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차미 Jan 23. 2021

갈라지는 것과 들러붙는 것들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2019)





임흥순의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은 두 개의 판본이 있는 작품이다. 정확하게는 여느 확장 영화(expanded cinema)들이 그러하듯 미술관과 극장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이다. 하지만 단순히 경계를 넘나드는 것만으로는 어떠한 문제의식이 성립하기 힘들어졌으므로, 좀 전의 발언은 불필요한 곁가지에 불과하다고 느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영화가 경계를 넘어간다는 사실은 더는 신비하거나 새롭지 않은 것이다. 이들은 마치 숨 쉬듯이 공간을 드나들기에 화를 내거나 눈물을 흘릴 만큼의 가십거리도 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는 디지털을 더는 디지털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왜냐하면 2000년을 전후로 디지털은 여러 분야에 걸쳐 언급되었으나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단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한데, 우리가 이미 디지털 세상을 살고 있고 심지어는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시대였던 이들이 사회의 주역이 되기까지 했다. (단순히 계산해보아도 2000년에 태어난 이들은 벌써 스무 살이 넘었다.) 하지만 이 모든 질문에 선행하는 물음은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격언일 것이다.



나는 지금 영화의 정전(Cannon)을 꺼내드는 게 아니라 ‘영화’라는 단어의 이상한 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를테면 ‘영화 같다’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는 감탄사로 사용하는 이 말에는 근본이 없다.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주소가 명확하지 않고, 이는 일반적으로 영화가 ‘발명의 순간을 아는’ 유일한 예술이라는 점에서 더욱 대비된다. 우리는 대체 언제부터 영화 같다는 말을 사용하게 된 걸까. 영화광들이라면 알 존슨이 처음으로 입술을 떼던 순간이나 서부의 협곡을 가르는 존 웨인의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이 영화 같음은 <라라랜드>나 <사랑은 비를 타고>와 같은 로맨스 영화에 더 잘 어울린다. 두 존재가 지금 이곳에 서서 서로의 눈을 마주하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우연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해,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상대방의 시선을 의식함과 동시에 내가 보내는 시선을 응시하게 되는 상호교환적 행위가 바로 영화 같음이다.



‘내가 너를 볼 때, 너도 나를 본다’라는 말은 굉장히 낯간지럽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딱딱한 흐름으로 바꾸어 말해보도록 하겠다. 당신이 영화를 보러 갈 때, 영화도 당신을 보러 간다. 대체 어떻게? 라는 물음이 나올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분명 현대 영화의 흐름이며 영화는 이제 더는 장치(apparatus)가 아니다. 에이드리언 마틴을 비롯한 이들이 줄곧 사용하는 단어인 디스포지티브(dispositif)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영화가 무언가를 도출해내는 기계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주관적 사고 능력을 키워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확실한 건 영화는 이제 답을 던져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니, 어쩌면 정답이 필요 없게 된 사회를 우리가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에 대한 증거는 사회의 여러 부분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철없는 아이의 항변, 인생에 정답이 어디 있나요. 고고한 트위터 시네필의 190자 감상평, 이 짧은 감상이 영화를 이해하는 완벽한 풀이는 되지 못할 겁니다.



나는 여기서 한 가지 논점 하나를 던져보려 한다. 발터 벤야민은 “어떤 현상의 아우라를 경험한다는 것은 시선을 여는 능력을 그 현상에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적었다. 이렇게 능력을 부여받아 시선이 열릴 때 우리는 그것이 품은 어느 먼 곳으로 홀연히 떠나게 된다. 이 은유에 따르자면 우리가 영화를 보며 아우라를 느끼는 것은 영화가 자물쇠이기 때문이 아니라 열쇠이기 때문이다. 즉 열쇠/능력을 부여받아 자물쇠인 자신을 열어주기를 원하는 영화라는 말이 성립한다. 요컨대 처음부터 그가 주도권을 쥐고 있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영화를 해석한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적어도 아우라의 시대에서는 그렇다. 이쯤 되면 당신은 ‘아우라가 없는 오늘날에 영화란 무엇인지’를 질문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무엇이 진짜 사랑인지를 우리는 쉽사리 확신할 수 없다. MSG라는 이름의 조미료 혹은 아스파탐이나 수크랄로스 등의 감미료를 진정으로 구분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입에 들어가면 다 똑같다.)



