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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ug 25. 2020

불사 : 불편하고도 편협한 진실

<반교 : 디텐션>(2020)



<반교 : 디텐션>을 구성하는 물질은 무엇일까. 이것이 영화이므로 당연히 ‘영화’로 구성되어 있다 말할 수 있겠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이 영화는 ‘작은’ 게임을 찾아다니는 게이머들 사이에서 한때 인기를 끌었던 작품을 원작으로 했다. 그리고 게임을 해보았던 이들이라면 영화를 보며 자연스레 게임과의 비교가 이루어질 공산이 크다. 따라서 게이머들은 이 영화에서 ‘게임’이라는 물질을 떠올릴 테고, 이러한 상황은 영화를 게임의 연장선으로 보게 한다. 잠깐, 이 이야기가 단번에 반박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이 글을 조금은 더 읽어주길 바란다.


먼저 작품이 다루는 소재가 다름 아닌 대만의 역사라는 점을 논해야 한다. (그것을) 얼마나 잘 구현했는지가 아니라, 구현이 구원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다소 난잡한 논증이다. 영화가 역사를 다루는 방법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고, 단순히 서사의 구축을 위해 소모하는 것뿐이라면 역사를 환상 안에 매몰시켰다는 비판을 피해가기 힘들다. 물론 역사를 정직하게 구현하려는 시도 또한 ‘순수영화’라는 환상을 경유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구축된 환상이 순수에 대한 갈망이라는 점을 알기에 오히려 그들에 대한 윤리적 지지를 표명하게 되는 것이다.


*


아주 분명한 사실 하나는 역사가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인간의 사상은 사회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구조 사이를 지탱하는 점착물이다. 말하자면 우리 사회가 일종의 건축물이라고 가정할 때, 인간과 사회를 이어주는 매질이 바로 사상(an idea)이다. 그 때문에 인간이 세상과 관계를 맺는 과정에는 미적지근한 지각 운동이 동반될 수밖에 없다. 또한 실제 지각처럼, 대륙판이 맞붙어 거대한 산이 생겨나거나 지진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일도 일어난다. 대륙이 영원한 것처럼 보여도 지표 위를 살금살금 떠다니고 있듯이, 역사는 미묘하지만 확실한 속도로 붕붕 떠다니고 있다.


그런 점에서 역사는 영화 위를 붕붕 떠다니는 쇼트들과 맥락적으로 섞여들어 간다. 영화가 지닌 입체(relief)의 면모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것은 3D라는 환영의 공간이다. 영화 기술의 발전과 맞물린 이 이야기는, 어떤 면에서 영화의 기록적인 성격이 ‘역사’에 대한 보존의 기능을 하고 있음과 전혀 무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부동할 것만 같던 대륙이 천천히 이동하듯이 영화도 그렇게 흘러간다. 들뢰즈가 영화에 대해 지적한 시간-이미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된다. 우리가 영화의 전면에 드러나는 스펙터클을 보는 동안, 배후에는 서사구조와 맞물린 시간이 여전히 흘러가고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내가 생각하기에 만약 영화가 이데올로기의 산물로 표현되어야 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영화의 안이 아닌 형식 그 자체에 답이 있다. 그 시작은 다름 아닌 에이젠슈타인이다. 에이젠슈타인이 <전함 포템킨>을 통해 보여준 충돌 몽타주는 A와 B를 더해 C를 만들어내는 변증법이었다. 여기서 A와 B는 전혀 다른 것이지만 그들을 이어주는 편집을 통해 완전히 다른 C로 이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볼 문제는 A와 B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어떤 달라붙음이 이루어졌느냐는 것일 테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변으로는 편집 과정에서 제작자의 이데올로기가 작용한다는 다큐멘터리의 구성론이 불려 온다.


촬영은 정직하지만 편집을 하며 그것이 망쳐진다고 믿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세계를 선택적으로 포착한다는 것 자체가 편집의 일환이라고 말하면서 ‘순수라는 환상’에 사망선고를 하는 이도 있었다. 카메라 오토마티즘에 의존하는 영화가 인간의 개입 없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순수한 것은 분명하나, 카메라의 시선이 세계를 가두는 순간에 그것은 비(非)순수한 것이 된다. 이 난제는 ‘순수의 비순수’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영화 매체가 인간의 세계에 편입되는 것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디지털 시대에 접어든 오늘날에서 그 난제의 의미는 카메라 오토마티즘의 원류로 다시금 회귀한다.


