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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Sep 19. 2021

속도는 상대적인 것이다: 오즈 영화 속의 연결


1.


오늘날 영화를 두고서 자기반영성의 매체라고 표현하는 일은 그리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는 감독 자신의 내면을 투영하는 ‘작가적’ 매체라고 생각하고 있다. 미리 결론을 내린 상태로 이야기하는 듯 보이지만, 이에 대한 근거는 이미 우리 스스로 잘 알고 있지 않던가? 우리는 영화감독을 두고서 ‘작가’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 누구도 영화감독을 단순한 조율자로만 보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확실히 영화에 대한 사회 전체의 교양수준이 올라간 덕택으로 보인다. 세계적으로는 1950년대(누벨바그) 들어서 그러했고, 한국에서는 영화교육 열풍이 불었던 1990년대(코리안 뉴웨이브)를 기점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중 후자에 관해서는 세계화의 흐름에서 한국이 그것을 늦게 따라잡았다고 볼 수 있으므로, 전자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영화에서 자기반영성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된 건 영화 작가주의가 성립한 덕택이라 볼 수 있다. 그전부터 공공연하게 논란이 되어왔지만, 1950년대를 기점으로 보편화된 영화 작가주의의 성립은 영화 매체를 통해 무언가를 말할 수 있다는 점을 알려주었다. 이 열풍의 중심에는 까이에 뒤 시네마와 편집장 프랑수아 트뢰포가 있었으며, 특히나 그가 알프레드 히치콕을 영화 제작자(film maker)에서 영화 작가(cineaste)로 인식하게 한 일은 꽤 유명하다.


하지만 우리가 ‘자기반영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작가주의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자기반영성이란, 기본적으로 매체 본연의 가치와 깊이 연루되어 있다. 다르게 말해 자기반영성이라는 말 자체는 작가의 속성인 것이지 영화의 속성인 것만은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미셸 푸코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비평한 일화가 잘 알려져있다. 푸코는 당대 유행하던 라깡주의 정신학을 참고로 하여 벨라스케스에게서 거울의 이미지를 발견해냈다. 회화의 한 화면 안에 화면을 보는 이와 그렇게 보여지는 이가 모두 담겨있던 것이다. ‘영화를 말하는 영화’라거나 혹은 ‘영화 만들기에 대한 영화’라는 표현은 이를 통해 성립된 것이다. 이 분야에서 유명한 작품으로는 페데르코 펠리니의 <8과 2분의 1>(1963), 잉마르 베리만의 <산딸기>(1957)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작품들에서 우리는 영화 본연의 이야기가 영화 자체로만 읽히지 않는 경험을 하게 된다. 즉 영화의 내러티브가 프레임 안에서 이탈하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이렇게 이탈한 프레임은 영화의 안팎을 이어주면서 서로를 마주하는 형태, 일종의 마주 본 거울처럼 배치되어 영화들 사이에 어떠한 반영성을 만들어낸다. 내러티브라는 픽션과 우리가 살아가는 논픽션이 서로를 잡아먹음으로써 둘 사이를 구분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이처럼 영화가 자기 자신을 인용하는 형식이 바로 자기반영성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기반영성을 정신분석만으로 설명하는 일은 엄밀하지 않은 듯 보인다. 분명 거울상은 정신분석학에서 귀인한 것이지만, 영화에서의 자기반영성은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자기기술(Self-discription)이었다. 영화가 영화를 보여주기 위해선 둘 사이에 관계를 설정하는 일이 필요했는데, 기술자들은 영화가 인용될 수 없다는 난관에 부딪혔다(이 문제를 해결하려던 크리스티앙 메츠는 끝내 자살했다). 영화는 회화처럼 고정된 시점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문학처럼 견고한 언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영화는 시간을 토대로 공간을 구축하는 일종의 영상매체였으며, ‘보여주는 것’ 말고는 달리 표현하거나 드러낼 방법이 없었다. 즉 영화는 재현의 매체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는 전진함으로써 그 뒤의 공간을 주워담는 매체이기에 모든 기록된 시간은 현재에서 바라본 과거가 된다. 즉 영화 영상은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떠올리는 형식이 아니면 성립할 수 없다. 이는 영화 자신이 아니라면 자신을 드러낼 수 없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었는데, 예컨대 영화가 자신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자신을 기술하는 방법을 알아야했다. 우리가 꾸는 꿈이 완전한 환영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반영한 것처럼, 영화에서 자기반영성이란 지나간 것을 스스로 드러내어 고백한다는 점에서의 자기기술이었던 셈이다.


