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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Oct 27. 2020

박물관으로 가야할 사람, 박물관이 되어 버린 사람

박경근의 세 영화 <청계천 메들리>, <철의 꿈>, <군대>

난 살아있는 사람들에 본능적으로 빠져 있었고 그들의 영혼을 탐색하고자 했다. 

에이젠슈타인이 전함 포템킨의 영혼을 탐색했던 것처럼. – 푸도프킨 –


이 인용문을 처음으로 보았던 게 어디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출처를 알 수 없다면 아예 없는 말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이 문장이 전하고자 하는 의미는 확실하므로 에세이적인 면으로는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가 아니라 역사를 생각해보자. 역사에서 전함 포템킨이 갖는 이미지는 전함의 웅대함과 제국의 강인함이었다. 동시에 그 단단한 외피가 구더기와 같은 연약한 것들에 의해 손쉽게 무너질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도 했다. 포템킨 호의 선상 반란은 선내에 배급되는 고기에 구더기가 들끓는 모습을 본 어느 수병의 항의에서 출발했었고, 이 작은 구더기들은 곧 전함을 장악하게 된다. 제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작고 여린 구더기들이 나라 전체를 죽게 만든 셈이다. 그러나 구더기가 어떤 생물이던가. 구더기는 썩어가는 시체 위에서 자주 발견되곤 한다. 그러하니 이 구더기들의 반란은 제국의 부패를 표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을 뿐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라고도 할 수 있을 테다. 


박경근의 <철의 꿈>에서도 아주 커다란 배가 나온다. 포항 제철소 안을 유유자적 거니는 카메라는 영화가 자체적으로 부여하는 고래의 이미지에 의해 배를 숭배하는 종교단체의 일원이 된다. 스크린의 표면에 울산의 신석기 시대 암각화가 보여지는 한 편, 내레이터의 발언은 그 이미지 위를 흘러가며 종교적인 주술을 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처음에 고래는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포경을 할 수 있게 된 이래로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영화와는 별 상관이 없지만 이 암각화는 근처에 건설된 댐으로 인해 턱밑까지 물이 차오른 상태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고래 그림은 물의 표면 위에 곧바로 자리한 것처럼 보이고, 이러한 점은 우리가 영화의 표면을 떠다니는 조선소의 모습과 겹쳐지면서 우리를 종교적인 숭배 의식 안으로 밀어 넣는다. 물론 우리는 원시인이 아니지만, 포항 제철소를 탐방하던 카메라의 사이를 옛 대한뉴스 클립이 비집고 들어올 때는 왠지 모를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내레이터는 이 이미지에 도전하는 것을 회피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한국에도 신이 있었다고” 말하는 그의 심정은 아마도 사냥할 수 있게 됨으로써 숭배의 대상이 된 고래에 한국사를 비추어 보는 것이리라. 요컨대 이 말은 이미지가 본래 떠나온 시간과 우리가 그를 바라보는 시간을 계속해서 벌려놓는 셈이다. 


그들 시대와 우리의 시대는 계속해서 멀어지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이 멀어짐이 우리를 그들에게 몰입하게 하는 역설을 낳는다. 대상과 멀어짐으로써 더욱 가까워지게 됨이란 흡사 보들레르를 연상시키는 것 같기도 하다. 가깝고도 먼 것은 반발력을 추진력으로 바꾸는 힘이 있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일회적인 이미지로서 현실에서는 손쉽게 사라지지만 인간의 마음에 남는다는 점에서 영구적이며 항구적인 평화이기도 하다. 즉 육신이 탈락되고 관념에 가까워지는 일에서 이미지가 풍화되고 미화되는 일은 피할 수 없는데, 이것은 그것이 정말로 모든 흔적을 남기지 않을 때 비로소 종언을 고하게 된다. 따라서 그 종언의 시간이 언제가 될지를 따져보는 게 우리의 역할일 테다. 영화가 잘 보여주듯이 여기서 연상되는 것은 다름 아닌 고래와 배의 이미지들, 바다 한편을 시원하게 가르는 일련의 물줄기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갈라짐은 영화가 이어짐을 놓지 않으면서도 이미지를 편리하게 분절하는 트래킹 쇼트의 용례이기도 하다. 여기서 더 문제를 논해본다면 수평과 수직으로도 방향을 나눠볼 수 있을 듯하다. 배가 뒤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나 카메라가 수평적으로 갈라놓는 것이나 결국에는 시간과 공간을 일치시키려 든다는 점에서 트래킹 쇼트일 테니 말이다. 다만 영화의 형식상으로는 후자가 우리에게 더 친근할 텐데, 뒤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이미지는 우리의 눈앞에 곧바로 도착한다는 점에서 전자보다 위협적인 형태이기도 하다는 점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눈앞을 위협하는 것은 곧 찌르기의 위험성이 아니던가?





