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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Nov 09. 2020

동물화하는 사회에서 동물원의 의미를 재조명하기

<동물, 원>(2019)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의 사회에서 동물원의 의미를 재조명하다



영화의 플롯을 보자마자 처음으로 생각했던 것은 데이빗 린치의 <엘리펀트 맨>이었다. 데이빗 린치의 이 영화는 기괴한 외모를 지닌 한 남자의 일생을 다루는데, 그는 동물원에 전시되는 등의 수난을 당하다가 종국에는 객사한다. 인간이 어떻게 동물원의 전시 대상이 되느냐고 묻는다면 예전에는 정말로 있던 일이라 답할 수밖에 없다.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자행되어 온 인간 동물원은 어쨌거나 실화였다. 린치의 이 영화도 해당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고, 때로는 영화보다 현실이 더 영화 같다는 말은 이런 일을 두고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동물원에 관한 단상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로 변환되는 건 위의 이야기로부터 출발한다. 이를 위해 왕민철의 <동물, 원>(2019)에서 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는 두 개의 문장을 거론해볼 수 있겠다. 첫 번째는 “동물들은 요구하지 않아요. 티를 내지도 않구요. 이 친구들은 그냥 살아갈 뿐인 거죠.”라는 사육사의 대사이다. 두 번째는 “땅이 아주 넓었으면 좋겠어요.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만큼요.”라는 대사이다. 이 두 개의 문장은 1) 동물들이 ‘있는 그대로 보이는 존재’라는 점과 2) ‘아주 협소한 시각으로 보여지는 존재’라는 점을 말해준다.



1) 있는 그대로 보이는 존재



먼저, 첫 번째 대사를 점검해보도록 하자. 창틀을 경계로 나뉜 밖과 안의 공간에서 동물들은 안쪽에 자리한다. 그들은 인간이 사는 곳과 분리된 장소에 살고 있다. 그런데 이 분리는 동물들이 인간과 말이 통하지 않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말이 안 통하니 통제할 수가 없고, 따라서 이들을 세상과 분리하는 것은 응당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반문한다. 말이 안 통하므로 상대를 나와 떨어트려 놓는다는 게 과연 합리적이기만 한 일인가? 이를테면 데이빗 린치의 <엘리펀트 맨>을 떠올려보도록 하자. 같은 인간 존재이지만 단지 외모가 다르다는 이유 만으로 대화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대화의 불가능성을 논하며 우리의 안전을 위해 그들을 ‘동물원’으로 추방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 할 수 있는가?



물론 동물원에 있는 동물들이 실제로 동물이라는 점에서는, 인간의 안전을 위해 그들을 가두어 놓았다는 말이 어느 정도는 타당성을 지닌다. 그러나 우리가 밖에서 안을 바라본다는 점과 그 응시가 일방적인 투과의 방향만을 지닌다는 점이 이 이야기를 다르게 보도록 한다. 우리가 동물원에 놀러 갔을 때를 떠올려보자. 동물들이 우리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했던 적이 있던가? 반대의 경우가 훨씬 많을 테다. 우리가 동물원에 간 것은 동물들을 보기 위해서다. 허나, 이 이야기에는 동물들이 나를 보게 하기 위해서라는 소통의 창구가 빠져 있다. 말하자면 동물원이라는 장소는 전적으로 인간의 시선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공간에서 동물들은 오직 시선을 받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존재인 것이다.



시선의 일방적인 응시. 만약 그들이 사람이었다면 불쾌감을 내비칠 법도 하지만, 동물들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다. 사육사의 말처럼 그들은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티를 내지도 않는다’. 이것만 들으면 동물들은 배고프거나 아파도 표현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해 인간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말처럼 들린다. 이 이야기에 할 수 있는 손쉬운 답변은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라’는 것이겠지만, 동물원이라는 장소는 멸종위기의 동물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동물원의 두 가지 성격 중에 무엇을 따라야 하는 걸까? 동물원은 동물을 감금하는 장소일까, 아니면 보호하는 장소일까?



