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차미 Oct 05. 2020

휘발성이 강한 이미지를 본다는 것

<세계 이미지와 전쟁의 각인>(1988)

휘발성이 강한 이미지를 본다는 것


최근에 나는 알랭 레네의 <밤과 안개>(1956)와 하룬 파로키의 <세계 이미지와 전쟁의 비명>(1988)을 보았다. 영화사에서 얼마 되지 않는 귀중한 자료를 이제야 보았느냐고 질책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또 다른 누군가는 이 영화의 생소함에 대해 물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때의 이유는 영화의 형식 때문일 수도 있겠고, 다루고 있는 내용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지 몽타주만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들은 스크린 안에서 서사를 구성하는 게 아니라 현실 세계로부터 서사를 빌려온다. 어쩌면,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을 태풍의 눈으로 삼아 역사를 관통하는 이 영화들에게서 서사란 의미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요컨대, 역사란 서사가 될 수 있는가? 


역사를 서사의 일종이라고 가정해보자. 오래된 서사시 등을 떠올려볼 수 있겠지만, 이 경우들에서는 서사시가 기록을 대체하고 있음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호메로스와 길가메시와 같은 서사시들은 이야기인 동시에 역사이기도 하다. 물론 당시에 기록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바꾸어 말해, 역사를 기록한다는 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렇다면 역사를 기록할 수 있게 된 지금의 우리에게 역사란 무엇일까. 역사를 기록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생겨났고, 그래서 우리는 역사가 객관적일 수 있다고 믿었다. 구전을 벗어나 문자와 영상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기록의 장소를 내부에서 외부로 옮겨놓음으로써 변환된 사고의 전환이었다. 그리고 이는 서사 세계를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특성과 반대되는바, 우리는 이야기를 ‘허구’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야기를 허구로 여기는 것에는 ‘세계가 그곳에 있다’라는 분리의식이 전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역사란 늘 ‘지금’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이자 기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일 테고 말이다. 이 대목에서 영화와 역사간의 일치점이 생겨난다. 스크린 위의 영상은 생성과 소멸을 동시에 반복하는 복합적 현상이다. 많은 영화인이 지적했던 이 영화의 ‘틈’은 시선과 결부되어 관음증으로 발전하기도 했고, 광학기술과 결합하여 옵스큐라의 일종이 되기도 했는데, 사회학적인 면에서는 이론과 실천 사이에 놓인 거대한 장막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현상들은 많지만 그것들을 따라가기엔 한계가 뚜렷한 눈의 구조를 우리는 갖고 있다. 바라봄과 동시에 소멸해버리는 이 현상들이 기록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과거에서 떠올리는 이미지일 뿐이라는 한계가 있다. 


영화를 보며 무언가를 기억한다는 문제가 결코 정직해질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는 영화와 현실 사이의 기술적인 재현의 문제가 아니라, 평면과 입체 사이에 놓인 근본적인 차이에서 비롯된다. 영화는 3D의 현실 안에서 촬영되지만 출력된 데이터는 2D의 형태를 하고 있다. 언젠가 기술이 발달하게 되면 이것도 옛말이 되겠지만, 어쨌거나 지금까지의 영화는 모두 2D 데이터로 출력되고 보존된다. 이는 훗날 진정한 의미에서의 ‘3D’ 영화가 생겨난다 해도 이전 시대의 2D 영화를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시대에는 VR 영화와 같은 기술적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VR 영상을 감상할 기기를 관객 모두에게 적용하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그 영상을 만드는 작업환경은 여전히 2D라는 것이다. (기술자들은 평평한 모니터를 바라보며 3D 이미지를 작업한다.) 