아마 이러한 점으로 이 영화를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뒤에서 앞으로, 이어지면서도 분절되는 것은 일종의 리듬으로서 시원한 난타와 같은 폭력적인 이미지를 자아낸다. 권투를 하는 복서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주먹의 사용법이라고나 할까. 사실 총기의 발사나 고래잡이에 사용되던 작살 같은 것도 삽입과 퇴출을 반복하면서도 대상을 놓쳐서는 안 되었던 것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일찍이 프로이트도 이 점을 지적하면서 보고 싶지 않지만 보게 되는 심리를 남근적인 과정으로 설명하기도 했고 말이다. 이처럼 영화에서 남성적인 것들의 계열체를 근대사의 물신 숭배와 연결하는 건 몹시 쉬운 일인데, 이 편리한 구분에서 우리의 자신의 불편함을 끌어내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박경근은 <철의 꿈>(2014)을 만들고 나서 언론매체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영화들이 본의 아니게 남성적인 면을 많이들 드러내고 있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던 바가 있다. 이를테면 그의 <청계천 메들리>(2010)에 나오는 개불이 해외 상영에서는 페미니스트들에게 적나라하게 지적당했었다는 점이 그렇다. 다음으로 만든 <군대>(2018)는 말할 것도 없이 남성적인 영화고 말이다. 


하지만 이 남성적인 것들이 ‘대한민국이 근대화를 이루어낼 수 있었던 이유’와 ‘대한민국에서 군대를 가야만 하는 이유’로 연결될 때는 이것이 어떠한 표면적 가치만을 종용한다는 인상을 지우기가 힘들어진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이 영화들이 보여주는 현상들로부터 계속해서 멀어지고 있고, 바로 그러한 점에 의해 거부할 수 없는 끌림을 느끼고 있으므로 이 중간고리를 끊어내기가 힘들어진다는 소리다. 생각해보자. 대한민국이 근대화에 성공한 이유가 박정희 정부의 강력한 중앙집권 덕분이었다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또한 한국에서 남자들이 군대를 가야 하는 이유는 북한이라는 적대국가를 바로 마주하고 있어서라는 말도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한국 사람에게는 별다른 대안없이 도출되어 나오는 결론이기도 하다. 우리는 항상 이 자리에서 서 있기만 했고 그러한 거리감이 박경근의 영화 전반을 매끄럽게 만드는 셈이다. 그가 <청계천 메들리>에서 말했듯이, 그의 영화들에서는 충동이 항상 의식을 이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식의 끈이 완전히 놓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본다면 박경근의 영화들에서는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를 부드럽게 서핑하는 표면의 흐름이 도드라지는 게 아닐까. 이 서퍼의 물줄기는 고래나 배가 헤엄칠 때 후면으로 생겨나는 물보라와는 달리 자체적인 동력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지만, 바로 그들에게로 연결된 선이 있기에 이 헤엄이 가능하다는 점을 명심해야만 할 테다. 요컨대 그가 고백하듯이 쇠붙이에 비친 얼굴이 우리의 악몽이고, 하지만 물질과 꿈의 세계가 만나는 지점 또한 바로 이 표면이라 할 수 있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만 한다. 과연 쇠의 표면 위를 미끄러지는 것은 가능한가?


