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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l 22. 2020

속세를 향한 수도인의 작은 갈망

<데이즈>(2020)



차이밍량의 <데이즈>는 그릇에 떠놓은 물 같은 영화다. 청아하다거나 초췌하다는 게 아니라 내용이 투명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실 이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닌 것 같다. 다큐멘터리처럼 건조한 시선을 지닌 이 영화는 무언가를 보여주고 있지 않다. 두 명의 남자가 나오고, 카메라가 그들의 삶을 관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화를 보고 난 우리가 그들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다큐멘터리적 시선의 진실됨을 생각해보게 된다. 


다큐멘터리란 세계에 대한 기록(Document)이지만,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만으로 세계의 진실이 깨어진다고 말하는 보수적인 관점이 있다. 그들에게 진실이란 너무 소중한 것이기에 오히려 포착되어서는 안 된다. 혹자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과연 포획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만 것 동물 보호의 일환일까? 세상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하는 건 아닐까? 눈치챘겠지만 보수주의자들이든, 진보주의자들이든 간에 진실 자체를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믿음에 대한 다양한 수행방법이 있을 뿐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데이즈>는 우리가 여태까지 살펴보지 않은 면에 대한 탐사이다. 요즘 말로 ‘브이로그’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이 이야기에서 인물의 대화는 여섯 마디 정도가 전부이다. 2시간 여의 러닝타임을 지닌 이 영화는 40여개의 쇼트로 흘러가고, 그나마도 이 중에 10개 정도는 하나의 장면을 다양한 구도로 보여주기 위해 소모된다. 평소 슬로우 시네마라는 이름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이 형식에 익숙하겠지만, <데이즈>는 미술관에 걸릴만한 영화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공간에 설치됨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간에 설치될 필요가 없다는 뜻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첫 번째, 이 영화는 우리네 현실에서 비중을 갖지 않는다. 이 영화는 설치(Installation)라기 보다 체험에 가까운 영화다. 그것도 우리가 누누이 말해왔던 체험이라는 용어와는 거리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영화에서의 체험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영화적 체험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영화의 가상이 우리의 전신을 에워싸는(Surround) 것이다. 이때 우리의 신체는 가상에 둘러싸이는 ‘것’으로서 실존의 중심에 꿋꿋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러한 대목에서 다큐멘터리의 보수적인 힘이 발휘된다. 


다큐멘터리가 그저 가상에 불과할 뿐이라면, 이것은 우리를 기망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조금 더 생생히 체감하도록 돕는 일이다. 이는 반성적 성격으로 제안되는 영화의 거울(Mirror Stage) 기능과도 다르다. 오히려 다큐멘터리라는 가상은 영화관 안에 설치되는 서브 화면 (한국의 ScreenX와 같은)이나 돌비 사운드에 가깝다. 이러한 생각은 영화의 안쪽이 모두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음을 가정한다는 점에서 매우 도발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세계의 어떤 진리를 표방한다는 점에서도 형이상학’적’이라고 비판될 수 있을 테고 말이다. 


맥락을 다시 본문으로 옮겨와서 차이밍량의 <데이즈>를 짚어보도록 한다. 차이밍량은 2017년 베니스 영화제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관점을 내비친 바 있다.


"나의 첫 VR관람은 갑자기 귀신이 나타나고, 카니발 축제를 보여주는 콘텐츠였다. 머리를 모든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고, 어디든 볼 수 있었는데 그 탓에 관람하는 사람도, 창작자도 모두 이유 없이 바빠서, 나는 이걸 보자마자 VR은 제작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리를 뜨기 직전 마지막으로 관람한 것이 직물공장을 360도로 보여주는 VR이었는데, 나는 그 생생한 색감과 디테일에 매료되어 유혹을 느꼈다. 그 이미지는 내가 마치 그 공장에 있는 기분을 들게 해주었다." (Veriety, Venice Interview: Tsai Ming-Liang on the craft of VR film making, 2017.9.4.)


차이밍량의 이 인터뷰는 당시에 막 공개했던 <The Deserted: VR>(2017)라는 VR 영화를 염두에 둔 발언임이 분명하지만, 이것이 3년이 지난 2020년의 <데이즈>에서도 얼추 비슷하게 겹쳐 보이는 이유는 따로 있다. ‘게임적 리얼리즘’이라는 표현으로 영화의 게임화와 게임의 영화화를 논하는 글들에는 영화가 ‘체험’의 성격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지적하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그러나 만약 영화가 그런 체험을 온전히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영화의 종말을 눈앞에서 목격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영화는 최후의 현실은 항상 이곳이라고 말해왔던 매체이기 때문이다. 이는 다큐멘터리의 기능이 현실의 완벽한 재현이 아닌 이유이기도 하다. 만약 영화가 우리에게 무언가를 보여주지 못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때 영화는 비로소 끝나게 될 것이니 말이다. 