우리가 그들에게 개입하는 게 서투른 참견인 것은 아닐까. 많은 생태주의자들이 인간이 개입하지 않더라도/않아야 생태계는 보존된다고 말하곤 한다. 코로나 19로 인해 인간의 통제된 장소 등에서 발견되는 자연의 회복을 보고 있노라면 이 말은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만 그렇다.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면 금세 무너져버릴 생태계도 많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여러 선택지를 손에 쥐게 된다. 그리고 각각의 선택지가 교묘하게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보며 무엇이 최선의 선택인지를 곤궁하게 고민해보곤 한다.



위에서 말한 일방적 응시의 문제에서 한국 사회의 여성 문제를 떠올려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영화의 영역에서 이 질문을 다시 던져보고 싶다. 1980년대, <상계동 올림픽>으로부터 출발한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는 액티비즘이라는 큰 기조를 가지고서 발전해왔다. 비록 2000년대 들어 액티비즘의 실천적 면모는 약해졌다 하더라도,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는 여전히 실천적이며 자신의 그 본분을 잊지 않고 있다. 요지는 다큐멘터리에서의 ‘실천’이라는 문제가 ‘동물원’이 갖는 양가적 성격과 비슷한 면이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동물들을 보호하는 것일까, 아니면 섣부르게 참견하는 것일까.



2) 아주 협소한 시각으로 보여지는 존재



전통적인 다큐멘터리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려 했다. 일찍이 그리어슨은 다큐멘터리 장르를 두고 ‘현실의 창조적 처리’라고 말하기도 했다. 반면, 한국에서 다큐멘터리는 노동 운동과 결합해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군중을 결집하는 역할을 했고, 주류 미디어에서 드러나지 않는 소외 계층의 이야기를 보도하는 대안 언론의 역할을 했다. 우리는 이것을 액티비즘 다큐멘터리라 부른다. 이 경향이 2000년대 이전까지 지속되었고 새천년 들어 우리는 새로운 다큐멘터리 경향을 맞이하게 되었다.



먼저, 2000년을 기준 삼아보자. 이전 시기의 한국 다큐멘터리가 주류 미디어에서 드러나지 않는 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려 했다면, 이후 시기의 한국 다큐멘터리는 그동안 비교적 소외되어 왔던 것에 주목한다. 둘 다 같은 말 같지만 세부적으로는 다르다. 이전 시기의 한국 다큐가 밀집하는 군중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이후 시기의 한국 다큐는 미시적인 것들을 보려 노력했다. 이는 시기적으로 포스트 모더니즘이 발흥하고, 민주 항쟁이라는 집단의 목표가 사라졌고, IMF를 필두로 거시 담론이 붕괴한 2000년대의 모습과 맞물린다. 큰 것이 무너진 자리에 개인이 드러났고, 카메라의 시선은 이제 가족이나 골목과 같은 미시적인 것들에게로 향하게 된다.



카메라가 미시적인 것들을 조망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시야가 너무 협소했다는 점이다. 이전 시기의 방법론을 21세기의 이야기에 그대로 적용하던 우리는 그런 오류를 겪게 되었다. 군중의 밀집을 통해 힘을 얻던 사회운동의 이야기 구조는 미시 세계에서 적용되기 어려웠다. 동물원에 빗대자면, 세상으로부터 동물들을 지켜냈다고 생각하던 우리가 사육사의 입장이 되어 방사 안으로 들어갔을 때, 늙고 병들고 축 늘어진 동물들의 모습을 눈앞에서 목격하게 된 것이다.



