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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l 16. 2020

영화는 어떻게 소멸하지 않을 수 있는가?

<도망친 여자>(2020) 

영화 <도망친 여자>의 작품 포스터 © 전원사


1. 


흔히들 사진의 기능을 두고서 ‘박제’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한다. 이는 사진이 풍경을 보존한다는 의미로 붙여진 별명이다. 정확히 말하면, 온전한 의미에서의 보존이 아니라 어떠한 강제력을 지닌 행위에 가깝다. 왜냐하면 사진기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눈을 닮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무언가를 바라보는 행위에서 피사체의 저항이 무의미하듯이, 사진은 늘 무력한 존재로 남는다. 그러나 적어도 소멸에 한해서는 이 의견이 달라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진의 박제 기능은 그것이 물리법칙의 바깥에 있다는 점에서 소멸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쉽게 말해, 현실과 사진이 있다면 정말로 소멸하는 쪽은 현실일 것이다. 


이말인즉슨 사진에 관하여 생각을 달리해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점검에 앞서 그동안의 생각을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우리가 사진을 찍는 이유는 눈앞의 풍경이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풍경을 사라지게 하려고 사진을 찍는다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어떤 풍경 같은 것을 볼 때, 그것을 빠르게 해치우기를 원한다. 맛있는 음식 같은 것을 보거나 멋진 풍경 혹은 사람을 보았을 때 가장 먼저 향하는 건 바로 눈길이다. 그리고 이 사례들은 모두 소멸의 직전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맛있는 음식을 ‘먹기 전에’ 찍어둔다는 것이나, 우연히 만난 풍경은 ‘다시 만날 수 없’기에 사진으로 남겨두는 것처럼 말이다.


늘상 볼 수 있는 것이라면 굳이 사진으로 남기지 않을 것이다. 일상이란 그런 의미에서 소멸하지 않는 영속성을 지닌다. 다르게 말해 일상의 소중함이란 ‘영원’할 것만 같았던 것이 ‘소멸’하는 광경을 목격할 때 느끼는 감정이다. 조금 더 생각의 폭을 넓혀본다면, 우리는 영화에서 인용되는 ‘일상’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영화가 일상을 보여준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위의 맥락에 따른다면 영화에서 일상이란 소멸을 위하는 것이 된다. 허나 우리는 영화의 현실보존적인 기능에 대해 많이들 이야기를 들어왔다. 영화는 현실을 반영하며, 그렇기에 영화란 세계의 박제 혹은 재발견이 된다고 말이다. 


예컨대 우리가 아는 영화에서의 일상이란 세계의 박제 혹은 재발견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이에 가장 잘 어울리는 감독은 아마도 홍상수일 것으로 생각된다. 홍상수 영화의 여러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가 유지하고 있는 단 하나의 형식이 바로 일상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는 홍상수 영화에서 일상이라는 단어의 용례적 변화를 논해볼 수 있다.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변화가 바로 소멸의 저편이다. 그가 말하는 일상이란 것은, 일상을 소멸로부터 구출하는 하는 게 아니라, 일상을 소멸시키려는 영화적 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2. 


일상을 소멸시킨다는 것에 관하여 먼저 말해보자. 여행을 가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모습 중에는 현지의 풍경을 빠르게 촬영하는 것이 주목적인 사람도 종종 보인다. 눈으로 무언가를 보며 감상에 젖기보다는, 사라져버릴 이 순간-감정을 비롯한 이 모든 것을 보존하려고 든다. 그러니 이를 두고서 ‘장의사’ 혹은 ‘박제사’라는 표현을 쓴다면 이보다 더 적절한 말은 없을 테다. 시신은 ‘빠른’ 처리가 생명이니 말이다. 


그런데 시신을 빠르게 처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통상적으로 시신을 빠르게 처리해야 하는 이유는 시신이 부패해서다. 다시 말해서 무언가를 빠르게 포착하는 행위란, 현실이라는 시체가 썩기 전에 어서 도려내려는 일종의 솔선수범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영화의 소멸 기능이라는 것은 양가적인 성격을 지닌다. 첫 번째로는 현실을 소멸시키는 와중에 소중한 것을 골라내는 작업이고, 두 번째로는 현실을 그대로 두되 소멸할 예정인 것을 골라오는 작업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영화를 두고서 두 가지 선택지를 받아든다. 지금 이 자리에서 소멸하는 것은 영화인가 현실인가. 


