이라 하더라도 인터넷인 만큼 공개된 장소임이 분명하고, 작가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가 인터넷에 공개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이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낯선 사람 앞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쉽게 털어놓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의외의 부분이다.


자신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개인이 일탈을 저지르게 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기존에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는 개인이 일시적으로 사회를 떠나 사회와의 연결고리가 끊겼을 때, 완전히 홀로 된 상태에서는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때문에 여행에서 마약, 성매매, 폭력, 도박등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본래 목적대로라면 온전한 모습의 자신을 찾아 떠나는 자아탐구를 제공하기도 한다. 삶이 힘들 때 배낭여행을 떠나보라는 건 그런 맥락의 권유이다.


이에 따르면 카연갤은 일종의 여행 장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을 되찾는 장소, 그렇지만 디시인사이드라는 사이트의 특성을 고려하면 이곳은 명백한 음지이다. 마약이나 도박처럼 아주 깊은 어둠은 아니더라도, 일반 대중의 시선과는 괴리되어 있는 장소가 바로 디시인사이드다. 따라서 이곳의 작가들은 카연갤에 와야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여행지에서 솔직해지는 사람이 있듯이, 인터넷 공간에서 떠나는 여행도 사람을 솔직하게 하는 경향이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여행을 가는 이유가 꼭 일탈을 위해서만은 아니듯이, 카연갤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걸 일탈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카연갤이라는 공간 자체가 만화 시장에서 일탈로 여겨지는 면이 있다. 예컨대 카연갤에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건, 공간 자체가 주는 분위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애초에 디시인사이드가 양지보다는 음지에 가까운 사이트다. 그리고 카연갤은 디시인사이드의 일부다. 따라서 카연갤이 디시인사이드의 영향을 받지 않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디시인사이드의 갤러리가 각기 다른 문화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다만 카연갤은 디시인사이드라는 음지 안에서 ‘만화’라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고, 그것은 음지 전체에서 자신을 표현하려는 이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4.


남들에게 쉽게 하지 못할 이야기가 만화의 형식으로 올라온다. 작품의 퀄리티는 그리 높지는 않다.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즉흥적으로’ 사람들이 유입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므로 기억이 나는 대로 바로 그려서 올리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들이 일기장에나 쓰일 만한 사적인 기록이라는 점에서 그런 즉흥성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런 만화들에 대한 반응도 즉흥적이라는 점이다. 아마추어 만화를 그려 올리는 여타 플랫폼에서는 독자들의 댓글에 작가가 일일이 반응하기 어렵지만, 디시인사이드 플랫폼은 이전 싸이월드 홈피처럼 댓글 하나가 달리면 그에 알림이 가는 구조이다. 알림이 오면 호기심 때문이라도 눌러볼 수밖에 없고, 그렇게 달리는 댓글들을 하나씩 눈여겨 보게 되는 게 이 사이트의 소통 구조이다.


그런 점을 이용하여, 작가를 상처 주기 위해 일부러 자극적인 댓글을 다는 사람도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자전적인 이야기에 따스한 댓글만 달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디시인사이드라는 사이트의 특성이기도 하겠지만, 인터넷 공간 전반에서 일어나는 악플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이는 카연갤이라는 공간 안에서 다음처럼 바라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만화에 욕설을 다는 사람들을 몰상식하다고 비판하는 게 맞지만, 이곳에 만화를 올리는 사람들이 그걸 모르지는 않는다. 욕을 먹을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카연갤이라는 장소에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는 것이다. 물론 이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피드백을 받는다는 점에서 작가가 견뎌야 할 시련이지만, 이것은 자전적인 이야기이고 일부는 일기장과도 같은 성격을 띠므로, 작품 자체에 대한 비판은 인격적인 모욕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카연갤에 올라오는 자전적 성향의 만화가 신기하게 느껴지는 게 그 대목이다. 왜 인격적인 모욕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 하는 걸까. 아마도, 그런 점을 감수하면서까지 올릴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달리는 악플을 버티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지만, 두 그룹 모두가 공유하는 가치관이 그곳에 있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서는 디시인사이드가 표방하는 음지 문화를 고려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디시인사이드는 한국의 인터넷에서 ‘문화수도’라고 불릴 만큼의 입지를 지닌 사이트다. 그만큼 인터넷 문화에 끼치는 영향력이 크다는 것인데, 이는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그곳에 모인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디시인사이드는 대외적으로 각인된 이미지와는 다르게, 갤러리별로 소소한 문화적 차이가 있으며 어떤 곳은 디시인사이드라고 볼 수 없을 법한 문화를 지녔기도 하다.


