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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Dec 29. 2021

판타지는 현실이 없다면 성립하지 않는다

<지옥>(2021)


1.

우리는 <지옥>을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었다. 꼭 그래서 하는 이야기인 것만은 아니지만, <지옥>이 보여주는 풍경은 어딘지 모르게 넷플릭스의 성격과 닮아있다. 이를테면 넷플릭스란 과연 어떤 플랫폼인지를 먼저 물을 필요가 있다. 최근 넷플릭스를 두고 벌어지는 ‘콘텐츠 전송료’ 논란을 떠올려보자. 콘텐츠 전송료라는 건 넷플릭스가 인터넷 트래픽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따라서 인터넷 사업자 측에 ‘통행료’ 개념의 요금을 납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방송 사업자들이 전파 사용료를 납부하듯, 넷플릭스도 일종의 ‘자체 프로덕션’을 가진 방송 사업자로 보아야 하기에 ‘전파 사용료’ 명목의 세금을 걷겠다고 말이다. 이와 유사한 논란이 다른 나라들에서 벌어진다. ‘티브이 세금’이 그러하다. 이 논란의 골자는 넷플릭스를 ‘티브이’로 보아야 할 것인지에 과세 여부가 결정된다는 점에 있다. 먼저, 과세하는 쪽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티브이 ‘구독’을 끊고 넷플릭스를 ‘구독’하는 이들에게 넷플릭스는 하나의 ‘티브이’로서 여겨지므로, 넷플릭스는 티브이 세금을 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에 대해 넷플릭스는 “자기들은 티브이가 아니라 OTT 사업자일 뿐”이라고 항변한다. 자신들은 티브이에 적용되는 규범을 따를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 OTT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로 보아달라고 말한다.

이 두 가지 사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넷플릭스가 기존 세계의 바깥에 자리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넷플릭스를 해석할 학문적인 정의도, 법적으로 규제할 장치도 마련하지 못했다. 따라서 넷플릭스를 두고 무언가를 논할 때는 기존에 있던 것을 토대로 이를 설명할 수밖에 없다. 현장이 규범보다 더 빠르게 변화하는 상황이라면 규범은 부랴부랴 뒤를 쫓아올 수밖에 없다. 이러한 지체의 현상이 <지옥>의 안팎으로 자리한다. <지옥>은 어느 날 지옥의 사자들이 나타나고, 이들이 죄인을 심판한다는 플롯으로 진행된다. 이를 ‘고지’라 하는데, 대상자의 앞에 천사가 나타나 “어느 날 몇 시에 너는 지옥에 간다”고 말하는 식이다. 작품 안에서의 세세한 대립은 ‘지옥에 간다’는 게 무슨 뜻인지, 그리고 ‘지옥’에 가는 이들을 선별하는 기준이란 무엇인지, 이하의 두 가지 질문을 바탕으로 진행된다. 허나 거시적으로 볼 때 이 문제는 “기존의 규범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의 등장”이기도 하다. 이른바, ‘고지’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기존에 있던 규범에서 최대한 비슷한 사례를 모아봐야 한다는 의견이 있을 수도, 혹은 완전히 새로운 현상이므로 이를 바라볼 새 규범이 필요하다는 입장이 있을 수도 있을 테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옥>은 규범에 대한 드라마라 할 수 있다. <지옥>은 고지라는 현상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규범 해석의 문제를 다룬다. 첫 번째는 <지옥>의 1부에서 정진수 의장을 놓고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이다. <지옥>의 1부에 해당하는 1~3화에서 정진수는 자신이 선지자임을 밝히면서, 사람들은 아직 신을 받아들인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고지를 둘러싼 사람들의 의식을 변화시키기 위해 모종의 무대를 마련하고, 그 위에 진경훈 형사를 세운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그는 ‘고지’를 둘러싼 여러 규범이 사람들의 의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편이다. 정진수가 말하길, “사람들이 고지에 아무런 규칙이 없다는 점을 알게 되면 세상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지를 신의 뜻으로 여기면서, 그것이 우리의 세상을 더 낫게 만들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말하자면 정진수는 고지를 두고서 기존의 규범, ‘인간의 상식’을 기준 삼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2부에 해당하는 4~6화에서 보여주는 판타지의 세계이다. 판타지(Fantasy)라는 건 현실(Reality)의 물밑으로 작동하므로 어디까지나 현실을 필요로 한다. 결국 <지옥>의 여러 사건들이 현실적인 문제와 관계로 얽혀있다 한들, 이는 판타지를 보여주는 것일 수밖에 없다.