카메라 오토마티즘이 디지털 시대에 화두가 되는 이유는 알고리즘 기술이 본격적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알고리즘은 한번 시작점을 지정해두고 나면 이후로는 알아서 자신을 재생산한다. 예컨대 이를 두고서 기술복제시대의 두 번째 판본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딥 러닝 기술은 학습의 목표만을 지정해주면 이후로는 프로그램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한다. 그 과정에서 프로그램은 최초에 지정되지 않았던 프로그램을 자기 손으로 만들어내며,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처음으로 만들었던 프로그램이 아니라 프로그램이 만들어낸 것들을 보게 된다.


이를 영화에 적용해본다면 다음처럼 바꾸어 쓸 수 있다. 이전 시대의 영화가 카메라를 선별적으로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편집이라 보았다면, 우리 시대에 카메라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 뚜렷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프로그램의 자동화를 통해 영화가 알아서 척척 만들어질 것만 같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우리의 목표는 마땅히 지정되어야만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다. 비유하자면 우리는 레일을 깔아 카메라를 이동시키는 달리(Dolly) 기법처럼 정해진 노선을 깔아주어야만 한다. 미래로의 노선을 미리 설정해둔다는 건 시간의 궤적을 미리 그려본다는 것과도 같다.


그런데 이렇게 알고리즘에 따라 뭉쳐지는 알갱이들이 구축 과정에서 원하지 않는 불순물을 얻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촬영을 위해 세워둔 카메라는 동물이나 낙엽과 같은 불순물에 가려질 수도 있다. 반면, CCTV처럼 세상이 순수해지기를 바라며 원하지 않는 불순물을 인위적으로 포착하려 들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카메라의 오토마티즘을 무엇으로 정의해야 좋을까?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오토마티즘은 늘 낯선 것을 동반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삶이 어쩔 수 없이 시간을 따라 진행되는 것처럼, 카메라는 그 시간의 진행 속에서 예상치 못한 것들을 많이 만난다.


*


영화가 게임이 되어가고 있다. 반대로 게임도 영화가 되어가고 있다. 처음에 이 교환은 단순한 이미지의 수입으로부터 시작했지만 점진적으로는 각자의 성질을 닮아가는 게 되었다. 게임이 영화의 입체적 이야기 흐름을 취득했을 때, 게임은 영화가 지녀야 할 실사의 논리 또한 가지게 되었다. 영화가 게임의 입체적 선형성을 모방했을 때, 영화는 게임이 지니는 불사의 논리 또한 지니게 되었다. 이들을 다소 단순하게 생각해본다면 영화는 현실을 닮아있기에 윤리적이고 게임은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기에 불멸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들에 대한 비판도 그러한 맥락에서 성립한다.


영화의 게임화를 우려하는 이들은 현실로부터 멀어짐에 따른 윤리의 해체를 우려한다. 게임의 영화화를 공격하는 이들은 게임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매체인데 왜 죽음을 신경 써야 하느냐고 묻는다. 이때 우리에게 포토제니라는 이름으로 익숙할 전자는 그렇다 쳐도, 후자에 대해서는 조금 더 부연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게임은 캐릭터가 죽어도 얼마든지 부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불사’이기도 하지만, 사회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위험한 몇 가지 행동들에 대한 책임이 면제된다는 점에서 ‘불사’이기도 하다. 육체와 정신 모두가 현실의 판면과 어긋나는 것이다.


