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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Sep 28. 2020

내 얼굴은 너와 같다

<김군>(2019)

산산이 흩어진 ‘김’들


‘김’은 누구일까? 영화는 그렇게 묻는다. 이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김’을 한국의 대표적인 성으로 꼽을 테다. 실제로 10명 중 2명이 김씨 성을 지녔다고들 하니 그 물음 자체에는 명확한 답이 담겨있는 듯 보인다. 그 유구한 답변은 다음과 같다. ‘김’은 김이다. 개인을 식별하는 명확한 표지라 할 수 있는 이름조차 사라진 그 자리에는 김, 이, 최, 박과 같은 어느 뿌리 갈래만이 덩그러니 남는다. 물론 그 지표조차 동명이인이 있을 수 있지만, 성이 같은 것과 이름이 같은 것은 하늘과 땅 정도의 차이가 있다. 


이름이 보다 사적인 지표라면 성은 나와는 전혀 무관할 수도 있는 거대한 그룹을 상정한다. 생각해보자. 현대 한국 사회에서, 자신의 성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던 시절은 꽤나 오래전이다. 동성동본과 같은 문제가 아니라면 우리가 성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는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는 성에 담긴 동류의식도 희미하게 사라져가고 있다 보아야 할 것이다. 본관, 뿌리, 민족, 이 모든 것들은 ‘포스트~’라는 흐름 안에서 자연스레 잊혀져 왔다. 


그런데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것에 민족주의라는 코드가 빠져서는 안 된다는 점이 지금의 우리에게 하나의 의문점이 된다. 세월이 흐를수록 한국이라는 집단에 대한 동류의식은 줄어드는 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의 어떤 현상들은 한국민이라는 이름을 통해 뭉쳐지거나, 귀결되고는 했다. 말하자면,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의식은 사라져가는 가운데 같은 집단에 소속되어있다는 점은 부각되고 있다. 이를테면 세월호 사건에서 자주 회자되었던 문구인 “어른들이 미안해”는 한국민이 아니라면 이해에 어려움이 있는 정서였다. 세월호 사건과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 있는 평범한 시민들은 왜 이 사건에 연대책임을 느꼈을까? 


영국의 가디언지는 세월호 사건의 관련자 처벌을 두고서 “설사 선원들이 부주의했다 하더라도 그들을 배에 대한 관리 책임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살인으로서 죄를 다루는 건 부당한 처사”라고 말한 바 있다. (보태자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사유에는 세월호 사건에 대한 책임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내 사견일 수도 있겠지만 한국 사람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의견이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우리가 ‘왜’ 그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는지를 따져보는 게 생각을 이어나가는 것에 도움이 될 테다.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세월호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고 느꼈을까. 


아마도 이 생각은 우리가 <김군>을 볼 때 지나칠 수 없는 대목일 것이다. 먼저, ‘김’이라는 성이 대한민국에서 흔하다는 점을 전제로 제목 지어진 이 영화는 해당 성을 지닌 채 80년대 광주의 한복판으로 들어간다. ‘김’이라는 성만으로는 서울에서 김서방을 찾을 수 없지만, 영화가 지정하는 시공간 안에서는 ‘김’이라는 성이 비교적 명확하게 특정된다. ‘김’이라는 성으로 불렸던 소년에 대해 다양한 사람들이 증언하고, 그러나 이름을 숨긴 채 단지 성으로만 존재하는 상황에서, 이 증언은 소년이 아니라 소년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뿌리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김’이 누구인지에 대해 알아보는 르포 형식으로 시작했던 이 영화가 북한군 개입설에서의 북한군에 대한 호칭인 ‘광수’를 먼저 제시했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김’과 ‘광수’는 한국 사회에서 흔한 성/이름이다. 이 각각의 성/이름은 시민군 ‘김’과 북한의 어떤 지위를 지닌 ‘광수’라는 이름으로 각각 분할된다. 풀이하자면, ‘김’은 이름이 없는 존재이지만 배후에 뿌리가 있고, ‘광수’는 성이 없는 존재이지만 그 자신의 지위가 명확하다. 따라서 영화의 이 표기법에서 우리는 민주주의에 몸담은 무명의 개인과 사회주의에 몸담은 실명의 개인을 목격한다. 


민주주의에서 개인이 중요시되는 것과, 사회주의에서 국가가 중요시되는 것을 고려해본다면 그들이 서로 상반되는 위치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영화가 진실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이 대립쌍이 정말로 일치하는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김’에 대한 탐구 과정이고, 이 탐구 과정에서는 수많은 ‘광수’들이 원래의 이름을 되찾는다. 그런데 광주의 현장 속에서 ‘김’은 1명이고 ‘광수’는 600명이다. 600여 명에게 성이 없었고 개중에 하나는 이름이 없는 ‘김’이었다는 것이다. 


