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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21. 2021

<스파이의 아내>의 동시대 의식에 관하여


우리가 구로사와 기요시의 <스파이의 아내>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이것이 역사를 소재로 한 ‘기요시’의 영화라는 점이고, 두 번째는 이것이 본래 TV 영화로서 기획되었다는 점이다. 전자에 대해서는 작가론적 접근이 필요하니 긴 여정이 될 것이고, 이에 따라 후자에 대해 먼저 말해보도록 하겠다. 내가 ‘TV 영화로서’라고 서술한 건 ‘~로서’의 사전적 두 번째 정의를 따른 것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로서’는 “어떤 동작이 일어나거나 시작되는 곳을 나타내는 격 조사.”라는 뜻을 지녔다. 따라서 ‘TV 영화로서’라고 말한다면, 이는 TV로부터 일어난 영화 혹은 시작한 영화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TV에서 출발한 영화란 무엇일까? 이 물음이야말로 <스파이>를 이해하는 단초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1. TV에서 출발한 영화


영화와 TV의 관계에 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대개, 기술적인 면에 몰려있다. 하지만 우리가 기술(technique)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면, 기술(description)에 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걸 놓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기술의 발달은 역사의 판도를 바꾸어 놓곤 하기 때문이다. 구텐베르크의 활자 기술이 인류사의 기술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음을 떠올려보자. 영화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는데, TV 영화가 바로 그러했다. 


TV 영화의 발명은 영화관에서만 볼 수 있던 ‘영화’를 각자의 가정으로 옮겨 놓았다. 이를 통해 영화는 모두와 함께하는 체험(Realistic)에서 가장 사적인 경험(Experience)으로 변모했다. 여기서 핵심은 극장 영화와 TV 영화 간에 기술적 우위가 있지 않다는 점이다. 만약 둘 사이에 기술적 우위를 상정할 경우, 모두의 체험이 사적인 경험과 직접 비교될 위험이 있다. 요컨대 체험과 경험 사이에 어떤 우열 같은 건 없다. 단지 공적인 것에서 사적인 것으로, 열린 장소에서 닫힌 장소로 넘어갔다는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이때 우리가 제기해볼 수 있는 물음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 영화의 정의를 명확히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극장과 가정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통해 영화를 정의하게 될 위험이 있다. 두 번째,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그리고 열린 장소와 닫힌 장소 사이에 존재하는 불일치를 해소해야만 한다. 


이 글에서 내가 영화라고 지칭하는 것은 카메라 기술을 통해 가능해진 기술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즉, 발터 벤야민이 시각적 무의식(optical conscious)이라고 불렀던 ‘빗겨나간 시선의 가능성’이다. 인간의 눈은 과녁의 정중앙을 정확히 바라보지만, 그로 인해 주변 상황은 쉽게 무시되곤 한다. 카메라는 그와 정반대의 일을 수행한다. 카메라는 주변 상황을 정확히 바라보지만, 우리가 의도적으로 보고자 하는 정중앙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무지하다. 그래서 영화의 의미작용은 항상 분산되며,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를 더 잘 보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러한 시선의 분산이 주변부의 사람들에게 더 잘 가닿는지까진 알 수 없다. 소위 말하는 영화의 지정된 흐름은 이 영화를 누가,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를 전제하는데, 그게 꼭 들어맞으리라는 법은 없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의미작용(크리스티앙 메츠, 『영화의 의미작용에 관한 에세이』 1편, 2편)이 분산된다고 가정한다면, 극장이 아니라 가정으로 송신되는 티브이 영화의 경우는 더 많은 화살을 과녁으로 보내는 행위일 것이다. 최대한 많은 곳에 화살을 보내야만 과녁에 꽂힐 가능성이 늘어난다. 그런데 문제는 이 화살이 여전히 꽂히지 않는다는 점, 그래서 오히려 의미작용의 분산을 더 가속하기만 할 뿐이라는 점에 있다. 헌데 그렇다면, 우리는 영화의 의미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 


