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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Dec 30. 2021

기억의 드로몰로지: 자동차는 운송수단이 될 수 있는가?

<드라이브 마이 카>(2021)


하마구치 류스케와 신카이 마코토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일본 영화감독이라는 점?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이 두 사람의 최근 행보는 묘하게 겹쳐 보이는 면이 있다. 우선 신카이의 경우 <너의 이름은>(2016), <날씨의 아이>(2019)에 이어 <스즈메의 문단속>(2022)으로 재난 3부작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다른 한편 하마구치는 <해피아워>(2015), <아사코>(2018), <드라이브 마이 카>(2021)처럼 잔존에 관한 영화를 찍고 있다. 이런 분류가 “구분을 위한 구분”이라는 비판을 듣기 십상이라는 걸 잘 안다. 하지만 내가 눈여겨보는 건 이 두 사람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요소가 바로 ‘사랑 그리고 폐허’라는 점이다(하마구치가 각본으로 참여한 <스파이의 아내>(2020)도 그렇다). 먼저, 신카이의 영화는 흔히 세카이계라 부르는 둘만의 세계를 다룬다. 다른 한편 하마구치의 영화는 세계의 기억 속에서 삶의 잔향을 뒤쫓는다. 전자가 폐허를 터전 삼아 사랑하는 이들의 노래를 다룬다면, 후자는 이미 재건되어 버린 일상에서 폐허에서의 지난 삶을 추억하는 이들의 모습을 다룬다. 여러 인터뷰에서 두 감독이 밝혔듯이 2011년의 도호쿠 대지진이 그들의 삶에 영향을 주었고, 어쩌면 위의 경향은 그러한 토양에서 자라났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나는 두 감독 간에 발견되는 공통점이 ‘영화적인 면’이 아니라 ‘일본인의 삶’이라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혹자가 말하듯, 2011년 이후의 세상은 ‘어딘지 모르게 계속되어 버린 삶’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드라이브 마이 카>는 어떤 세상의 에필로그처럼 보이는 면도 있다. 실제로 아내의 죽음 후에야 비로소 제목이 뜨기도 하고 말이다. 


고백하자면 내가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면서 신카이를 떠올린 이유는 따로 있다. 영화에서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의 전속 운전사로 나오는 미사키는 배우 미우라 토코가 분했는데, 미우라 토코는 신카이의 <날씨의 아이>에서 OST를 부른 바 있다. 피쳐링이긴 해도 그녀가 OST 제작에 참여했다는 점은 어딘지 모르게 <날씨의 아이>에 나오는 소년소녀를 떠올리게 한다. <날씨의 아이>에서 히나(모리 나나)는 하늘과 지상을 잇는 문이 되었는데, 그녀가 문이 되기를 포기하자 중립지대를 잃은 세상은 위에서 아래로의 중력에 일방적으로 당하는 처지에 놓인다. 언제든지 폭우가 쏟아질 수 있는 이 시대는 그 무엇보다 중력에 강하게 영향받는 중이며, 이는 마치 기억에 사로잡힌 채 그에 벗어나지 못하는 재난 이후의 PTSD적인 삶처럼 보인다. 그리고 <드라이브 마이 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날씨의 아이>에서 열림과 닫힘을 내보이는 신체가 황혼에서 지상으로 떨어져 갈 때, 그곳에 사라지는 건 소년소녀의 뒤로 보이는 배경이 아니라 그들이 마주해야 할 기억의 막중한 무게감이다. 말하자면 기억의 단수, 그렇다면 가뭄은 세상을 구할 수 있을 것인가. 가뭄은 세상을 구할 수 없다. 고 <드라이브 마이 카>는 말한다. 딸이 죽은 2001년 이후 아내와의 관계도 소홀해졌다는 가후쿠는 아내의 외도를 수도 없이 목격하지만 이를 애써 모르는 체한다. 그걸 인정하고 마주하면, 현관 앞에 머무르는 그의 세계는 진입 이전에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가후쿠는 마치 삽입하면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하는 풋내기 사회초년생을 닮았다. 삽입하면 무조건 책임져야 한다는 보수적인 성적 가치관은 어떤 면에서 재난 이후의 삶은 그런 재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잔존의 가치관과 닮았다. 