말하자면 디시인사이드라는 공간이 갖는 문화적 다양성이 다른 곳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한 이들을 끌어당기는 듯 보이는 면이 있다. 정확하게는 자기 삶에서 주류가 되지 못하고 떠도는 상처받은 과거를 타자화하고, ‘그’를 만화의 형식을 빌어 카연갤이라는 공간으로 추방하는 것이다. 이때, 이 만화는 자신이 버리고 간 것, 버리고 싶은 자신의 모습이기에 유저로부터 공격받아도 작가에게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오히려 작가는 유저들과 함께 자신의 만화에 공격을 가하고 싶을 것이다.


공감대 형성이라는 점도 빠트릴 수 없다. 타인 앞에서 상처를 드러내고 그걸 공유한다는 건, 상처를 치유하고 싶은 이들이 하는 행동이니 말이다. 상처받은 과거와 그에 비롯된 감정을 버리는 곳이라는 인상이 공간 전체에 퍼져 있는 듯 보이지만, 그런 폐허 안에서도 다시 일어나고 싶은 사람은 항상 있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들은 이곳에서 작품에 가해지는 비판을 참지 못하고 떠나게 된다.


하지만 카연갤이 공감대 형성을 하지 못하는 공간이라 해서 나쁜 공간인 것은 아니다. 어느 사이트나 장단점은 있기 마련이고, 카연갤은 공감을 위한 공간이 아닐 뿐이다. 이곳은 디시인사이드라는 쓰레기장에서 만화를 전시하는 장소이며, 그곳에서 버려진 감정을 수집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원래 이렇다고 생각해야 한다. 오히려 그렇기에, 상처받은 이방인이 상처를 드러내어 버리고 가기에 좋은 장소라고 말이다.


살바도르 달리, 승화의 순간, The Sublime Moment, oil on canvas, 39×47, 1938


5.


프로이트는 우울을 현명하게 이겨내는 방법이 승화라고 말했다. 내면의 우울을 글을 쓰는 능력이나 음악을 만드는 것과 같은 창조적 행위로 바꾸어 보라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창조적 행위가 우울함의 대항마로 설정된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이, 죽음과 창조가 서로 반대되는 행위라는 점만을 알아두면 된다. 나를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는 죽음과, 내가 세상에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창조의 정중앙에 자리한 게 바로 승화다.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이란 존재의 소멸이자 시간의 중단이다. 데카르트가 말하듯이 생각하는 자신이 살아감의 증명이 된다면, 잠자는 동안에 중단되는 사유의 행위는 우리에게 ‘죽어있음’이라는 말이 된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우리는 잠을 청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울함을 겪는 대부분의 사람은 깊은 잠에 빠져들기를 원한다. 그들은 잠을 진통제처럼 사용한다. 잠자는 동안에는 생각하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니 고통 또한 느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잠은 영원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흔히 죽음을 ‘영원한 잠’이라고 말하지만, 일어나지 않을 때 비로소 죽음이 되는 것이므로 잠은 죽음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잠을 죽음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생각함으로써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눈을 뜨기 전까지는 우리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 잠의 영원성을 부정한다. 마치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상자를 열어보기 전에는 우리의 생사를 알 수 없다는 점이 잠을 승화의 과정으로 만든다.