말하자면 영화는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고백의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 고로 ‘보여준다(Represent)=드러낸다(Reveal)’라는 공식이 성립한다. 이를 근거 삼아 스탠리 카벨은 카메라는 시간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며, 이 과정에서 지나간 공간을 묘사하는 것이 바로 카메라의 역할임을 지적한다. 그는 『눈에 비치는 세계』에서 자신이 제안한 ‘자동기법’에 대한 보론으로 다음과 같은 논거를 덧붙인다. “그 해결은 현실을 재현하는 것에 의해 현실과의 연결의 필요를 기적적으로 소거시킴으로서, 또 현실 그 자체의 현실과의 연결의 필요를 기적적으로 소거시킴으로서, 또 현실 그 자체의 연속적인 투사를 통해 이 연결을 획득하는 능력에 의해 가능해진 것이다.”[1] 이 문장에서 카벨은 고전 할리우드 시네마에서 발명된 영화의 연속성(Continuity)을 영화와 영화 간의 관계를 성립하게 해주는 연결성(Connectivity)으로 변환하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영화의 연속성은 무언가를 보이지 않게 한다는 점에서 환영주의와 연결되는데, 이 환영주의는 사실 완전한 환상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에 기반에 만들어진 논픽션이다. 왜냐하면 영화는 앞으로 나아가며, 그 과정에서 자신이 지나쳐 온 과거에 있는 일을 떠올림으로써 과거와 현재의 틈새를 메우기 때문이다. 이처럼 카벨의 자동기법은 영화의 환영주의가 그 틈새를 가렸음을 비판하면서, 영화에서 자기반영성이라는 말은 무언가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러한 틈새들의 연속으로 구성된 영화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 카벨은 영화의 인용불가능성이라는 문제를 기억의 모호함이라는 성격과 연결짓고자 했다. 이른바 무의식의 반사작용이라 불리는 정신분석학의 테제는 카메라가 포착하지 않는 모든 부위에 포진한다. 카메라가 개인의 기억을 고백하는 데 사용된다면, 반대로 카메라가 조망하지 않는 곳은 개인의 고백되지 않은 무의식이라는 말이기도 하다(보는 이와 보여지는 이가 한 자리에 공존할 수 없다는 점도 그렇다). 따라서 영화에서 인용불가능성이라는 말은 고백될 수 없음이라는 말과도 같다. 그렇다면 카메라를 통해 표현할 수 없는 몇몇 장면들을 두고서 자기기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일은 어떤 면에서 모순인 건 아닐까? 고백될 수 없음이라는 속성과 자신에 대한 기술은 한 자리에 놓일 수 없는 게 아닐까? 지젝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신 분석학이 주는 교훈은 허구이다.” 생각되어지는 나와 그것을 떠올리는 나는 한 자리에 공존할 수 없으므로, 자기반영성의 영화란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자신에 대한 기술이 결코 객관적 재현의 산물이 될 수 없음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개인이 자신의 모습을 기술한다고 가정할 때, 우리는 늘 거울을 통해서만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게 된다. 즉 자신이 바라본 자신의 얼굴상은 늘 세계를 경유해서만 우리 눈에 비쳐진다. 이와 유사하게 영화 작가들의 고민은 카메라가 세계를 정직하게 재현해내지 못한다는 점이었고, 여기서 파생된 게 바로 자기반영성의 영화였었다.