이는 이 영화를 비롯한 SBS의 TV 동물농장과 같은 프로그램들이 일종의 성찰적인 성격을 띠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론적으로는 많은 우회가 필요하겠지만, 이미지의 측면에서 <엘리펀트 맨>은 동물원의 안쪽을 통해 울타리의 안쪽을 조망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와 모종의 친연성이 있다: 2000년대를 기점으로 무너져내린 것은 거시 담론이었을 뿐, 사회 곳곳에 스며든 미시적인 것들은 여전히 울타리가 쳐진 채로 남아있다. 여성 문제, 장애인 문제, 퀴어 문제, 원전 문제, 세월호 문제 등. 이 작은 울타리는 사적인 문제를 조금 더 집약적으로 만든다. 카메라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프레임화가 진행 중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쳐진 울타리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을 보다 확고히 할 뿐, 그들을 구속한다거나 감금한다고만은 볼 수 없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그에 동의하기란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통 약자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것이 응당 정의로운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물원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동물 자체에 대한 액티비즘이 될 수 없는 이유 또한 바로 그 때문이다. 위의 두 가지 명제를 떠올려보자. 2) 우리의 시각이 아무리 협소하다 하여도, 1) 동물은 아무런 표현도 하지 못한다. 동물의 심정을 알 길이 없다는 소리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동물을 보호하는 것도, 동물을 해방하는 것도 동물을 위한 게 아니라는 말이 되어 버린다. 우리가 그들을 관대하게 보든 사려 깊게 보든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의 개인들



그렇다면 이 문제의 해답은 “내버려둬”인 것일까? 그냥 동물을 원래 살던 자리에 데려다 놓으면 끝인 걸까? 그들이 자기들이 처한 문제에 도움을 청하지도 않고, 혹은 아프거나 불편한 점이 있어도 표현하지 않으므로? 나는 이 해결될 수 없는 문제에 집착하기 보다 문제의 현장을 다른 곳으로 옮겨 놓고자 한다. 이를 위해 아즈마 히로키의 이론을 빌릴 예정이다. 먼저, 아즈마 히로키는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미시 담론에 천착하는 개인은 오타쿠라는 이름으로 동물화된다고 말한다. 오타쿠는 ‘대상에 대한 부분적 선호를 즐기는 인간이며, 이는 사회화 이전의 본능적 욕구라는 점에서 그들은 ‘동물’이다.



아즈마는 『관광객의 철학』에서 자신의 이 생각이 루소의 사상을 변형시킨 것임을 언급하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루소는 인간을 히키코모리(=오타쿠)로 보았다. 그들은 존재적으로 서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지만 사회적으로는 필요성을 느끼기에 사회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아즈마가 바라본 포스트 모던 사회의 인간상은 사회를 거치지 않은 본능적인 주체들, 바로 ‘동물’이다. 나는 아즈마의 이 생각이 동물원에 관한 단상을 근사하게 뒷받침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물’이라는 단어의 교집합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탐구를 진행한다는 점에서다.



이 영화 <동물, 원>에서는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사망한 호랑이의 사연이 나온다. 그는 울타리 안에서 태어나 울타리 안에서 죽었다. 이 묘사는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심상에 관해 이루어졌다. 늙은 호랑이는 수술실에서 생을 마감했으니 죽어서는 자유를 맛보았다고 볼 수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핵심은 그가 평생을 갇혀 지냈다는 점이다. 여기서 이 울타리를 데이빗 린치의 <엘리펀트 맨>으로 전유해보도록 하자.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인간 동물원에 전시되었다가 마지막에는 사연이 알려져 그곳으로부터 구출되는데, 자유의 몸이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죽어버린다.



