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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n 13. 2021

“진실이라고? 됐거든!"

<사마에게>(2020)


영화가 시작하고 1시간 20여 분이 지났을 때에 나오는 대탈출 행렬을 잘 살펴보자. 카메라는 많은 환자를 살려낸 의사를 인터뷰한다. 영화의 주인공이자 감독인 그녀와 친구이기도 한 그는 카메라 앞에 서서 말한다. “중요한 건 장소가 아니라 거기에 있는 사람이에요.” 이 글에서 나는 이 문장을 중심으로 몇 가지 장면들을 간략하게 다루어보려 한다. 그 시작은 의사라는 직업이 영화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관해서다.



위의 인터뷰 장면에서 카메라는 약 31초 동안 의사의 얼굴만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 클로즈업과 롱테이크는 이어지는 다음 시퀀스를 의미적으로 보조한다. 인터뷰는 도시를 탈출하기 직전에 한 것이므로, 바로 다음 장면은 자동차를 타고 도시를 떠나는 모습이 나오게 된다. 문제는 역시 검문이다. 세력이 명확히 갈린 이 도시에서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내 어둠이 서린 밤, 피난민들의 행렬이 이루어진 가운데 감독과 의사는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눈다. 의사는 이미 반정부인사로 낙인찍힌 상태여서 잡히는 즉시 처분될 예정이고, 그래서 이 순간은 위독하다. 의사인 그가 환자들을 살릴 때처럼 아슬아슬한 생명 곡선이 묘사되는 상태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생명 곡선은 영화가 중심으로 다루는 감독의 딸 ‘사마’와도 관련이 있다. 영화 안에서는 수많은 생명들의 삶이 꺼져가지만, 그중 한 장면은 숨이 멎은 채로 태어난 아기가 기적적으로 숨을 내쉬게 되는 기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작중의 말처럼 “신이 도왔다”고 할 수 있을 이 기적은 전장의 한복판에서 태어난 감독의 딸 사마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이 감각을 설명하려면 다시금 영화의 첫 장면으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영화의 첫 장면은 감독 자신에 대한 설명이다. 이는 여러 자료들을 화면 위에 오버레이 해둔 것이어서 영화의 본격적인 시작이라고는 볼 수 없다. 진짜 영화는 바로 다음 장면에서 출발한다. 똘똘한 눈매의 아기를 바라보는 카메라의 눈길이 먼저 나오고, 그다음 장면에서는 폭격으로 인해 흔들리는 건물 안을 감독의 시점 쇼트로 보여준다. 예컨대 이 연쇄되는 이미지들은 생명의 경이로움이 불안한 삶의 터전 위에 건립되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은유적으로 말하자면 폐허에서 피어난 꽃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테다. 그런데 “중요한 건 장소가 아니라 거기에 있는 사람”이라는 문장을 생각하면, 이 은유에서 주목할 건 폐허가 아니라 꽃일 것이다. 그러니 이 영화의 제목이 <사마에게 For sama>인 것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잘 드러낸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살아가는 장소가 어디였든 간에, 중요한 건 이 영화가 사람들을 찍는다는 것이고, 영화가 택한 방법론은 장소에 대한 고발이 아니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예우’이기 때문이다.



이 예우에 관해서는 히토 슈타이얼의 글 한 편을 참조해보려 한다. 글 제목은 「그녀의 이름은 에스페란자였다」이다. 이 글에서 슈타이얼은 ‘로맨스 스캠’이라 불리는 신종 사기 수법을 예시로 가져온다. 로맨스 스캠이란, SNS상에서 낯선 외국 사람이 자신에게 보내오는 사랑의 구애, 그리고 그를 필두로 하여 돈을 요구하는 비대면 사기 수법을 의미한다. 이제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하는 슈타이얼이 가상으로 꾸며낸 사기의 사례이다.



