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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an 10. 2022

무대의 이전과 이후에 무엇이 있었나


1.


남자는 자동차 운전을 좋아한다. 다만 이는 자의에 의한 것은 아닌 듯 보인다. 이 남자가 자동차 운전을 좋아하게 된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먼저 영화의 도입부, 게슴츠레하고 어둑어둑한 방 안에서의 섹스 장면이 지나고 나면 남자는 일상으로 돌아간다. 함께 섹스하던 여자가 아내라는 걸 알고 나면 이 장면은 알콩달콩한 부부 사이처럼 보인다. 그러나 외출했던 남자가 예상치 못한 일정 변경으로 다시 집에 돌아오자 그곳엔 아내의 외도가 있다. 남자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지만 그는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온다. 그는 집에 들어오며 자동차를 댔던 주차타워로 향한다. 좀 전에 제시했던 쇼트를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이행하는 하마구치의 화법은 아마도 방향성을 말하는 것이리라. 말과는 달리 자동차는 후진할 수 있는 탈 것(이자 언어)지만 하마구치는 자동차를 그렇게 표현하지 않는다. 이 사내는 첫 번째로 고개를 돌리고, 두 번째로는 자동차의 머리를 돌려 왔던 길로 다시금 빠져나온다. 그리고 다시금 도로, 공항 옆의 호텔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된 남자는 아내와의 화상통화에서 자신이 본 것을 말끔히 잊어버린다. 마치 발길을 돌려 빠져나오던 현관문에서처럼, 그는 후퇴가 아니라 고개를 돌려버리며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거나 고백하기를 외면해버린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무언가를 외면하는 남자의 이야기이자, 그의 뒤를 따라가는 영화다. 영화는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의 아내가 죽고 난 직후에 제목과 오프닝 크레딧을 띄움으로써 여태까지의 이야기를 서막으로 만든다. 여기서 서막이라는 표현은 가후쿠의 직업인 연극과도 관계가 있다. 연극에서 서막은 앞으로의 이야기를 건설하는 데 있어 가장 밑단이 되는 부분이다. 심리학으로 치면 에고(Ego)이며 건축학으로 치면 철근 콘크리트다. 즉 연극에서 서막은 그 위에 모든 것을 쌓기에 역설적으로 자신은 바뀌지 못한다(또한 서막은 연극에 있어 본막의 서두에 해당하기에 암묵적인 합의처럼 취급되며, 관객은 그러한 서막이 있었다는 사실을 대외적으로는 함구해야 한다). 그렇다면 가후쿠에게 서막은 무엇이었을까. 답은 명료하다. 어느 아침 날, 출장길에 오른 가후쿠에게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온 아내는 “할 이야기가 있으니 집에 오면 대화 좀 해.”라고 말한다. 그러나 가후쿠는 아내의 외도를 목격하던 현관문에서처럼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그 주변을 빙글빙글 맴돈다. 그렇게 아내가 잠들었다고 생각될 무렵, 집에 들어간 가후쿠는 아내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쓰러져있는 걸 보게 되고 끝내 그녀는 돌아오지 못한다. 말하자면 그녀의 대답은 이제 에드가 엘런 포의 잃어버린 편지처럼, 수신인을 잃고 영영 떠도는 메시지가 되어버렸다.


자크 데리다가 라깡이 인용한 포의 편지 일화를 두고서 자기만의 해석을 덧붙인 일화는 유명하다. 구축 없이 해체만이 있고, 해체 안에서 모든 의미가 생겨난다고 말했던 데리다에게 편지는 시작이자 도착인 것, 즉 단자(Monade)였다. 라이프니츠는 단자에 대해 “오직 창조를 통해서만 생겨날 수 있고 파멸을 통해서만 사라질 수 있다.”고 말했는데,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가후쿠가 운전하는 자동차는 거진 단자와 비슷하거나 동일한 역할을 한다. 이 글에서 나는 자동차가 왜 단자이며, 이것이 영화 안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탐구하려 한다. 먼저, 가후쿠의 자동차는 그가 총괄하는 연극 무대와 동일한 장소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하마구치도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지만 자동차와 연극 무대는 가후쿠가 스스로 운전대를 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인물의 대사를 복기하지만 정작 그 자리에 자신의 역할이 빠져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이를테면 이런 묘사가 가능하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건 운전자이나, 운전하는 순간만큼은 운전자와 자동차는 한몸이라고. 연극 감독도 마찬가지다. 연극 무대에 오르는 건 배우지만 연극을 하는 순간만큼은 감독과 무대가 한몸이다. 벤야민이 바그너를 인용하며 썼던 ‘총체예술(Gesamtkunstwerk)’이라는 말을 기억한다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잘 알 것이다. 연극 감독의 무대 연출이 배우들을 무대의 일부로 만들 듯, 운전자에겐 동승자를 자동차의 일부로 만드는 힘이 있다. 


