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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l 13. 2021

중력에서의 해방과 욕망의 진자운동

<인트로덕션>(2021)


홍상수의 영화들이 ‘현실적’이라고 말해왔던 시절은 코로나 이전의 삶처럼 완전히 멀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허구는 현실 세계에 반대되는 상상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허구는 불일치를 가져오는 작업이다.”(『해방된 관객』, 현실문화, 2016, p.92) -자크 랑시에르-




홍상수의 영화들에서 성의 모티프가 자주 언급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라면, <인트로덕션>(2021)을 보면서 의아해할 수 있는 지점이 몇 가지 있다. 첫 번째는 영화의 27분 12초경에 김민희가 “충동이 있어야 살아있는 거지. 안 그래요?”라고 말하는 대목이다. 여기서 충동이라는 말은 다음 두 가지 장면에서 홍상수의 전작들을 떠올리게 한다. 먼저 48분 40초~ 52분 10초의 술자리 시퀀스에서 신석호가 자신은 사랑 연기를 할 수 없으며, 그 이유는 “그런 행위를 가짜로 한다는 건 좀 죄스럽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반면 기주봉은 “그건 다 사랑이야. 작게라도 좋은 것밖에 없어. 그게 얼마나 귀한 건데.”라고 답한다. 우습게도 이 말은 전작인 <강변호텔>(2019)에서 기주봉이 죽음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떠올리게 하는 면도 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곳에서와 달리 이곳에서는 풍경이 이야기에 제약을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인트로덕션>은 바깥과 상호소통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그렇다면 남은 건 자신과의 소통, 즉 자기 지시성(self-referentiality)일 테다. 이에 따라 이 사랑이라는 말이 김민희가 말하는 충동, 그중에서도 ‘성충동’으로 이해된다면 어떨까. 성욕이 아니라 욕망에 관한 이야기 말이다. 김민희의 말처럼 인간에게 욕망이 충동이라는 말로 표현된다고 가정할 때, 그것은 성충동이라는 상승의 힘과 죽음충동이라는 하강의 힘으로 나뉜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해 이는 중력을 역전시킴으로써 성충동과 죽음충동의 자리를 바꿀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서는 중력을 통해 존재하는 위상인 Z 축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이 글에서 나는 홍상수의 영화를 횡단할 생각이 없지만, 그러한 언급을 위해 <생활의 발견>(2002)에 나오는 가상의 회전문처럼 홍상수의 영화를 이분법으로 제단하는 행위가 그동안 빈번해왔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다. 홍상수의 남자들은 한심하고 편협하거나, 홍상수의 여자들은 늘 대상화되고 상징화된다는 게 이런 의견 중 하나다. 이러한 이분법으로 작품을 바라보는 행위는 이야기 안에서 어느 지점이 갈림길인지와 같은 문제에 몰두하게 한다는 단점이 있다. 이는 필연적으로 미끄러짐을 동반하는데, 그 이유는 이 해체의 형식에서 열린 게 영화가 아닌 바깥이어서다. 서사의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말은 그만큼의 미끄러짐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는 점을 명심하자. 혹자는 형식 안에 존재하는 선택지가 무한한 가능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선택지를 미끄러지게 하는 건 오히려 형식이다. 형식은 파괴를 전제함으로써만 존재하기에 오히려 그러한 선택지가 자신을 배반하게끔 유도한다. 따라서 이 대목에서 우리가 이야기해야 하는 건, 그러한 형식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다.



여기서 나는 홍상수 영화의 축이 바뀌었다는 점을 언급해두려 한다. 2D에서 3D로 말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두 차원 간의 차이점은 높이를 담당하는 Z 축이 있다는 것이다. Z 축을 도입함으로써 우리는 미로처럼 보이는 갈림길에 구애받지 않을 수 있고, 이는 홍상수 영화에서 클로즈업의 활용이 점점 변화하는 경향에서도 확인된다. 홍상수의 초기작 등에서 클로즈업은 과격하고 급진적인 확대를 동반했던 반면, 홍상수의 근작들에서 클로즈업은 어떠한 발견의 순간이라기보다 트래블링 이후의 클로즈업으로 이어지는 때가 잦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는 단순히 숏이 이어진다고 해서 롱테이크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어쩌면 세계가 X와 Y가 아닌 Z로도 이루어졌다는 점을 상기시키려는 의도일 수 있겠다. 달리 말해서 이는 세계가 어떤 발견의 순간(미끄러짐)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발견이 사라진 세계에는 무엇이 새로 들어올까? X와 Y의 간극이 아니라 Z축의 중력이 들어선 세계에서 인물에게 주요한 영향을 미치는 건 퍼즐게임이 아니라 거대한 힘과의 대결이다. 이 힘이 바로 중력이다.