“그는 그녀의 시신을 인도하기 위해 돈을 부쳤다. 충격으로 감정이 멍해져 있었다. 아무것도 중요치 않았다. (…) 이야기는 느닷없이 끝났다. 그의 친구가 온라인상에서 이것저것 검색을 해 보았다. 최근에 덴마크에서 살해당한 미국 시민은 없었다. 총격은 없었다. 에스페란자는 결코 실존하지 않았다. 그녀는 사기꾼 집단의 피조물이었다.”



그다음으로는 위에서 이어지는 가상 사례에 대한 슈타이얼의 논평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디지털 포스트-영어적인 언어들은 결함이 있는 것이 전혀 아니라, 이와 반대로 우리가 유감스럽게도 아직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도래할 세계에서 온 언어들이다. 로맨스 사기꾼의 언어는, 언어와 가치가 재난 자본주의의 정서적 플롯 내에서 현실을 놓아 버림에 따라 텅빈 가치 형태들이 영속적인 자유 낙하에 사로잡혀 추락하는 미래에서 온 메시지이다.”



이 문장에서 디지털 포스트-영어적인 언어라는 말은 오늘날 영어가 세계 표준어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지시한다. 로맨스 스캠의 경우, 사기꾼은 다양한 국적을 자처하는데 그럼에도 상대방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영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때 슈타이얼이 이를 ‘포스트 언어’로 규정하는 대목은 흥미롭다. 이 표현은 상대방과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언어의 일차적 속성이 사후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음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언어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물어야 한다. 언어가 없다면, 상대방과 어떻게 대화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이 질문은 진실이 사후적으로 만들어짐을 의미하는 ‘포스트-진실’의 맥락을 떠오르게 한다. 포스트-진실이란, 광주 민주화 운동처럼 오직 기록으로만 접근할 수 있기에 알 수 없는 현장의 진실 등이 사후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믿음이다. 여기서 내가 사후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진실이 이미 죽었다는 것이고,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건 과연 그렇게 만들어진 진실을 옳다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의구심이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언어란 상대방과 나 자신 사이에 소통할 수 있는 지점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데, 과거의 역사와 오늘날의 우리 사이에 소통할 수 있는 지점이 없다면 역사의 진실이 밝혀질 수 있겠는가?



슈타이얼 또한 이러한 의구심을 지닌 듯 보인다. 인용문에서 ‘유감스럽게도 아직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도래할 세계’라는 대목이 그걸 보여준다. 이 문장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어떤 도래할 세계라는 두 가지 지점을 모순의 형태로 엮어두고 있다. 중요한 건 그다음이다. 슈타이얼이 ‘도래할 세계’로 지정하는 건 ‘재난 자본주의의 정서적 플롯 내에서 현실을 놓아 버림에 따라 텅빈 가치 형태들이 영속적인 자유 낙하에 사로잡혀 추락하는 미래’이다. 여기서 자유 낙하라는 말이 슈타이얼의 빈곤한 이미지론에서 귀인했음을 고려한다면, ‘텅빈 가치 형태들’이라는 말은 아마도 빈곤한 이미지의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빈곤한 이미지의 맥락으로 ‘텅빈 가치 형태들’을 파악하는 일은 그녀가 다른 글 「지구의 스팸」에서 스팸 메일을 정크 이미지에 빗대었던 맥락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왜냐하면 「에스페란자」 또한 로맨스 스캠이라는 디지털 사기 행각을 다룸과 동시에, 사기꾼들이 사기 대상을 물색하는 방법은 무차별하게 살포되는 스팸 메일보다는 보다 더 정교한 방식의 접근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때 그 정교한 방식의 접근이라는 게 언어 이전의 문제와 연결된다. 스팸 메일은 기록 매체인 ‘메일’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문건이고, 따라서 사후적으로 접근하는 게 가능하다. 반면 로맨스 스캠은 화면 너머에 정말로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전제하며, 실시간으로 소통해야 하고, 또한 서로 말이 통해야 하므로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에 해당한다. 그런데 로맨스 스캠은 일반적으로 외국 사람임을 가정하는 경우가 많다. 왜 그럴까? 이들은 언어 이전의 문제로 참가자를 끌어들임으로써 사후적 감정이 아닌 진실의 감정인 것처럼 느끼도록 그들을 유도한다, 는 게 슈타이얼의 결론이다.