유명한 갱스터 게임인 GTA 시리즈를 생각해보자. 현실에서는 사람을 때리거나 죽이면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이 강력범죄이기에 사회적 죽음을 선고받게 된다. 그러나 게임 안에서는 그런 행동에 대한 피드백이 면제된다. 사람을 얼마든지 죽여도 아무런 제제가 없고, 게임 내 NPC가 달려와 플레이어의 캐릭터를 죽인다 하여도 얼마든지 살아난다. 이는 이른바 ‘리얼리즘’의 요소를 충족시키기 위해 여러 피드백(컨트롤러의 진동, 영화와 같은 카메라 구도, 플레이어와 상호작용하는 NPC)을 사용하는 것과 정확히 모순되는 지점으로서, 쾌락의 스펙타클만을 취한 채 책임만을 저버린다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재미있으면 그만”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들이 현실을 스크린 안으로 끌어들인 이상 현실의 논리에 서서히 잠식되어가고 있음을 깨닫아야 한다. 그런데 과연 현실의 논리란 무엇일까? 현실의 이미지적인 측면일까 아니면 현실의 윤리적인 측면일까. 먼저 현실의 이미지적인 측면에 대해 논해보자. 우리가 티브이나 모니터를 선택할 때 주로 접하게 되는 문구가 “현실처럼 생생한”인 것과 마찬가지로, 폴리곤과 프레임의 중첩이라 할 수 있는 게임과 영화는 그 밀집도가 높아질수록 그래픽과 화질이 향상된다. 그리고 여기서 전자는 포토제니라는 환영의 진실로 연결되며, 후자는 게임적 리얼리즘이라는 진실의 환영으로 인도된다.


문제는 게임의 포토제니가 윤리를 견인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게임의 그래픽이 구체화될수록 우리는 ‘진짜 같다’고 말할 테지만, 기술이 얼마나 발전하든 간에 ‘지금-이곳’에 있는 그래픽이야말로 가장 생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2010년대에도 우리는 현실 같은 게임인 [크라이시스]를 극찬했지만 그것이 2020년대에는 얼마나 초라해 보이게 되었는지를 생각해보라. 같은 맥락으로 역사라는 이름의 현실을 생각해본다면, 우리에겐 지금 당장 맞닥뜨린 것만이 가장 큰 화두이며 과거의 사건 따위는 빈곤한 이미지처럼 보이게 된다. 그것들은 여러 문헌을 통해 재생산됨으로써 본래의 크기를 상실한 채 아주 작은 크기의 윤리적 사이즈만을 지니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는 늘 화질 향상의 기술 개발에 매달려야만 한다. 결국 이전 시대의 영화와 게임을 리마스터링하는 일은 단순한 추억놀음에 불과하지 않다. 혹은, 이전 시대를 영화와 게임으로 되살려내는 일은 단순한 요깃거리로만 소모되어서는 안 된다.


*


<반교>는 동명의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이며, 이 영화가 게임과 닮은 점을 찾아보라 한다면 그 오토마티즘 적인 성격에 주목해볼 수 있을 것이다. 판판한 2D 그래픽으로 이루어진 게임 [반교]에서, 플레이어는 게임이 지시하는 장소로 끊임없이 유도되며 그곳에는 항상 진실이 깃들어 있다. 이른바 게임의 오토마티즘은 우리를 진실로 몰고 가며, 게임의 변형인 영화에서 카메라 오토마티즘은 역사의 진실을 향해 차분히 나아간다. 물론 이를 근거로 <반교>의 이야기가 등을 떠밀리는 것과 같은 게임적 진행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른 속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톰 거닝의 유명한 논문 「Cinema of attraction」을 따로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영화와 게임의 공통점 몇 가지를 찾아낼 수 있다.


먼저 영화는 유희를 위한 전진으로서, 앞으로만 나아가되 그 과정에서 여러 흥미로운 것들을 통해 관객을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 이 시간의 불가역성은 영화의 장면이 늘 선형적으로만 결합된다는 점과 그 이미지의 쇼트가 중층으로 겹쳐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 대한 이해를 제공한다. 포토샵 프로그램에서 여러 레이어가 한데 어울려 겹쳐지는 것처럼, 게임의 폴리곤과 영화의 쇼트는 전대의 위에 자신을 겹쳐 올리는 방식으로 구축된다. 여기서 편집 기술은 그 시간의 허리를 수정하는 게 아니라 시간의 위에 과거를 끼얹는 방식으로 사용되며, 대표적으로는 Ctrl+z와 Ctrl+v처럼 텍스트를 임시로 저장해두는 클립보드를 떠올려볼 수 있다.