2. 


<드라이브 마이 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커다란 자동차라 해도 무방하다. 예를 들어 라이프니츠는 단자를 두고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 바 있다. “운동은 오직 이전 운동에서 자연스럽게 야기될 수 있듯이 지각도 오직 이전 지각에서만 자연스럽게 야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훗날 현상학의 기초 원리가 된 이 테제는 우리의 지각이 항상 무언가에서 무언가로 흐르고 있음을 지적한다. 영화 또한 마찬가지로, 영화는 그 시작과 끝이 정해진 듯 보이지만 사실은 지면의 한계에 봉착해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개인 자동차와 자유에 대한 이념이 보급된 미국의 70년대에 등장한 드라이브 영화를 떠올려볼 수 있다. 이 영화들에서 묘사되는 고속도로와 그 위를 달리는 자동차는 그 시작과 끝이 모호하게 묘사된다. 그러니까 마치, 어딘가에서 왔다가 다시금 어딘가로 떠나가는 듯 보인다. 특히 1991년의 <델마와 루이스>의 마지막 장면은 절벽으로 떨어지는 자동차를 프리즈 프레임으로 처리함으로써 이들의 시간을 자체적으로 멈춰버리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가 묻게 되는 건 그녀들의 생사라기보단 이 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질지에 관해서다. 영화 결말에서의 정지 상황이 스크린의 한계로 인한 것이라면, 영화 밖에서 그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즉 이들의 여정이 영화 밖에서 시작되어 무대에 올랐다면, 그리고 영화 밖으로도 이어진다면, 무대[자동차]라는 건 결국 찰나의 드러냄[단자]일 뿐인 건 아닐까?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 영화의 차이로 이를 설명해보자면. 실사영화가 스크린의 안과 밖으로 작동하는 반면, 애니메이션 영화는 그 세계가 철저히 안으로 제한된다. 바꾸어 말해 실사영화의 러닝타임은 극 중 인물이 무대에 오르내리는 시간을 뜻한다. 키아로스타미의 <텐>이나 짐 자무시의 <지상의 밤>과 같은 영화에서 자동차는 수많은 이들이 오르내리는 이동식 무대가 된다. 이로 인해 자동차는 개개인의 이야기를 담는 ‘그들 각자의 영화관’이 되고, 이는 마치 영화사에 초기에 있던 유랑극단을 떠올리게 한다(베리만의 초기작 <나무톱밥과 금속 조각>이 다루는). 축제 장소마다 종종 등장했던 초기 영화는 스크린 내적으로만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도 계속해서 이동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가후쿠에게 자동차를 운전하는 일이 왜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가후쿠가 자동차에 탑승할 때 그는 무대에 오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무대에서 그는 아내의 목소리로 이루어진 연극 속 이야기를 경험한다. 어떤 면에서 서사 밖의 목소리인 환청(acousmatique)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리허설은 자동차를 연극무대로 이해할 때 비로소 가후쿠의 세계를 ‘현실’로 만들 수 있다. 무대 밖에서 무대 위로 오르는 게 자동차에 탑승하는 행위라면, 자동차를 운전하는 일은 단지 러닝타임을 겉으로 드러낼 뿐 그 바깥의 세상이 ‘없음’으로 치부됨을 뜻하지는 않는다. 가후쿠에게 자동차는 결코 도피수단이 아니며 오히려 현실을 드러내는 장소 그 자체다. 


