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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Oct 09. 2021

선을 넘어가는 하나의 기억

<오징어 게임>(2021)




예전에 미셸 푸코가 썼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생명 자체가 정치에서 문제가 되는 동물이다.  -조르주 아감벤-[1]



<오징어 게임>(2021)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 가장 처음으로 해볼 수 있는 말은, 이것이 넷플릭스라는 특수 플랫폼의 수혜를 입었다는 점이다. 2021년 현재를 기준으로 전 지구에 없는 이가 없을 정도가 된 스마트폰의 보급은 넷플릭스 자체를 하나의 방송매체로 만들었다. 일단 넷플릭스는 티브이보다 접근성이 높다. 전기 혹은 방송 인프라가 필요 없으며 그냥 인터넷이랑 휴대전화 하나만 있으면 된다. 심지어 방송 스케줄에 구애받지도 않는다. 티브이 드라마처럼 몇 개의 화로 분절되어 있기는 하지만, 티브이와는 달리 한 번에 몰아볼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 이른바 한 편의 영화를 여러 단락으로 나눠놓은 형태이며, 따라서 하나의 드라마 안에 자리한 아홉 개의 ‘장’으로 보는 게 옳다.




넷플릭스의 <오징어 게임>은 관람을 수시로 중단할 수 있는 비선형성을 띤다. 어떤 면에서는 보는 이가 수시로 화면에 드나들 수 있다는 점에서 “멈출 수 있는 연극”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이런 게 초기 영화가 지향했던 것이기도 했다. 연극 무대의 맨 앞자리서 고정된 관객의 시점으로 모든 연극을 하나의 필름에 담는 것, 이를 통해 나라와 국경을 초월해 언제든지 다시 (극장에) 찾아올 수 있게 하는 것 말이다. 초기 영화의 고정된 시점은 영화를 어디서 보든 간에 결국 그곳에는 같은 시간이 있을 뿐이라는 점을 의미했다. 하지만 연극의 방법론을 적용함으로써 하나의 시간을 여러 개로 분리할 수 있게 되었고, 이를 통해 관객은 연극의 장마다 화장실을 다녀오거나 하는 식으로 휴식할 수 있었다.




이런 연극들에서 ‘장(Chapter)’이라는 말은 영화가 점점 발전함으로써 점진적으로 사라지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인터벌(interval)이라는 이름으로 가끔은 등장했던 것도 사실이다. 어쨌거나 이런 사실들에서 주목해야 하는 건 영화 안에 자리한 연극 무대의 형식이란 게 일종의 ‘장’으로 이루어졌다는 점, 그런데 이 장을 상영인이나 관람자가 언제든지 끊거나 재개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를 두고서 뭐라 불러야 할까. 여러 장으로 나뉜 영화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드라마이긴 한데 영화 연극에 더 가까운 무언가로 보아야 할지 망설여진다. 어쩌면 영화가 점점 열린 쪽으로 이동하는 마당에 “영화”라는 단어로 그들을 정의하려 드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일 수도 있다.




사실 <오징어 게임>을 영화로 분류할 때 생기는 장점 하나가 있긴 하다. 영화는 중간에 하차할 수 없음을 암묵적인 합의로 두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이는 <오징어 게임>의 규칙 중 하나인 “모든 참가자는 중간에 게임을 그만둘 수 없다.”를 생각나게 한다. 누군가는 넷플릭스라는 매체가 자체가 언제든지 들어오고 나갈 수 있음을 전제한다는 점을 지적하겠지만, 적어도 <오징어 게임>의 세계는 그렇지 않다. 일단 장소부터가 섬이다. 그리고 여기서 다루는 게임은 바로 어린 시절에 했던 추억의 놀이이다. 드라마의 9화에 오일남(오영수)의 고백을 통해서도 밝혀지듯이, 이 놀이들이 굳이 ‘어린아이들의 것’인 이유는 그만큼 과거가 그립고 또 실제로 거기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치매라는 설정이 이에 해당된다.




