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2020)
1.
코로나 19의 여파를 뚫고 장률의 <후쿠오카>를 보러 갔다. 작은 마스크 하나가 세상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줄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속 나우시카처럼 당당해지기로 했다. 확진자가 연달아 나오며 인간이 살 수 있는 공간이 점차 좁아지고는 있지만, 남겨진 곳마저 코로나에 침식되어 버린다면 더는 할 수 있는 행동이 없을 것이니 말이다.
개봉도 안 한 영화를 어떻게 보았느냐고 묻는다면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문화를 사랑하는 대기업 CGV에는 문화가 있는 날에 곧 개봉할 영화를 미리 상영하는 전통이 있다. 배급사와 협의가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부적으로는 유료 시사회로 지칭하는 듯하다. 물론 유료인지 무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영화를 보고 싶은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찬스일 뿐.
평소 장률에 관심이 있던 나에게 <후쿠오카>의 유료 시사회 소식이 들려왔다. “전작인 <군산>을 보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게 개봉했구나.” 집에 있는 걸 좋아해서 외출을 자주 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가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률에 순수한 호감이 있기도 했고 전작인 <군산>에서 후쿠오카에 대한 짧은 이야기가 오갔기 때문이다.
2.
<군산>에서 박해일과 문소리는 후쿠오카 여행이나 떠나보자고 이야기한다. 맥락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아마도 이는 군산 특유의 분위기 탓일 공산이 크다. 군산은 일제강점기에 쌀을 수탈당하던 항구였고,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으며, 현재도 일본풍의 가옥이 몇몇 남아 있다. <군산>에서도 그 부분을 잘 묘사하고 있다. 당장 주인공 남녀부터가 일본 가옥을 개조한 숙박에 머무른다. 그런 와중에 나온 말이 ‘후쿠오카’라는 뜬금없음이다. 즉, 두 사람이 산책하며 그런 이야기를 꺼내게 된 게, 주변 풍경에 영향을 받아서라고 영화는 말한다.
두 사람은 군산 시내를 거닐던 와중에 후쿠오카 이야기를 한다. 수탈 항구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점이 어떤 생각을 들게 하지만, 오해를 풀고 갈 필요가 있다. 이는 장률이 화해를 청하는 방식이다. 정확하게는 매듭을 짓는다는 표현에 가깝다. 예를 들어, 장률은 <중경>과 <이리>라는 2개의 영화를 통해 하나의 사건을 묘사한다. 전반부인 중국에서의 이야기가 <중경>이고 후반부인 한국에서의 이야기가 <이리>이다. 여기서 다루는 사건이 1977년의 ‘이리역 폭발 사고’인데, 한국인인 우리조차 잘 알지 못하는 이 사건이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중경>) 한국으로 돌아온다 (<이리>). 아마 우리는 이 두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할 것이다. “중국과 한국이 이 사건 하나로 엮일 수 있는 걸까.” 이때 장률의 대답은 “YES”이다. 영화 속에서 그 물음은 인물 사이의 기묘한 인연에 대한 자문자답이 된다. 싸우지 않았지만 싸운 것만 같은 분위기가 화해 없이, 있는 그대로 매듭이 되어 버린다. 어쩌면 화해를 하면 모든 게 끝나버릴 것만 같기에 그런 방식을 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화해는 오랜 갈등의 종결이고, 그런 종결은 곧 단절을 의미한다.
그러나 장률은 어떤 형태로든 단절을 원치 않는다. 그에게는 <경주>와 같은 관계가 있고, <군산>과 같은 뿌리가 있다. <경주>에서 장률이 다루는 게 무덤과 춘화를 통한 육체의 역사와 감정의 빛바램이라면, 그것은 경주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공간인 이유이다. <군산>에서 장률이 말하는 조선족과 서울의 관계가 윤동주 시인이 일본에서 인기 있다는 말로 은근슬쩍 연계될 때, 우리는 <경주>의 마지막 장면으로 돌아가 춘화를 바라보게 된다. 예컨대 단절을 원치 않는 장률의 사고방식은 영화 단편이 아닌 그의 영화 전체에 적용되는 듯 보이는 면이 있다. 어떤 영화에서의 사물이 다른 영화에서의 사물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물이나 사람이 담고 있는 이미지를 덮어씌운다. 가장 가까운 것부터 언급하면 <경주>와 <군산>에서의 박해일과 <군산>과 <후쿠오카>에서의 박소담을 예로 들 수 있다. 두 영화의 두 배우는 다른 배역을 연기하지만 이미지상으로 비슷하다. 여기에 장률은 그런 유사함이 싫지 않다는 듯이 배우의 이름을 수정하지 않고 배역의 이름으로 차용하기도 한다 (일부 영화에서 그렇다. <춘몽>의 예리나 <후쿠오카>의 소담). 여기에 영화 한 편 안에서는 하나의 오브제가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경주>에서의 춘화나 <군산>에서의 사진, <후쿠오카>에서의 연등과 인형 같은 게 그런 부류이다.