라이프니츠가 말하는 단자 개념은 세계 위에 드러난 통각으로, 일종의 버튼처럼 그 자체로 있기만 하는 게 아니라 여러 감각의 종합을 통해 세계 안에서 드러남(Aware)을 실현한다. 예컨대 단자는 시작 이전, 끝 이후에도 세계가 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인지의 종합(총체예술로서의 연극Gesamtkunstwerk이라는 점을 다시금 떠올리게 되는)으로 세계 안에 드러난다는 점에서 영화와 닮았다. 영화는 실존하는 세계에 있던 일의 일부를 채록한 형태이며, 이러한 점은 영화라는 매체의 근간을 이룬다. 이 맥락에서 가후쿠의 자동차는 이동하는 영화, 즉 무빙 이미지이면서 그와 동시에 가후쿠를 드러내는 장소이기도 하다. 가후쿠는 자동차 안에서만 온전히 ‘가후쿠’로 있을 수 있다. 바깥에선 자신을 감독, 선생님, 등으로 부르는 여러 잡음이 넘쳐나나, 자동차 안에서만큼은 나 자신으로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가후쿠는 자신의 대사를 제외한 모든 파트를 아내의 목소리로 듣는다. 겉으로는 무대를 총괄하기 위함이라는 핑계를 대지만 가후쿠의 이 행동은 아내의 질문에 답하려는 것에 더 가깝다. 못다 한 이야기가 있다는 아내의 말을 외면했던 가후쿠에게 그날의 행적은 뼈저린 후회로 남았을 것이다. 그래서 가후쿠는 정면을 응시해야만 하는 운전 상황에 자신을 놓는다. 운전할 때는 고개를 돌리거나 하는 일이 불가능하며, 이는 곧 ‘대답을 해야만 하는’ 상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3.


그러나 가후쿠는 물음에 답하지 못한다. 이 불응이 가후쿠의 섹스 문제와 연결된다. 만약 자동차 안에서 들려오는 아내의 목소리를 ‘아쿠스메트로틱한 것’으로 본다면, 미셸 시옹의 말처럼 그녀는 자신의 육체를 찾아 헤매는 영혼과도 같으며 이러한 가정은 가후쿠의 불안과 고뇌를 가속한다. 다른 한편 이 목소리가 떠도는 자동차는 가후쿠에게 있어 죽은 아내의 육신과도 같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자동차에 탑승하는 행위는 죽은 아내와의 섹스와도 같다. 그러므로 고지(오카다 마사키)가 가후쿠에게 “그런 직업이면 여자가 충분히 꼬일만하지 않느냐”고 묻는 일도, 미사키(미우라 토코)를 처음 차에 들일 때 대뜸 당황하는 일도 거진 여자 문제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가후쿠는 이미 자동차를 타는 행위로 성욕을 대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성욕의 충족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우리는 가후쿠가 이미 한차례 자식을 잃은 적이 있다는 걸 떠올려보아야 한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사랑의 결실은 자식이다. 그리고 그 결실을 잃어버린 부부는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헤어지는 일이 잦다. 가후쿠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식이 죽은 후로 아내와의 관계는 데면데면해졌고 그런 모호한 분위기로 17년을 보냈다. 이런 분위기 속에 가후쿠는 헤어지지도, 자식을 새로 낳지도 못하는 이상한 일상을 보낸다. 말하자면 그는 베케트의 「고도」처럼, 무언가를 기다리지만 그게 뭔지는 모르는 채 이상한 일상을 보냈다. 


무대 밖에서 그는 그저 남편에 불과하지만 무대에 오를 때 그는 바냐가 된다. 아내가 죽은 후부터 「바냐」는 공백의 기표였지만, 그 공백은 존재의 무(無)를 뜻하는 게 아니라 쉴 새 없이 이동하는 시간 속에 자신의 인지가 시작되고 무대의 막이 오르는 무빙 이미지, 자동차였다. 이는 아내를 잃기 전에 가후쿠가 베케트의 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기하던 장면과 대조되는 것으로, 들뢰즈가 『소진된 인간』에서 비평했듯이 「고도를 기다리며」는 무대를 포함한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결정체 이미지(배아라는 표현을 태아로 치환하여 읽을 수도 있)다. 들뢰즈에 따르면 극 중에서 이들이 기다리는 건 고도라는 인물이 아니라 그가 도래할 시간, 공허하게 이어지는 시간에 통각을 부여함으로써 이전과 이후의 시간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들뢰즈의 결정체 이미지가 라이프니츠의 단자론에서 영향받았다는 점에서, 단자론을 피해 갈 수 없음이 다시금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가후쿠가 외면했던 건 아내이기도 했지만 이전과 이후라는 시간상이기도 했다. 가후쿠는 자신이 마음속의 아내를 직면했을 때 벌어질 시간의 뒤틀림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가후쿠는 연극무대에 서기를 거부하고 그 대안으로 자동차에 올라탄다. 가후쿠에게 자동차는 단순히 아내와의 추억이 깃들기만 한 물건이 아니라 하나의 단자로 기능한다. 자동차는 지나간 시간과 도래할 시간 모두 바깥에 자리하는 공간으로 고도에게는 무대, 영화 전체에서는 오프닝과 엔딩 이전의 지속되는 현실을 뜻한다. 즉 이곳은 들뢰즈의 말마따나 소진과 재-시동의 장소인 셈이다. 