여기서 혹자는 성충동과 죽음충동 또한 두 가지 사례라는 점에서 이분법이 아니겠느냐고 물을 수도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는 하나의 근원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당기고 끌어당기는 두 개의 방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상승과 하강이다. 그러한 점에서 홍상수의 영화는 점점 유령처럼 변해가는 듯 보인다. 디지털 시대에 보편화된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각은 줌 인과 줌 아웃의 기술, 상승과 하강의 관점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리고 이 전언에서 우리는 세상을 부유하는 유령이 될 수 있으며, 이곳에서 시선은 국경이나 경계가 아니라 디지털 픽셀의 교묘한 검열 시스템을 통해서만 배제된다. 따라서 이는 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관계가 명확했던 과거와는 다르게 볼 구석이 있다. 오늘날 이 유령은 우리 세상과 괴리된(배제된) 존재가 아니라 같은 장소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Z축의 존재이다. 같은 이유로 <인트로덕션>의 카메라는 정신분석학의 가면놀이를 하지 않는다. 발견이 이루어지려면 타자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하는데 이곳에 근본적 타자란 없기 때문이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선은 모든 것을 평면으로 만들며 여기서는 늘리고 당기는 힘이 사용된다. 검은 장소는 강한 목적성을 띠기에 중력이 고도로 밀집되어 있으며, 무엇이 자신을 끌어당기는지를 알아차리는 일은 중력을 인지함으로써 가능하다.








이 글에서 나는 중력이라는 말을 정신분석학과 다른 맥락에서의 욕망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하려 한다. 욕망이란 우리가 추구하려는 대상이 아니라,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힘을 뜻한다. 또한 육체와 유령의 관계를 두고서, 유령에게 중력을 부여하는 게 바로 육체이고 이에 따라 육체 없이 유령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이에 따라 유령에게 목표는 자신의 육체에서 벗어나는 일, 즉 탈출하는 게 된다. 여기서 다시금 김민희가 충동을 언급하던 대목으로 돌아가보자. 신석호에게 키스나 포옹 같은 행위는 감히 연기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행위인데, 왜냐하면 그에게 사랑이란 육체로부터 기원하기에 사랑을 연기한다는 건 곧 육체를 속이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즉 신석호에게 사랑은 육체의 문을 넘어서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반대로 말해 그에게 육체는 언어를 발화하는 어떤 주체이기도 하다. “배우 잘하게 생겼다”는 말을 듣고서 연기에 입문했던 석호는 연기를 몸으로 하는 것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사랑이라는 언어를 말할 수 없었다. 반면 기주봉에게 연기는 육체로 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일이다. 그에게 사랑이란 신체의 반응이 아니라 언어의 물질적 교환으로부터 파생되는 물질적 외견에 더 가깝다. 예컨대 신석호가 사랑을 육체의 껴안음으로 파악한다면, 기주봉은 사랑을 일종의 관념으로 여긴다는 점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를 요약하면 탈출 없이 대상을 지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사실은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7)에서 김민희의 “모르겠다”는 말이 지시하는 욕망으로부터의 해방을 상기시킨다. 죽어야만 비로소 삶에 대해 알 수 있다는 모순 말이다. 욕망으로부터 해방됨과 동시에 죽음의 개념 또한 사라진다. 욕망이 없다면, 성충동과 죽음 충동 모두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밤의 해변>에서 나오는 바다는 모순되고 중첩된 상태로서의 김민희를 보여준다. 그녀는 해변에 누워 마치 하늘로 떠나갈 것처럼 몸을 맡긴다. 하지만 <인트로덕션>에서의 바다는 그와 다른 맥락의 뜻을 지닌다. 영화의 54분 26초경에 나오는 바다에서, 신석호의 여자친구인 조소연이 자신은 죽을 병에 걸렸다고 고백하는 장면을 살펴보자. 석호가 “이리로 와. 일단 이리로 와서 이야기하자.”라고 말하자, 소연은 “여기는 다시 안 올라갈 줄 알았는데.”라고 답한다. 표면적으로 이 장면은 석호가 소연을 죽음으로부터 꺼내준다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우리의 맥락에서는 석호가 소연을 통해 욕망에서 자신을 끄집어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성충동 때문에 연기를 포기했었던 그가, 죽음충동 때문에 삶의 의지를 포기하려는 그녀를 구해주는 모습은, 두 개의 충동을 하나의 욕망으로 바라볼 때야 비로소 이해된다.



