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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Sep 12. 2021

뻥 뚫린 화면을 바라보며

<모가디슈>를 보며 들었던 생각 중 하나는 이 영화가 어딘지 모르게 근래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사실 평소에도 영화를 보며 그런 구석을 많이들 생각하는 터라, 이번에도 어지간히 착각이겠지 싶었는데 이번엔 뭔가 좀 달랐다. 무언가 떠오를 듯했지만 아직은 알 수 없었고 그렇게 일주일 정도의 시간을 보냈다. 그 후 문득 알게 된 사실은 지금 우리 시대가 비대면을 요구한다는 점이었다. 1990년대 말에 말하던 비대면 사회가 아니라, 지금 당장에 닥쳐온 현실 말이다. 


전염병이 돌기 시작한 후로 비대면이라는 말은 마치 메타버스처럼 우리네 현실에 덮어 씌워졌다. 모든 일상을 계속하면서도, 평소라면 ‘비일상’적일 만한 행동을 시도하게 되었다. 모든 수업을 화상통화로 한다든가, 두 명을 초과해서 약속을 잡으면 안 된다든가 하는 일 말이다. 이 모든 비일상적인 일들이 평소라면 코미디였겠지만 이제는 그게 평소가 아니게 됨으로써,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이 더는 ‘비일상’일 수 없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그걸 ‘비일상’이라 말해버리면, 우리들 또한 결국에는 ‘비정상’적이라는 뜻밖에 안 되었으므로 그렇다.  


자해라는 반쪽의 재난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비일상과 비정상의 구분이다. 비(非)라는 말은 ‘아니다’라는 부정사이므로 이는 각각 다음처럼 풀이된다. “일상이 아니다, 정상이 아니다.” 그런데 일상이 아니라는 말이 정상이 아니라는 말과 같은 선에 놓일 수 있는 걸까? 일상이라는 말이 정상의 시기를 영유하는 상황을 뜻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충분히 이해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상과 비일상의 자리가 뒤바뀌는 순간이 온다면, 무엇이 정상이고 비정상인지를 마땅히 구분 짓기 어렵게 된다. 이 둘은 모래시계처럼 한 번에 뒤집히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혼돈이 매번 찾아온다는 점이다. 우리가 비일상에 익숙해져 그것을 일상으로 받아들일 무렵, 또 다른 무언가가 이 자리에 찾아오고 다시금 혼돈은 반복된다. 


어쩌면 변증법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이런 생각이 <모가디슈>를 관통하는 하나의 물음이기도 하지 않을까 싶다. 그에 대한 이유로는 첫 번째, 이 영화는 재난 장르에 해당하지만 그와 동시에 완전한 재난은 아니다. 영화에서 이들의 목표가 생존이긴 하지만, 모국에서의 생존이지 현장에서의 생존은 아닌 듯 보인다. 생존을 위해서는 외부에 도움을 청해야 하는데 그러면 결국 상대와 협조했음을 알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를 마주한 이들의 첫 번째 고민은 안기부와 보위부에 ‘이것’이 들키면, 문책을 피할 수 없으리란 점이었다. 예컨대, 소말리아에 벌어진 사태는 완전한 의미에서의 재난은 아니었다. 나머지 반쪽은 북측과 남측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고, 이를 통해 영화는 비로소 재난의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이 대목에서는, 그동안의 한국 영화가 묘사하는 남북 간의 갈등은 둘 중 하나가 희생하는 것으로 끝났었다는 지적을 떠올리게 된다(김병규). 둘 중 하나가 희생한다는 건, 나머지 하나를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한 희생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그들 영화는 철저히 시선의 주체를 상정했던 셈이다. 이들 영화는 그런 희생을 보여줌으로써 제자리로 돌아가야 할 누군가에게 빈자리에서 오는 슬픔과 그것이 채워짐에서 오는 희망을 동시에 보여주려 한다. 즉, 의도적으로 상처를 내어 이를 보살핀다는 점에서 학대를 종용한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흥미로운 경험을 하고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가는 할리우드의 액션영화 플롯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남북 문제는 그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남북은 본래 하나였고 말하자면 이들은 형제다. 하나의 몸에 두 개의 인격이 있는 상황이고 이들이 벌이는 건 일종의 주도권 싸움이다. 그러니 남북이 서로에게 칼을 겨누는 건 사실상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는 행위나 마찬가지인데, 이는 즉 남북을 다루는 영화에서 어느 한 쪽의 희생을 요구하는 건 일종의 자해나 마찬가지라는 소리다. 그런데 상처에서 회복함으로써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게 된다면, 자해도 그런 기준을 충족시킬 수 있을까? 말하자면, 피를 흘리면서 강해지는 버서커(광인)은 가능할까?  