만약 영화가 인류의 역사 이래 다른 이름과 형상으로 늘 존재해왔다고 가정한다면, 영화를 파악하는 일은 의식에 대한 지향성을 찾는 일과도 같을 테다. 요컨대, 영화는 늘 진리와 이상을 추구해왔으며 그것이 결코 성취되지 않을 목표이기에 우리를 전진하게끔 한다고 말이다. 결과적으로 영화란 역사를 움직이는 동인이자 우리의 목에 줄을 채우는 주인과도 같다. 주인의식이라는 것은 우리가 역사와 발을 맞춘다는 동반자 의식에 가까우며, 그러나 역사보다 더 앞서갈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의 의미작용을 파악하는 일은 우리가 미래를 떠올려보는 일이 아니라, 런닝머신 위를 달릴 때처럼 현재를 과거 쪽으로 흘려보내는 것을 계속해서 감당해내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근래에 화두로 떠오른 가상화폐 붐이 단순한 투기장으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이 투기장은 사업장 단위로, 작게는 개인 단위로 채굴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티브이 영화의 의식 분산 기능과 유사하게 보이는 면이 있다. 과거에 프리드리히 니체는 가장 완벽한 하나가 역사를 굴러가게 하는 동인이라고 주장했지만, 오늘날 역사란 전 지구적 체계 안에서 동시대인들과 함께 런닝머신 위를 달리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분산되고 있다. 바꾸어 말해 역사의식은 한 명의 역사가에 의해서만 서술되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의 기록을 통해 ‘채굴’되고 있으며, 이러한 병렬분산을 통해 역사는 서로의 의식교환을 통해 확증되는 형태를 띠게 될 것이다. 


그래서 가상화폐는 극장 영화와 티브이 영화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설명해줄 좋은 예시라 할 수 있다. 극장 영화가 한 명의 역사가에 의한 시대의 재현이라면, 티브이 영화는 한 명의 역사가가 가정으로 정보를 송출하여 그것을 서로에게 교차검증하게끔 하는 병렬분산 네트워크이다. 이 병렬분산 네트워크는 가상화폐처럼 화폐로서 기능하는 건 아니나, 우리가 ‘아름다운 가상’이라고 말해왔던 극장 영화에 대한 반역의 단초를 제공해준다. 


만약 영화가 현실에 있을 수 없는 것들을 자체적으로 재현해냈다면, 이것은 현실 역사에 대한 하나의 판본일 뿐 진실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영화가 네트워크 안에서의 분산을 통해 가상(Virtual) 자체로만 교차파악된다면, 이것이 하나의 진실이자 동시대 의식이라는 점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동시대는 우리가 시간을 거슬러 미래를 엿보려는 ‘바깥의 사유’에 의존하지 않으며, 모두가 과거를 밟아 현재를 소진하는 방식으로써 역사를 기술해가는 하나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2. 멸망의 직전에 부귀영화를 누리다 


<스파이>에 대해 이야기한다면서 먼 길을 돌아온 것 같지만, 이런 논의는 반드시 필요하다. <스파이>는 근래에 벌어지는 ‘극장용 판본’의 네트워크 탈출 러쉬의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잘 만든 티브이 영화가 극장으로 넘어온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현실에서 가상으로의 진입이 가능할 수도 있음을 증명하려는 시도와도 같다. 오직 극장에서 탈출하는 것만이 의식의 해방구는 아니라는 뜻이다. 만약 극장이 단 하나의 현실만을 강요하는 현실이라면 극장에서 탈출하는 것은 이 허위의식에서 벗어나는 것과도 마찬가지일 테다. 하지만 오늘날 극장은 오히려 네트워크 안에서 지향되지 않는 움직임들의 게토로도 사용되고 있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나는 김어준이 만든 <그날, 바다>(2018)가 담고 있는 내용과 무관하게 이것이 네트워크 안에서 극장으로의 결집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눈여겨보았다. <내언니전지현과 나>(2020)는 조금은 다른 사례이지만, 이미 ‘섭종’이라는 결말이 정해진 현실에서 극장으로 후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따라서 정해진 미래를 바꾸는 것보다 쉬운 일이 ‘달리는 방향을 바꾸어 현재를 과거로 밀어내는 것’이라는 점이 이를 통해 증명된다: 자신이 미래를 엿본다고 말하는 선지자들은 오히려 현재에 대한 좌표체계가 없기에 사람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곤 한다. 반면, 실시간으로 현실 좌표를 갱신해나가는 이들에겐 사람들을 소집해 <포켓몬 GO>의 레이드에 참여시키는 것과 같은 버스터 콜이 가능하다. 