만약 바다가 욕망의 해방을 위해 준비된 무대라면, 바다를 거닌다는 건 오히려 그곳이 중력이 가장크게 작용한다는 점을 알기 때문일 수도 있다. 강한 중력이 시공을 왜곡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그곳은 가장 극적인 반전의 장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욕망은 김민희와 기주봉이 말했듯이 ‘살아있음’을 구성하는 원리이고, 영화 전체의 흐름에서 바다는 그러한 살아있음의 전환점으로 작동하는 일종의 쉼터 역할을 한다. 하지만 <밤의 해변>에서 바다가 삶의 저편에 있는 것, 즉 ‘반대편’이었다면 <인트로덕션>에서 바다는 삶의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좌표를 왜곡하고 빛을 휘게 만든다. 석호가 친구와 바다를 거니는 1시간 1분경의 시퀀스를 살펴보자. 두 사람은 석호의 어머니가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고 암시되는 방향을 바라본다. 하지만 “너희 어머니 우리 보고 있는 거 아니야?”라고 묻는 친구의 생각이 틀렸음을 석호는 말해준다. 즉 양측의 시선 방향이 일치함에도 두 사람이 바라보는 곳은 본질적으로 ‘불일치’ 한다. 여기서 핵심은 양측이 서로 반대되는 게 아니라 그저 불일치할 뿐이라는 점인데, 이는 이전의 술자리에서 사랑에 대한 논쟁이 그저 이분법만을 위해 준비된 무대가 아니었음을 우리에게 분명히 한다.



사랑할 수 없다면 죽을 수도 없거나, 죽을 수 없다면 사랑할 수도 없는 게 아니다. 기주봉이 신석호에게 전해주는 교훈은 사랑과 죽음이 하나라는 점이며, 산다는 것 또한 하나의 양태를 바라보는 프리즘적 분할인 것이지 마땅히 정해진 바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죽음이 절대적 진리의 양식이 아니라고 말해왔던 홍상수 영화의 공식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죽음이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면 사랑 또한 절대적 명령이 될 수 없으며, 그래서 홍상수 영화의 인간들은 부랑자(nomadian)다. 그런데 부랑자라는 말은 현대 사회에서 여행자라는 말로도 표현되는 바, 만약 여행자가 집 없이 정처 없이 떠도는 이라면 홍상수 영화에서 출발과 도착의 감각은 더는 찾아볼 수 없을 테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다. 평자들이 홍상수 영화에는 더는 서사가 없다고 지적해왔던 부분은 사실 이야기가 없는 게 아니라 출발과 도착의 지점이 없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 출발과 도착 모두 존재하지 않기에 홍상수의 영화는 점점 더 신화적으로 변한다. 도약과 안착의 지점 모두 옛날 옛적이라는 말로 사라지는 신화적 시간 말이다. 여기서 그러한 중력이 응집되는 곳이 바로 “열고, 벌리고, 꼬리와 머리의 공간을 만들어 그것들로 하여금 하나의 사건이 되도록 발생의 여지를 주는” 몸인 것이다. (장 뤽 낭시, 『코르푸스』, 2012, 문학과지성사, p.21)