영화와 연극의 규칙 중 하나는, 무대의 밖은 없고 무대를 바라보는 나 자신만이 있음을 가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자동차에 올라탄 순간 이들의 공간은 바깥세상과 격리된다. 그런 점에서 자동차에 올라 연극의 전반적인 대사를 점검하는 가후쿠의 모습은 무대 위에서의 리허설과 닮았다. 만약 영화를 격리된 시간, 현실 안에서 이동하는 별개의 공간으로 본다면 여기서 연극의 방법론을 떠올리는 건 무리가 아니다. 배우라는 존재가 무대 밖에서 위로 올라올 때 그 존재는 변화를 겪는다. 때때로 배우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배우가 다시금 개인으로 돌아갈 때, 그는 자신의 변화를 취소하지 않는다. 무대에 올랐던 이가 개인으로 돌아오는 법이란 지난 행적을 지우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 즉 기수를 돌려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요컨대 배우의 연기는 켜짐과 꺼짐이라는 0과1의 이진법이 아니다. 만약 사람이 딱 잘라 구분될 수 있다면 배우는 더는 연기를 할 수 없다. 연기는 연기를 하는 주체가 있을 때 비로소 성립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가후쿠가 겪는 괴리감은 바로 그 연기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무대 위의 배우는 무대를 통해서만 태어나는 존재는 아니다. 배우는 무대 밖에서도 여전히 배우다. 이 중요한 사실은 무대를 내려온다고 해서 연기가 끝나는 건 아니라는 점을 말해준다. 하지만 가후쿠는 무대를 내려오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나버릴 것처럼 여겼고 그래서 그는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끝이 난 후를 산다는 걸 두려워했기에 말이다. 


4. 