가후쿠는 그 누구보다 이 기억에 진심이지만, 기억에 삽입하면 더는 관계가 유지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후쿠는 성욕이 없는 척하고 기억이 메마른 척한다. 하지만 성욕이 본능이듯 인간에게 기억이라는 것 또한 원초적인 영역에 속한다. 본래대로라면 열림과 닫힘 모두로 기능해야 하는 이 영역에서 가후쿠는 문을 닫는 법을 잃어버렸다. 그에게 기억은 마치 뻥 뚫린 하늘처럼, 먼 곳에서 가장 낮은 지대까지 일방적인 무게감을 쏟아낸다. 그런 가후쿠가 홍수를 이겨내는 법은 아내의 목소리가 담긴 테이프를 수도 없이 듣는 것이다. 너무 많이 들어서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대사를 외울 지경이 되었지만, 그곳에 정작 자신이 해야 할 대사는 빠져있다. 왜냐하면 이 무대에 올라서는 게 바로 그이기에, 이 세계에 흘러드는 기억을 마주하는 게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무라카미의 소설을 관통하는 게 상실의 무드라면 하마구치의 영화에 구성되는 건 그런 상실을 마주해야만 하는 것들, 즉 잔존하는 것들이다. 이는 문학이 눈으로 읽어내어 머리로 구성되는 이야기라는 점과는 달리, 연극이 머리로 읽어내어 눈으로 안착하는(구성되는) 매체라는 점으로도 이어진다. 연극배우들을 두고서 “일단은 감정을 빼보라”고 말하는 가후쿠의 속내는 아마도 그런 가치관에 기인했을 테다. 가후쿠는 머리로 이해해야 비로소 보이는 게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마치 대본 리딩 후에 일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배우들이 타 언어를 두고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불교 경전을 듣는 것만 같다.”고 건네는 농담처럼 말이다. 


가후쿠는 아내와 외도했던 고지(오카다 마사키)에게서 이야기의 나머지 반을 들었을 때야 비로소 그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잔존하는 기억을 ‘보게’ 된 것이다. 자식의 죽음이 있던 2001년, 그로부터 17년이 흐른 2018년에 마주한 아내의 죽음은 영화의 도입부에 이루어진 불꺼진 방에서의 섹스처럼 희미한 기억만을 남겼다. 이 기억은 마치 이중인화처럼, 과거와 미래의 틀을 허물어 오직 현재만을 기억하게 한다. 그리고 이렇게 압축된 공간은 마치 고도로 응집된 중력인 블랙홀처럼 그를 사건의 지평 너머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이로 인해 가후쿠는 연기자이면서도 연기는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버린다. 연기자의 덕목은 무대 위에 올라 땅을 밟고 서 있는 것인데 그가 짊어진 기억의 무게는 그로 하여금 기억의 주인공이 될 수 없게 한다. 영화 초반에 짧은 인서트로 삽입되듯, [고도를 기다리며]는 성적으로 불구가 된 그의 처지를 은유하기도 하지만 그가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연극이란 기본적으로 기억을 훔쳐 얼굴에 뒤집어쓰는 이들의 유희인데 이제 그는 기억을 마주하지도 못하고, 즐기지도 못한다. 누군가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은 타인의 기억을 자신의 것처럼 연기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가후쿠의 모습은 거진 고개 숙인 남성처럼 보인다. 가후쿠가 성욕을 잃어버린 건 발기가 되지 않아서라기보단 그러한 발기에 담긴 속내가 더 크다. 발기를 할 수 없다는 건 결국 기억을 응축시킬 수 없다는 것, 다시 말해서 기억의 동물인 인간으로서 실격이며 타인의 기억을 뒤집어써야 할 배우로서도 실격이다. 