처음에 감독은 ‘김’을 찾기 위해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결과적으로 그 과정에서 ‘광수’라고 여겨졌던 사람들은 남한의 사회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북한에서 파견된 공작원이라는 주장은 이제 북한이 아닌, 남한 사회 내의 적대자로서 실재의 귀환이라는 주제를 우리에게 던진다.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질문을 던졌을 때 그 물음이 안착하지 못하는 거울 뒤의 존재들: 광주 민주화 운동, 일본군 위안부 문제, 그리고 청년 전태일의 후예들. 매끄러운 표면을 지닌 채 우리 사회의 모습을 비춰주었던 이 거울들에 정말로 ‘얼굴’이라는 게 존재했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이 영화에서 반공주의나 레드 콤플렉스를 언급하는 것은, 비록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해당 주제가 직접적으로 거론된다 하더라도 너무 광범위한 주제에 다가서는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영화는 북한군 개입설을 작품의 도입부로만 사용할 뿐, 주요 논제로 다루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내 얼굴을 비춰주는 거울들에게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는 온갖 부끄러움과 생각이 몰려오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내가 이 사건을 바라보았을 때 그곳에는 내 얼굴이 들어서 있다. 이 사건에 대한 나의 생각이 전적으로 나의 얼굴이 되며, 그게 사실은 거울이 아니라 실체라는 점을 깨달았을 때는 얼굴에 대한 갖은 생각이 들게 될 것이다. 


사진과 기록의 문제


내 얼굴을 사진으로 남기는 순간, 화면 속의 그는 내가 아닌 타자가 된다. 사진이란 시간의 표면으로부터 대상을 미끄러지게 하는 허들과도 같다. 바꾸어 말해, 우리가 화면을 보며 그것이 나라는 인식을 갖는 건 저곳과 이곳의 시간이 ‘같다’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로부터 ‘김’에 대한 생각을 출발시켜보도록 하자. 영화는 ‘김’의 얼굴을 담은 사진 한 장으로부터 시작했다. 서울에서의 김서방이 아니라 5월의 ‘김’을 보여주는 이 사진 한 장에서 우리는 이름이 아니라 성을 보고 있다. 대상에 대한 고정장치인 이름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계속해서 미끄러지고 있는 상태다. 마찬가지로, 그곳 화면과 이곳 객석의 시간은 동질적이지 못하다. 


이를 영화 매체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으로도,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우리의 인식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 판단은 중요하지 않다. 광주의 진실을 찾아가는 게 아닌 이 영화에서 두 장소의 시간관념은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는다. 말하자면 그냥 그 자리에 그대로 남겨진다. 우리가 그들을 저버렸기 때문도 아니고, 그들이 실패했기 때문도 아니다. ‘김’의 얼굴을 통해 그들의 뿌리, 시공간으로 진입한 우리는 어떠한 목적이나 결론 없이 공간을 서성이다 밖으로 빠져나온다. 이때 이 여정은 철저하게 주관적이지만, 접촉하는 것이 불가하므로 철저하게 객관적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단지 현장을 방문해 둘러보는 것만으로 그곳에서 건져 올린 생각이 객관적인 게 되느냐고 말이다. 분명 틀린 말은 아니다. 어떠한 상황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개인의 주관에 따르므로 그런 의미에서라면 ‘객관’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실제로 이 영화는 도입부에서 자체적으로 던진 물음에 답하지 않는다. 그러나 도입부에서 던진 물음은 포물선으로 날아가 궤적을 형성한다. 이 궤적은 기록된 상태에서는 눈에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따라잡을 수 없다는 점에서 역사의 후천성과 일치한다. 요컨대, 동시대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은 비디오 판독기와 같은 기록의 매체를 통해 진솔함을 획득하게 된다. 


잠깐, 나는 ‘진실’이 아니라 ‘진솔함’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사실(Fact)에 주관을 더하면 그때야 비로소 진실이 된다. 바꾸어 말해, 우리가 객관을 통해 바라보는 현장은 어디까지나 ‘사실’이다. 내가 어느 한 쪽의 편을 들어주려 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가 현장에서 찾아낸 게 ‘진실’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북한군이 왔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혹은, 현장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광주의 시간은 전부 기억되지 않은 채 부분부분 파편화되어 있다. 이런 상황 속에 사진은 매체 특유의 성질이라 여겨졌던 중립, 객관성을 반대로 이용당하게 된다. 


우리는 오직, 사진 속에서 믿고 싶은 것만을 본다. 그 이유는 우리가 사진 매체를 진실의 재현이라는 관습 안에 두었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또한 그렇다.) 사진 자체는 충직하게 현실을 재현한다 하더라도 맥락을 맞추어 서사를 형성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해설자의 몫이다. 그렇다면 이제 영화 속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관으로 자리를 옮겨보도록 하자. 우리가 찾던 ‘김’의 얼굴이 전시관 한쪽 벽에 참고자료로 놓여있다. 벽 위의 해설은 ‘김’이 이름 모를 저항군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달리 보자면, 우리는 이 해설을 따라 ‘김’을 잊혀진 자, 혹은 추방된 자로서 여기고 있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며 ‘김’의 궤적을 쫓는 것이 마치 전시관을 탐방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첫 번째로, 전시관의 목적은 어떠한 사실을 다투기 위한 장소가 아니다. 전시관의 목적은 전시된 것들이 이루고 있는 풍경들, 이를테면 그들이 모여 만들어진 성좌에 이미지를 부여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어떠한 시대적 시공간을 만들어내는 행위에 관객을 동참시키는 것이다. 이른바 역사 탐험, 혹은 남겨진 장소라는 이 전시관 안에서 관객은 ‘그것’ 자체로서 보존되고 남겨지는 여러 사물들을 관람한다. 