2-1. #좌표에 관하여


투명드래곤은… 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먹이를 먹지도 않고, 그림자도 없지만, 사람들이 있다고 믿으면 존재는 간접적으로 증명된다. 각자가 보고 느끼는 게 다르다 하더라도 형상에 대한 하나의 일치점이 있다면, 그건 있는 게 된다. 아주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에 대한 생각도 근본적으로는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영화를 만들어진 게 아니라 보이는 것을 확정 짓는 행위로 바라볼 경우, 영화란 형상에 대한 하나의 방법론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우리는 영화의 의미작용이 집중되는 장소를 열렬히 탐구하게 되는데, 이는 그곳에 죽은 자의 온기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헌데, 우리는 과연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만약 영화가 죽었다면… 눈에 보이지도 않고, 먹이를 먹지도 않고, 그림자도 없는데,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고만 믿으면 영화는 아직 살아있다고 단정할 수 있는 걸까? 


영화평론가 유운성은 2019년 7월 27일날 “"〈#김군〉에 대한 다섯 개의 물음"라는 이름의 토크에서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당대인이 아니라 동시대인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하면서, 이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빗댄 바 있다. 이에 따르자면, 아버지는 말할 수 없지만 아들은 그에 저항해야만 하는 오이디푸스적 관계를 지닌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만화 <진격의 거인>으로부터 도출해낼 수 있는, 역사에 대한 하나의 시선이 성립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진격거>에서 주인공 에렌 예거는 자신이 벌인 학살극을 ‘그냥’이라는 말 한마디로 대신해버린다. 그리고 이 이해되지 않는 말은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군부의 편에 섰던 군인들이 했던 말과 거의 일치한다. 그들은 현실에 대한 하나의 기억이 없는데 어떻게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느냐고 되묻는다. “어쩔 수 없었다”거나 “대안이 없었다”는 말과 동시에, 진리는 없다는 말로써 ‘그냥’이라는 말이 정당화된다. 


여기서 우리가 마땅히 구분해야 할 것은, 그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포용의 태도가 아니라 그들은 “말할 수 없다”는 점을 확실히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의식은 당대의 현실에 화살처럼 고정되어 있으며 그리하여 의식의 분열이 이루어질 틈새는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스파이>를 이해하는 하나의 단초는 이것이 티브이에서 극장으로 옮겨갔음을 이해하는 일이다. 