정신분석학에서 주체와 대타자는 같은 자리에 놓일 수 없지만, 그들 서로가 서로를 기술하게 한다면 이런 문제는 말끔히 해결된다. 즉 주체로 하여금 대타자의 역할을 겸하도록 하는 게 바로 스탠리 카벨의 주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동기법의 역할은 그것이 귀인한 1930년대 초현실주의 선언과는 조금은 다른 성격을 지닌다. 자동기법이 주안점을 두는 건 세계에 대한 이미지가 늘 후천적으로 구현될 수밖에 없다는 전진의 행보이다. 즉, 카메라가 먼저 앞으로 나아감으로써 세계에 대한 이미지가 파생되듯이, 우리 자신이 이곳에 존재함으로써 삶에 대한 기억들이 우리 곁에 소환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흔히들 카메라가 세계를 ‘목격’한다고 말해왔던 입장과는 거리를 두는 것이었다. 영화를 단순한 기계복제의 산물로만 보지 않게 된 이후, 카메라는 단순한 목격자로만 기능하는 게 아니었다. 이제 카메라는 하나의 주체가 되어 영화 속 세계를 살아갔다. 그러나 이에 파생된 문제는 영화 속의 시선이 과연 누구의 것이냐는 점이었다. 일반적으로 관객은 카메라의 시선을 곧 자신의 것으로 취하는 방식으로 영화 속 세계에 이입하는데, 영화가 자신을 기술하고자 할 때 카메라의 시선은 세계의 최전선에 자리한다. 즉 이는 기억의 최전선으로써 앞으로 영화가 무언가를 ‘보여줄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에 따르자면 결국 관객은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헌데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영화를 관객들이 좋아할 수 있을까? 본디 영화를 본다는 건, 무언가를 ‘보고자’ 극장에 방문하는 행위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자신을 기술하는 영화들은 정면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자신을 소개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영화들에서 기억은 앞이 아니라 뒤편, 그러니까 카메라가 전진하고 흩어진 반대편의 물결에 자리한다. 이들 영화는 기억을 환영처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이곳으로 소환하는데, 이때 관객은 단순히 영화를 보는 것만이 아니라 그런 소환 작업에 동행하게 된다. 바꾸어 말해, 자기반영적 영화가 자기기술에 관한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면 그런 작업에는 동행인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자신의 모습은 늘 세계에 비쳐서만 비로소 인식되기 때문이다. 자기반영적 영화에서 관객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 관객이자 감독인 이 인물은 영화라는 세계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봄으로써 영화를 자신의 것으로 취하게 된다. 본디 자기반영적 영화란 작가-감독 개인의 내면을 풀어놓는 모종의 프레임처럼 여겨졌지만, 자기기술법은 자신의 입장이나 지위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관객을 영화 속 세계와 관계 맺도록 한다. 이렇게 영화와 관계를 맺은 관객은 영화를 단순히 보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서,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 것들을 자신의 삶 안에서 목격하고 또 찾게 된다. 이 점에서 이들 카메라의 전진은 재현이나 목격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2.


이 글이 오즈 야스지로에 대해 이야기하는 만큼, 오즈의 영화를 잘 설명할 수 있는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하고자 한다. 오즈 영화에서 전진은 재현이나 목격 이상의 의미가 있으며, 이는 일종의 자기기술적인 면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오즈 영화의 속도를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아이라 제프는 근 30여년 동안 대두되어 온 슬로우 시네마의 경향이 영화사의 고전기에 있었던 오즈 야스지로 등의 모더니즘 영화와 어떤 면에서 다른지를 설명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슬로우 시네마는 느린 시간 안에서 텅 빈 공간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관객의 성찰이 영화에 개입할 여지를 준다.[2] 그런데 제프의 주장은 근 30여년 동안의 슬로우 시네마에만 국한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아날로그 이미지가 쇠퇴하는 디지털 시네마의 시대에는 고전 영화 이론을 돌아볼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네마가 갖지 못한 게 아날로그적 능력이기에 오히려 이전 시대를 탐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느린 영화의 텅 빈 시공간이라는 말은, 영화가 있는 그대로 자리에 서있었던 1910년대의 영화적 프레임을 묘사하고 있기도 하다. 어떠한 편집이 가미되지 않은 1910년대의 영화들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 정말로 느린 것이다. 우리는 이 느린 영화들을 감당해낼 수 없다. 이 영화들은 있는 시간 그대로 흘러가기에 굉장히 지루하며, 어쩌면 끝까지 관람하는 것조차 버거울 수 있다.