위에서 ‘진실’이라는 단어에 의구심이 있다고 말했던 게 이 대목과 연결된다. ‘이해할 수 없는 세계’가 아무런 의심 없이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오게 되는 과정은 무엇인가. 가장 쉬운 접근법은 사랑일 것이다. 이른바 ‘진리의 죽음’을 운운하는 사람들에게는 진실이란 없거나, 혹은 어딘가에는 있지 않을까 하는 불가지론에 가까운 믿음이 있다. 이들에게 진실이란 일종의 로맨스와도 같아서, 어딘가에는 있을 운명의 단짝이 있음을 쉽사리 부정하지 않는다. 문제는 정말로 사랑하는 이와 운명처럼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해도 그것이 정녕 ‘붉은 실’인지는 그 누구도 확인해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사랑은 단지 개인의 믿음에만 의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의 감정은 비교적 언어 이전의 문제에 가까운데, 그와 마찬가지로 진실 또한 비교적 언어 이전의 문제에 가까워진 게 오늘날의 사회이다.



이러한 맥락으로 <사마에게>를 들여다보면 우리는 흥미로운 프리즘 하나를 얻게 된다. 그건 바로, 사랑과 진실 사이의 통찰이다. 어떤 의미에서 <사마에게>는 지구촌 어딘가에는 이런 사람들이 있고, 이렇게 긴급사태에 처한 이들을 한시라도 빨리 도와주어야 한다는 식의 홍보물처럼 보일 수 있다. 그 홍보물이란 대개 [이 아이들은 도움이 필요해요]라는 식의 호소에 의존하곤 한다. 그런데 누군가는 이를 보며 다음처럼 생각할 수 있다. “이 아이들이 정말로 있을까? 혹시 구호단체가 애초에 있지도 않은 아이를 두고서 돈만 빼먹는 건 아닐까?” 이 의심은 우리가 그들을 실제로 대면해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불신이라는 점에서 합당하다. 슈타이얼이 발견한 로맨스 스캠의 문제처럼, 구호단체의 홍보물은 언어 이전에 진실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호소한다. 이는 감독이 그녀의 딸 사마에게 보내는 모성처럼 절대적 진리로써 작동하기를 대중에게 호소하는 것이다.



그러니 일각에서 제기되는 “유니셰프의 홍보물은 명실상부한 빈곤 포르노에 가깝다.”는 비판에는 논리적 결함이 없다. 빈곤이 정말로 실존하는지는 죽어가는 아이들을 눈으로 목격할 수 없다는 점으로 인해 쉽사리 결단에 이르지 못한다. 유니셰프의 홍보물에서 아이들은 단지 이미지상으로만 존재하고, 심지어는 같은 이미지들이 무더기로 복사되어 네이버, 다음, 혹은 개인 블로그 등에서 빈곤한 이미지의 형태로 발견된다. 이것들에 원본은 없고, 중심도 없으며, 따라서 우리가 아이들을 정말로 ‘있다’고 믿을 만한 진리의 이유 또한 사라져버린다.



여기서 개입하는 건 다시금 이미지의 문제이다. 영상이 지배하는 21세기에 언어라는 것은 대부분 영상 언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진실을 탐구하는 일도 이미지의 문제, 영상의 문제가 된다. 바꾸어 말해 슈타이얼이 말하는 빈곤한 이미지의 문제는 ‘빈곤한 진실’의 맥락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유니셰프의 홍보물에 관한 비판에는 논리적 결함이 없되, 윤리적 결함은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진실이라는 것은 인터넷 한복판을 오르내리며 점점 더 진리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오래전 [가족오락관]에서 헤드폰을 끼고 앞사람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던 풍경처럼, 진실은 전파될수록 더욱 진리로부터 멀어진다. 오늘날 인터넷을 통한 소식의 전파들이 그러한 것을 잘 보여준다. 이 자리에서 당장 떠올려볼 수 있는 몇 가지 좋은 사례들이 우리에겐 있다. 그리고 이 사례들에서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잘못되고 왜곡된 정보를 사실처럼 받아들이게 되는 게 아니라, 처음에는 사실이었던 것이 점점 더 빈곤에 다가서게 되는 일이다.