결론부터 먼저 이야기해두자면, 나는 카연갤에 올라오는 자전적인 만화들이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잠이라고 생각했다. 먼저, 자신의 우울함을 만화로 풀어내는 모습은 프로이트의 맥락에서 ‘승화’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우리는 의문 하나를 떠올리게 되는데, 디시인사이드는 상처에 공감하기보다는 욕설을 남기는 사람이 더 많을 장소라는 점이다. 내면의 우울함이 다른 사람에게 공격받는다면 오히려 그 우울함은 더욱 심해지지 않을까? 우리는 누군가 악플에 상처받는 모습을 흔히들 보아왔고, 그중 일부는 죽음을 택했다는 점에 슬퍼하곤 했으므로 그들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위에서 서술했던 “상처받은 과거를 타자화”한다는 문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문구에서 타자화라는 단어를 ‘잠’으로 대체하면 논의는 완성된다. 즉 그들은 잠자는 자신을 타자화하는 것으로 자신을 관찰할 수 있다. 이 행위는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우울함을 승화하는 것이다. 감정을 펜끝으로 쏟아내고 나면 감정을 빨아들인 캔버스는 그곳에 자화상을 기록한다. 이는 거울을 보고 그리는 얼굴이 아니라, 압지 위에 얼굴을 찍어 만든 시간의 데스마스크이다.


신체를 이탈한 영혼이 허공에서 자신의 잠자는 모습을 바라볼 때, 슈뢰딩거의 상자는 열리고 고양이의 생사는 결정된다. 그 상처와 우울함을 죽일지 살릴지는 개인의 몫이 된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화자는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는 독자와 함께할 수 있다. 상처에 공감하든지 돌을 던지든지 하는 것들은 모두 잠자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잠자는 이는 존재의 소멸과 시간의 중단을 동시에 겪으므로, 그에게 가해진 어떤 외부 자극에도 반응할 수 없고, 기억할 수도 없다. 요약하자면 ‘한 귀로 흘려보낸다’.


잠을 잔다는 것은, 내가 시간에 주는 자유가 아니라, 시간으로부터 내가 빼앗은 자유이다. 다시 말해서, 상처의 해방이 아니라 상처의 고사이다. 그들은 야생동물을 대하는 방법으로 생태계로의 방사가 아닌 안락사를 택한 것이다. 자신이 아니라 우울함만 죽으면 된다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행동했다. 그래서 이 행위는 삶으로의 강한 의지를 내포한다. 비록 자신에게서 나온 슬픔일지라도, 내가 그의 부모라 해서 꼭 보듬고 책임질 필요까지는 없다고 말하는 매정함 혹은 단호함이다.


6.


위에서 우리가 논했던 것은 창조의 측면이었다. 카연갤에 올라오는 자전적인 만화들은 삶으로의 의지를 갖추고 창조를 추구한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그 반대편에는 무엇이 있을까. 창조의 반대 방향에는 존재의 소멸이 있다. 존재의 소멸을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잠들지 않고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는 이의 모습이 만화 ‘올리기(Uproad)’라는 행위로 나타난다.


존재의 소멸은 카연갤이라는 사이트 내에서 비교적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 거대한 인터넷 공간에서 우리는 일개 개인에 불과할 뿐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이 존재의 보잘것없음이 활발히 올라오는 글 사이에서 우리를 고사시킨다. 이때 고사에 대응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예술가로서의 개인이 창조의 영역에서 자신을 도드라지게 하려 노력한다면, 상처받은 개인은 소멸의 영역에서 자신을 분쇄하기를 시도한다. 전자는 존재의 소멸로부터 살아남아야 하고, 후자는 창조의 정수로부터 달아나야만 한다. 왜냐하면, 예술가는 성공해야 하고 우울함은 죽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논의를 확장해 소멸의 영역을 들여다보려 한다. 영화가 말해주는 현재라는 시간의 이상함은, 우리가 그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될 때 주관적인 상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영화의 전신이 된 환등기를 살펴보자. 개별적인 상태로 존재하던 이미지가 영화라는 가상을 만들어낸다. 만약 우리가 영화의 한 장면을 포착할 때 그것은 더는 영화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강렬한 이미지로 우리 마음에 각인될 뿐이다. 그런데 그 강렬함이란 사진을 찍을 때 터트리는 플래쉬와도 같아서, 우리가 흔적을 목격할 때는 이미 지나가버린 후이다. 결국 영화라는 가상을 바르게 응시할 때 우리는 영화의 단편이 아니라 소멸을 목격하는 게 되어버린다.