그러나 조너선 로젠봄이 「오즈는 과연 느린가?」의 말미에서 지적하듯이 “속도는 상대적인 것이다.”[3] 예컨대 우리가 슬로우 시네마를 두고서 ‘느리다’고 지적하는 일은 우리가 세상을 너무 ‘편집적으로’ 살아가고 있어서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느린 시간 안에서 텅 빈 공간을 발견하는 일은 이전 시대의 영화에서도 가능하다. 여기서 이전 시대라는 말은 영화사에서 새로운 물결(*누벨바그)로 여겨졌던 모던 시네마를 뜻한다. 모던 시네마는 전후의 리얼리즘의 바로 뒤에 자리한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영화적 의미를 그 형식의 틀 안에서 찾았다는 특징이 있다. 이들 영화는 알랭 레네나 장 뤽 고다르의 실험적 영화들에서도 잘 알 수 있듯이, 시간을 따라 내러티브를 형성했던 이전 시기의 작법과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이들은 내러티브를 해체함으로써 그러한 시간이 생겨난다고 믿었다. 고다르의 유명한 발언 중 하나인, “영화의 처음과 끝이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문장이 지적하는 바가 그렇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이 말은 로젠봄의 위 발언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어 보인다. 속도가 상대적인 것이라면, 내러티브 또한 상대적인 것일 수 있다. 즉 영화의 시간은 사람에 따라 그 처음과 끝이 다르게 보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모던 시네마를 바라보면, 이는 어떠한 제작의 한 경향이 아니라 영화를 바라보는 관점의 한 경향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는 분명 고전적인(Classical) 것에 가까워 보이지만 그 영화 속의 시간은 모더니즘적이라고 말이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서 오즈는 들뢰즈적인가? 라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말도 틀린 것 같지는 않지만,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건 오즈의 영화에서 시작과 끝의 개념은 상대적이라는 점이다. 오즈 영화에서 마주 보는 두 인물을 찍는 대화 장면을 떠올려보자. 오즈 영화의 대화 장면은 사선이나 빗금이 아닌 오직 정면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이 대화 장면들에서 오즈는 인물의 위치를 말해줄만한 단서를 프레임 안에 배치하기도 하지만, 이따금 이런 배치조차도 쉽게 무시되곤 한다. 하스미 시게히코가 오즈의 <만춘>(1949)에 대해 서술했던 것처럼 오즈는 몇몇 대화 장면에서 180도 규칙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는데, 이를 위해 프레임 안의 미장센마저 수정하기까지 했다. 정면을 바라보는 대화 장면 A에서 왼쪽에 있던 화병을, 그 반대편의 역숏인 B에서도 왼쪽에 있도록 조치를 취했던 점이 그렇다. 오즈의 이런 선택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우리는 카벨의 의견을 따라서 이를 쇼트와 쇼트 간의 연결성을 확보하는 행위로 규정할 것이다. 180도 규칙이라는 게 사실 두 인물이 서로 대화하고 있음을 말해주기 위해 발명된 연결성의 한 고리에 해당하지만, 오즈는 이런 규칙을 무시하고 두 인물 간의 관계에 더 중점을 두었던 셈이다.


아마도 오즈에게 영화적 완성도라는 말은, 쇼트 하나의 견고함이라기보다 인물 사이의 면밀한 관계에 적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바꾸어 말해 오즈는 영화가 아니라 인물을 찍고자 했다. 정성일 평론가가 오즈의 <오차즈케의 맛>(1952)의 마지막 장면에 대해 지적하는 대목은 이를 잘 설명해준다. 정성일은 서먹해진 두 부부의 회복을 꾀하는 마지막 장면은 확실히 롱테이크로 찍었어야 했다고 지적하면서, 오즈가 이 장면을 두 개의 쇼트로 분할한 것에는 시간의 흐름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4] 사이가 서먹한 부부가 다시 하나가 되는 모습을 하나의 고정된 쇼트(오즈의 익숙한 구도)로 찍을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오즈가 이 장면을 두 개의 대화 쇼트로 분할한 건, 부부간에도 시간이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테다. 두 개의 쇼트를 하나의 롱테이크로 찍었다면 영화적 연속성은 유지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부의 시간이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는다면, 이들 부부가 왜 다투었고 하필이면 왜 마지막 장면에 와서야 불현듯 화해에 이르는지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말하자면 오즈의 이 쇼트 분할은 영화가 그동안에 보여주었던 부부 사이의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자기기술의 행위였다. 이 자기기술을 통해 두 사람은 속마음을 고백하게 되며, 바꾸어 말해 이는 보여줄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오즈만의 방법이었다.