2-2. 탈출에 관하여


영화를 보았다면 알겠지만 <스파이>는 배를 타고 떠나는 사람과 폐허에 남겨진 이의 이야기다. 이 경우 보통은 배를 타고 떠나는 사람이 폐허에서 탈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영화에서 끝까지 생존한 건 부인 쪽이다. 이 관계에서 우리는 스크린이라는 영화 속으로 사라진 남편과 폐허가 된 현실에 남게 된 부인, 둘 중 누가 더 나은 처지에 놓였는지를 고민하게 된다. 남겨진 이와 떠나간 이의 관계는 흔히 사용되는 구도이지만 이 경우에는 둘 다 우리의 현실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떠나간 이도 현실이고, 남겨진 이도 현실이다. 우리는 역사 안에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없다. 오늘날 영화의 입지도 이와 유사하게 흘러가는 듯 보인다. 영화가 죽었다고 말하는 이들은 늘어나지만 영화가 죽었음을 보여주는 일은 불가능하다. 정말로 죽었는지 아닌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오히려 죽은 자의 온기에 대해 생각해보는 일이 더 중요하다. 아버지가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를 논하는 건 부두술사를 통해서나 가능한 괴기의식이니 말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 괴기의식은 한 명의 부두술사가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소원을 모아 이루어지고 있다. 미래에 대한 추리가 불가능해진 바다의 끝자락, 폐허의 터전 위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염원을 담아 무너진 땅을 개간해나간다. 말은 안 하지만 하나의 터전을 일궈나간다는 점에서 이를 ‘공간을 통한 간접적인 증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는 공론장이라고 불렀던 것들이 더는 사회적 체계로서 기능하지 못하게 된 현시점에서 의견을 통한 상호확증의 논리인 다중(Multitude)은 역사에 대한 의식도 분할시킨다. 모두가 하나의 터전을 살아가지만 이곳에서 기억은 하나로 일치하지 않는다. 현장은 하나의 현상으로만 기억되지만 누구나 기록을 남길 수 있게 된 시대에 오히려 기억은 파편화된다. 말그대로, 기술을 통해 오히려 기술에 혼란이 와버린 상황이 되어버렸고, 그래서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하나로 통합해줄 마이크를 취임시켰다. 그러나 다중을 대변하는 한 명의 스피커란 가능한가?


<스파이>는 정말로 있었던 역사를 기반 삼지만 그 누구도 그것이 실존했음을 말하지 못한다는 점이 역설적이다. 대개는 정치적인 이유로 그렇지만, 스피커는 하나에 불과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늘 혼선이 생긴다.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니라, 아우슈비츠에 관해서도 우리는 비슷한 말을 했었다. 유운성은 광주 민주화 운동과 아우슈비츠 간의 결정적인 차이는 “생존자”의 유무라고 말하면서, 아우슈비츠는 절멸의 수용소였다는 점을 지적한다.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저항자들은 주체였지만 아우슈비츠는 인격 자체를 말살해간 장소였음을 지적하면서, 광주 민주화 운동은 저항자들의 구심점이 된 기억이고, 또 그런 점에서 아우슈비츠와는 다른 맥락에서의 혼선이 발생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 말은 응당 옳으며, 개인적으로 주석 하나를 더 달아보자면 우리는 가상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만약 폐허가 영화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장소라면 그러한 ‘있었음’이라는 지표적 성격이 영화의 죽음을 단언하지는 않으며, 이에 따라 폐허를 가상으로 인식하는 일은 바로 그 현실의 가능성에 의해 가로막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실이라는 하나의 가능성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일까? 


3. 죽거나 떠나거나


오히려 현실이 우리의 기억을 분산시켜놓는 상황에서 현실에 대한 의견은 죽음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여러 갈래로 분산된다: 이때 죽음이라는 말은 다양한 맥락으로 읽힐 수 있다. 누군가는 영화의 죽음을 떠올릴 테고, 누군가는 역사의 종언을 떠올릴 테며, 누군가는 잊혀진 이들에 대한 망각을 떠올릴 테다. 그런 점에서 구로사와 기요시의 <스파이>는 현실을 하나의 가능성으로 만들고, 이에 따라 현실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다.


티브이에서 극장으로 옮겨간 영화는 역사를 한 편의 미래의 기억으로 만든다. 그러나 이 미래의 기억은, 아주 분명하게도 우리에게 주어진 아름다운 가상으로써, 불규칙하게 유동하는 허위의 좌표이다. 그렇지만 이 좌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현재를 발판삼아 과거를 만들어나가는 전진 운동을 끌어낼 수 있다: 여기엔 두 개의 길이 있다. 바다로 나가 바깥을 엿보거나 폐허에 남아 멸망을 탐하거나. 기요시의 의식은 바다를 향하지만 관객인 우리는 폐허에 남게 된다. 요컨대 <스파이>는 우리에게 불규칙 난수 방송을 송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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