이 모순된 지점이 위의 두 가지 사례를 설명해준다. 영화에 푹 빠지기 위해서는 개인을 소멸시켜야 한다. 반면 개인이 되기 위해서는 영화로부터 달아나야 한다. 즉 살아남고 달아나는 행위 모두가 하나의 영화 안에 성립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만화라 해서 별 차이는 없다. 만화의 여러 장르 중에서 컷으로 분할된 만화의 경우라면 영화와 유사하다. 별개의 컷이 유동적인 이미지의 단편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것은 영화의 장면들을 잘라서 이어 놓은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말해 컷으로 분할된 만화는 항상 강렬한 이미지이며, 개별자로의 자신만이 있을 뿐 주관으로의 자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주관으로의 자신은 없다, 라는 말이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에 결합된다면 꽤나 그럴싸하게 들린다. 이 말이 오도될 여지를 남김에도 선언되어야 하는 이유는, 카연갤에 올라오는 자전적인 이야기는 만화라는 매체보다는 카연갤이라는 공간 자체에서 소멸의 힘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이 말이 우리가 여태까지 해왔던 말들을 부정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영화를 영화관이라는 공간과 분리할 수 없듯이 자전적인 만화와 카연갤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멸해가는 자신을 그려내는 것은 굳이 만화가 아니어도 별 상관이 없겠지만, 카연갤이 아니라면 자전적인 만화를 그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 그러하다.


인터넷이 갖는 소멸의 성질은 익명이라는 은폐의 표지 말고도, 그 전체가 거대한 유동성을 띄기에 절단과 생성의 지점을 딱 잘라 구분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귀인한다. 쉽게 말해 물은 잘릴 수 없다. 물을 제거하는 방법은 흡수하거나, 증발시키거나 하는 선택지밖에 없다. 물을 쪼갤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가 인터넷 상의 것들, 이를테면 무정형의 집단을 어떻게 분류할 수 있을지와 같은 물음과 연결된다.


디시인사이드의 수많은 유동 ‘ㅇㅇ’들은 동의를 표하는 ‘ㅇㅇ’이자 존재를 공란에 두는 ‘ㅇㅇ’이기도 하고, 이들에게 자신을 내보인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자신에 대한 동의이자, 자기 존재에 대한 비움의 행위이기도 하다. 예컨대 유동하는 것은 유동적 자신의 형태에 동의하는 것이자, 유동적인 면모에 본격적으로 빠져들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금은 전설이 되어버린 작가 불명의 작품 <모정돼지>. 2003년에 연재되었으며,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라는 소문만이 무성하다.


7.


질문 : 상처받은 과거, 우울함을 품은 시간을 사라지게 하는 방법은 그것을 생각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런데 상처를 승화하려면 깨어있는 자신이 필요하므로 우리는 모순에 부딪히게 된다. 슈뢰딩거의 상자를 열지 않고도 고양이를 쓰다듬을 방법은 없는 것일까?


대답 : 우리는 양자역학을 뒤집어 유동적인 자신을 긍정하는 세상을 주장한다. 왜냐하면 유동적일 때 생겨나는 가상적 이미지가 우리를 매혹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멈춰 있는 현실이 부질없거나 고통스럽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만화를 통해 그려내는 멈춰있는 이미지가 고통을 효과적으로 품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뿐이다.


결론 : 우리는 인터넷 상에서 너무 많은 것들을 목격하기에 그만큼 많이 잊게 되고, 이는 마치 영화가 너무 많은 이미지를 보여주기에 역설적으로 가상의 이미지를 도출해내는 것과도 마찬가지인데, 카연갤의 ‘작가’들은 그런 소멸의 공간 안으로 들어가 만화라는 이름의 가상을 도출해내는 것이다.