현재까지 세상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이미지 지각 구조가 이와 유사하다. 우리는 3D 현실 안에 존재하지만, 그것들을 목격해 기억으로 남길 때는 2D 이미지 형태로 기록 및 보존하곤 한다. 이러한 이미지 형태의 불가침성은 영상 매체를 감상하는 방법의 변화에 따라 동시적으로 변환되곤 했는데, 파로키의 작업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파로키는 <세계 이미지와 전쟁의 비명>에서 연합군이 독일 상공을 찍었던 항공 사진을 돌아본다. 이 이미지에는 훗날 ‘아우슈비츠’로 알려질 건물동이 수직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 즉 이 사진을 찍을 당시에는 평범한 건물에 불과했던 것이 종전 이후에야 비로소 이름을 되찾는다. 그리고 그저 이미지 자료에 불과했던 사진이 역사의 시공과 의미를 담은 ‘기록물’로 변모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파로키의 작업은 훗날의 히토 슈타이얼을 돌아보게 하는 매력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슈타이얼의 매체학과 파로키의 사회학(혹은 윤리학)에는 엄연한 방법론적 차이가 있다. 수평 원근법을 수직 원근법으로 교차하는 방식에서는 공통분모가 발견되나, 그렇게 발견된 시야가 세계의 안과 밖 중 어느 쪽으로 향하는지는 확연히 다르다. 먼저, 파로키는 영화가 만들어진 1988년 당시까지 기록된 모든 형태의 영상 기록물을 이미지 형태로 응집한다. 사진, 도표, 영상, 이 모든 기록 매체들은 내레이션을 따라 하나로 이어지며, 이 절합의 구조는 이미지의 넘나듦이 아니라 모든 장소에서의 사회학적 기록으로 작동한다. 우연한 기회로 발견하게 된 항공 사진 한 장으로부터 비롯된 시공의 폭발은 동시대에 연루된 모든 기록 매체를 공동정범으로 만들고, 이로서 기록 매체의 기록적 성실함은 시각적 무의식으로부터 나오는 무지에 대한 철저한 반성으로 전환된다.  





낯선 장소에 홀로 떨어진다는 것


조금 더 생각을 해본다면 우리는 이 영화에 나오는 내레이션에 주목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사진, 도표, 영상이 있던 자리에서 배제된 목소리가 역설적으로 그들을 엮고 있기 때문이다. 파로키가 이 영화에 사용한 자료들은 모두 기록물이었으며, 어느 스펙타클한 영화들처럼 음향효과가 철두철미하게 개입하고 있지 않다. 사진에는 당연히 소리가 있을리 없고, 전쟁의 이미지를 담은 기록 영상에서는 소리가 없거나 혹은 이미지의 뒤로 숨어버린다. 그 말인즉슨 전쟁은 음향이 아닌 이미지의 산물이라는 뜻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다룬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같은 영화들에서 나오는 파격적인 음향 효과는 폭열음으로 인해 귀가 멀고 꿈속의 환영에 시달리는 PTSD 환자들에게 이미지에 못 미치는 파급력을 지녔다. 이로서, 소리가 사라진 세계는 순수한 이미지 추출물로 전환되고, 항공 사진이라는 수직적 형태에서 세계의 소리는 지구와 우주의 고요함으로 덮여진다. 


우리는 수직 이미지에 소리를 덧입히거나 청취해내는 것을 자연스럽지 못한 일로 여긴다. 마땅한 근거는 없지만, 아마도 이는 수직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수직 원근법 대부분이 인공위성이나 현미경 같은 그라이아이적 시선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해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수평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기에 수직적 시선은 자연스럽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는, 바닥에 쓰러진 주인공이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희뿌연 상태로 처리되는 화면의 수직적 응용을 떠올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샘 멘더스의 <1917>에서 주인공은 영화의 중간에 전장 한복판에서 기절한다. 영화 내내 원테이크(처럼 보이는) 트래킹 숏을 유지하던 이 영화가 수직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건 오직 이 순간뿐이다. 시간이 흘러 주인공이 오랜 기절로부터 깨어났을 때, 관객은 서서히 돌아오는 사운드를 통해 그 사실을 먼저 인지하게 되며, 뒤따르는 이미지는 천장을 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제서야 관객은 카메라가 트래킹하던 건 주인공이 아니라 음향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다시 파로키의 작업으로 돌아가보자. 그리고 항공사진 위에 흐르는 내레이터의 목소리를 재검토해보자. 파로키가 영화를 만든 1988년의 독일은 전쟁이 한창이던 1945년으로부터 수십 년이 흘렀다. 이 시간의 흐름 동안 세계에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이미지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하나. 이미지가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말은, 이미지에 대한 해석이 바뀔 수 없다는 말과 같은가? 기록이 세계의 재현이라면 우리는 같은 해석만을 도출해내야 하는 것일까. 이는 역사를 부정하거나 수정하는 과격한 움직임이 아니라 평면적 이미지에서 시공을 도출해내려는 시도이다. 이른바 2D에서 3D로의 전환, 2D의 표면에 머물러야 한다는 한계는 여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의 시공을 엿본다는 점에서 이 시도는 의미 있다. 닫혀있는 문이 벽의 일부이지만 열려있는 문은 다른 세계로의 통로인 것처럼 말이다. 