매거진 필로의 21호에 수록된 하마구치의 대담 「’끝이 난 후를 살고 있다’는 심정」에서는 무대를 설명하는 두 가지 중요 키워드가 나온다. 첫 번째는 하마구치가 “끝이 난 후를 살고 있다”고 말하는 대목이고, 두 번째는 미우라 데쓰야가 ‘한차례 끝나버린 인물’을 언급하는 대목이다. 전자의 경우는 이른바 파국을 맞이한 시대가 모든 것의 끝이 아닌, 어떤 이야기가 시작되려는 작금을 의미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다른 한편 데쓰야가 말하는 인물상은 들뢰즈의 맥락에서 바로 그 전자를 수식한다. 자신의 과거에 속박되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인물, 이는 마치 고도가 온다는 확신만으로 자리에 남은 이들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이런 맥락에서 <드라이브 마이 카>는 이동하는 세계를 살아가는 정지된 인물을 보여주는 듯 보인다. 자신의 세상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고 그곳에 시간은 멈추었는데, 그럼에도 이 세계는 줄곧 살아가고 있다. 가후쿠가 종말을 맞이했다고 생각했을 때, 진정으로 멈춘 건 자신의 세계였을 뿐 살아가는 세계는 아니었다. 그렇게 보면 가후쿠가 자동차에 집착하는 것도 이해된다. 멈춘 존재로 하여금 세계의 속도에 어울릴 수 있게 해주는 게 바로 자동차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 자동차가 무대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연기를 한다는 건 타인의 정체성을 뒤집어쓴 채 세계를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후쿠에게 연극은 정체성을 타고 세계를 이동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이동수단이었고, ‘살아가고’ 싶지 않은 가후쿠에게 무대에 오르는 일은 그래서 거부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해볼 수 있는 문제 제기란 ‘왜 하필 자동차에서만 연기를 하는지’다. 위에서 말했듯 자동차가 연극무대가 되어야 한다면, 왜 자동차여야만 했는지가 의문으로 남는다.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을 뿐이라면 집에서도 독백쯤은 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문제는 ‘연극 무대를 감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그런 연극에 직접 들어가고 싶지 않아 하는’ 그의 심리에 실마리가 있다. 가후쿠가 아내의 외도를 목격했던 장소는 주로 집이었고, 그러니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자동차는 이러한 맥락에서 도드라지는 외부다. 한편으로 연극인인 가후쿠에게 무대가 일종의 집에 해당한다는 점도 고려할 수 있다.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말은 무대에 서기 싫다는 말과도 같다. 왜냐하면 무대에 오르면 연기를 해야 하고, 이는 마치 그들 부부의 사랑이 연기였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부부생활을 하는 게 아니라 부부 연기를 하고 있는 아닐까.”라고 되묻는 가후쿠의 고민은 결국 무언가를 연기한다는 것에 관한 주저와 두려움이다. 끝이 난 후를 살아가는 가후쿠가 이 결혼 생활을 부정하는 순간 무대는 무너져버린다. 연극인인 그에게 무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건 단순히 연기에 대한 선호의 문제에 불과하지 않으며, 다시금 연기를 하는 순간이 바로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말하자면 가후쿠에게 삶은 연기 그 자체였고 이는 영화 전반의 역설이 된다. 운전을 시작한 이상 핸들을 놓을 수 없는 것처럼, 태어난 이상 연기를 멈출 수 없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모든 인간이 연기하는 존재라 말한다. 여러 언어가 한데 어울리는 연극 무대는 그들의 언어가 인간의 어떤 본성을 드러내는 ‘수단’에 불과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예컨대 언어란 인간이 무언가를 연기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순수한 의미에서의 인간은 언어 없이도 서로 소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가능하다. 특히 이유나(박유림)의 수화는 구어가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소통에 가깝다. 언어 이전에 몸짓이 있었고, 이는 무언가를 거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표현의 순수한 형태에 가깝다. 이 점을 짚고 넘어가면 영화의 도입부에 나오는 섹스 장면이 암시하는 바는 명백해진다. 통상 ‘몸의 대화’로 일컬어지는 섹스는 언어 이전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가장 내밀한 소통으로 이해된다. 헌데, 그런 섹스가 거짓된 감정으로 이루어졌다면 어떨까. 수많은 남성과 섹스를 하는 아내를 보며 가후쿠가 떠올린 건 신체의 고유성이다. 만약 하나의 신체에 하나의 감정만이 가능하다면, 아내가 몸을 섞는 이들 중에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는 누구인가. 어쩌면 자신은 섹스 파트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한다. 동시에 그는 연기라는 행위에 회의감을 느낀다. 이미 우리는 살아가며 무언가를 연기하고 있다는 생각, 그리고 이 연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게 인간이라는 존재의 근본이라고. 가후쿠가 이런 생각을 했을 때 무대는 벗어날 수 없는 삶의 제한이 되어버린다. 무대에 서는 일이 곧 자기 세계의 한계처럼 느껴지고, 이곳을 더는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 그는 후퇴를 택한다.


5.


영화가 내린 결론은 신체와 표현은 고유하지 않다는 점이다. 가후쿠가 「바냐 아저씨」의 등장인물을 다양한 외국어 화자로 구성했다는 점이 그렇다. 해외 뮤지컬이나 오페라, 희곡을 국내에 상연할 때 현지 언어를 사용할 것인지 아니면 로컬라이징을 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사례가 이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무언가를 표현하고 드러내는 일은 언어에서 비롯되는 걸까, 아니면 사람의 몸짓에서 비롯되는 걸까. 어느 쪽이든 이것이 총체예술이라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지만 이러한 생각은 우리의 몸도 결국 하나의 운송수단에 불과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가후쿠에게 자동차를 타는 일이 단순한 운송수단에 불과하지 않은 건 그 때문이다. 가후쿠가 자동차에 탔을 때 그는 일종의 신체에 탑승한 것이다. 연기자에게 신체가 영혼을 운송하는 하나의 수단에만 불과하다면, 가후쿠에게 자동차 또한 자신을 운송하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따라서 가후쿠가 자신의 자동차에 운전사를 들이고 싶지 않아 했던 건 몹시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신체를 주도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건, 그리 좋지 않은 경험을 안겨다 줄 게 뻔하니 말이다. 그리고 이는 자신의 집에 누구를 맞이할 것인지의 문제보다는 자신이 무대를 주도할 수 없다는 감독의 관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만약 그가 한 명의 연기자였을 뿐이라면 누가 자동차를 운전던 별 다른 상관은 없었을 테다. 무대는 모두에게 열려 있고 누구도 올라올 수 있다. 반면 무대를 총괄하는 입장일 때 그에겐 자동차를 운전해야 할 의무가 있다.