근거 : 영사기에서 돌아가는 필름이 어쩌다가 멈추어질 때는 필름에 불이 붙어 활활 타버리고는 한다. 즉 영화는 멈추기를 허락하지 않고, 그렇기에 영화라는 가상은 시간의 속성을 그 무엇보다 잘 실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시간은 멈추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만약 시간이 멈춘다면 우리는 필름처럼 타오르게 된다. 다시 말해서, 시간의 중단인 잠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가 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는 자전적인 만화에 부여되는 ‘일기장’이라는 속성이 그런 식의 소멸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흔히 귀신을 ‘봉인’한다고 표현할 때는 인형이나 부적 같은 매개물이 필요하기 마련인데, 생각해보면 이 시도들은 귀신이라는 유동적 형태를 어떤 고정된 사물에 ‘부여’하려는 성격을 지닌다. 마찬가지로 자전적인 ‘만화’는 개인의 유동적인 감정, 소멸해가는 존재인 죽음의 모습을 컷 단위로 부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감정에 죽음을 선언하고는 데스마스크를 찍어 견본으로 보관한다. 이 작업이 죽은 곤충 시체를 사진으로 남기는 일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아마도 산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일 듯하다. 아직 살아있는 사람인데 어찌 데스마스크를 남길 수 있느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물음의 반대편에 서서 우리의 삶이 가상적인 것이라고 반문할 수 있다.


이것이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희망적인 문구와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느낄 수 있다. 삶이 가상적이라면 그것은 일회적이고 덧없는 무언가일 테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잠자는 이유는 피로를 해소하기 위해서고, 잠자는 동안에 피로를 풀고 나면 일어나게 된다. 따라서 피로를 ‘잠의 연료’로 보아도 좋다. 다르게 말해 우리는 일회성을 획득하기 위해 피로를 느끼고, 또 그래야만 한다. 만약 우리의 삶이 피로하지 않다면 우리는 쉬지 않을 것이며, 시간과 평행선을 달리는 우리에게는 자유가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간은 결코 쉬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방책을 꾀하는데 그게 바로 일회성, 유동적이어서 쉽게 사라질 것 같지만 아무리 절단해도 사라지지 않는 감정들, 존재의 괴로움이다. 우리는 생각하기에 존재하고, 그렇기에 존재함에서 오는 괴로움을 절단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영화를 스크린에 투영하는 행위가 시간의 필연성과 결합하듯이, 삶이라는 가상은 어쩔 수 없이 행해지는 것이고 결국 우리는 살아가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영화는 ‘살아간다’는 점에서 너무나도 잔혹한 매체이다. 우리는 세상에 이미 태어났고 존재하기를 멈출 수 없다. 되풀이하자면, 우리는 이미 생각하게 되었고 생각하기를 멈출 수 없다.


8.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약간의 죽음을 맛보는데, 그 약간의 죽음이 전체로 확장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잠자는 동안에는 자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잠을 자는 동안에 정말로 죽는다면, 아무런 고통 없이 세상을 마감할 수 있는 게 장점이라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시간의 틈새 안에 자리한 사유의 절단을 꾀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사유의 절단이란 맹렬히 돌아가는 환등기를 멈춰 세우고, 주관적인 이미지인 가상-삶으로부터 객관적 이미지인 시간-존재를 찬탈하려는 시도이다. 또한 과거를 지우고 미래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잠이라는 중첩 안에서 둘 중 하나를 택하지 못하고 방황하게 되는데, 우울함이 우리를 죽음으로 이끈다는 점에서 창조적 행위란 그에 대한 반발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자신의 지난 과거와 결합해, 돌이킬 수 없는 일들에 대한 깊은 후회와 번뇌, 그런 우울감을 만들어내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아마도 만화는 이에 대항할 수 있는 다른 방향의 접근법일 것이다. 다만 우리는 소멸해가는 개인의 모습을 인터넷이라는 공간에 녹여내는 일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인터넷의 유동성에 몸을 맡기는 순간 우리는 분해되고, 분해된 것을 회수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시간으로부터 자유를 되찾는 순간 우리는 그렇게 생겨난 빈 곳을 막을 방법을 동시에 궁리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멍 난 치아에 온갖 찌꺼기가 들러붙어 충치가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없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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