자해를 하는 사람들의 심리


자해를 하는 사람들에겐 그런 심리가 있다고 한다. 몸을 제거함으로써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행위 말이다. 하지만 몸이 없을 때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몸이란 영혼의 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하이데거). 말하자면 영혼이 자신이 누구이고 돌아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알 때, 어쨌거나 몸은 존재한다. 이런 맥락에서 자해는 부재와 희열을 동시에 취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라깡식으로 말한다면, 나는 여기에 없기에 오히려 그곳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쟁점은 ‘그곳’이란 과연 정말로 존재하는가?일 테다.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상태, 즉 자아의 부재가 희열을 발생시킨다는 말은 그런 희열이 집약될 장소가 없는데 어찌 가능하냐는 난관에 부딪힌다. 육체가 영혼의 집이라면 영혼의 기쁨을 담을 집이 없는데 어찌 영혼이 행복해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결국 이 말은 한국 영화에서의 북한이라는 타자가 왜 끊임없이 등장하는지에 대한 한 가지 이유가 된다. 우리가 행복해지려면 결국 북한을 조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누군가에게는 금단의 구역이라고도 할 수 있을 그곳은 우리가 모두 떠나온 곳이라는 점에서 근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중인격이라는 말이 아니라 아직 살펴보지 않은 미개척지대라는 표현이나, 비일상이나 비정상이라는 말처럼 ‘한국이 아닌’ 곳으로 보아야 한다. 양측은 서로가 없으면 성립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정상이라는 말이 비정상이라는 말과 한 세트이듯이 말이다. 서로에게 돌아가려 한다는 점도 유사하다. 남한이나 북한이나 최종적인 목표는 통일이라는 점을 헌법에 못박아 두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그런데 이런 영화들에서 우리가 보는 건 빗금처진 몸이다. 몸에 빗금을 치지 않으면 그 몸은 제대로 조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북한이라는 타자를 만나게 되는 상황은 <쉬리>에서처럼 간첩의 형태이거나, 혹은 <백두산>에서처럼 긴급한 피난 사태, 마지막으로는 <베를린>에서처럼 한국이 아닌 전혀 다른 곳에서로 한정된다. 즉 예외적 몸의 형태, 영혼과의 고리가 느슨해지는 혼돈의 시기 말이다. 그런데 혼돈의 시기는 어디까지나 ‘예외’일 뿐이기에 그들은 다시금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많은 이별과 만남이 찾아오며, 상처와 회복이라는 주제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이쯤에서 그러한 혼돈이 고착화될 가능성을 떠올려볼 수도 있다. 처음에 사람들이 코로나바이러스를 두고서 예외적 재난으로 생각했지만, 지금은 정부가 나서서 ‘위드 코로나’를 외치는 실정이다. 마치 죽음을 받아들이는 다섯 단계처럼 사람들은 이 재난에 협력하기 시작했다. 극도의 우울감은 이제 수용의 단계에 들어섬으로써 그들이 우리와 같은 현실에 살고 있음을, 비정상 사태를 정상으로 되돌리는 방법은 현실을 바꾸지 않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해주었다. 현실을 바꾸려면 현실이 바뀌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게 이 사태의 아이러니다. 


북한을 다루는 영화들이 저지르는 몇몇 실수는, 그러한 현실이 바뀌지 않는다는 점을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고서 선을 넘을 때 벌어지곤 한다. 여기서 내 입장이 완고한 적대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이건 몸의 문제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항상 몸이 그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몸을 혐오하는 사람은 ‘몸이 아니게 되는’ 게 아니라 그냥 영혼이 소멸해버린다. 그런 이유로 <모가디슈>에서는 모두가 자기들의 신념을 따르지만, 때때로 이는 한민족이라던가 동포라던가 하는 말로써 위반된다. 하지만 이 위반은 집에 대한 배반이라서 위반인 게 아니라, 빗금 처진 몸이 거기에 있다고 느낀다는 점에서 위반이다. 이들은 서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선을 넘은 것이지, 조국을 배반했기에 진정으로 선을 넘은 게 아니다. 즉 이들 서로에게 ‘아닌’ 것이 아니라 ‘빗금’이었고, 이런 빗금에서 탈피해 서로를 ‘아닌’ 것으로 만드는 화법이 바로 모가디슈에서의 공존이다. 


남북을 다루는 영화에서 어느 한쪽의 희생을 종용하는 행위는, 그런 부재를 타인의 것으로 몰아세우고 자신은 희열만을 취하는 이기성을 띤다. 북한을 희생자로 만듦으로써 남한을 생존자로 만드는 이 논리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다. 그런 점에서 <모가디슈>는 기존에 북한을 다루었던 영화보다는 한층 더 진보한 이야기 구성을 갖고 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이런 상황이라면 어쩔 수 없다는 식의 타협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건 결국 하나의 세계(몸)임을 직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사람들 


다른 한편 김철홍 평론가는 <모가디슈>를 두고서 이들이 세계의 시선을 더 의식한다고 지적한다(씨네 21, 08.18). 이 말은 영화 안의 세계로부터 그들을 점점 더 고립되게 만들지만, 반대로 그런 고립으로 인해 고립에서의 돌파구가 발견된다는 점이 이 영화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비대면 사회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가치 또한 그러하다는 점이다. 


