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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n 29. 2020

신탁은 두 번 실현된다

<어둠 속의 댄서>(2001) 


그리스 신화에는 눈이 먼 것으로 유명한 이가 두 명 있는데, 한 명은 오이디푸스고 다른 한 명은 테이레이시스다. 오이디푸스는 운명에 도전한 죄로 눈이 멀었지만, 테이레이시스는 눈이 멀었기에 타인의 운명을 점칠 수 있었다. 이렇게만 보면 두 사람의 공통점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이 두 맹인의 기구한 운명은 그들 자신에게 점지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신화 속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신화라는 것은 앞선 이의 발길이 끊긴 곳에서 비로소 성립하므로 그들은 운명을 보지 못할 때 비로소 신화가 된다. 이것이 두 사람의 공통점이다. 젊은 영웅과 늙은 현자의 이야기이다. 


라스 폰 트리에의 <어둠 속의 댄서>는 이 구도를 살짝 비틀어 신화의 원리에 도전한다. 눈이 멀어가는 셀마(비요크)에게는 유전병을 물려받은 아들 하나가 있다. 아들은 13세에 눈이 멀 예정이며, 그런 이유로 그녀는 13번째 생일선물로 안과 수술을 선물하려 한다. 눈이 멀어가는 와중에도 비용마련을 위해 밤낮없이 일하지만, 그마저도 평소 알고 지내던 이웃에게 빼앗기고야 만다. 이 가혹한 시련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웃은 빼앗긴 돈을 가져가려면 자신을 죽이라면서 총을 건넨다. 그녀는 제안을 수락해 사형대 위에 서고, 유예된 죽음의 순간에 그녀는 노래한다. 


짤막하게 요약되는 이 이야기가 잔혹하게 들린다면 이유는 하나일 것이다. 눈이 먼 현자는 자신의 미래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오이디푸스의 운명을 물려받은 아들에게 어머니의 변호사 선임 비용은 자신의 눈과 등가가치를 지닌다. 셀마의 친구 캐시(카트린 드뇌브)는 면회 장소의 수화기 너머로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면 사형은 면할 수 있다고 말한다. 동시에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과 아들의 눈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기를 종용한다. 그러나 셀마는 지금 이 순간이 아니라면 아들은 눈이 멀게 될 것이라면서 제안을 거절한다. 


이윽고 셀마는 죽는다. 공장 안의 소음에 맞추어 뮤지컬을 행하던 셀마의 다리는 교수대 위에 매달린다. 처형장 발판이 열리는 소리에 그녀는 반응하지 못한다. 아마도 셀마는 아들이 13살 생일에 눈이 멀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녀는 예언자인 동시에 어머니였기에 운명에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운명에 개입하는 이에겐 천벌이 내린다는 점도 알고 있었을 터다. 말하자면 그녀는 이것이 어디까지나 ‘신화’ 속 이야기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닥쳐올 운명을 보았으나, 그것을 모른 체했기에 비로소 신화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신화 한 편이 끝났다. 


일간에서 라스 폰 트리에게 가하는 비판은, 이 신화의 집필의도를 감안한다면 나름의 옹호지점이 될 수 있다. 무릇 신화에서 영웅은 시련을 겪기 마련이다. 또한 그들의 이야기가 정말로 있었던 일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길가메시와 헤라클레스가 정말로 있었다는 걸 우리는 믿지 않는다. 다만 이 기록이 왜 쓰였는지는 어렴풋이 안다. 무언가를 전하기 위해 작가는 집필한다. 아마도 라스 폰 트리에는 자기식의 신화를 쓰고 싶었던 모양이다. 분명 이 영화는 작위적이고 또 너무나도 작위적이나, 바로 그런 이유로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것이 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왜 쓰여야 했을까. 단순히 신화의 이야기 구조를 가져와 보고 싶었기 때문은 아닐 테다. 눈먼 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희생은 원형(Archetype)이 될 수 없다. 허나 무엇이든 답해주는 아키네이터(Akinator)가 될 수는 있다. 아키네이터는 생각하는 것을 맞추는 스무고개 게임을 한다. 우리는 아키네이터와 대화하며 그가 정말로 잘 맞춘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고개를 넘어왔기에 그도 맞출 수 있었다. 예컨대 이 대화는 완전한 예언이 아니다. 우리와 그가 대화함으로써 물리적인 거리를 좁혀왔기에 비로소 예언이 성립한다. 


셀마의 대화는 세계 안에 존재하는 잡음을 빌미로 시작된다. 이 대화는 자신이 의도하고 환경이 아니라는 점에서 비자발적이다. 그녀는 타산이 아니라 타의에 따를 수밖에 없는데, 눈이 머는 것도 그렇지만 공장이라는 환경도 그렇다. 기계가 수행하는 반복적인 운동 속에 노동자의 일은 재료를 집어넣는 것이다. 만약 노동자가 한눈이라도 팔면 기계에 손목이 잘리고야 만다. 왜냐하면 노동자는 멈추어도 기계는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런 이유로 셀마가 잡음에서 리듬을 발굴해내는 모습은 일종의 강간과 같은 게 된다. 그녀는 세계의 소음이 들이닥친 고막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한다. 