그렇다면 이 사내, 엘리펀트 맨은 마침내 자유로워졌을까? 그를 가둔 울타리를 무엇으로 정의하는지에 따라 의견이 갈리게 될 것이다. 물리적 현실에서 울타리의 의미를 찾는다면 그는 자유로워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기괴한 외모를 지닌 그에게 몸이란 그 자체로 울타리나 마찬가지였다. 요컨대 그는 몸에 갇힌 영혼이었고, 그런 점에서는 끝까지 구원받지 못했다. 아마도 이 이야기는 현대 사회에서 성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혹은 신체의 장애를 지닌 이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목적어를 관객으로 바꾸어도 이질감은 없다. 마음이 혼란스럽고, 몸이 불편한 관객들 대부분은 자신을 제약하는 울타리가 있다고 느끼기 마련이다. 회사, 가정, 그 모든 사소한 이야기는 다양한 형태와 층위에서 나를 제약한다.



위에서 말한 아즈마의 맥락을 따른다면 울타리에 관한 이야기는 아주 정확하게 동물원이라는 장소에 부합한다. 왜냐하면, 동물원이란 기본적으로 울타리들의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호랑이 우리, 침팬지 우리, 사막여우 우리 등이 모여 동물원이라는 하나의 공간이 된다. 그리고 이는 아즈마가 루소의 주장을 통해 오타쿠들의 동물화를 설명한 대목과 일치한다. 아즈마의 주장에서 핵심은 사회를 거치지 않고서도 개인끼리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이 바로 오타쿠를 통해 만들어진 ‘동물’이라는 것이다. 이 오타쿠들은 욕망에 충실하기에 온갖 사회적 제약들, 그 울타리로부터 자유롭다. 울타리로부터 자유로우니 그들을 통제할 수 없을 것만 같고 따라서 위험한 집단이 될 것만 같지만, 이 오타쿠들은 개인의 취향을 찾아 하나로 뭉치기에 그러한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는다. 요컨대, 진정한 개인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 그들을 사회를 거치지 않고서도 사회화로 이끌게 된 셈이다.



분명하게도, 동물원은 우리가 주변의 현실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동물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교육적 가치를 갖는 공간이다. 주류 미디어가 보여주지 않던 노동 운동의 현장을 담던 1980년대의 액티비즘 다큐멘터리와 유사한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노동자뉴스제작단의 작품이 주로 그러했다.) 차이가 있다면 동물원과 다큐멘터리가 나아간 공간의 성격일 것이다. 한국 다큐가 미시 세계에 집중하게 된 것에 거시 담론의 붕괴가 큰 영향을 끼쳤다면, 21세기에 동물원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게 된 것은 울타리의 밖이 아니라 안쪽에서 이야기를 바라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오타쿠는 문화가 되었고 미시적인 개인이 거시적인 사회를 뒤집는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문제는 동물원이라는 공간 자체에 관한 것일 테다. 동물을 보호하는 방법이 꼭 세상으로부터 그들을 분리하는 것이 되어야만 하는가? 점진적으로 미시화되는 이 시대에서 우리는 개인의 취향,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려고 노력한다. 알고리즘을 도입한 여러 서비스가 개인에게 맞춤형 제안을 제공하고 있으며, 하나의 팬덤에서도 취향이 세부적으로 갈리는 등의 미시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혹자는 이러한 풍경이 하나로 밀집되는 개인, 다중을 통한 대중 운동의 불가능성을 예견하는 게 아니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제각각이면 큰 이야기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우리 시대에 동물원이 단순한 교육의 목적도, 보호의 목적도 아닌 동물 복지의 연장선에서 논해지는 만큼 우리는 울타리 안에서 더 넓은 지대를 점유할 필요가 있다. <동물, 원>은 동물들에게는 각자가 마음껏 뛰어 놀만큼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육사의 말로 끝난다. 산군님인 호랑이에게는 산 하나가 필요하고, 독수리에게는 철원 평야에서 자기들 무리와 어울리는 게 필요하다는 식이다. 우리 시대에 사회 운동에 참여하는 개인도 이러해야 한다. 무언가를 이루어 내기 위해 꼭 취향을 다변화할 필요는 없다. 그저 활동 범위를 넓히고, 그 안에서 자신의 본능에 충실하기만 하면 된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의 사회에서 동물원이란 그저 큰 울타리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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