여기서 꼽을 수 있는 장률 영화의 핵심은, 영화 자체에 특정한 관계나 의미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니 군산에서 후쿠오카로 공간이 바뀌는 것에는 ‘가야 하는 이유’를 찾는 것보다 ‘가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는 게 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된다 안된다의 문제가 아니라 가면 무엇을 보고 들을 수 있는지를 먼저 따져본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후쿠오카>에서 윤제문이 후쿠오카로 떠나게 된 이유는 ‘못 간다’거나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말 이전에 존재하는, ‘오래된 악연’을 보러 간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행동에 별다른 대의가 있는 건 아니다. 박소담이 윤제문에게 후쿠오카에 가자고 제안했고, 후쿠오카라는 단어를 들은 윤제문에게 ‘악연’인 권해효의 환청이 들려왔으며, 이에 윤제문은 환청을 따라 후쿠오카의 권해효를 찾아가게 된다.
그렇게 찾아간 술집에서 권해효는 윤제문에게 “왜 28년 만에 찾아왔느냐.”고 따지듯이 묻는데, 윤제문이 권해효에게 “환청을 들었다.”고 답하자 그는 어이없어하면서도 대충 넘겨버린다. 만남이 아닌 흘림으로 완성되는 장률 영화의 모습이 헛소리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 귀로 ‘흘려듣는’ 말들이 장률에게는 가장 가치 있는 행위이다. (위의 대사에서 28년이라는 뉘앙스 자체가 욕설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십팔년”이니까.) 사실 이 대목은 <경주>에서 박해일에게 “북한이 언제 멸망할 것 같으냐.”고 묻던 답에 헛소리로 응수하던 박해일을 떠오르게도 한다. 경주의 고분을 보며 여자 가슴 같다고 말하던 박해일의 모습이 실제 가슴을 만지는 정사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어쩌면 메타포일 수도 있는 것들이, 실제 행동과 관계로 이어지지 않음으로써 참말일 수도 있던 것은 헛소리가 된다.
<군산>에서 자신의 조상 중에 윤동주가 있다고 말하는 조선족 가정부의 발언은 정말로 뜬금없이 튀어나온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헛소리 같은데, 이후에 박해일이 서울 한복판을 걷다가 조선족들의 시위를 목격할 때 그것은 메타포처럼 느껴지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메타포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허공으로 날아 영화의 세상 언저리로 흘러가버린다. 마치 배수로가 빗물을 운반하듯이, 만연하던 의미가 세상의 어딘가로 사라져버릴 때 그곳에는 어떤 바다가 있을지를 우리는 생각해보지만, 물보라 너머 물안개만이 우리의 눈앞을 가릴 뿐이다. 그런데 그런 촉촉한 분위기가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안 되는 무릉도원을 연상케 한다. 장률이 말하는 <춘몽>이 현실의 측면에서 그런 의미였다면 <필름시대사랑>은 영화의 측면에서 그런 의미를 보여주었고, <경주>와 <군산>과 <후쿠오카>처럼 현실의 장소와 영화의 장소가 일치하는 곳에서 그 두 가지 의미는 상충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를 꿈이라 할 수 있다면, 현실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나는 이에 대한 대답을 ‘꿈인지 생시인지.’라는 관용어구에서 찾았다. 꿈은 꾸는 것이고, 생시는 ‘살아있는 동안’을 뜻한다. 이에 따르면 영화와 현실은 꿈과 생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영화의 입장으로 보면 상영시간은 곧 ‘살아있는 동안’을 의미한다. 러닝타임(Running Time)은 생시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현실과 영화가 일치하는 곳, 경주와 군산과 후쿠오카라는 장소는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곳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건, 장률의 세 영화 속에서 인물이 그곳으로 떠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일 테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장률도 딱히 큰 이유를 부여하고 있지 않다.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 목적지는 이미 정해졌고, 그곳으로 떠나는 게 도입부의 이야기다. 이는 아주 편리한 영화 작법일 수도 있겠지만, 장률이 보여주려는 게 인물이 아닌 공간이라는 점에 대한 설명이 되기도 한다. 장률은 영화 전반의 플롯을 짤 때, 이야기의 당위성을 인물이 아닌 공간에 부여한다. <경주> 같은 경우에는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곳이라는 모티브, <군산>의 경우에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이라는 모티브, 그렇다면 <후쿠오카>는 과연 무슨 모티브를 지정해둔 것일까? 미안하게도, 한국인이 즐겨 찾는 일본 관광지라는 것 말고는 생각나는 바가 없다. 하지만 <군산>으로부터 미끄러져 왔다는 것은 추측해볼 수 있다. 아마도, <군산>에서 박해일의 말은 장률의 속마음이기도 했을 것이다. 경주에서 군산으로 왔고, 이제는 후쿠오카로 가보고 싶다는 말, 공간 도약을 보여주는 - 비행기를 이용하는 장면이 생략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경주>에 더 가까운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을 <경주>-<군산>-<후쿠오카> 연작으로 부르기보다는, 장률이 머물렀던 곳이라고 보는 게 더 맞지 않을까 한다.