현실에서 소멸할 예정인 것들을 골라온다면 그 영화는 박물관 혹은 냉장고에 다름 아닐 테다. 그리고 이 시선은 대개 다큐멘터리적인 건조함을 띄게 된다. 그러나 벤야민이 말했듯이 수집된 것들은 기능이 없기에 그 자체로 가치 있다. 조금 잔혹하게 말하면 수집이란 ‘미라’를 만드는 행위다. 그것들은 심장도 없고 뇌도 없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가치가 있고, 그러니 영화의 보존에 관한 의무는 일종의 ‘수집’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이 경우 일상이라는 장르는 만연하는 것들을 수집함으로써 그것이 얼마든지 소멸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점을 상기시켜주는 게 된다. 즉 여기서 소멸하는 건 영화이다. 그것들은 제 역할을 끝마친 후 자동적으로 소멸함으로써 관객을 현실로 되돌려보낸다. 


현실을 소멸시키는 와중에 소중한 것을 골라오는 일은, 세상은 모두 망했다는 게 아니라 영화적 세계관의 온전한 구축을 뜻한다. 이 경우 관객은 세상이 망했을 때 무엇을 골라올 것인지와 같은 문제를 접하게 된다. 말 그대로, 현실의 소멸로서의 영화란 도피처와 같은 성격을 지니며, 이때 영화에는 공간적인 성격이 부여되어 ‘패닉룸’으로 기능한다. 이곳에 바깥이란 없으며, 우리가 들고 온 몇 가지 법칙만이 삶의 기본 전제로 작용할 뿐이다. 이 경우 일상이라는 장르는 우리가 숭배하는 대상이라는 게 사실은 얼마나 하찮고 한계가 있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게 된다. 즉 여기서 소멸하는 건 현실이다. 그것들은 지구로부터 멀어지는 우주선처럼, 우리가 떠나온 곳을 더욱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들 뿐이다. 


3. 


일상으로서의 홍상수 영화에 대해 말해보자. 홍상수 영화에서 소멸하는 것은 영화인가 현실인가? 다시 말해서, 홍상수의 일상은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가 혹은 현실을 저버렸는가. 논의에 앞서 홍상수의 영화를 김민희를 만나기 전과 후로 분류해본다. 홍상수의 필모그래피는 김민희를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 말이다. 여기서 ‘만난다’라는 말은 영화 바깥에서의 두 사람의 관계를 뜻한다. 그리고 이 말은 가십으로서의 무언가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이 만나기 시작한 후로 홍상수의 영화에는 김민희가 주연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7), <클레어의 카메라>(2018), <그 후>(2017), <풀잎들>(2017), <강변호텔>(2018), <도망친 여자>(2020)에는 김민희가 주연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영화 내외적으로 모두 ‘페르소나’라는 표현에 적합해 보인다. 예컨대 김민희가 홍상수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면, 홍상수가 김민희를 주연으로 영화를 찍는 이유를 ‘일상’과 연결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 없는’ 일상을 생각해본다는 것과 ‘~가 일상인’ 삶을 생각해본다는 것에 관하여. 우리는 홍상수의 관심사가 둘 중 무엇인지를 먼저 고민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고민해보아야만 둘 중 무엇도 아니라는 점을 깨닫기 때문이다. 홍상수의 최근 영화에서는 김민희가 없는 일상이 등장하지도 않고, 김민희가 일상인 삶만이 보여지기도 한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면, 김민희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가 아니라 김민희를 통해 보여지는 홍상수 영화의 전체 모습이다. 


홍상수의 김민희 연작에서,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7)부터 <그 후>(2017)까지의 김민희는 극 중에서 어떤 역할로 등장한다.* 이들은 작품 속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주된 화자로 기능한다. 이 세 가지 영화에서 김민희는 ‘어떤 사연 있는 여자’로 등장하는데, 그들은 모두 일상으로부터 도피 중이거나 도피 중인 상황이다. <밤 해변>에서는 외국이고 <클레어>에서는 영화제이며 <그 후>에서는 출판사이다. 영화는 이들이 일상의 바깥에서 교훈을 얻은 후에 다시금 일상으로 되돌려지기를 원하는 듯 보인다. 따라서 이 경우는 일상의 소중함을 탐독하는 것으로, 영화 같은 삶보다는 현실에서의 익숙한 것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후>는 세 가지 작품 중 가장 마지막에 개봉했지만, 제작은 <밤 해변>과 동일한 2017년에 촬영했다.)