이따금 폭발의 여파가 기록 매체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 시도에 대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이를테면 체르노빌의 현장을 담은 사진 몇 장에서는 방사선으로 인한 사진의 오염이 관찰되곤 한다. 그 사진들은 숱한 필름이 손상되고서 남은 ‘생존자’들의 외피를 하고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파로키가 항공사진에서 찾아낸 아우슈비츠는 연합군의 폭격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의 외피를 뒤집어쓴다. 쉽게 말해, 아우슈비츠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아우슈비츠가 어떤 장소인지를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이 사진에서 풍겨오는 잔향을 맡을 수 있다. 전쟁의 총성이 멈추었으니 우리가 따라갈 것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건 크나큰 착각이었다는 걸 우리는 이제 깨닫는다. 이미지에 향기는 없지만 이미지는 향기의 형태를 모방해 우리의 감각 안에 스며든다. 그래서 이 영화는 모순적이고 역설적이다.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것을 자신의 것처럼 설명하니까. 그렇지만 파로키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이 비판에 응수한다. “우리들 중, 1945년의 아우슈비츠를 아는 사람이 있을까? 그곳에서 살아남은 생존자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그곳의 향기를 알지 못할 텐데.” 


무차별적으로 찍힌 이 사진들에서 우연히 발견된 시각적 무의식은 우리 눈의 맹점과 같은 보정의 산물로서의 아우슈비츠를 발현한다. 전지전능하게만 보이는 수평 시점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놓치고, 간과한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실수 덕분에 오히려 역사는 더욱 생생하게 살아난다. 우리가 기록의 중요성을 거론하는 데 사용되던 철두철미한 검토는 잠시 뒤로 물러나고, 전면화된 이미지는 그러한 검토 속에서 살아남은 이의 표식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물론 그가 살아남은 것은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우연에 불과하다. 그것이 파로키의 영화가 순간이 아닌 흐름 안에서 시간의 유적을 발견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면은, 그 시간의 유적이 흐름이 아닌 순간을 우리에게 전달해준다는 점에 있다. 마치 미래에서 온 기억처럼 그것은 메모리의 형태로 우리에게 주입된다. 




자유의지의 변증법


어떤 영화들은 영화를 다 보아도 머릿속에 남는 게 없을 때가 있다. 영화 외적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서사를 갖지 않는 영화들이 이런 부류에 해당한다. 이는 픽션과 논픽션으로 분류되는 게 아니라 서사와 비(非)서사라는 내러티브의 유무로 평가되는 것들을 뜻한다. 서사 영화에서는 이야기의 전체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주가 되고, 그렇기에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이야기의 흐름을 정리해보는 게 관객의 할 일이 된다. 하지만 비서사 영화들에는 영화 내적으로 존재하는 내러티브가 없고 이야기가 아닌 이미지상으로만 흐름이 존재한다. 그를 대신해 영화 외적인 내러티브를 가져와 볼 수도 있겠지만 파로키의 영화는 그에 해당하지 않는다.


영화 외적인 내러티브를 통해 서사가 없는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전형적인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반면 파로키의 이 영화는 이미지를 거쳐 흐름이 생성되고 그것이 자기만의 내러티브가 되는 에세이 형식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세계 이미지와 전쟁의 비명>에서, 파로키는 이미지에서 출발한 자신의 생각을 목소리를 통해 엮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파로키의 절륜한 이미지의 활용을 발견하게 된다. 이때 누군가에게는 영화 매체에 대한 탐구처럼 보일 수 있는 이 작업은, 영화 속의 이미지들이 무언가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무언가로부터의 발견이라는 점에서 사적인 성격을 띤다. 이를테면 파로키의 이 작업이 재발견이 아니라 관점의 전환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파로키가 사진에서 발견한 아우슈비츠는 당대의 맥락이 아니라 사진 속의 시공에 갇혀 있다. 이 시공에서 파로키는 땅을 보는 사람이 있다면 하늘을 보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왼쪽을 보는 사람이 있다면 오른쪽을 보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라는 단순한 사고에서 자신의 논지를 출발시킨다. 