2.

이에 따르자면, 고지라는 판타지는 기존의 규범을 토대로 해석해야 마땅하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은 작중의 2부에서 송소현의 아기가 고지를 받는 사건이다. 송소현의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고지를 받았고, 이를 토대로 2부의 사건이 진행된다. 논쟁의 핵심은 이렇다. 새진리회가 세운 고지의 규범에서는 ‘원죄’라던가 ‘업보’라는 말이 없었다. 모든 죄인은 살아서 지은 죄를 토대로 살아서 지옥에 간다. 헌데 신생아의 경우는 그런 원죄를 지을 새도 없었으므로 새진리회가 말하는 ‘고지’의 규범이 틀렸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대목에서 ‘현실’의 죄를 토대로 ‘판타지’와도 같은 고지 현상을 해석하던 새진리회의 논리는 무참히 깨어진다. 신생아의 고지가 생중계되는 것을 막으려는 새진리회는 판타지가 현실에 우선하게 될 때 현실은 그러한 판타지에 짓밟힐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그에 대응하는 소도측의 논리는 보다 희망적이다. 판타지가 현실에 우선한다면 그것은 ‘규범 밖’의 일이 될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규범을 만드는 건 우리들 인간이다. 따라서 우리들 인간은 고지를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이것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를 차분히 따져 보아야 한다. 신의 규범이 인간 세계에 적용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신의 규범을 막연하게 따르기만 할 게 아니라 그러한 규범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를 논해야 한다.

우리가 넷플릭스의 <지옥>을 통해서 던져볼 수 있는 물음이란 바로 그렇다. 현실 안에서 판타지는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으며, 판타지를 통해 바꿀 수 있는 현실이란 무엇일까. 누군가는 에리카 발솜의 「여성적 응시」 를 언급할 수도, 혹은 오오바 츠구미의 만화 <데스노트>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전자의 경우는 남성의 시선으로 구획된 영상 매체를 여성의 판타지적 시선을 통해 다시 바라보고, 이를 토대로 새 규범을 건설해 나가는 일을 뜻한다. 후자의 경우는 현실의 규범에서 벗어난, 신적 도구인 ‘데스노트’를 이용해 신화적 살인을 저지르는 고등학생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두 가지 사례는 맥락은 전혀 다르지만 현실 규범으로 해석할 수 없는 문제를 그 바깥에서 풀이법을 찾고, 이를 다시금 현실로 들여온다는 공통점이 있다. 전자가 정신분석학적인 판타지라면 후자는 신화적인 판타지라 할 수 있다. 이 주제에 대해서도 해볼 수 있는 이야기가 많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눈여겨본 지점은 “현실과 판타지가 합쳐질 때”라는 소주제다. 이 소주제는 대개, 현실과 판타지 양쪽을 오가는 주인공이 양쪽 세계의 경계가 무너져내렸을 때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는지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 있다. 완전히 다른 판타지 세계로 넘어가는 게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던 중에 그 안에 판타지가 닥쳐옴으로써 벌어지는 모종의 사건들을 다룬다.

즉 현실과 완전히 다른 규범이 적용되는 곳이 아니라 “현실의 규범에 어떤 사건이 벌어짐으로써 변화하는 규범의 양태”를 다루는 게 이 소주제다. 이 소주제에서 우리는 ‘규범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된다. 기존의 규범을 토대로 새로운 규범을 받아들인다는 소극적 개화가 있을 수 있고, 기존의 규범을 전복하고 새로운 규범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적극적 개화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네이버 웹툰에서 연재되는 <열렙전사>는 현실과 양립 관계에 있는 판타지 세계를 마치 게임에 접속하듯 오간다는 설정이다. 그러나 후반부로 가면 악당의 술수로 인해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가 무너져버린다. 작품은 현실 세계에서 충족될 수 없는 욕구를 판타지 세계의 법칙을 통해 충족시키지만, 둘 사이를 분리하던 경계가 무너지고 나면 이러한 법칙은 역설적으로 현실 세계의 규범을 벗어나 버린 탈주선으로 작동해버린다. 즉 현실성이라는 ‘규범’에서 판타지 세계는 모종의 해방구로 여겨졌지만, 두 세계가 합쳐지고 나면 판타지는 현실을 망쳐버리는 혼돈으로 작동할 뿐이다. 넷플릭스에 우려를 보내는 이들의 입장도 그것과 같다. 넷플릭스는 기존의 미디어 환경에 비하면 판타지에 가깝지만, 이것이 우리의 현실 규범 안으로 들어올 땐 여러 규범을 건드리는 골칫덩어리 (Trickster)가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넷플릭스를 판타지로 볼 것인지, 현실로 볼 것인지에 대한 선택지 앞에 서게 된다.