그런데 현실에서의 익숙한 것들에 대해 말하는 게 홍상수의 영화의 전반기였다. <생활의 발견>이나 <강원도의 힘>에서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사물들은 인물의 시선과 관찰, 발화를 통해 지칭됨으로써 ‘재발견’ 된다. 이 과정에서 대상의 언어는 분해 후 재구축 절차를 거치는데, 이 양상은 영화와 현실이 관객을 교두보로 부딪힐 때 현실 쪽에 더 힘을 실어준다. 왜냐하면 영화는 현실에 가닿는 것으로서 제 역할을 다한 채 소멸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관객은 무심코 던진 시선과 말의 힘을 몸소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는 체험을 위한 도구로서 소멸된다. 말하자면 <밤 해변>에서 <그 후>까지의 홍상수는 여태까지의 홍상수 영화처럼 ‘김민희’ 체험을 위한 영화를 찍었다. 


4. 


<그 후>의 후반부 작업에서, 택시에 올라탄 김민희를 아름답게 포착하는 카메라를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이때까지는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다음 작품인 <풀잎들>에서 우리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풀잎>에서 김민희는 카페에 앉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즉 이 영화에서 김민희는 작품의 전면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김민희는 카페의 뒤쪽에 앉아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인 ‘일상’을 수집하고 있다. 그녀는 타인의 이야기를 엿듣고, 그것을 가공해 글을 쓴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기능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대상을 가치 있게 만드는 수집가의 면모를 떠오르게 한다. 


영화 안에서 김민희는 어떤 것으로 기능하고 있지 않지만, 오히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영화 안의 것들을 수집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쉽게 말해 홍상수 영화 안의 김민희는 영화 안쪽의 총괄 책임자가 된다. 이를 두고서 김민희가 홍상수의 영화적 분신이 되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홍상수가 영화를 바라보는 방식이 바뀌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점이다. 여태까지 홍상수가 영화를 현실을 위해 소멸시키는 도구로 보았다면, 이제는 현실을 저버리고 영화로 돌아가야 하노라고 주장하는 듯 보인다. 


<강변호텔>과 <도망친 여자>에서 김민희는 그녀가 방문한 공간의 어떤 인물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들을 포함해 위에서 언급한 6개 영화가 개봉시기로만 나열했을 뿐, 실질적인 제작은 비슷하거나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음을 지적하면서 위의 분석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은 홍상수의 영화가 즉흥적으로 촬영된다는 점으로 이해될 수 있다. <자유의 언덕>(2014)에서도 볼 수 있듯이 홍상수에게 중요한 건 제작 시기가 아니라 배열방법이다. 그러므로 위의 “영화로 돌아가야 한다.”라는 문장은 단순한 회귀나 복귀의 의미로만 알려져서는 안 된다. 어쩌면 홍상수에게 ‘영화가 된다’라는 말은 현실을 영화화하는 게 아니라 영화라는 가장 이상적인 조합을 찾아내는 게임에 가까워 보인다. 요컨대 홍상수의 영화에서 발견되는 김민희라는 수집가는, 영화의 밖에서 홍상수가 하던 작업을 영화의 안쪽에서 수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홍상수의 기존 작업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홍상수는 일상을 소멸시키려는 것 같다.  이 소멸은 영화의 존재론과 연관이 깊다. 도입부에서 말해두었듯이, 카메라가 현실을 소멸시킨다는 말은 카메라가 현실을 미라(corpse) 상태로 만든다는 말과 같다. 현실을 촬영했기에 그 현실은 사라져도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잔혹한 처사로부터 도망치려 한다. 이 과정에서 현실은 박제의 형태로라도 남아있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내비치는데, 이 볼품없는 모습의 현실은 본래 기능을 상실한 채 수집가에게 수집된다. 그리고 이 현실은 영화의 문을 두드리면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고자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팔팔했던 시기의 예전 자신이 들어서 있다. 요약하자면 홍상수는 자신이 바라본 현실의 어떤 면을 표현하기 위해 영화라는 반(反)면을 수집하는 수집가였다. 


5. 