물론 이 행위는 정말로 실존했던 시공간을 불러일으킨다는 보장이 없다. 대표적으로는 테마파크가 이에 해당한다. 디즈니 랜드나 에버랜드의 경우, 그곳은 정말로 실존한 바가 없는 장소이지만 그럼에도 환상의 나라로서 우리에게 인식된다. 정해진 코스에 따라 시공을 거닐면서 어떠한 풍경을 체험하는 행위는 말 그대로 후천적인 경험이다. 말하자면 어떤 궤적을 따라가는 일이 공포특급이나 방탈출 게임처럼 후천적으로, 자발적으로 문제 해결을 해나간다고 여겨지게 하는 착각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반박하는 두 번째는 전시관이라는 장소가 ‘추모관’이 될 경우이다. 911 테러처럼 어떤 사건이 벌어졌던 시공간을 보존할 목적으로 건립되는 ‘메모리얼 파크’는 전시나 관람을 위한 장소가 아니다. 방문자의 현실 위에 설립된 이 공간은 [포켓몬 고]의 스테이션처럼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되, 관람자의 인상 속에 자리한다. 말 그대로 이곳은 실재하지 않는 공간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안으로 응시할 때는 명백히 현존한다. 이 착시의 마술을 기만이나 현혹과 같은 수사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그것과 같은 원리로 추모의 기운은 우리의 인상을 잠식해온다. 요컨대, 그 둘은 본질적으로 같다. 어떠한 역사의 환영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갈라놓을 수 없는 현상인 것이다. 


세월호 사건에서 한국 사회는 그와 같은 역사적 환영에 사로잡혔다. 그곳은 가해 전시관이기도 했지만 피해 추모관이기도 했다. 이때 두 사례 사이에는 모순된 문제가 등장하게 된다. 무언가를 전시하는 것이 추모의 행위가 될 수는 없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무언가를 추모하는 행위가 전시의 행위가 될 수는 없다. 전자의 경우는 단순한 사실 나열에 불과하고, 후자의 경우는 감정적 기만에 가깝다. 부실한 수사와 영혼 없는 사과, 이 두 가지 사례 사이의 합의점을 찾지 못한 한국 사회는 자아상을 보여주는 거울 앞에서 한없이 미끄러지기만 했다. 그 미끄러짐은 멀리서 볼 때 코미디처럼 보였지만, 가까이서 볼 때는 끝없는 분쟁의 원인이었다. 


무엇이 전시이고 무엇이 추모인지를 분간하지 못할 지경에 다다랐을 때 사람들은 이 사건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사건으로부터 멀어지게 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무관심이 아닌 관심이었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 사이에서는 무관심이라는 감정이 무의식의 기전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무의식을 통해 인상 안에서는 존재하지만 현실 공간에서는 의식되지 않는 것들이 우울증을 유발했다. 병원에 가도 원인을 알아낼 수 없었으며, 눈에 보이지 않으니 물리적으로 취할 수 있는 조치도 없었다. 다만 인상으로부터 흔적을 쫓는 것만은 가능했다. 사람들은 물리적 현실에 나타난 궤적을 찾아 떠나기 시작했다.  


이 영화는 그런 맥락에서의 추모를 한다. 정확하게는 추모관을 건립하는 것에 가깝다. 도입부에서 열렬히 행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만 영화는 그들을 매정히 지나친다. 이들의 목적은 그 의견에 반박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을 때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부끄러움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떠났다. 그리고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영화는 진실의 문턱에 다다르지 못하고 정해진 공간 안을 맴돌기만 한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오랜 기억 속에 있던 이 장소로 다시 돌아온 것뿐이다. 


영화가 그리는 궤적은 어느 다큐멘터리와 같이 야수의 심정으로 총알을 쏘는 것에서 비롯되는 운동 에너지를 함유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 궤적은 다 부서지고 남은 폐허를 맴돌며 실재의 꺼풀을 벗겨보려는 시도에 가깝다. 서대문 형무소, 히로시마 평화기념 공원, 전쟁기념관, 체르노빌, 아우슈비츠와 같은 어두운 장소들에서 우리는 과거와 동일한 풍경을 목격할 수는 없겠지만, 이곳을 떠도는 망자의 대열에 합류함으로써 우리는 기억을 수집할 수 있다. 벤야민의 말마따나 수집가는 폐허 속에서 쓸만한 것을 찾아낸다. 이 골동품은 낡고 오래되었고, 이제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했거나 기능하더라도 더는 활동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지만. 이 골동품들을 모아둔 공간은 우리에게 반짝임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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