3.

다른 한편 이 소주제는 생각보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기도 한데, 단테의 <신곡>이나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같은 것도 넓은 범위에서는 이런 부류에 속한다. <신곡>은 당대의 세계관이었던 지옥, 연옥, 천국을 모험의 형식으로 보여주는 소설이었으며, <셜록 홈즈>는 신화화된 범죄자 ‘잭 더 리퍼’와 동시대를 살았다. 이 두 소설은 분위기나 경향, 장르가 다르지만 “현실에서는 볼 수 없지만 그러한 현실을 바탕으로 상상된 가공의 것들”을 현실 안으로 수입해온다는 점에 그 공통점이 있다. 말하자면 판타지 장르는 <걸리버 여행기>의 내용처럼, 낯선 나라가 있을 것이고 그곳에선 다른 법칙이 적용될 것이라는 모종의 믿음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들 낯선 나라가 바로 우리네 나라가 되었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소설 속의 잭 더 리퍼는 현실 세계와 판타지 세계를 분리하는 요인이지만, 현실 세계의 잭 더 리퍼는 우리의 일상 세계를 침범해오는 재난일 뿐이다. 위에서 말한 <열렙전사>에서도 그렇지만 판타지는 그것 ‘세계’로 남아있을 때 비로소 해방구가 되는 것이지, 우리네 세계가 되어 버린다면 그저 규범의 붕괴만을 뜻할 뿐이다. <지옥>이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현상이다. 종교적 맥락에서 기능하는 ‘지옥’이라는 말을 현실을 기반으로 한 지옥으로 정의할 수만 있다면, <지옥>은 “판타지가 현실을 침범해올 때” 벌어지는 일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을 테다.

이 대목에서 지적해둘 만한 건, 종교는 장르가 아닌 현상으로서의 판타지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이다. 본래 판타지라는 건 현실을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진,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규범 바깥의 것들을 상상하고 적용해보려는 시도를 의미했다. 이는 현실의 대안적 성격이기도, 욕망을 충족하는 기능이기도 했다. 중세 기독교에서 지옥과 천국의 의미가 그러했고, 이러한 규범들에서 파생되어 나온 연옥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보아도 그렇다. 연옥이라는 말은 “죽은 이는 원죄 여부에 따라 천국이나 지옥, 둘 중 하나로 가게 된다”는 기독교의 규범을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임산부의 뱃속에서 죽은 아이의 경우, 태어나지도 않았기에 원죄라곤 지었을 리가 없으니 천국에도 지옥에도 소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이 그런 실수를 저질렀을 리 없으므로 급하게 연옥이라는 개념을 급조해낸 것이다. 여기서 연옥은 기존의 규범을 깨트리지 않을 요령으로, 현실 규범을 토대로 만들어진 판타지라고 볼 수 있을 테다. 말하자면 판타지라는 건 현실에 기반을 두면서도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다는 점에 방점이 찍힌다. 즉, 일종의 금기로서 현실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상상으로는 그에 다가서려 한다는 점에서 두 세계 사이의 간극을 명확히 하는 효과가 있다. 연옥이라는 모호하고도 중첩된 장소는 천국과 지옥이 맞닿을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셈이다.

이러한 점에서 <지옥>은 결국 ‘혼합 현실(Mixed reality)’ 장르를 벗어나지 않는다. 네트워크의 개념이 추상화되던 1970년대 무렵 ‘가상’의 현실이라는 개념이 일종의 ‘대안’으로 여겨졌던 것처럼, 나쁜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간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대안 현실’이었던 것이다. 현실에서 나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벌 받지 않는다면, 죽어서라도 그 죄를 갚아야 할 것이라는 말. 이는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을 상상하는 판타지 세계와도 같았다. 이는 실제로 단죄할 수도 없지만, 단죄한다고 해서도 기존의 규범을 헤치기에 막연하게 지지할 수만은 없다. <데스노트>와 같은 만화를 봐도 알 수 있듯이, 판타지가 현실에 개입할 때 벌어지는 것은 ‘사이다’뿐만이 아니라 그런 탈주선이 초래한 무규범 상황도 있다. 그러나 <지옥>이 보여주는 것은 그러한 현상을 만들어가는 쪽이 아니라 에워싼 군중의 입장이다. 혼합된 두 세계를 오가는 주인공의 시점이 아니라, 어느 순간 무너져 내린 세계의 규율 안에서 자유의지를 갖고 행동하는 일반 시민의 시점을 다룬다. 말하자면 <지옥>이 다루는 대안 현실의 모습은 [세계Sekai]가 아니라 [사회Society]이다. 규범을 만들어가는 주인공 측이 아니라, 그런 규범을 받아들이며 살아가야 하는 일반 시민과 이들 사회의 관계를 다룬다.