반면에 홍상수의 이후 작업은 영화와 현실을 오가지 않는다. 홍상수는 김민희를 영화의 주인공으로 만들기보다 영화 안의 수집가로 만드는 길을 택했다. 이에 대해 덧붙일 만한 논평은 홍상수의 영화에 사회적 분위기가 은밀하게 녹아 들어간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전에 홍상수 영화에서 여성들이 배제되어왔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동시에 한국 사회에서 전반적으로 여성 운동이 대두되고 있다는 점을 안다. 이 두 명제에 부응하기라도 하듯이 <도망친>에서는 여자들이 남자 이야기를 한다. 한 명의 여자(김민희)가 세 명의 여자를 만나고, 그들은 각각 남성에 대한 제각각의 생각을 내놓는다. 이때 그들이 생각을 내놓는 방식은 직접적이거나 적접적이지 않는데, 아마도 이는 홍상수가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말한다기보다 그저 현실을 충실히 담아낼 뿐이라는 점에서 귀인하는 모습일 것이다. 


홍상수가 현실을 담아낸다는 말은 영화라는 반(反)면에서 기능을 제거한 순수 미라 형태로서의 면모를 부각한다. 이는 그동안의 홍상수 영화에 구조적이거나 형식적이라는 말보다 기능적이라는 말이 덧붙여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이 기능적인 면모는 인물에게도 적용되어 소위 말하는 스테레오 타입을 만들어내었다. 짤막하게 말하건대 홍상수의 영화에서 남자는 한심했었고 여자는 새침했었다. 그런데 김민희는 성격으로만 본다면 남자와 여자 둘 중 그 무엇도 해당하지 않는다. 김민희는 그저 김민희일 뿐이며, 이러한 모습은 홍상수의 어떤 영화에서도 그녀가 그녀로만 남을 수 있게 한다.


그렇게 본다면, 홍상수는 김민희라는 미라를 통해 그동안의 영화관에 변화를 준 듯 보이는 면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도망친 여자>에서 그가 펼치는 논의를 참조해볼 수 있겠다. 영화에 나오는 여인들은 다들 무언가로부터 도망쳐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고, 그것들을 관망하는 건 영화의 중심에 선 김민희이다. 홍상수가 김민희를 이용해 인물의 세 가지 사연을 종합하는 방식은 다분히 의도적이지만, 세 가지 사연 중에 무엇을 택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도가 서려 있지 않다. 이때 홍상수 영화에서의 일상성에 생각해본다면, ‘의도가 서려 있지 않은’ 행동이 얼마나 많은 우연을 낳고, 그것들이 어떻게 일상이 되는지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세 개의 장막(Chapter)으로 구성된 이 영화에는 매 챕터의 종료를 알리는 음악이 흘러나옴으로써 각각의 파트를 밀어낸다. 이는 홍상수의 다른 영화에서도 몇 번 기용된 연출이지만, <도망친>은 들어가고 나오는 형식을 고착화하는 것으로 자신을 특별화한다. 마치 관객에게 선택지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펼쳐진 세 개의 이야기는 하나의 일상이 아닌 세 개의 사건으로 분할되며, 어떤 면에서 이것들은 문제가 빨리 해결되기를 원하며 자신을 촬영이라는 구도 안으로 몰아붙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의도를 통해 소멸의 길에 들어서는 방식으로 자신을 구원하기 때문이다. 


6.


현실을 저버리고 영화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통용된다. 현실을 저버리는 것은 우리가 사는 곳을 포기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사진 혹은 영화가 묘사하는 현실에 대해 우리가 궂은 불만이 있다는 뜻이다. 되짚어 보면 홍상수의 첫 출발은 싸늘한 리얼리즘 영화*이기도 했다. 이 영화에서 홍상수는 소설이라는 픽션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픽션을 영화화했고, 이것은 그가 영화와 현실의 관계에서 현실을 소멸로부터 구원하려 함을 보여주었다. 현실은 픽션이 됨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픽션이 됨으로써 상품이 되고, 상품이 된다는 건 실질적인 ‘기능’은 잃을지언정 수집가의 보관소에서 안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


꼭 김민희 때문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지만, 이 변화는 김민희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제 홍상수의 현실은 영화의 바깥에서 영화의 안쪽으로 들어감으로써 그동안의 패닉룸을 탈출한다. 그동안 이 패닉룸에서는 그가 애지중지하는 것들이 아기자기하게 모여있었고, 인제는 더는 볼 수 없는 풍경이 되겠지만 홍상수의 이 선택은 세상이 이전보다는 더 살만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만약 당신이 <월-E>를 보았다면 이렇게 빗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 동안 지구를 떠나 있던 우주선이 지구로 돌아오게 된 것은 환경이 회복되어서라고 말이다. 예컨대 이제 홍상수에게는 일상이라는 말이 더는 필요 없다. 우리는 이미 일상에 속해있고, 그보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어떻게 소멸하지 않을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기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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