안시환 평론가는 과거에 카페가 사람들끼리 모여 담화와 대담을 즐기는 장소였음을 언급하면서, 오늘날의 카페는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노트북, 또는 스마트폰 안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장소가 되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가까이 있는 이는 무섭고, 멀리 있는 이가 오히려 더 친근한 사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결국에는 사람들이 고립에서 고립을 돌파할 방법을 찾았다는 말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마치 <모가디슈>가 소말리아의 소요사태를 통해 양측 대사관 직원들을 고립시키고, 이를 통해 고립된 두 진영을 하나로 이어주었다는 식의 해석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핵심은,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이 어느 한 순간에 친근감을 느끼는 일을 일종의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다. 중요한 건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이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고 하나의 안건으로 올려보는 게 <모가디슈>의 역할이다. 


이 흐름의 연장선에서 <싱크홀>은 생뚱맞은 영화로만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싱크홀은 2010년대 들어 한국에서도 자주 발견되는 재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빌라가 통째로 가라앉는다는 허구성이 가미되어 있다. 완전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맞는 말이라고도 볼 수 없다.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맞는 말은 부동산 가격일 것이다. 열심히 돈 모아 산 빌라(대출을 절반 이상 껴서 구매한)가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상황은 2021년의 한국에서 보기 어려운 풍경은 아니다. 하지만 영화가 보여주려는 건 그런 일을 배경 삼아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는 게 아니다. 이 영화에서 싱크홀은 앞으로의 상황을 보여주기 위한 배경설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오히려 외부와 제대로 소통할 수 없다는 고립의 상황이 더 중요한 것 같다. 구조대는 생존자를 구조하려 하지만 결국에는 실패하고야 만다. 오히려 재난민들이 자력으로 탈출하는 게 더 빨랐다. 이 과정에서 스쳐 지나가는 건 빌라 옥상에 있던 물탱크에 사람들이 들어가는 장면일 것이다. 이 장면은 고립된 공간에 물이 차오른다는 점과 구조대는 지켜만 볼 뿐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2014년의 세월호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다. 하지만 그 맥락은 다르다.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건 재난에 대한 대처 능력이 아니라, 재난이 각기 다른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방식이다. 왜냐하면 서로를 잘 알지도 못했고, 혹은 대립하기도 했던 이들이 싱크홀 사태로 인해 허물어진 층간을 마주하게 되고, 이를 통해 하나의 생존자 그룹을 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재난을 통해 얼굴을 마주하지 않던 사람들이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기존에 있던 경험이나 처지의 문제가 재난이라는 ‘비(非)’의 상황을 통해 허물어지고 나면, 이들은 가장 원초적인 욕망 안으로 내쳐진다. 같은 빌라에 살면서도 고립된 삶을 살아가던 이들은 이제, 하나의 천장만을 바라보게 된다. 하루아침에 일상이 비일상으로 변해버린 이들에게 ‘아닌 것’의 가치는 ‘무언가인 것’으로 이동한다. 말하자면 이 싱크홀에서 재난민들이 얻은 건, 서로의 얼굴을 ‘아니’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이다. 


분명 같은 공간에 있음에도 서로의 얼굴을 빗금친 채 살아가는 상황에서, 이는 충분히 교훈이 될 만하다. 어쨌거나 세상은 하나고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점 말이다. 그와 반대의 일도 가능하다.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게 서로 다른 세상을 살아감을 보여주는 건 아니다. 한자리에 있지 않더라도 고립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우리 시대에 있다. 예전에 그런 방법은 땅에 뚫린 구멍처럼 이상한 예외로 느껴졌지만, 정작 그 꺼진 구덩이 안에 들어가고 나면 그런 구멍은 하늘이 된다. 즉 구덩이에 빠지는 일이 하늘로 나아가는 일이 되어버린다. 


그러니까 결국, 이 구멍은 이미 죽은 자들이라는 ‘아닌 것’이 아니라 실종자라는 ‘무언가인 것’을 보여주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빈 자리를 밟고 나아가는 게 아니라, 그곳에서 무언가 희망을 보아야 하는 게 아닐까? 비대면 사회를 영유하는 우리는 죽은 이들과 대화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서 실종된 이들을 화면에서 찾고 있다. 처음에 이 화면은 땅에 뚫린 구멍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 안에서 사람들이 보는 건 저 멀리 작게 보이는 희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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