암각화를 보여주는 장면이 있고, 종교적 의식을 치르는 장면이 있으며, 조선소의 내부를 살피는 장면이 있다. 이처럼 크게 세 개의 이미지 계열로 정리될 수 있는 이 영화는 미술관에 설치되었을 때 세 개의 디스플레이로 나누어 방출되었다고 한다. 이 단순한 사실이 말해주는 것은 영화의 이미지 계열이 단순히 우리의 추론에 의해서만 나뉘는 게 아니라 영화 안에 내재한 일종의 형식이라는 점이다. 물론 우리가 이것을 영화라고 부르는 것도 단지 분류를 위한 지칭에만 불과하겠지만, 달리 보면 그 이미지 계열들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겠느냐는 점도 같은 맥락으로 던져지는 질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암각화, 종교적 의식, 조선소의 이미지 위에 흘러가는 것은 배경음악 혹은 내레이터의 규정적 소리라고 할 수 있겠지만, 바꾸어 생각해보면 이들은 이 세 가지 이미지가 처음부터 다른 것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한 눈속임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추론의 기원은 전작인 <청계천 메들리>에서 그가 칼의 노래를 인용하는 대목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피에서 쇠 맛이 난다”는 말을 시작으로 “옛사람들은 백정과 쇠쟁이를 같은 맥락에 두면서 천대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그는 피와 쇠를 하나의 계열체로 보고 있는데, 이 말이 피에서 쇠가 태어나고 그 쇠가 피를 빨아들인다는 일종의 순환 논리로 변질되는 것은 그가 트래킹 쇼트로 진입하던 청계천 골목을 한국의 근대화 속에 놓기 위함이리라. 말하자면 박경근의 시선은 피와 쇠 사이를 미끄러진다. 그리고 이게 바로 박경근 영화의 리듬이자 멀어지면서도 가까워지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으로의 진입을 허가하지 않는 차단막이기도 하다. 





하지만 역시 의심스러운 것은 그의 영화가 국가와 민족 사이의 어딘가를 미끄러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이를테면 피와 쇠라는 단어는 피와 뼈라는 인체의 부산물로 쉽게 치환될 수 있다. 이때 뼈가 피를 만들어내는 구조물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쇠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피를 만들어내는 구조적 위치가 보장되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맥락을 따르자면 <철의 꿈>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조선소 안의 모습은 이 쇠를 통해 노동자들의 피가 만들어지는 과정처럼 보인다. 대한뉴스 클립을 통해 적절하게 지적되었듯이, 매일 아침과 저녁에 조선소의 안팎을 오가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이 쇳덩어리가 아니라면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떠올리게 된다. 여기서 핵심은 역시 네이션이라는 단어일 테다. 한국에서 네이션이라는 단어는 국가와 민족 모두를 아우르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 아우름의 리듬 자체가 한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모종의 트래킹 쇼트처럼 보일 때 우리는 이곳이 박정희 때에 만들어졌다는 점을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박경근이 <청계천 메들리>에서 먼저 보여주었듯이 피와 뼈의 관계는 어느 하나가 선행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점이다. 비록 뼈가 피를 만들어 낸다 하여도 둘은 꿈과 현실의 관계처럼 모호하며, 어쩌면 그가 자신에게 철이 매혹과 두려움의 낯섦(Uncanny)로 남게 된 이유를 어려서 꾸었던 악몽에 근거한다고 고백했던 지점으로 돌아가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가 잘 알다시피, 프로이트는 자아와 초자아의 관계를 분류하면서 초자아는 자아에서 억압된 것들이 남겨지는 장소라고 말했다. 그런데 박경근은 <군대>에서 한국 남자에게 군대라는 것은 유전자 단위로 각인되는 무언가라고 말하면서 피와 뼈의 근원을 개인이 아닌 국가 자체로 옮겨놓는다. 어떤 면에서는 계보라고도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맥락으로는 국가와 민족의 교란이라고 칭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네이션은 국가와 민족이라는 두 가지 갈래로 분할되지만, 본질적으로는 둘 사이에 놓인 표면과 그로부터 미끄러지는 모습이 우리에게는 중요한 것이다. 만약 군대가 한국의 남성들에게 원초적인 불안감을 제공한다면 그 이유는 북한과 남한 사이에 놓인 정치적 대립, 그 표면의 긴장감이 초자아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셈이다. 여기서 핵심은 역시나 대립이나 표면처럼 어느 하나로만 특징지을 수 없는 양방통행의 묘사이다. 북한이 없었다면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되었을까?라는 식의 상상은 불필요하거나 무의미하다는 뜻이다. 피와 뼈는 우리 인체가 구성될 때 동시에 생겨난 것들이며 자아와 초자아의 상관관계도 그러하다. 따라서 피와 쇠의 관계를 개인과 국가의 관계에 대입하는 듯 보이는 <철의 꿈>도 국가의 아래에 개인이 생겨난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대립항이 아니라 계열체의 관계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계열체들은 하나의 의미로 종결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표면을 통해 정착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미끄러지는 것이고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좀 전에 했던 질문을 반대로 물어야 할 듯싶다. 오히려 쇠의 표면을 미끄러지는 게 더 당연한 일이어서, 쇠의 표면에서도 미끄러지지 않을 방법을 질문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이 대목에서는 박경근 본인이 고백했듯이 그의 영화가 여성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있다는 점을 거론해보고 싶다. 무엇이든 간에 ‘남성적’이라는 표현은 마초적이라는 인상을 주기 쉬운데 박경근의 영화는 그런 쪽의 분위기와는 거리가 있다는 점이다. 박경근의 영화에는 개불을 가위로 잘라 먹으며 야한 농담을 하는 아저씨도 있고, 거대 크레인과 선박 위에 올라선 남자들이 선사시대의 고래 사냥에 비견될 만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들이 여성성과의 대립 구도를 만드는 데 사용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남성성이란 우리가 말하는 쇠와 뼈라는 계열체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그가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다녔던 경험을 고백하며 말했던 것처럼 자신이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잘 모른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우회해서 표현하자면 그에게 한국이라는 나라는 유년기에 본격적으로 진입하지 못한 채 주변부를 떠돌았던 경험으로 독해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 우회의 지점은 박경근의 영화가 왜 표면에서 미끄러지는 듯한 느낌을 주는지에 대한 꿈보다 해몽식의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이 이방인 혹은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로 변화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박경근의 영화는 크리스 마커나 요나스 메카스와 같은 자전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고, 또 실제로 <철의 꿈>의 도입부가 서간문의 형태로 시작하기는 해도 이 편지가 영화의 시작과 끝을 정확하게 장식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만 한다. 이 편지는 아즈마 히로키가 데리다에 대한 자기만의 해석에서 언급했듯이, 존재의 세계 밖에서 흘러와 존재의 안쪽으로 끝없이 관통해가는 이상한 물체이다. 내면으로 향하기에 언젠가는 도착할 것만도 같지만 그 끝은 마치 식물 뿌리의 생장점처럼 계속해서 연장되기만 할 뿐이다. 정 반대의 지점에서 들여다보면 이 구조란 그가 왜 수직이 아니라 수평을 추구하는지에 대한 해답이 될 수도 있을 듯하다. 만약 그의 트래킹 쇼트가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는 것과 같은 그라이아이적인 것이었다면 근대의 원초경을 탐사하려는 시도, 혹은 자신의 내면이나 뿌리와 같은 것들에 대한 미시적인 탐사로 볼 수도 있었을 테다. 