4.

만화 <진격의 거인>의 1화는 높고 위대한 벽 위를 넘어오는 거인의 거대한 얼굴, 그리고 시선으로 시작한다. 이 장면은 주인공이 풍문으로만 듣던 거인의 존재를 두 눈으로 처음 확인한다는 점에서, 또한 그 첫 만남이 이들의 안전한 세계를 의미했던 ‘벽’의 붕괴와 함께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혼합 현실 장르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만화는 그렇게 무너진 세계에서 새 규율을 찾아가는 주인공을 다루었다. 반면 <지옥>은 새 규율을 찾아가는 주인공이 아니라 무너진 세계의 규범 안에서 이전 세계와의 연결고리를 회복해보려는 이들의 모습을 다룬다. 이들은 양쪽 세계의 경계가 무너졌다면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을 대체하는 게 아니라, 살아가는 현실 안에 판타지를 그대로 남겨두는 편이 옳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환상은 현실의 종속 변인이지 그 자체로 변인이 될 수는 없다. 지옥의 사자들이 범죄자를 응징하는 것일 수는 있지만, 모든 범죄자가 지옥의 사자들에게 응징당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지옥의 사자들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이를 둘러싼 주변 현상과의 관계 안에서 자유롭게, 그중에서도 [가공의 영역]으로 판단될 문제에 불과하다. 이 환상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더 중요하지, 이 환상이 세계의 규범을 대체해버릴 때 우리는 영영 현실이 아닌 곳을 생각해볼 수 없게 된다. 즉, 지옥이 아닌 그 무엇도 상상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 셈이다.

차라리 지옥은 상상될 수 있어야 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옥은 상상될 여지가 있어야 비로소 바르게 기능한다. 이는 지옥이라는 환상이 왜 우리의 현실 규범 안으로 편입되어서는 안 되는지를 말해준다. (어느 종교든 간에) 사람들이 지옥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건 현실에서 벌하지 못한 죄인들이 지옥에 가서라도 벌을 받을 것이라고 믿어야만 했기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았서였다. 그러니 현실에서 죄인을 벌할 수 있으면 지옥 같은 건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고 여길 수도 있지만 사실 지옥이란 것은 그리 단순한 개념이 아니다. 지옥이라는 말이 도덕이라는 선험성에 기반을 두는 반면, 그것을 벌하기 위한 사회 규범은 사법 체계 안에 있으므로 지옥은 [죄인]을 벌할 수 없다. 즉, 지옥에 가는 죄인들이 꼭 사법적 죄인인 것이 아니며 이는 곧 규범의 밖에 존재하는 죄인이 있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규범의 밖에 있는 죄인을 벌할 수 있다는 말은 애초에 규범 자체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우리들 세계를 규정하는 규범을 박살 내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규범의 밖에 있는 죄인을 벌함으로써 세계의 테두리를 유지하는 일은 옳은가. 인간에게 모호한 죄의 중첩 상태를 부여함으로써 그를 판타지 세계로 추방해버리는 일은 정당한가.