이 두려운 현상은 오래전부터 소문이라는 형태로 존재해왔지만, 그에 접속하는 언어가 문자에서 영상 이미지로 바뀌게 됨으로써 벌어지는 몇 가지 변화를 동반했다: 문자를 읽으며 무언가를 비판적으로 상상하던 일은 줄어들었고, 영상을 보며 그것들을 무지성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잦아졌다. 따라서 <사마에게>를 보면서 우리가 떠올려 볼 수 있는 생각 중에는 그런 것이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왜 생판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하지? 우리 사회의 문제만으로도 생각이 복잡한데 왜 지구 반대편의 소식까지 들어야 하지?” 혹은 이런 태도를 내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진실이라고? 됐거든!” 왜냐하면 우리가 알아야 할 진실 같은 건 이미 원본을 찾을 수 없게 된 빈곤한 상태에 접어들었으므로, 애초에 불분명한 해상도를 지닌 이 진실 따위의 원본을 추적할 필요성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사마에게>의 첫 장면을 떠올려보아야 한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진작에 빠져나가야 했을 이 도시에서 감독은 위험한 촬영을 계속한다. 이때 이 위험성은 위기에 빠진 장소에 계속해서 머무름으로 인해 발생한다. 아이를 키우기에 부적절한 환경이어서가 아니라, 카메라로 기록하지 않으면 진실이 될 수 없는 장소이기에 그렇다. 예컨대 이곳의 위험이란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생명의 위협이 아니라, 언제든지 진실이 죽어버릴 수 있다는 진실의 위험인 것이다.



물론 이 영화는 진실을 탐구하지 않는다. 감독 스스로 변을 밝힌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무엇이 정의이고 진리인지는 딱 잘라 말할 수 없다. 세 개의 세력으로 분할된 시리아에는 세 개의 사실이 있지만, 그중 무엇도 정답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곳에 필요한 건, 객관적으로 기록된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기록된 진실이다. “중요한 건 장소가 아니라 거기에 있는 사람이다”라는 작중의 대사는 그렇게 읽혀야 한다. 장소는 비교적 객관적인 흔적으로 남지만, 사람에 관해서는 기록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아이러니한 점은 언어는 전혀 객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 의미전달이 제대로 될 것으로 여기지만, 그렇지 않은 때도 많다. 반대로, 외국인과의 대화에서 언어가 아닌 비언어적 몸짓을 동원해보는 일을 떠올려볼 수도 있다.



위에서 슈타이얼은 “로맨스 사기꾼의 언어는, 언어와 가치가 재난 자본주의의 정서적 플롯 내에서 현실을 놓아 버림에 따라 텅빈 가치 형태들이 영속적인 자유 낙하에 사로잡혀 추락하는 미래에서 온 메시지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이 문장에서 ‘재난 자본주의의 정서적 플롯’이 “대안은 없다”는 문구를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것임을 안다면, 우리는 ‘대안은 없다’라는 문구에서 ‘진실은 없다’는 자조적인 목소리를 듣게 된다. 다시 말해서, “진실은 없다”고 말하는 이들의 생각은 어쩌면 “진실은 있는가?”라는 생각을 청개구리처럼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러한 생각에 대한 감독의 답변은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감독의 논리는 아이의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장소를 포착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사마의 환히 웃는 얼굴에서 이어지는 혼돈의 공간이 그곳에 있다. 이 장면의 흐름은 멈추었던 생명 곡선이 다시금 생기를 띠는 신생아의 모습과 정반대이다. 공간 또한 마찬가지다. 첫 장면에서 아기가 있는 방이 혼란에 빠진 병원 복도로 전환되는 흐름은 영화의 중간에, 혼란에 빠진 복도를 통해 심정지 상태로 태어난 아기를 되살려낸 생명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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