이에 대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대답은 간명하다. 먼저 그는 가상현실을 다룬 영화인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 주인공 퍼시발의 모험을 열쇠를 찾아 떠나는 게임으로 만든다. 내용 자체는 어느 할리우드 영화와 다르지 않게 임무를 완수하면 부자로 만들어준다는 아주 단순한 목표설정이 되어 있다. 자연스럽게 모두가 열쇠를 찾는 일에 혈안이 되는데, 퍼시발 혼자만 자물쇠를 찾아 떠난다. 여기서 영화의 결말을 적지는 않겠지만 그들이 하는 도전의 일부를 소개해보려 한다. 퍼시발은 열쇠를 얻기 위해 자동차 경주에 참가한다. 이 자동차 경주는 페르시안의 왕자나 슈퍼마리오 브라더스 게임처럼 지정된 트랙이 있고, 종착지점에 다다르는 게 이들의 최종 목표이다. 이때 퍼시발은 기묘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자동차를 타고 뒤로 갔더니 보이지 않는 길이 열렸다는 것은 어쩌면 <백 투 더 퓨쳐>의 드로리안이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은 공간 이동의 순간일 수도 있다.



마틴이 보낸 1편과 2편과 3편 사이의 간극은 영화의 안과 밖 모두에 자리한다. (각각의 개봉년도는 85, 89, 90이다.) 이 영화들에서 마틴은 매번 다른 시간대로 떠나는데, 관객인 우리도 매번 다른 시간대에 그들을 보고 있다. 그리고 이는 영화가 세 편으로 나누어졌기에 가능한 일이다. 만약 영화가 세 편으로 나뉘지 않았다면 우리는 세 번의 시간여행이 아니라 한 편의 시간’여행’을 떠나는 게 된다. 왜냐하면 영화 자체가 일종의 여행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게 바로 우리가 어떤 영화들에서 손을 뗄 수 없게 하는 이유이다. 이 뒤에 무언가 더 남아있을 것만 같은 환상, 영화는 그 시작과 끝에 있어 여행길을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말하자면 한 편의 영화는 내용을 중심으로 시작과 끝이라는 출발지점과 도착지점을 설정한다. 중간에 관람을 그만둔다 한들 이 지점은 결코 달라지지 않는다. 당신이 영화보기를 그만두어도 영화 안의 것들은 계속 그곳에 있을 것이다. 프로시니엄 아치, 혹은 디제시스.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의 이름은 여러 매체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 왔고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같은 존재다.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의 영화 버전에서는 영화의 중간에 영화의 스태프들이 영화를 보러 간다. 일부러 모호하게 작성했지만 풀어쓴다 한들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이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모습을 그들 자신이 보러 간다. 영화에서 실존인물을 연기한 배우 세 명이 모여 전시에 참여하는 모습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이 재미있는 장면을 우리는 메타 영화, 메타 서사 등으로 부를 수 있을 텐데, 이런 이야기보다는 위에서 했던 말을 이어서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에이드리언 마틴의 기념비적인 논문 「페이지를 넘겨라」에서 그는 영화의 장치 개념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영화 디스포지티브로의 전환을 선언한다. 이후 프란체스코 카세티는 이것을 두고 이주(Relocation)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가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다름 아닌 ‘이주’라는 용어 자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자리하고(locate) 난 후에 다시금(Re) 자리를 채운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주라는 자신의 용어를 ‘재-재배치(Re-relocation)’라는 개념으로 ‘재배치’한다.