1부의 마지막, 자신이 고지를 받았던 학교에서 진경훈 형사를 마주한 정진수 의장은 그렇게 묻는다. “만약 사람들이 고지에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점을 알게 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 것 같냐.” 천사가 말하는 “지옥에 간다”는 말이 일반적인 세계의 규범으로 이해된다면, 이것은 고지받은 사람을 죄인으로 만든다. 또한 그렇다면, 죄인이 되는 것에 아무런 이유가 없는 세상에는 규범이라는 게 있을 필요가 없다. 모두가 죄인이 될 수 있는 사회에서 규범이란 선제조치가 아니라 후속조치만을 위해서만 요구될 뿐이다. 헌데 규범이 그저 후속조치를 위해서만 요구된다면 규범의 바깥으로 죄인을 추방하는 일은 정말로 규범을 위한다고 볼 수 있을까. 추방 이후에야 비로소 죄인의 상태가 성립한다면 그 규범은 오히려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형태에 더 가깝다. 이 대목에서는 원작에서 덧붙여진 하나의 추가 장면을 언급해볼 수 있겠다.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에는 웹툰 <지옥>에 없던 장면 하나가 덧붙여졌다. 시연을 당해 죽은 박정자가 다시금 현세로 돌아오는 장면이다. 완전한 무기물로 변해버렸던 박정자는 무기물에서 다시금 유기물이 되어 현세에 강림한다. 세세하게 따지면 문제될 게 많은 장면이지만 오히려 이 장면은 가장 단순하게 접근해볼 때 명쾌한 결론이 나는 듯하다. “지옥에 간다”고 천사가 말했던 걸 떠올려보면, “지옥에 다녀왔다”라는 점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5.

그렇다면 이 이야기의 초점은 대속으로도 옮겨갈 수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박혀 인간의 죄를 대신하였듯이, 이들에게 지옥이라는 말은 타인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세계에서 죄는 규범의 밖에서 안쪽으로 들어오는 대속의 형태를 띤다. 이는 화살촉의 전 리더 이동욱이 말했듯이, 고지를 받은 이들을 원죄가 아닌 대속의 개념으로 바라봄으로써 그들을 메시아로 만든다. 그리고 이 경우, 메시아는 규범의 안에 있는 것들을 밖으로 내보내는 존재로서 현실을 판타지 세계로 분출하는 역할을 한다. 바꾸어 말해 메시아는 규범에 소속되지 않는 것들을 대신해 판타지 세계로 먼저 규범을 흘려보내는 선제적 조치에 해당한다. 이런 시점으로 <지옥>의 2부를 들여다보면 아기가 고지를 받는다 한들 아무런 문제될 게 없다. 이 아기는 인간의 무결함에 관한 규범을 뒤흔드는 ‘키’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시점’을 유지할 때는 아기를 위해 희생한 부부의 이야기가 흐트러져버린다는 단점이 있다. 기존의 시점으로 볼 때 이 장면은 아기의 원죄를 부모가 대신 짊어진다는 대속의 개념인데, ‘이런 시점’으로 볼 때는 오히려 신의 존재를 긍정해버림으로써 원죄 자체의 재난적 성격을 더 강조해버린다. “왜 지옥에 가는가”라는 물음의 방향성이 ‘속죄’나 ‘회개’가 아니라 ‘선별’과 ‘희생’으로 바뀜으로 인해, 그들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속죄 당함]이나 [회개해야 함]이 아니라 [선별 당했다]와 [희생되었다]라는 말이 된다.

1부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건 의식이 물질을 견인했을 때 벌어지는 현상이다. 정진수는 이 재난에 확실한 의도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의 의식이 물질을 따라잡지 못할 때 벌어지는 혼란을 우려한다. 이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건 사자들에 의해 사망한 피해자의 시신이 완전한 ‘무기물’로 규정된다는 점이다. 과학수사대는 말한다. “이건 지구에 없는 물질”이라고. ‘고지’라는 알 수 없는 현상을 의식하지 못하므로 그에 따른 물질 또한 세계에서 인지되지 못한다. 이를 토대로 정진수는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는 식의 논지를 펼치며 “살아있는 동안 죄를 짓지 않는다면 고지를 피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신은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서 고지를 행하는 것일까. 아니, 그렇게 믿어야만 세상은 평화로울 수 있을까. 이를 반박하는 게 소도 측의 논리였었다. 2부에서 공형준 교수는 말한다. “우리가 맞닥뜨린 이 불행이 온전히 불행으로만 사유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소도의 리더 민혜진 변호사의 정의에 따르면, ‘고지’는 초자연적 현상이며 우리가 알지 못하고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재난에 가깝다. 즉 물질은 그저 물질일 뿐, 어떠한 의식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고 그녀는 말한다. 이것이 자연적인지, 아니면 인위적인지도 알 수 없지만 불특정다수를 상대로 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피해자의 책임이 아니라고 말이다.