<인트로덕션> 한 편만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강변호텔>의 연장선으로 본 영화를 바라본다면 전체적인 흐름은 이러한 중력으로부터의 해방에 있는 듯 보인다. 왜냐하면 충동을 하나로 이해할 때 오히려 그것은 죽음을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을 죽일 수도 없는 자가당착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김응수가 <오, 사랑>(2017)과 <초현실>(2017)이라는 두 편을 통해 살펴본 두 개의 관점처럼, 누군가의 죽음을 사랑하게 되는 일과 사랑하는 행위를 죽여야만 하는 상황은 병리적이다. 전자는 진정한 애도가 아닐 수 있고, 후자는 진정으로 애도하라고만 말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결정적으로, 이 두 가지 사례 모두에서는 정작 자신의 몸은 사랑받지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죽을 수도 없게 된다. 이런 모순 안에서 <인트로덕션>의 카메라는 부유한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혹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연속되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숏과 역숏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영화적 기법으로 볼 수 있지만, 이것은 서사적 연속성을 획책하는 것이기보다 차라리 둘 사이에 선택권을 쥐여주지 않으려는 고개 저음의 행태에 더 가깝다. 그런 점에서 바다의 모습은 좌우를 반복운동하는 진자의 형태, 즉 무한한 고개 저음의 인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바다는 지구 밖에 달이 있기에 파도를 유발한다는 점에서 ‘거대한 중력’의 상태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장소이기도 하다는 걸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점에서 바다의 움직임을 모방하는 영화 속의 부유 상태는 오히려 욕망을 담보하지 않기에 긍정적으로 보이는 면이 있다. 자크 랑시에르는 만약 영화가 허구라면, 그 이유는 스크린이 현실의 반대편에 서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현실과의 균열을 만들어내는 지점을 묘사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는 현실과의 흐름에서 벗어나는 장소로서의 영화인 ‘시네마’를 의미한다. 이때 시네마라는 말은 스펙터클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상품으로서의 영화가 아니라, 중력에 속한 우리에게 반중력의 흐름이 감지될 때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영화를 보는 이유는 단순히 영화 서사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할 뿐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영화와 영화관의 관계에 접목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관이 특정한 공간이 아니라, 영화를 보는 상태로의 진입과 그에서의 탈출을 뜻한다면, 영화를 본다는 건 진입과 탈출의 상태를 반복하는 진자운동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영화관은 영화로 진입하기 위한 예비적 단계로서, 그것이 현실에 있는 실체이든 아니면 미학적 관념이든 간에 영화관람을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는 영화가 일종의 비일상으로써, 일상에서 비일상으로 진입하려면 중간의 완충지대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귀인한다. 기주봉이 육체 없이도 사랑은 가능하다고 말했던 것처럼 진입의 단계만으로 영화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신석호가 시련에 빠진 여자친구에게 손을 내밀어 줄 수 있었던 것에는 어떠한 완충지점이 자리하지 않았다. 연기라는 것이 무언가를 재현하는 일이라는 착각에 빠지는 순간, 영화는 영화관의 환영에 사로잡히고야 만다. 일상의 반대편에 서있어야 한다는 생각 말이다. 만약 우리가 영화로 진입하는 어떤 단계를 설정할 경우에는 그것이 현실과 서사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될 우려가 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강박들로부터 벗어나야만 비로소 영화는 해방될 수 있다. 즉 영화는 진입이 아니라 탈출에서 출발할 수 있고, 이때 영화는 욕망이 하나의 삶의 성립조건이라는 점을 통해 우주로 나갈 탈출속도를 마련 마련해준다.



일상 속에서 발견하는 영화적인 순간들이 클로즈업의 형태로 발견되었었다면, 오늘날 시네마라는 것은 부유의 감각에 더 가깝다. 이를 위해 영화는 점점 출발도 도착도 아닌 사이 시간을 묘사하는 것에 몰두하지만, 사실 시간을 극도로 가속하면 사이 시간은 역시 찰나에 불과한 점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점은 현대 영상 매체를 구성하는 최소한의 구성단위이기도 하다. 홍상수 영화의 클로즈업이 더는 갑작스러운 발견을 지시하지 않는다는 점도 고려해볼 만하다. 확대할수록 증폭되는 것은 망원 풍경뿐만이 아니다. 우리 손의 떨림 또한 카메라 클로즈업에 고스란히 증폭되어 들어가는 것이다. 이는 아무리 매끄럽게 녹음해도 결과적으로는 잡음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 혹은 그러한 잡음이 있어야만 오히려 CG라는 완벽한 풍경이 존재하는 현실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영화 개인의 판단인 것처럼 보인다(홍상수의 영화들은 점점 화질이 열악해지고 있다). 이에 따라 단락을 구분 짓는 이정표는 마땅히 제거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가 말하는 연속성이란 이야기가 아니라 흐름(Flow)이기 때문이다. 이는 즉 우리가 추진력을 내는 게 아니라, 중력에 반발하는 탈출속도를 내는 것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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