<데이즈>는 느릿한 흐름으로 극적인 구도 변화 없이 흘러가는 영화이지만, 작품 중간에 날이 바뀌는 장면에서 영화는 새 국면을 맞이한다. 작품의 제목처럼 ‘하루’가 흘러가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푸른 대지 위로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을 차이밍량은 보여준다. 그러나 이 플랑-세캉스는 리얼타임을 따라가므로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을 정말로 목격할 수는 없다. 다만 이곳에 존재하는 것은 바로 전까지 흐르던 동시-녹음의 잡음이 사라지고 난 컴컴한 ‘어둠’이다. 그렇다면 왜 ‘어둠’인가? 이곳에 깜깜한 형태로 남은 것은 영상이 아니라 소음이다. 이 국면에서 영화는 보는 게 아니라 듣는 게 된다. 이는 영화의 영상 재생 기능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소리가 없는 영상이 오히려 더 ‘비현실적(Cinematic)으로 느껴지는 현실을 반영한다. 


화면 뒤로 소가 지나가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지 않는다면 영화가 멈춰버린 것은 아닐지 걱정하게 될 정도다. 마치 거짓말 같은 이 풍경은, 약간의 고동도 들리지 않는 신체를 생명활동의 정지로 여기는 것처럼, 일말의 두려움을 자아내기도 한다. 영화의 기능이 시간을 축약하고, 혹은 늘리는 것이라면, 완전히 정지된 화면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영화가 멈춘다는 것은 시간의 정지가 아니라 사라진 진실을 의미한다. 영화는 진실을 전하기 위해 기차의 형태로 달려왔고, 그 모습은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런 영화가 일순간에 멈춰버린다면 우리는 더는 진실을 ‘체험’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거짓이라는 단어에 가까운 가상과 연루되어 ‘체험’이라는 묘사로 이어지는 까닭은, 영화의 마술적인 면이 아닌 윤리적인 면과 결탁해서다. 요즘에도 ‘너무 진짜 같기에 영화 같다’고 표현하는 말은 변함없이 사용된다. 그 말인즉슨 우리가 이미 영화가 진실이 아니라는 점을 안다는 뜻이며, 영화의 체험이란 그런 의미에서의 현실 체험과도 같다. 우리는 촬영 현장에 있는 반사판처럼, 얼굴을 조명하기 위해 세워진 반사판으로의 영화를 본다. 때문에 다큐멘터리라는 것은 거울을 닦는 행위가 아니라 얼굴을 닦는 행위이다. 


그 다음 물음으로 넘어가자. 그렇다면 VR 다큐멘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이 물음의 변형된 판본을 제시해볼 수도 있겠다. VR 다큐멘터리의 기능적인 면모를 기존의 시네마 안에 끌고 오는 방법은 무엇일까. 차이밍량의 이번 관심은 후자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VR 환경에서 관람자는 전후방을 360도로 둘러볼 수 있고 사운드도 그에 따라 멀어진다. 반면 기존 영화의 환경에서 관람자에게 360도로 다가오는 것은 오직 사운드뿐이다. 영상은 객석에 따라 시야각이 다르므로 관객에게 ‘어느’ 자리에 앉을 것인지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되지만, 소리는 비교적 균등한 품질로 객석에 가닿는다. 


여기서 위에서 언급한 문제의 장면을 떠올려 볼 사람이 많으리라 생각된다. 이 영화는 조용하다 못해 답답한 시야각을 보여준다. 아주 간단하게 말해 당장이라도 고개를 돌려 뒤를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바꾸어 말하면 차이밍량은 VR시네마에서의 시선 고정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 같다. 전후면이 모두 제시된 세계에서 오직 앞만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영화의 현장감, 혹은 리얼리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이 제한된 구도에서 소음이 제거되는 순간은 우리는 시선의 불균질함을 깨닫는다. 이 불균질함은 우리가 일반 영화를 볼 때는 느끼지 못하는 부류의 감각이다. 왜나햐면 영화는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열차의 선로가 앞을 향해 깔렸고 그렇기에 이 앞으로 달려오는 것처럼, 화면이 보여주는 대로 끌려다니는 게 관객의 몫이었다. 


차이밍량의 <데이즈>에서 소리가 멈추는 순간 객석을 에워싸던 포만감은 마술처럼 사라진다. 이윽고 남은 것은 불균질한 시선으로,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방식은 서로의 시선에 가닿아 산란된다. 이러한 모습은 정보의 과잉 시대, 혹은 진실이라는 조미료의 과잉 함유 속에 우리의 시선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 일련의 논평을 남긴다. 나에게서 빠져나오던 시선의 시대가 영상의 우주가 되어버렸을 때, 그곳을 유영하는 우주인인 우리는 영화라는 공간(Space)을 헤엄칠 수 있을까. 아마도 우리 시대에 영화관은 속세를 향한 수도인의 작은 갈망에 가까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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