『소진된 인간』에서 들뢰즈가 말하는 게 그렇다. 고도를 기다리는 이들에겐 운명을 조종할 힘 같은 게 없다. 그들은 단지 무대 위에 올라 무대 밖의 무언가를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건 영화의 프롤로그에서 그가 「고도」를 연기했다는 점이다. 고도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가후쿠 또한 아내에게서 듣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러나 정작 아내가 그걸 입 밖으로 꺼내려 할 때 가후쿠는 그런 현실에서 도망쳐버렸다. 정황상 가후쿠의 아내가 하려던 말은 이혼이었을 것이다. 둘 사이에 있던 아이가 죽은 지 17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들이 이혼하지 않을 이유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둘 사이는 겉으로 보기에 화목했지만 사실은 그런 화목함을 연기하고 있을 뿐이라고 가후쿠는 의심 중이었다. 그래서 가후쿠는 언젠가 이 관계가 끝날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정작 그 끝을 제대로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가후쿠는 고도를 기다리는 처지이면서도 정작 고도를 마주하고 싶지는 않아 했다. 이 양가적인 감정은 아내의 죽음 이후 그가 왜 자동차에 집착하게 되었는지와 무대에 오르는 걸 싫어하게 되었는지 모두를 설명해준다. 「고도」가 묘사하는 건 고도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순간의 무한한 연장이다. 즉 사실 고도는 와서는 안 되는 존재이다. 마찬가지로 가후쿠는 자신이 맞이해서는 안 될 순간을 맞이했고 이 순간 무대는 끝나버렸다. 이제 가후쿠는 “끝이 난 후를” 살고 있고, 이미 고도가 와버린 무대에서 극은 더는 진행되지 못한다. 시간이 멈췄고, 그 안에서 자동차만이 움직인다. 


시간은 멈췄다. 정확히 말해 가후쿠가 그렇게 했다. 끝이 난 후를 살아간다는 게 어떤 감정인지는 <노매드랜드>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자동차 안에서 보이는 바깥 풍경은 다들 비슷비슷해서 당장에 느껴지는 속도감 말고는 별 다른 진전이 없는 듯 느껴진다. 그러나 여기서 멈춰있는 건 정작 세상이 아니라 운전하는 사람 본인이다. 어떤 순간을 기다리던 사내는 이제 그 순간에 줄곧 머무르며 무언가가 다시 시작되기만을 기다린다. 어쩌면 그는 이제 고도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고도 본인이 되려 하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드라이브 마이 카>는 ‘모든 것을 소진한 사내가 연극 무대에 올라 도래할 무언가를 기다리는’ 영화다. 이 사내는 마치 불사조처럼, 모든 걸 소진했지만 그 안에 새 시작을 잉태한 존재이기도 하다. 들뢰즈가 카프카를 두고서 썼듯이 “감금은 하나의 바깥으로 되돌아가고, 감금된 것은 다름 아닌 바깥이다.” 가후쿠는 자동차에 올라탐으로써 그 안에 스스로를 유폐하기를 택하는 듯 보이지만, 정말로 감금된 것은 그가 살아가는 세계였다. 시간이 멈춰버려 더는 이야기라는 게 진행되지 않는 세상은 기다림만으로 무한히 연장되는 세계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결국 언제 시작되는지가 문제일 뿐 언젠가는 다시 시작되기 마련이다. 운전석에서 내려와 관객석에 앉은 가후쿠는 그동안 자신이 감금해두었던 게 무엇인지를 스스로 보고, 듣는다. 그리고 그가 가두었던 바깥은 이제 내실이 되어 안정적인 삶의 토대가 되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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