오일남이 오징어 게임에 참가했을 때 보여준 모습은 어디까지나 치매 연기였지만, 구슬 찾기 게임에서 그가 보여준 그리움과 한탄만큼은 진짜였을 것이다. <오징어 게임>을 영화로 볼 때 우리는 이런 기억의 문제를 다룰 수 있게 된다. 기억을 그만둘 수 없다는 것, 마르셀 프루스트의 무의지적 기억 말이다. 프루스트에 따르면 기억은 마치 도화선처럼 한번 불이 붙으면 지난 과거로 거슬러 오르기를 멈추지 않는다고들 한다. <오징어 게임>의 1화와 2화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것도 이런 가속이다. 게임에 참가한 이들에겐 그들을 벼랑으로 내모는 규모의 빚이 있으며, 이는 그들로 하여금 오징어 게임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한다. 그리고 이들의 인생사는 그런 빚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오징어 게임>은 이들의 사연을 먼저 보여줌으로써 게임에 참가해야 할 당위성을 만들어준다. 도박중독자인 주인공 성기훈(이정재)이 오징어 게임에 참가하게 되는 과정이나 그의 친구 조상우(박해수)가 자신의 참가 동기를 공개하는 장면, 장덕수(허성태)가 필리핀 깡패들을 피해 달아나는 장면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 대목에서 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상상 하나는 그러한 사연과 돈 사이의 관계이다. 기억이 우리 삶의 그림자처럼 줄곧 따라붙는 것이라면, <오징어 게임>에서 기억이란 빚에 따라붙는 게 아닐까. 바꾸어 말해 <오징어 게임>은 기억의 회수를 두고 벌이는 생존게임이며, 이들은 빚을 다 갚으면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기억들 또한 자연스레 앙갚음 될 것으로 믿는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다. 오히려 게임에 몰두할수록 그들의 기억은 더 생생해진다. 왜냐하면 그들의 빚에서 기억이 태어난 것이지 그러한 기억에서 빚이 태어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빚을 갚으려고 게임에 참가했지 고통스러운 기억을 잊고자 게임에 참가한 것은 아니다. 만약 후자였다면 이들은 2화에서 다시금 오징어 게임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테다. 이들에게 정말로 두려운 건 고통스러운 기억이 아니라 당장에 짊어진 돈의 무게였고, 이 무게가 없으면 뒤에 따라붙은 기억도 사라지리라고 굳게 믿었었다. 말하자면 <오징어 게임>에서의 기억이란 그러한 게임에의 참가를 추동하는 무언의 의지이다. 빚에서 기억이 파생됐고 이 기억은 그들에게 오징어 게임에 참가하도록 했다.




그렇다면 <오징어 게임>을 빚에서 태어나 ‘지금’을 이루는 어떤 기억들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시대의 단면을 보여주는 순수 이미지, 단적으로 말해 <오징어 게임>에서 강조하고 있는 건 신자유주의 시대의 질서이다. 관리자는 게임은 어디까지나 공평하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리 공평하다고는 볼 수 없다. 각자 출발선이 다르고 이후의 삶도 그만큼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기훈과 상우의 학벌 차이를 통해서도 직접 드러나는 부분이다. 고졸과 대졸, 그것도 서울대 경영학과라면 사회 안에서 이들의 출발선은 다를 수밖에 없다. 물론 공부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였느냐는 질문이 가능하다. 서울대를 가기 위해 공부한 사람과 고등학교 졸업으로 공부를 끝낸 사람이 같은 노력을 했다고는 볼 수 없다.