잠시나마 위에서 언급했었던 달리 기법을 떠올려 보자. 레일이 깔렸다는 점에서 놀이동산의 어트랙션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한번 출발하면 마음대로 멈출 수 없다는 불가항력을 눈여겨볼 수도 있다. 이는 역사를 폭주하는 열차에 빗대었던 벤야민의 은유를 떠오르게 하는 바, 우리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반교]와 <반교>의 불가항력에 대한 탐구로 이어지게 된다. 이를테면 [반교]에서 플레이어는 슈퍼 마리오처럼 맵의 한쪽으로만 나아갈 수 있으며 이는 플레이를 위해 강제되는 사항이다. 레벨 디자인 상으로 맵의 곳곳이 막혀 있지만, 게임의 진행에 따라 갈 수 있는 영역이 해금되며, 처음에는 빙 돌아서 가야 했던 길도 나중에는 바로 통할 수 있게 된다.


<반교>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반교>에서는 적을 피해 한정된 복도를 뛰어다니는 것과 같은 식의 일방향적인 강제가 자주 등장한다. 게임에서 빌려온 연출을 굳이 지적하지 않더라도, 영화의 이야기는 초반에는 알 수 없었던 것들이 후반에 가서야 비로소 알 수 있게 되는 복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컨대 이 부분이 바로 [반교]의 레벨 디자인과 유사하며, 영문을 알 수 없던 쇼트가 후반부의 어느 장면에서 불현듯 끼워 맞춰지는 ‘퍼즐 맞추기’의 쾌감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그리고 이 작업은 필름을 직접 잘라내는 것과 같은 식의 현실 조작이 아닌, 클립보드를 이용해 과거에서 현재로 우리를 옮겨두는 게임적 리얼리즘의 논리를 따라간다.


그러나 게임과 영화의 등장 순서를 두고서 두 매체의 서열을 매기는 일은 다소 부질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영화가 게임을 닮아간다는 말에는 미디어 고고학을 통한 영화의 재발굴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임이 영화처럼 되어갔기에 영화는 게임을 자신의 아래로 편입한 것일까? 아니다. 게임이 영화에서 DNA를 빌려오는 것을 보고는 영화가 게임이 자신의 친족임을 뒤늦게 깨우쳤을 뿐이다. 즉 우리가 영화에서 게임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영화가 게임에 우선해서가 아니라 게임이 영화의 다른 판본이어서다. 영화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게 윤리적인 선택이 될 수 있고, 게임이 실사를 닮아가는 게 재미에 대한 가중이 될 수 있다.


1편에서 ‘영화적 게임’의 표본처럼 언급되었던 [라스트 오브 어스]는 2020년에 발매된 2편에서 영화의 정치적 올바름에 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1편이 단순한 ‘시네마틱’에서 벗어난 시네마의 어떤 면모를 보여주었다면, 2편에서 우리는 제작의 윤리와 구현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반면 영화가 게임처럼 변해갔다는 말은 그보다 앞선 2000년대부터 흘러나왔다. <엘리펀트>가 개봉했던 2003년에는 실화를 다루면서도 FPS 게임처럼 카메라 워크를 잡는다는 논란이 일었다. 또한 2001년에는 9.11 테러를 전후로 비행기가 나오거나 빌딩이 나오는 영화는 장면을 편집하거나 개봉을 취소하기도 했다.


이것들은 모두 카메라의 워킹이나 카메라의 안에 비치는 이미지가 사건의 ‘흔적’을 면밀히 건드린다는 점에서 금지되었었고, 우리는 이것을 이미지를 통해 간접적인 징후를 목격할 수 있음에 대한 증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노인의 얼굴에 새겨진 주름이 삶의 지난 시간을 포획하듯이, 이미지는 시간과 결탁하여 뒤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방식으로 중첩된다. 바로 이 점에서 영화와 게임은 윤리의 형태에 관한 특이성을 공유한다. “예컨대, 불사인 것들은 사랑을 위해 불멸을 포기해야만 한다. 그가 사랑하는 현실과 함께 늙어감으로써 불편하고도 편협한 진실을 마주해야만 한다. 우리는 시간이 주도하는 질서 아래에 편입됨으로써 이야기를 계속해 나갈 수 있다(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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