내가 제안하고자 하는 것은 이주라는 딱딱한 말이 아니라, 여행이라는 보다 순화된 표현이다.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에서 세 연기자는 구술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각자의 동시대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마치 드로리안을 탄 것처럼 말이다.) 예를 들어 전시 버전과 영화 버전 모두에서 세 여인은 하늘을 바라보는데, 그곳에는 문득 개기일식이 벌어지고 있다. 흡사 카메라 조리개가 서서히 닫혀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 풍경은 영화의 고전적 해석을 따라가면 명백한 불길의 징조라 할 수 있다. 개기일식은 태양이 사라진다는 신화적인 면에서도 그렇지만, 태양이 완전히 혹은 부분적으로 사라질 것이 예견된다는 점에서도 불길하다. 이와 유사하게 영화 또한 사라질 것이 예견되기에 불안을 항상 내재하고 있다. 왜냐하면 영화가 시작하는 순간은 곧 영화가 언젠가는 끝난다는 점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두고서 콘텐츠(Content)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다. 이 안에 무언가를 담고 있다(Content)는 점, 그렇다면 그것이 모두 소모되고 말 경우에는 영화는 텅 빈 상자가 되어버릴 테다. 이때 영화는 바로 폐허가 된다.



그러나 들뢰즈가 『시네마2』에서 지적하는 건 그와 정 반대의 지점이다. 영화가 언젠가는 끝난다는 점에 불안을 느껴야 하는 게 아니라고, 오히려 불안에 의해 지속이 가능하게 된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니까 사실 들뢰즈의 이 불안은 벤야민이 말하는 신경감응(Innervation)의 맥락으로 바라보는 게 옳은 듯 보인다. 벤야민은 영화가 만들어내는 시각적 무의식(optical unconscious)이라는 새로운 지평이 극장이라는 공간과 만나며 시각적 감각을 촉각적 감각으로 만든다고 주장한다. 그의 이 주장을 잘 보여주는 것은 초현실주의자들의 마르크스적인 혁명의 발언이다. 이곳 현실에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 것, 이 초현실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아 지금-이곳에서도 볼 수 있게 해주는 게 바로 영화라는 무구라고 그는 적는다. 이와 동시에 영화 관객의 몸을 타고 흐르는 전율은 결코 불안에 따른 신체 반응이 아니라는 말도 덧붙인다. 그에게 깨어나기란 꿈에서 현실로의 귀환이 아니라 현실에서 꿈으로의 이주였으며, 이를 통해 인식가능성의 지금을 만들어내는 일이었다.



요컨대 들뢰즈가 『시네마2』에서 지적한 안토니오니의 <태양은 외로워>의 마지막 공백이 만들어내는 불안은 꿈에서 현실로의 깨어남이 아니라 현실에서 꿈으로의 이주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영화의 마지막 공백을 묘사하자면 다음과 같은데, 거리에는 사람이 나다니지 않고, 오직 카메라만이 생생하게 눈을 뜬 채로 있는 이 거리의 고요함은 마치 폐허처럼 보인다. 즉 <태양은 외로워>의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는 세상을 마치 영원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벤야민이 폐허를 산보자가 눌러앉은 곳, 수집가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장소로 보았듯이 여기에서 영원은 ‘그렇기에’ 이주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남아야 할 이유를 제공한다. 이처럼 역사가 파행의 연속이더라도, 역사가 파행의 연속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곳에 남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역사의 천사는 지금-이곳에 홀연히 나타나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섬광처럼 만나게 할 것이며, 이 소실점이야말로 우리가 왜 영화의 시작과 끝을 구애받지 않아도 되는지에 대한 전제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들을 영화적 여행으로 변환하기 위하여, 우리는 영화의 안에 있는 내용물(Content)이 자신을 유지할 요령으로 소모하는 시간에 손을 대야 한다. 영화는 역사가 되기 위해 내부에 시간을 구축하려 드는데 바로 이게 우리가 ‘영화가 갖는 지속의 힘’을 시간에서 찾는 이유였다. 발터 벤야민이 말하듯 역사가 어쩔 수 없이 달려오는 이미지들의 종합이고 그것을 멈춰 세우는 것만이 우리 시대의 역할이라면, 영화는 이주가 아니라 폐허에 남기를 선택할 것이다. 이는 영화 역사에서 롱테이크나 데쿠파쥬와 같은 카메라의 지속력을 통해 그 검증이 시도되어 온 바가 있다. 그러나 세르쥬 다네가 말했듯이 이 여행은 “남들과 교통할 수 없는 행복의 가능성을 실현하기에 무거운 대가가 존재한다.” 그가 이 발언을 하게 된 결정적 계기인 글 한 편 「카포의 여행하는 쇼트에 관하여」는 우리가 응시하는 것들이 사실은 일방적인 무언가에 그쳐버렸던 건 아닌지를 돌아보게 한다. 만약 영화적인 것이 상호 간의 눈 마주침이라면 우리의 여행은 단지 풍경을 바라보는 것일 뿐, 그 어떤 영화적 소통도 만들어내지 못할 테다.