만약 섹스를 옛 표현처럼 “문과 문을 맞대는 행위”로 본다면, 하마구치가 모티브를 따왔다는 천일야화의 야사들은 그러한 성행위를 기억의 문제와 결부 짓는 것이다. 섹스를 할 때마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가후쿠의 아내(키리시마 레이카)가 죽고 난 후부터 그는 무대 위 주인공이 될 수 없었다. 하늘과 땅이 맞닿는 지점이 사라지자 그곳 하늘엔 뻥 뚫린 구멍만이 자리한다. 이 구멍의 사이론 메울 수 없는 기억들이 쉴 새 없이 쏟아진다. 이야기가 사라짐으로써 내일이 오지 않는 나날이 계속되고, 가후쿠가 마주한 현실이란 바로 그런 잠 못 이루는 밤, 불면의 열대야다. 굉장히 뜨겁지만 사그라지지 않는 열기, 그리고 마음. 그러니까 아내의 죽음은 가후쿠에게 있어 하나의 거대한 공동을 만든 것처럼 보인다. 2001년에 아이가 죽은 후로 별다른 관계없이 부부로 살아왔다는 가후쿠에게 딸의 존재는 일종의 중력이었다.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쪽으로 나아가는 삶의 순리는 무게의 강화를 동반한다. 그러나 딸의 죽음으로 붕 떠버린 일상은 무거운 기억을 하늘로 붕 뜨게 하였고, 이들의 삶은 그 어떤 새로운 기억도 새로 안착하지 못하는 무중력 지대가 되어 버린다. 바꾸어 말해 그들은 오래된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런 상황에서 서로를 지지해주는 게 바로 섹스였다. 암나사와 수볼트의 정교한 결합처럼, 혹은 <날씨의 아이>의 추락 장면처럼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아내에게 그러한 버팀목이 꼭 가후쿠일 필요는 없었다는 점이다. 구멍을 막는 게 누구든 성욕은 충족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누군가를 연기한다고 해서 꼭 그가 될 필요는 없고 그게 바로 연기자다. 


이런 상황에서 가후쿠는 아내로부터 정신적인 사랑을 추구하려 들지만 정작 그는 그런 속내를 들여다보기를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기억의 중력이 가장 강하게 작용하는 이 세계에서 기억을 마주하는 일은 부유하는 몸을 바닥에 고꾸라트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그런 몸을 바닥에 잡아두는 건 자동차를 운전하는 행위다. 원심력은 중력이 없는 우주에서도 사람이 바닥을 디딜 수 있게 해주는 동력원이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동차를 운전하는 일은 자동차와 함께 나아감으로써 자신이 살아가는 일상, 대지에 붙들리는 기억에서 나를 벗어나게 해준다. 그러니 가후쿠에게 운전사가 배정되었을 때 거부감을 내비친 것은 몹시 당연하다. 운전이라는 행위에서 가속의 감각은 앞좌석에 앉을 때 더욱 생생하니 말이다. 따라서 가후쿠가 미사키에게 “이렇게 편안한 운전은 처음 느껴본다.”고 말하는 장면은 중요하다. 꼭 성교(운전)를 거치지 않더라도 오르가즘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을 가후쿠는 깨닫는다. 바꾸어 말해 섹스가 아니더라도 그와 아내 사이에는 유대가 성립할 수 있었으며, 이는 아내의 외도가 역설적으로 가후쿠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은 아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사실 두 사람 다 배우라는 점에서 섹스도 연기하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기도 하다. 가후쿠의 실책이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가후쿠는 머리로 이해해야만 비로소 보이는 게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고, 이는 즉 유물론이 아니라 형이상학에 가까운 것으로, 섹스를 하기에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기에 섹스를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그에게 사랑이란 어떠한 행위의 발단이었고, 기억의 원형이었으며, 삶의 모든 것이었던 셈이다. 


이후 대강의 사건들이 지나가고 나면 가후쿠는 미사키에게 “조용하게 생각할 수 있는 곳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한다. 여기서 둘 사이에 뭔가 일어날 것 같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가후쿠가 미사키를 처음 만났을 때 이미 “젊은 여성이라서 꺼려지냐.”고 물었고, 고지와의 술자리에서 가후쿠는 “사랑하지 않는다면 섹스 같은 건 안 한다.”고 답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후쿠가 미사키와의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이 물음에 답하려면 두 사람의 여정을 따라가보아야 한다. 첫 번째 터널, 두 번째 터널을 지나고 나면 미사키가 어린 시절을 보낸 마을에 도착한다. 검은 무대 위에 하얀 조명을 받아 서 있던 도입부와는 반대로, 이곳에서 가후쿠는 하얀 무대에 서 있는 검은 인간처럼 보인다. 고도를 연기하던 가후쿠는 고도를 눈으로 보아야만 비로소 고도가 있음을 믿는 처지에서 벗어나 “고도를 믿기에 진정으로 그를 볼 수 있는 상태”에 접어든다. 말하자면 이제 그에게 섹스는 형이상학이 아니라 유물론이다. 상대방을 믿기에 섹스를 할 수 있지 섹스를 해서 상대방을 믿는 게 아니다. 즉 섹스는 열림과 닫힘으로 기능하는 문이지 서로를 대지에 바로서게 하는 중력이 될 수는 없다. 가후쿠의 불행은 그런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가후쿠는 아내가 잃어버린 것을 자신이 채워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아내의 외도를 모른 척했다. 그러나 아내에게 그 외도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기억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세상과 통하게 함으로써 끝없는 추락의 감각을 맛보려는 것이었다. 