이 대목에서 언급해야 하는 것은 오즈 영화의 시작과 끝이다. 시작과 끝의 의식이 카메라의 전진에서 비롯됨을 위에서 언급한 바 있는데, 오즈 영화에서 이는 카메라의 움직임이 아니라 쇼트의 구성과 배치에서 비롯된다. 현재에서 바라본 과거가 있고 영화의 자동기법은 이 사이를 메운다고 지적했던 대목을 유의해주길 바란다. 오즈 영화에서 인물들은 몇 가지 소소한 갈등들을 겪으면서 영화의 결말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이는 오즈 영화의 소시민성이나 잔잔함과 같은 단어로 설명되는 부분이지만, 오즈 영화에는 갈등이 없다고 평자들이 지적할 때 주로 거론되는 대목이기도 했다. 엄밀히 말해 갈등은 있겠지만 그것이 대외적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갈등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다. 바꾸어 말해 오즈는 인물 간의 갈등을 표면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한데, 우리는 오즈가 왜 보여주지 않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오즈는 왜 인물 간의 갈등을 (극적으로) 드러내지 않는가? 위에서 우리가 ‘보여준다=드러낸다’라고 설명했던 것을 생각하면, 어쩌면 오즈는 그런 갈등들을 보여주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성일이 <오차즈케…>를 통해 지적한 대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오히려 오즈는 그런 갈등들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건 영화와 카메라였으며 어디까지나 이들은 인물의 관계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었다.


반대의 지점에서 보면, 오즈는 카메라를 통해 만들어진 시작과 끝의 의식이 있어야만 보여줄 수 없는 관계를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게 바로 오즈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고백의 정서이다. 자기기술의 방법론에서 현재가 과거를 붙잡고 그 사이를 메운다고 지적했던 대목은 오즈 영화에서 되돌아보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오즈 영화에서 인물 간의 대화 장면이 정면 대 정면으로 묘사되는 반면, 인물이 프레임 안에 홀로 고립되어 있는 쇼트들에서는 그(녀)들의 뒷모습이 사선으로 배치되어 있곤 한다. <이른 봄>(1956)의 1시간 6분 9초, <도쿄의 황혼>(1957)의 2시간 17분 9초, <부초>(1959)의 20분 20초, <고하야가와가의 가을>(1961)의 1시간 57초에 이런 장면들이 나온다. 하지만 오즈의 영화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동경 이야기>(1953)일 테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버지를 연기한 류 치슈는 부인을 떠나보낸 후 홀로 남은 집에서 적적함을 달래고 있다. 구도는 역시나 등 뒤에서 목덜미 주변을 수평으로 찍는 대각선 방향이다. 그런데 이 구도는 사실 영화가 처음 시작했을 때 자녀들을 보러 동경으로 상경할 것을 의논하는 부부 간의 구도를 묘하게 비튼 것이다. 이 구도에서는 류 치슈의 부인이 류 치슈의 왼쪽 상단 방향에 동일한 구도로 앉아있다. 시점으로 보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말을 건네는 방향이 된다.