하지만 박경근은 전함 포템킨 호의 썩은 고기들에서 안으로 파고들던 구더기가 되고자 하지 않았고, 자기들이 하던 일들의 총량은 유지하면서 그 힘의 방향을 바꾸는 방식을 사용하려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던졌던 질문들의 마지막 수정은 아마도 다음처럼 되지 않을까. 어떤 것이든 간에 표면에서 미끄러진다면 둘 중에 마찰계수가 없는 건 대상이 아니라 우리 쪽이 아니겠느냐고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그가 인터뷰에서 했던 직설적인 발언을 떠오르게 한다. “내면을 본다는 건 그 사람의 표면을 통해 내면을 상상하는 거죠. (중략) 왜냐하면 안이 없기 때문이에요. 거꾸로 말하자면, 안이 있기 때문에 안이 없다는 것인데. 나는 행동 방식 자체가 직설적이에요. 별 생각이 없이 바로 말이 나와요.” 말하자면 그의 시선이 표면에서 미끄러지는 이유는 애초에 안이 없기 때문이다. 안이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안이 없기 때문에, 바깥으로 미끄러졌던 나머지 안쪽에 대한 개념이 상실되어 버렸기에 박경근의 영화는 마치 전시장과도 같은 갑갑함을 준다. 즉, “눈으로만 보세요.”라는 경고. 이 물음은 이렇게 고쳐 써야 할 듯싶다. “당신은 그게 보이나요? 나에게는 표면만이 보여요. 이 철들에도 영혼은 있을 텐데 말이에요.” 이처럼 박경근은 살아있는 철들에게서 영혼을 탐색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영화들 중 <철의 꿈>은 울산 MBC를 통한 TV 편집본이 유튜브에 무료로 공개되어 있다.

https://youtu.be/23IAOyo7Nms


<철의 꿈><청계천 메들리>는 박경근 감독의 vimeo를 통해 유료로 구매할 수 있다.


본문에서 인용한 박경근 감독 인터뷰는 다음과 같다.


이승민, <시각과 장치의 변주, 감독 박경근>, dockingmagazine, 2020년 10월 23일 검색.

http://dockingmagazine.com/contents/8/39/?bk=maindockingmagazine.


이선옥, <청계천 기계들, 이명박, 이건희, 그리고 우리들>, 프레시안, 2020년 10월 23일 검색.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02766#0D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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