3.
장률은 공간이 사람을 만든다기보다는, 사람 안의 공간이 사람을 끌리게 한다고 믿는 듯하다. 쉽게 말해, 여행을 떠나는 이유가 여행지에서 새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닌, 자신이 아는 여행지에 홀리듯 떠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여행을 떠난다’기 보다는 ‘이끌리듯 떠밀려왔다’고 말하는 장률 영화 특유의 화법을 제공한다. <경주>에서 박해일이 한국으로 오게 된 것도, <군산>에서 박해일이 군산으로 떠나게 되는 것도 그런 이끌림의 일종이다. 같은 맥락으로 말하자면 <군산>에서 <후쿠오카>로 이어지는 흐름 또한 군산이 제공하는 단서가 바로 후쿠오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 영화가 면밀하게 이어지지 않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것들은 내부적으로 어떤 고리를 형성하는 게 아니다. 장률은 계속해서 어딘가로 이동하는 사람이고, 그런 그의 시선이 닿은 자리가 장률을 중심으로 연결될 뿐이다.
<후쿠오카>에는 어느 장소를 가도 보이는 철탑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박소담이 권해효에게 “철탑이 어딜 가나 자신을 따라오는 것 같다.”고 말하자, 권해효는 “이곳 어디에서든 철탑은 보인다.”고 답한다. 하지만 이후, 영화는 철탑이 보이지 않게 해버리면서 철탑에 관한 전설을 깨어버린다. 여기서 영화가 철탑을 보이지 않게 하는 방식이 촬영인지, 편집인지, 연출인지는 알 수 없다만, 후쿠오카의 중심부에 자리하는 자신을 따라오는 것이 사라지고 난 후에 벌어지는 일들은 마치, 일식 동안 벌어지는 여러 기묘한 사건을 보는 듯하다. = 후쿠오카를 지배하는 철탑, 그것이 부재하는 동안에는 해가 없는 동안 망자가 깨어난다는 태양의 전설처럼 현실 법칙의 역전이 일어난다. 윤제문과 권해효의 첫사랑 순이는 박소담의 몸으로 들어가 빙의하고, 연극은 더는 연극이 아니게 되어버리면서 영화, 라는 이름의 생시가 되어버린다.
철탑이 사라지고 난 후에, 권해효는 평소 자주 들렀던 서점에서 서점 주인 할아버지가 아닌 그의 손녀딸을 만난다. 권해효가 “할아버지는 어디 갔느냐.”고 묻자, 손녀딸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꽤 되었다면서 “동네 사람들도 할아버지를 보았다고 말하는데 정작 자신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손녀딸은 박소담이 이전에 맡겨 두었던 인형을 보관하고 있다며 인형을 전하는데, 이 인형은 마치 죽은 할아버지처럼 후쿠오카 동네 이곳저곳에서 발견된다. =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인형, 할아버지, 박소담이라는 세 명의 유령을 본다. 철탑이 사라진 장소는 두 개의 경계가 허물어진 것만 같다. 하나는 영화라는 현실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이라는 영화다. 윤제문과 권해효가 꿈꾸었던 순이는 박소담의 몸을 빌려 현실로 돌아오고, 죽은 할아버지는 살아있는 사람처럼 동네를 활보하며, 인형은 죽은 사물이지만 이때만큼은 마치 자아를 가진듯이 영화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영화라면 가능했던 일들, 현실이기에 가능하지 못한 것은 이곳 후쿠오카에 모여 장소의 일부가 된다.
역시나, 이 문장에서 핵심은 굳이 후쿠오카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후쿠오카에 오기는 했지만, 그들의 만남이 후쿠오카에서 이루어진 건 권해효가 후쿠오카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영화 안에서 윤제문이 권해효에게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면 너는 여기 왜 왔냐.”라고 쏘아대는 권해효에게 윤제문은 “그야 형이 여기에 사니까 그렇지.”라고 답한다. 그런데 눈여겨보아야 하는 건 그 다음 문장이다. 권해효가 후쿠오카에 사는 이유를 두고 윤제문이 “순이가 후쿠오카 출신이었다.”고 지적하자 권해효는 소스라치듯 놀라면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다. 동시에, 권해효는 윤제문에게 “아직도 서점이나 하는 이유가 순이가 즐겨 찾던 곳이라서 그런 거 아니냐.”고 답한다. 그러니까 이들의 대화를 요약하자면 아마도 다음처럼 된다.