그런데 부부가 동경에 상경했을 때, 아내가 몸이 이상하다고 말했던 것에 류 치슈는 제대로 답해주지 못한다. 그리고 아내는 죽어버린다. 이제 아내가 건넸던 말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오즈는 영화의 도입부에 사용되었던 구도를 그대로 비틀어 아내의 자리를 공백으로 만든다. 이후 옆집 부인이 류 치슈를 보러 창밖에서 고개를 내밀지만, 그럼에도 이 공백은 채워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류 치슈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가 할 수 있는 건 답해지지 않은 목소리를 그녀가 있던 창가로 전하는 수밖에 없다. 왼쪽 상단이 바로 현재에서 과거로 이어지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이 장면을 통해 오즈는 현재와 과거의 고리를 확보하고 이제 그들의 삶은 연결된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오즈 영화에서 중요한 건 연속성이 아니라 연결성이었다. 이러한 점은 오즈의 영화를 볼 때 왜 인물의 관계에 집중해야 하는지를 설명해준다. 연속이라는 말은 선형적인 흐름을 전제하지만 연결이라는 말은 그렇지 않다. 연속이라는 말에서는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지만, 연결이라는 말에서는 끝이 다시금 시작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죽은 아버지를 생각하며 아버지와의 관계가 변화하는 일도, 불현듯 남편이 돌아와 오차즈케를 허겁지겁 먹어치우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이런 변화는 확실히, 시간이 연속되었다는 말로만은 설명할 수 없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그냥 어른이 되는 게 아니니 말이다.


3.


오즈 영화에도 분명 시작과 끝이라는 말은 있지만, 이는 영화 속 이야기를 여닫는 일종의 입구로서 기능하는 게 아니다. 오즈 영화에서 시작과 끝이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카메라가 나아가는 전진의 길이를 의미할 뿐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카메라가 찍지 않다고 해서 이들의 삶이 끝나버린 건 아니다. 카메라는 오직 필름이 돌아가는 동안만을 눈에 담을 뿐이지, 이렇게 담긴 화면이 그들의 나머지 삶까지 모두 설명해주는 건 아니다. 그래서 오즈의 영화를 볼 때 시간의 진행을 측정하는 일은 거진 의미가 없다. 분명 오즈의 영화들이 계절의 이름으로 순환하고 있는 건 사실이나, 얼추 비슷한 영화의 내러티브들은 이들 각각이 마치 다른 이름과 얼굴로 같은 장소에 돌아오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물론 이런 감상적인 생각이 오즈 영화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는 없을 테다. 하지만 오즈의 영화가 시간의 흐름에 의존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 오즈 영화에서 자기반영성을 결정한다. 그리고 이 자기반영성이란 딱히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고백의 행위, 아버지를 이해하고 딸을 이해하게 되는 식의 초월성으로 이어진다. 특히 <만춘>이나 <꽁치의 맛>(1962)은 때가 되면 시집을 가야 한다고 말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린다는 점에서 비슷해 보이지만, 이들 사이를 연결하는 고리는 다르다. 이러한 점은 두 영화의 영어 제목이 [늦은 봄]과 [가을 오후]라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1949년에 오즈는 [늦은 봄]을 찍었고 1951년에는 [초여름]을 찍었는데 1956년에는 불현듯 [이른 봄]으로 돌아가 버린다. 계절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불연속성은 말년으로 이어지는데, 1960년에 [늦은 가을]을 찍고 난 후 61년에는 [여름의 끝]을 찍는데 마지막 62년도엔 [가을 오후]를 찍었다. 초여름에서 이른 봄으로 돌아간 이유는 무엇인가? 혹은 늦은 가을에서 가을의 도입부로 돌아간 이유는 무엇인가? 이들 제목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여름이나 봄 같은 계절의 흐름이 아니라 ‘이른’, ‘초’, ‘늦은’, ‘오후’처럼 시간을 지칭하는 단어다. 이들 영화를 이어주는 고리는 계절의 연속적인 흐름이 아니라 이르거나 늦어진다는 식의 연결성이다. 이러한 사실은 오즈의 영화가 단순히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식으로 인생의 기쁨과 슬픔, 시간의 경과에서 오는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말해준다. 즉, 노인이 죽거나 자식이 때가 되어서 출가한다는 식으로 오즈의 가족 영화를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오즈의 영화에서는 늘 연결고리가 있고 이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만춘>과 <꽁치의 맛>은 자신이 ‘늙어가고’ 있으며 딸 또한 ‘노처녀’가 되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늦은’이라는 연결고리가 있다. 그러나 전자는 ‘늦었다’는 점에서 슬픈 감정이 들고 후자는 ‘오후’라는 점에서 인생의 말년이 더 강조된다. 즉 이들 각각은 둘 사이를 잇는 연결고리가 있으면서도, 손을 내미는 쪽의 인물은 다르다.