문제는 그런 공부를 할 수 있는 환경조차도 전혀 공평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게 바로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줄곧 지적되는 기회의 평등이라는 말의 실체이다. <오징어 게임>은 아무런 사전 정보를 알려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평해 보이지만, 까고 보면 여성이나 노인에게 불리한 줄다리기 등이 등장하기도 하므로 그리 공평하지만은 않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라는 말만으로 <오징어 게임>을 설명할 수는 없고, 오히려 위의 ‘영화’라는 말에서 파생된 몇몇 속성들이 더 중요하다. 이는 중간에 내릴 수 없는 연극이라는 점, 공평해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게임이라는 점, 처음부터 거기 존재하던 게 아니라 앞으로 나아감으로써 생성되는 몇몇 기억을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오징어 게임>을 관통하는 대사가 바로 ‘깐부’라고 생각한다. 작중에서는 깐부를 “네 것 내 것 없이 모든 걸 공유하는 동맹” 정도로 소개하는데, 현실에서는 마땅히 합의되거나 정의된 뜻은 없다. 국립국어원도 깐부가 뭔지 모른다고 말한 걸 보면 깐부는 한국 사회에서 잘 알려진 비표준어, 이른바 은어라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대중적인 공감대를 많이 얻고 있는 어원 중 하나인 ‘콤보(Combo)’를 따른다면 나름의 해석을 해볼 수는 있다. 첫 번째 어원에서 콤보라는 건 재즈 밴드의 구성원과 그러한 구성 상태를 뜻한다. 반면 두 번째 어원에서 콤보라는 건 콤비네이션의 준말이고, 이는 양쪽 모두가 있어야만 비로소 하나의 공동체로 기능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전자의 의미를 따르면, 기훈과 일남이 구슬치기 게임에서 맺은, 어쩌면 그 이전부터 시작된 유대감을 지칭하는 게 된다. 후자의 의미를 따르면, 돈이 많아서 사는 게 재미없는 사람과 돈이 너무 없어서 사는 게 재미없는 사람이라는 정반합의 조합을 뜻하는 게 된다. 이른바 테제와 안티테제, 두 사람은 양쪽 모두가 있어야만 비로소 하나의 의미로 기능하는 상태인 셈이다. 이런 맥락으로 보면 일남이 죽고 나서 기훈이 본격적으로 게임에 임하게 된 이유는 그러한 변증법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정, 반, 합은 변증법에서 자명한 이치이니 말이다. 물론 여기서 기훈이 더 나은 상태가 되었는지는 다소 논쟁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게임에 더 잘 임하게 되었다는 게 꼭 인간적으로 나은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프루스트 또한 기억의 후퇴에서 현재의 나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정반합의 원리를 따른다. 돈이 많은 일남이 정이고 돈이 없는 기훈이 반이라고 가정해보자. 두 사람은 서로와 함께함으로써 ‘네 것 내 것’가 없는 깐부가 되며, 이를 통해 개인을 배제하고는 하나의 깐부로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이제 두 사람은 깐부로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고, 이는 곧 그들이 지닌 개개인의 기억이 아니라 오징어 게임 안에서 겪은 하나의 기억이 자리하게 됨을 의미한다. 예컨대 기훈과 일남의 관계를 하나로 묶어서 볼 때, 오징어 게임 전반을 통찰할 수 있는 한 가지 관점이 생겨난다. <오징어 게임>을 단순히 신자유주의 사회를 묘사하는 하나의 비판으로만 볼 게 아니라는 뜻이다.




<오징어 게임>에는 단 하나의 관점이 아니라 여러 관점이 있으며, 이런 관점 모두를 우리가 이해해줄 수는 없다. 각자 생각이 다를뿐더러, 모두가 행복해질 방법이란 것도 없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해 기억은 균일하지 않고 단일하지도 않다. 그러나 이를 의도적으로 만들어보려는 게 바로 깐부다. 이를테면 다음 설명을 살펴보자. 서로 경쟁하는 게임에서 네 것도 내 것도 없다는 말은 일종의 (운명)공동체로 풀이된다. 공산주의 같은 게 아니라 명쾌한 집단 논리 말이다. 이는 즉 안이 없고 바깥만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공동체라는 말은 집단을 하나로 이어줌으로써 모든 전력을 밖으로 돌릴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이는 초기 영화가 프레임을 통해 오히려 관객의 현실을 더 잘 보게 해주었다는 점을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이제 오징어 게임의 인물들은 연극 무대에 오른다. 아홉 개의 단락은 깐부로서의 영화를 신자유주의 시대를 묘사한 연극처럼 만든다. 오징어 게임장 안에서의 통일된 복장은 그들의 기억을 하나로 잇지 못하며, 돈이라는 하나의 공통 목표가 있긴 하지만 왜 돈이 필요한지는 각자 다르기 마련이다. 이는 사람들의 욕망이 얼마나 개인화되어있는지, 이들 각각이 얼마나 다른 존재인지를 상기시킨다. 이 점에서 ‘깐부’는 분열하여 원자화된 이들의 욕망을 하나로 이어주는 주된 키워드가 될 수 있다. ‘네 것 내것’ 없다는 말은 우리 사회에 하나의 통일된 기억이 있을 수 있다는 말과도 같다. 모두가 같은 세계를 살아간다는 공동체 의식 말이다.


[1] 조르주 아감벤, 『목적 없는 수단』, 양창렬 역, (서울: 난장, 2009)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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