머리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섹스는 우리 생각만큼 우연을 따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상대방에게서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볼 때 그곳에는 믿음이 생겨난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연극 대본이 담긴 테이프를 돌려 듣는 가후쿠의 모습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건 거기에 죽은 아내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는 점이 아니다. 이 테이프는 정해진 지면이 있다는 점에서 아직 쓰이지 않은 것도, 앞으로 쓰여야 할 것도 담지 못한 현재만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한 점이 가후쿠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와 닮았다. 자동차는 분명 현실 안을 움직이지만 자동차 안에서 우리는 그걸 느끼지 못한다. 자동차는 하나의 운송 수단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테이프는 가후쿠에게 있어 기억을 운송하는 수단이었고, 반대로 말해서 가후쿠는 기억을 타고 다닐 생각만 했지 그게 무엇인지는 제대로 보려 하지 않았다. 우리가 자동차를 두고서 때때로 그게 하나의 공간이자 장소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잊듯이, 카세트테이프도 그가 이 ‘현재’를 잊지 못했다는 걸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즉 자동차가 하나의 무빙 이미지라면 테이프 또한 하나의 무빙 이미지다. 둘 사이에는 그들이 횡단하는 게 공간/시간이라는 차이밖에 없다. 가후쿠의 태도가 변하는 시점은 이 두 가지 오브제가 단순한 호크룩스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을 때이다. 자신과의 섹스에서만 들려주었다고 생각했던 이야기는 정작 다른 남자와의 관계에서도 이어졌고, 이는 아내의 삶에서 가후쿠도 결국 하나의 정거장에 불과할 뿐이라는 점을 의미했다. 그녀는 움직이는 이미지였지 고정된 이미지가 아니었고, 따라서 기억 속에 멈춰있을 리가 만무했을뿐더러 오히려 멈춰있는 건 가후쿠 자신이었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만이 답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은 사내의 이야기다. 몸과 자동차는 우리를 운반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그러니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에 집착하던 가후쿠가 정작 몸을 운전하는 것에는 두려움을 내비치던 것은 꽤 이상한 일이었다. 설사 그게 배역에 대한 과도한 이입 때문이라 하더라도 무언가를 운전하려면 눈앞과 옆의 시야를 제대로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주하지 않으면 사고가 나니 말이다. 어쩌면 가후쿠가 연극을 두려워했던 건 바로 그러한 운전의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 멀리서 다른 사람들이 연기하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확실히 흥미롭다. 그러나 정작 그러한 연기를 운전해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 가후쿠는 두려움에 빠진다. 내 몸을 주체 못 한다는 점이 겉으로 드러나면 결국 아내와의 섹스 또한 그런 부류의 미성숙함이 되어 버린다. 어쩌면 그래서 아내는 외도에 빠졌다고 그는 생각한다. 가후쿠는 아내와의 사이에 있었던 슬픈 기억이 아니라 자신이 아내를 만족해주지 못하는 게 바로 이들 사이의 결핍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후쿠는 아내가 외도하는 것을 암묵적으로 용인함으로써 이 땅을 밟고 서 있는 일을 외면했고, 자동차를 운전하는 일은 그런 외면의 연장선이었다. 자동차를 타고 달리면 마치 붕 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드니까, 또 실제로 자동차에 탑승한 인간은 어느 정도 지면을 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러나 이 자유로움은 결코 무중력이 되지 못한다. 요컨대 미사키가 가후쿠에게 알려준 건, 무언가를 잊지 않기 위해 운전대를 잡을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즉, 오히려 운전이야말로 가장 중력에 가까운 행위다. 이제 가후쿠는 무대에 올라 몸을 운전하고, 침대에 누워 섹스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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