슬픈 점은 자신의 마음을 잘 드러내지 못하는 쪽, 그러니까 손을 내미는 쪽의 인물들이 항상 무언가를 떠나보내게 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오즈의 영화에서 고백하는 이들은 늘 지고야 만다. 이들이 속내를 드러내는 순간 그것을 목격한 쪽의 상대방이 떠나버린다는 점을 보면, 오즈에겐 본다는 것에 대한 편집증스러운 면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까 마치 오즈 영화에서 목격담은 일종의 금기처럼 느껴진다(<동경 이야기>에서 아내가 죽자, 류 치슈는 며느리에게 시계를 넘긴다). 예를 들어 1959년의 영화 <부초>는 떠돌이 악단 아버지와 그걸 모르고 고아처럼 자라온 아들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가 아들을 보고자 마을에 찾아오고, 아들이 이를 눈치챔으로써 이들 사이에는 갈등이 자라난다. 그런데 이상한 건 이들 사이의 연결 순서이다. 아들이 그가 아버지임을 눈치채고 손을 내밀었을 때, 아버지는 이미 마을을 떠나고 없다. 이 자각은 영화의 거의 마지막에 이루어지기에 내러티브 상으로는 별다른 문제 없이 이어지지만, 생각해보면 굉장히 이상하다. 목격한 쪽이 아니라 목격당한 쪽이 죽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마치 총을 맞은 사람처럼, 응시당한 이가 죽어버리는 셈이다. 이 이상함은 <동경의 황혼>(1957)에서도 있다. 집나간 어머니가 딸을 보려 찾아왔을 때,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임을 알아채고서 모진 말을 하는 장면 이후에 그녀는 문득 죽어버린다. 왜 하필이면 매정한 부모가 아니라 가련한 딸이 죽는가? 오즈의 영화는 철저히 고백담(=목격담)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오즈의 영화는 늘 무언가를 고백하는 형식이기에 고백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러한 생존은 영화 속에서 퇴장하는 일과는 별다른 관계가 없다. 오즈의 영화에서 마음을 고백하는 쪽이 여전히 스크린에 남는다고 해서 그들이 성공 혹은 생존했다고는 볼 수 없다. <동경의 황혼>에서는 딸이 어머니에게 먼저 마음을 고백하지만 이내 그녀는 병에 걸려 죽는다. 그러나 고백을 당한 쪽, 그녀의 어머니도 영화 안에 계속 남아있지 못하고 다시금 떠나간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고다르가 “영화의 처음과 끝이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던 것을 다시금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영화가 처음에서 끝으로 나아갈 필요가 없다는 말은 끝에서 시작으로, 혹은 다른 방식의 배치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는 영화의 연속성이 아니라 연결성에 무게를 두는 것으로, 우리가 흔히 내러티브라고 말하는 개연성의 논리가 아니라 영화 속의 이어지는 시간에 주목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어지는 시간이라는 말이 영화의 완결 논리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 시간은 픽션과 논픽션 사이를 이어준다는 점에서 상호소통적이다. 오즈의 영화로 예를 들자면, 딸의 시간이 아버지의 시간과 어떻게 이어질 수 있는지를 자문해 볼 수 있다. 딸이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까? 아버지와 딸의 시간은 다르다.


<꽁치의 맛>에서 류 치슈는 술집에서 수병가를 부르는데, 이는 그가 전쟁을 겪은 세대임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딸은 전쟁 이후에 태어났으며 당연히 아버지와 통하지 않는 몇몇 가치관이 있다. 이런 구분은 가족 영화라는 틀 안에서 세대 차이, 혹은 세대 갈등이라는 면으로 오즈에게 드러나며 이것은 오즈 영화의 단절을 구성한다. 그러나 시작과 끝의 배치가 비교적 자유롭다면 그런 단절은 별다른 문제가 되지 못한다. 단절이라는 말은 시작과 끝이라는 선형적 구조 안에서만 성립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모든 시간을 시작과 끝으로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역사 속의 몇몇 사건들을 내 일처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즉 역사는 영영 이해되지 못할 것이며, 우리는 그런 역사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오즈는 이런 문제를 드러냄의 과정으로 이해한다. 오즈의 영화는 가족의 시간을 기록으로 남긴다기보다, 보이지 않던 시간을 고백함으로써 서로에게 가시적인 형태로 드러내는 식의 형태를 취한다. 이때 단절은 오히려 그들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단서가 된다. 오즈 영화에서 관계는 기본적으로 단절된 시간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들이 서로에게 속내를 고백할 때 이들 시간은 비로소 ‘붕괴’한다. 즉 둘 사이를 규정하는 시간적 틀이 사라짐으로써 연속이 사라지고 연결이 들어선다. 단지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만 계보학적으로 파악되던 관계가, 이제는 마음이 연결되는 것으로 탈바꿈한다.