여기서 “피해자의 책임이 아니”라는 대목에 집중하면서도 해볼 수 있는 말은 많겠지만, 나는 이것을 간소화해 “이것은 가상, 혹은 판타지다”라고 말해보려 한다. 피해 사실을 판타지에 빗대는 게 아니라, 그러한 판타지가 현실 세계의 규범 밖에 존립한다는 점을 지적해보고 싶다. 예를 들어, 피해 사실이 규범의 밖에 존재할 때 우리는 그것이 ‘피해’라는 점을 인지하지 못한다. 따라서 피해 사실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규범의 안쪽으로 그러한 환상을 들여오는 작업이 필요한데, 여기서 필요한 게 바로 재난이다. 이상한 말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재난이 먼저 일어난 후에 규범이 따라붙는다는 점에서 재난은 선제타격의 논리를 따른다. 재난이 먼저 일어나야만 현실과 판타지 사이에 균열이 나고, 이 균열을 통해 우리는 두 세계 간에 물질교환을 실행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재난은 어떤 점에서도 규범에 선행하며, 우리가 재난을 마주할 때마다 새로 규범을 짜야 하는 건 그 때문이다. 누군가는 ‘안전불감증’이라 할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세계는 점점 더 사건이 먼저 일어나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는데, 이는 이전보다 더 살기 힘들어져서가 아니라 그러한 사건을 감지하는 능력이 더 발달해서다. 바꾸어 말하면 이 시대에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은 사건을 막는 일보다는 그런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혹은 어떻게 반면교사 삼을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

6.

이것은 우리가 재난을 피해갈 수 없다는 숙명론이라기보다 그렇게 재난에 정면으로 대항함으로써 오히려 우리 세계가 재난에 더 가까워지고 있음을 받아들이는 일에 더 가깝다. 말하자면 우리는 고지를 받아 속죄하는 세계에서 벗어나야만 비로소 세계의 죄를 짊어지는 대속을 행할 수 있다. 그러니 정진수의 맥락에서 살펴보자면, 그녀의 입장은 우리에게 찾아온 이 불행을 유물론(마르크스)이 아니라 정신분석학(지젝)으로 받아들이자는 것에 더 가깝다. 의식에서 잔류하는 것들이 무의식으로 가고, 무의식이 없다면 의식은 일상을 영유할 수 없으며, 무의식의 것들이 의식으로 넘어올 때 의식은 붕괴하고야 만다는 것. 이런 측면으로 보면 정진수의 말은 확실히 옳을지도 모른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세계가 있어야만 비로소 세상은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자명한 이치를 갖는다. 세상은 교과서처럼 딱 잘라 돌아가는 게 아니므로, 이들을 교과서처럼 살게 하려면 고지가 바로 신의 의도라는 점을 사람들에게 말해주어야 한다. 허나 민혜진에 따르면 이는 역설적으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신의 의도를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다면, 우리가 말로 설명할 수 없어야 하는 건 없어야 하는데 세상은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모든 규범으로 세상을 설명할 수 없어야 비로소 세계는 앞뒤 없는 재난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판타지’라는 장르가 대개 초현실적인 현상과 규범 밖에 잔류하는 욕망으로 시작하는 건 그 때문이다.

이러한 대립 구도가 변화하는 건 2부의 마지막에 벌어지는 사건이다. 박정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도 신의 의도라면, 고지라는 건 인간을 현세에서 일시적으로 격리했다가 다시금 현세로 되돌려보내는 ‘환상세계로의 유배’에 더 가깝다. 이 경우 신의 역할은 심판을 내리는 게 아니라 사람들에게 방향성을 제시하는 인도자 역에 더 가까워진다. <신곡>의 베르길리우스처럼, 의식 상태로는 탐험할 수 없는 판타지 세계를 여행할 수 있도록 돕는다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신의 의도라는 것은 죄인을 가려내는 일이 아니라 이러한 판타지가 현실에 침범해오는 일, 그리고 이 판타지는 현실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상기시켜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옥>이 말해주는 것은 지옥이 상상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는 것, 즉 판타지를 우리 현실 안으로 수입해오는 일이다. 만약 신이 교과서적인 존재라면, 오히려 우리는 신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는 점에 의심을 품어야 한다. 판타지로서, 신은 초현실적인 현상이지만 결국에는 우리들의 염원이 만들어낸 잔류 사념에 더 가깝다. 그 욕망은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기에 죽어버렸지만, 현실 세계의 바깥에 나가 비로소 우리들의 내면을 차지해올 판타지로 탈바꿈한다. 때때로 판타지는 현실이 없어도 작동하는 온전한 허구, 혹은 독립적인 개체처럼 여겨지곤 하지만 판타지는 현실이 없다면 성립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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