그러나 들뢰즈의 불안은 이 영화에 동일하게 적용될 수 없다. 미술관에 전시된 이 영화는 더 이상 우리의 뇌로서 기능하지 않고, 신경생리학적인 감응을 우리에게 전달하지도 않는다. (물론 전시를 먼저 했고 이를 보완해 영화로 만든 것이다만 영화 안에서 그들은 미술관으로 향한다.) 그렇다면 이때 당신은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관객에게 감각을 알려주지 못하는 영화는 정치적으로(나 미적으로나) 죽은 게 아니냐고 말이다. 물론 이 물음조차 이것이 영화라는 점을 은연중에 전제하고 있다. 위에서 말했듯이 어쩌면 영화라는 것은 우리가 그들에게 품는 막연한 기대감을 표현하는 두루뭉술한 단어일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이때 우리가 생각하는 당신은 무엇인가.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이 재연의 방법을 택했을 때 우리는 여러 이유로 이 선택을 지지하게 되기 마련이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큰 이유는 실존인물이 사망했다는 점일 테다. 말 그대로 그들이 죽었기 때문에 죽음 자체를 영화 위로 불러오는 행위는 영화가 죽음을 빗겨나가게 하는 매체임에도 불구하고 지양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알다시피 죽음과 사랑은 딱 잘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배면에 달라붙은 개념(들)이다. 그래서 때로는 죽음을 사랑하는 행위와 사랑을 죽음으로 여기는 일이 각자 혼동되는 일이 있기도 하다. 이쯤에서 우리는 내가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게 그저 착각에 불과했던 것은 아닌지를 재점검해보아야 한다. 당신의 사랑이 단순히 도피성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를, 폐허가 된 마음으로부터 떠나 새로운 장소에 이주하게 되면 무언가 일상이 극적으로 변하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를 말이다. 당신이 미술관에 가서 하나의 영상을 만날 때 그는 자신을 영화라고 소개하지 않는다. 다만 당신은 이 사이를 여행하며 풍경과 풍경 사이의 간극을 얼마든지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다. 우리 모두의 보폭은 각기 다르기 마련이기에 이 영화는 성립한다. 이들이 시간의 중심부를 돌며 구축한 공간의 풍경이 그들 연기자의 무대가 된다. 이처럼 여행이 일종의 지속력을 지닌 행위라는 점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단순히 극장에서 미술관으로의 이주와 재배치라는 말로서만 설명될 게 아니라 영화관을 나와 미술관으로 향하는 그들의 여행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이 영화의 전시 판본에서는 세 개의 스크린이 사용되는데, 개기일식 장면을 묘사하는 세 여인의 시점이 각각 별개의 스크린에 할당됨으로써 중앙으로 집결되는 여인들의 시선은 개기일식이라는 현상을 통해 동기화된다. 이러한 면은 이 영화의 동시대적인 면을 강화해준다. 이에 예시로 들만한 영화는 아마 버스터 키튼의 <세 가지 시대>일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동물화하는 사회에서 동물원의 의미를 재조명하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