영화가 시작하면 인공적으로 건설된 파도 생성 장치의 안쪽에 배 한 척이 떠 있다. 이때의 이미지는 실사다. 이윽고 화면은 스크린의 안쪽에서, 티브이와 같은 출력 장치 안에서의 항해 모습을 보여주는데, 파로키는 이 대목에서 인간의 수평 원근법을 묘사하는 그림과 인간의 눈에 대한 치장을 데쿠파주한다. 파로키의 여정은 대략 이런 흐름의 반복이다. 그는 전쟁에 관한 이미지 몇 편과 기술에 관한 작업적 다큐멘터리 약간을 인간의 눈으로 엮어내려는 시도를 반복해서 보여준다. 이것이 완결된 구성이 아니라 시도인 이유는, 영화 한 편을 완결된 사유로 만들지 않았고, 오히려 사유에 다가서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카메라 옵스큐라의 발명 역사를 중간중간에 데쿠파주하여 보여주는 이유가 매체 역사에 대한 전반적인 점검을 위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 데쿠파주는 인간의 감각이 수평 원근법과 수직 원근법으로 분리되는 시기를 탐구하도록 지시한다. 그가 이미지를 통해 설명한 바에 따르면, 이 항해에서 우리가 알아차려야 하는 것은 수평 원근법으로 쓰인 역사에는 수직 원근법의 시점 또한 겹쳐져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태까지 찾아보았던 시료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으며, 이것이 기술의 발달에 따른 사유의 확장이므로 기술이 가져다준 것은 오히려 시점에서 벗어날 수 있음에 대한 가능성이다. 그런데 파로키가 보기에 이 가능성은, 우리가 이전보다 지혜로워졌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공간이 넓어졌을 뿐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파로키는 겹쳐진 시점의 발굴을 통해 공간의 지평을 확장하고, 그렇게 확장된 크기만큼의 사유와 시야를 해금한다. 


이러한 가정에 따르면 인류의 역사는 앞쪽에서 뒤쪽을 돌아보는 게 아니라, 지리 정보의 해금을 위한 동시대적 탐구의 실천이 된다. 그 정보들이 언제 발견되든 간에 같은 맥락과 밀도를 지닌다고 파로키는 말한다. 요컨대 아주 먼 미래에서든, 2차 세계대전 당시에서든 그렇게 발견된 아우슈비츠는 수많은 사람이 죽어간 장소이다. 일반적인 다큐멘터리가 분열된 시공을 자신의 품 안에서 엮고 봉합하는 반면, 파로키의 에세이 영화는 불변하는 것은 기록이 아니라 시공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파로키에게 카메라는 정직한 세계의 재현이 아니라 미확인 지대로의 거친 항해이다. 카메라가 펜이 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모사가 아니라 탐구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따라서 이곳에 재현의 윤리나 불변의 진실과 같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남들이 원근법에 따라 벽 위에 문을 그렸을 때, 직접 문을 열고 들어가 보는 실험을 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 실험은 성공했을까? 어떤 면에서 이 대답은 게임이라는 의외의 장소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게임에서는 문을 열고 탐험하는 행위가 중요시되니 말이다. 평면처럼 보이지만 그 배면에는 3D의 공간이 펼쳐져 있는 것, 이것은 텍스트와 질료를 표현하는 폴리곤의 표현 방식이 아니라 플레이어가 이동할 수 있는 공간에 따른 것이다. 수평 원근법이 평면에서 프레임 안쪽으로의 탐구의 가능성, 즉 ‘공간’을 만들어 내었다면, 수직 원근법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를테면 반도체 제작 공정 중에는 평면 회로를 수직으로 쌓아 같은 부피에 더 많은 데이터를 담는 공법이 있다고 한다. 그에 견주어 본다면 우리에게도 아직 많은 것이 남아있다. 파로키의 영화는 무한한 확장의 영화이자, 비스듬히 열린 평면 위의 문과도 같다. 우리는 문을 열고 들어갈 수도 있지만, 게임 [심즈]의 카메라처럼 벽을 관통해 문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핵심은 언제 어디서나 그 문은 항상 그곳에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 얼굴은 너와 같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