연속된 게 사라지고 연결이 들어선다는 대목은 오즈 영화를 구성하는 효과 중 하나인 침묵으로 이어진다. 영화를 하나만 꼽자면, 1932년의 영화 <태어나기는 했지만>을 리메이크한 <안녕하세요>(1959)에는 말하지 않는 아이들이 있다. 아이들이 말을 하지 않게 된 건 단순한 투정에 가깝지만, 그 파급력은 엄청나서 이웃 관계에 악영향을 주었다. <부초>에서 남편과 아내가 한 뼘 치 공간을 두고서 재회하는 장면을 떠올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폭우가 내리치는 가운데 양쪽 건물 동을 두고 마주한 두 남녀의 목소리는 서로에게 닿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동경 이야기>에서 며느리는 류 치슈의 말에 침묵을 지키며, <동경의 황혼>에서도 어머니는 자신에게 화를 내는 딸을 두고서 아무런 말을 꺼내지 못한다. 그리고 오즈의 영화에서 이상한 점은 이러한 침묵의 관계가 누구로 인해 시작되었는지, 끝나게 되었는지와는 무관하게 먼저 고백하는 쪽이 늘 져버린다는 것이다. 즉, 무언가를 본 쪽이 세상을 뜨거나 혹은 자리를 뜨게 된다. 그래서인지 오즈의 인물들은 늘 사선에 서있다. 대화하는 장면을 찍은 180도 쇼트에는 서로 마음이 닫혀있고, 진솔하게 대화하는 장면에서는 서로 눈을 안 마주치거나 혹은 대각선으로 나란히 서있다. 그러나 이런 불일치를 마냥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즈의 영화는 그렇게 불연속적이기에 연결성을 획득할 수 있다.


이제 글을 마무리하면서 오즈 영화의 속도에 대해 다시금 재고해볼까 한다. 오즈 영화에서 인물들이 대각선으로 걷는 것처럼 보인다면, 이는 나란히 걸을 때 상호 간에 속도를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사선으로 걸을 때는 얼추 맞기만 하면 되지 꼭 같은 속도로 걸을 필요는 없다. 말하자면 오즈 영화에서 대각선의 의미란 이들의 관계가 꼭 순서를 이룰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단지 눈빛만이 통하면 되는 것이고 그렇게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기만 하면 될 뿐이다. 이 연결성이야말로 들뢰즈가 지적했던 오즈 영화에서 화병의 의미일 테다. 철학자이자 시네필이기도 했던 들뢰즈는 『시간-이미지』에서 오즈의 화병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늦봄>의 꽃병은 딸의 엷은 미소와 복받쳐 오르는 눈물 사이에 삽입된다. 그 사이 무엇인가가 생성되고 변화하고 지나간다. 그러나 그 자체는 변화하지도 지나가지도 않는다. 이것이 바로 (…) 변화하는 것들에 부동의 형태를 주면서 그 내부에서 변화가 생성되도록 하는 직접적인 시간-이미지이다.” 그리고 이 말은 어딘지 모르게 카벨이 “현실 그 자체의 연속적인 투사를 통해 이 연결을 획득하는 능력에 의해 가능해진”다고 했던 것을 떠오르게 한다. 오즈의 영화 속에서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그가 보여주려는 현실이 연결을 위해 노력하는 세계여서인건 아닐까. 어쩌면 이는 오늘날의 우리가 여전히 오즈의 시대와 연결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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