순이의 고향이었기에 후쿠오카로 돌아온 것이라면, 그 반대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윤제문이 말했듯이 후쿠오카에 온 이유는 순이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권해효를 떠올려서, 정확하게는 ‘권해효의 환청’을 들어서다. 결국 이 영화에서 순이는 맥거핀에 불과하고, 그들 여행의 목적은 죽은 줄 알았던 권해효가 살아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을 테다. 이 대목에서 영화가 표현하는 영화와 현실의 경계가 러닝타임의 어느 면모, 우리 눈에 보이는 화면 바깥에 존재하는 것들, 비가시의 ‘영역’에 있는 권해효와 그의 후쿠오카에 대한 생각과 겹쳐 있음을 알 수 있다. = 어떻게든 말은 통하게 되어있다고 말하는 박소담의 말은 언어라는 게 결국 발화를 위한 도구임을 직시하는 듯하다. 어떠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포장재로 사용하는 게 언어이기에, 포장재 없이 전달하는 진솔한 마음이 따스함의 어떤 표현이라면, 솔직하게 다가가기에 말이 통하는 것일 뿐 인간에게 언어가 필요 없다는 식의 발언은 아닌 것이다.
영역이라고 지칭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러한 경계를 영화 전반의 세계로 옮겨 두려는 생각은 지양해야 한다. 안될 것은 없겠지만, 그렇게 영역을 크게 해버리면 영화가 감당할 수 없게 된다. 장률이 머무르는 장소들은 장률 세상의 전부가 아니고 단지 영역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경유지인 것도 아니다. 장률은 세상의 여러 장소를 거쳐 어딘가로 향하고 있지 않다. 그는 길을 걷고 있고, 어느 영역에 잠시 발을 들일 때가 있겠지만 그곳에 눌러앉지는 않을 것이다. 길거리에서 잘 다니다가 어느 순간 사라져버리는 박소담처럼, 가던 길에서 이탈하고는 하지만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연스레 이 길로 돌아올 테다.
4.
러닝타임을 직역하면 달리는 시간이기도 하다. 달리는 동안에 살아있음을 느끼는 이유이자, 인생이 하나의 달리기 경주인 이유이다. 달리 말하면 멈추어서는 안 된다는 게 경주로서의 삶이다. 하지만 그 반대라면 어떨까. 삶으로서 경주를 생각하면 어떠냐는 것이다. “인생은 달리기와도 같아”가 아닌 “달리기가 인생 같아”라고 말이다. 쉽게 말해, 우리 삶에서 달리기는 ‘삶을 표현하는 것’ 중 하나일 뿐 그게 인생 전체를 대변할 수는 없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우리 삶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그는 다른 곳을 향해 달려가는 주자 중 한 명일 뿐이다. 그들이 어느 길을 달리는지 다 알 필요가 없다.
<군산>이 막 개봉했을 무렵, <군산>에 관한 기사를 뒤적거리면서 후속작 <후쿠오카>에 대한 언급을 들었었다. 장소가 어디인지는 딱히 중요하지 않았고, 장률이 생각하는 후쿠오카가 그의 삶에서 어느 영역에 자리하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런 점에서는 ‘포켓몬고’가 떠오르기도 했다. 원처럼 표기되어 일종의 ‘영역’처럼 보이는 어느 포켓몬을 만날 때, 포켓몬이 어떤 분과의 어느 속성을 하고 있을지를 설레는 모습으로 기다리는 우리의 모습을 말이다. 만남을 원치 않는다면 그저 지나쳐 갈뿐이라는 점도 그렇게 설계된 영역의 장점이다. 그게 세상이라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에 속해야 하겠지만, 영역일 뿐이기에 서로를 존중하면서 비켜갈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포켓몬 트레이너가 되어 영역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렇게 마주함으로써, 손아귀에서 미끄러짐으로써 (포켓몬은) 품 안에 들어온다.
단절을 원치 않는다는 마음이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끊임없이 미끄러져 영화의 바깥으로 흘러가버리기만을 장률은 고대하는 것 같다. 어딘가에 머물렀다가 떠나고 나면 그들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어떠한 풍경을 마음에 안고 살아간다고 말이다. 다만 장률은 각본을 쓰지 않는다. 각본이라 함은 영화에 대한 앞으로의 생각인 것인데, 삶이 생각처럼 잘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비슷한 사람으로는 홍상수가 있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장률의 태도는 영화가 아닌 삶에 대한 무엇이다. 어떻게 해도 살게 된다는 무기력함의 표시가 아니다. 그것은 ‘타의에 의해 미끄러진 것’을 ‘본능으로 붙든다’고 바꾸어 말하는 언어유희이다. 본능적으로 끌린다는 말을 장률은 그렇게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