하지만 이 승화를 두고서 주이상스(Jouissance)라고 부르지 않으려 한다. 고통 속에 희열이 있다는 말은 강간이라는 행위에서 희열을 찾아내는 것을 통해 피해자의 고통을 타의가 아닌 타산으로 만든다. 잘 알다시피 이 대사는 싸구려 변명에 불과하다. 고통 속에서 모종의 희열을 느낀다는 사실이 범죄의 논리에 결합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이 범죄를 피해 자기 연민의 윤리와 결합할 때는 자기구속의 행위가 된다. 머리 위에 당근을 매단 당나귀처럼, 자신을 채찍질함으로써 앞으로 달려가는 영구기관이 된다. (이 이야기는 훗날 <님포매니악>으로 이어진다.)


노동자가 비명을 질러도 기계는 멈추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는 다음 날 공장에 나와야만 한다. 그것이 그들의 생계수단이어서다. 여기서 드는 흥미로운 생각은 그들이 노동을 통해 얻는 고통이, 오히려 노동하게 하는 역설을 자아낸다는 점이다. 행복한 일상에서 행복의 감정을 느끼는 게 아니라, 고통 속에 희열이 있기에 고통에 매진하는 모습은 명백한 개미지옥이다. 그렇게 본다면 영화의 시작부터 셀마가 구원받을 가능성은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셀마는 공장 소음에서 음악의 리듬을 찾아내는 사람이니 말이다. 


반면 셀마가 마주한 이 환경은 그녀에게 다가오는 주변 사람의 말이 그만큼 고압적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듯하다. 뮤지컬 책임자나 공장 책임자의 말은 친절해 보이지만, 으레 누구나 할 수 있는 상투적인 위로일 뿐이다. 그 어떤 말에도 셀마는 진심으로 위로받지 못한다. 오히려 인간이 아니라 기계에서 위안을 받는 그녀의 모습은 <모던 타임즈>의 사도마도히즘적 버전처럼 보인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채플린은 손을 통해 고통을 흘려보낸다는 점이고, 셀마는 발을 통해 고통을 흘려보낸다는 점이다. 이른바 두 사람은 인간 피뢰침인 셈이다. 


그들은 영화 필름에 발을 내디디며, 스크린으로부터 닥쳐온 것들을 태연히 흘려보낸다. 이 인간 피뢰침은 라임 오렌지 나무처럼 다가온 관객에게 행복을 줄 것만 같지만, 실상은 흘러들어오는 것을 막아낼 수 없는 처지이다. 그들은 전류를 흘려보낼 정도로 강하지만, 전류를 맞이할 만큼의 친연성이 있기에 불행하다. 아무리 도망쳐도 벼락은 그들의 머리 위로 내릴 것이고, 그때마다 그들은 내디딘 땅으로 전류를 승화시킬 테다. 아! 슬픈 운명이여. 이것은 영화에서 그들이 마주할 수밖에 없는 물질의 필연성이다. 소리라는 필름의 한 요소, 소리에서 탄생한 인물의 대사, 대사로 인해 생겨난 리버스 쇼트는 그녀로 하여금 세상과 얼굴을 마주하게 한다. 


이는 자신에게 폭력을 가한 세상과 얼굴을 대면시킨다는 점에서 정말로 폭력적이다. 그래서 이 모습은 마치 햄릿이 자신에게 닥쳐온 운명을 한탄하는 것처럼 보인다. 햄릿의 고뇌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음에 대한 고뇌가 아니라, 자신에게 닥쳐온 운명의 이분법에 대한 것이었다. 죽느냐 사느냐라는 논제는 단순한 삶과 죽음의 문제가 아니라, A가 살면 B가 죽고 B가 살면 A가 죽는 딜레마였다. 만약 내가 죽음으로써 당신을 살릴 수 있다면 이 문제는 쉽게 끝날 터다. 그러나 당신이 내가 죽기를 바라지 않기에 이 문제는 딜레마가 된다.


라스 폰 트리에는 개인의 운명을 판돈으로 건 게임을 진행한다. 게임의 주제는 예언자가 예언에 대항하는 방법을 두고 하는 갑론을박이다. 그녀는 자신의 눈이 머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것은 트리에로부터 내려진 신탁이다. 그러나 자신의 아들에게 같은 예언이 내려지는 것만은 막고 싶었다. 물론 예언자인 그녀는 오이디푸스에게 내려진 예언이 어떻게든 실행되리라는 점을 알았을 테다.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그녀가 운명에 거역한다면 영화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 신화의 주인공은 그녀이고 그녀의 아들은 다음 세대의 주인공이다. 그래서 그녀는 선택해야 한다. 우리 시대를 택하는 것으로 다음 세대를 구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 시대를 연장할 것인가. 


할리우드의 뮤지컬 장르가 그러하듯, 처음에는 러브-코미디처럼 보이던 영화가 사실은 코미디-러브라는 점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절망한다. 이곳에 사랑의 달달함은 없고 오히려 우스꽝스러운 사랑만이 존재할 뿐이다. 희극이 아니라 비극이라는 것인데, 사실은 비극이라는 말도 틀렸다는 걸 마지막에 가셔야 깨닫게 된다. 비극의 끝자락에는 작게 피어나는 사랑이 있다. 예컨대 이는 비애극이다. 비극이 어찌 사랑스러울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비애극이라는 말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니 라스 폰 트리에의 <어둠 속의 댄서>는 맹인(Blind)의 춤사위가 아니라 어둠(Blind)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관한 영화다. 혹은 앞을 볼 수 없음에도 가장 밝은 앞날을 보는 이의 이야기다. 영화는 화면이 꺼질 때와 화면이 끝날 때, 두 번 시작되기 마련이기에 그렇다. (미셸 시옹, 『 영화의 목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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