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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n 23. 2020

영혼이 없을 때 사람들은 육체에 매료된다


1.



의미 있는 일들은 대체로 계획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계획대로 이루어진 여행보다 계획이 어긋난 상황에서 마주한 것들이 유독 기억에 남곤 한다. 불행 중의 행복, 혹은 우연함의 필연성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이 말은 너무 과한 것 같으니 다른 말을 해보고 싶다.



내가 생각하기에 의미 있는 일들은 ‘계획되지 않기보다 뒤늦게 발견되는 것’에 가깝다. 이른바 재발견이다. 이 재발견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데, 우리에게 정말로 소중한 것들은 ‘우리가 이미 갖고 있지만 당장은 알지 못할 뿐’이라는 점과, 머나먼 미래에 성장한 자신은 미숙했던 과거를 품어볼 수 있으리라는 점에서 희망차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재발견이란 자신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긍정이다. 이 완전한 긍정사에는 자신의 모자람에 대한 자책이 없다. 오히려 우연을 발견하는 능력에서 의미를 찾기에 그는 고고학자이다.



고고학자들은 무엇이 발견될지는 알 수 없어도 ‘무언가를’ 발견한다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부여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파는 땅은 유물이 나올 법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만약 유물이 나올 가능성이 없다면 그곳을 파는 행위는 시간 낭비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우연을 발견했다는 사실이 그곳을 황금의 땅으로 만든다. 물론 이것만으로 서부개척 시대를 상상하는 건 무리이겠지만, 황무지를 금싸라기 땅으로 만드는 기적은 오직 고고학뿐이다.



https://youtu.be/VtvjbmoDx-I



2.



이나카기 히로시의 <무호마츠의 일생>(1958)을 보는데 주인공이 미후네 토시로였다. 알다시피 미후네 토시로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페르소나였고 그래서 나는 그가 반가웠다. 이윽고 영화가 조금 더 진행되자 류 치슈가 미후네 토시로에게 조언하는 역할로 나왔다. 두 번째로 찾아온 만남에 나는 사뭇 흥미로움을 감출 수 없었는데, 류 치슈가 오즈 야스지로의 페르소나였다는 점이 그렇다.



구로사와 아키라와 오즈 야스지로는 스타일이 다르지만, 일본 고전기 영화의 대부라는 점에서 같은 범주로 엮이곤 하는 감독이다. 이 짧은 문장만으로 어떤 사유를 진행할 수는 없겠으니 다음으로 넘어가도록 하자. 히로시의 영화를 마치고 그다음으로 선택한 건 이타미 주조의 <장례식>(1984)이었다. 영화는 일상처럼 순조롭게 진행되었는데 극의 마지막 지점에서 승려 역할로 류 치슈가 나왔다. 두 영화에 26년이라는 시차가 있는 만큼 류 치슈는 더 늙어있었고, 이와 동시에 1984년이라는 시기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누군가는 1984를 조지 오웰의 D-day로 기억하겠지만,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54편 중 52편에 출연했던 류 치슈가 왜 다른 영화에 나와 있는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숫자이기도 하다. 오즈 야스지로와 류 치슈는 일본 영화의 고전기, 스튜디오 시스템으로 긴밀히 엮인 관계였으며 그래서 오즈의 사망은 시대의 종말과도 같았다. 오즈의 유작인 <꽁치의 맛>(1962)은 동시대에 가장 많이 공격받는 ‘구닥다리(요즘 말로 하면 적폐쯤일 듯싶다.)’였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 시기에 사망한 오즈를 두고서 ‘한 시대가 저물었다’고 생각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설사 그것이 우연이든 필연이든 간에.



그러니까 이는 기본적으로 유령에 관한 이야기다. 어느 감독의 페르소나에게 갑자기 닥쳐온 자유라는 이름의 불운을 생각해본다. 이것을 ‘불운’이라고 표현했으나 류 치슈 본인에게는 어찌 다가왔을지 알 수 없다. 다만 내가 보고 들은 것들은 이것을 오즈 야스지로의 잔흔으로 불러주기를 간청한다.



3.



내가 보고 들은 첫 번째는 그의 국적에서 비롯된 심상이다. 영화사적 평가나 영화 외적 상황을 제한다면 <라스트 사무라이>와 <마지막 황제>와 같은 절멸의 순간을 떠올려볼 수 있다. 주인이 있던 것들 이 주인을 잃었을 때 나타나는 반응은, 세상에 홀로 남겨진 순간으로부터 세상의 품으로 돌아가기까지 걸리는 시간에 대한 슬픔이다. 함께 걸어야 하는 것이 짝이 맞지 않게 될 때, 그것은 짝짝이가 되어 우리의 현실 인식에 균열을 낸다(<걸어도 걸어도>). 마치 영화 파일에서 영상과 음성의 싱크가 맞지 않는 것처럼, 육체는 먼저 갔지만 영혼은 아직 이곳에 남아있는 것들이 우리를 균열 속으로 초대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영상과 음성의 싱크가 맞지 않을 때는 영상보다 음성에 집중하게 되는 감이 없지 않다. 눈을 감는 건 자발적으로 가능한데 귀를 막는 건 꼭 손을 대야만 한다는 게 그에 대한 이유이다. 쉽게 말해, 듣는 게 보는 것보다 강제성이 강하다. 그리고 이 문장에서 ‘강제성’을 ‘힘’으로 바꾸면 우리는 음성의 힘에 대해 말해볼 수 있다.



뒤늦게 생각해보니 굳이 음성 말고 소리 전반에 해당하는 것 같다. 공포영화에 밝은 분위기의 음악을 배경으로 깔아두면 영화가 전혀 무섭지 않게 되는 일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소리는 영상의 윗면을 침범해오는 일종의 병균에 해당한다. 소리는 영상을 감염시킬 수 있지만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는다. 영상은 소리를 감염시킬 수 없고 소리를 자신의 형질로 변형시키지 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타인에게 건네는 짧은 인사는 육체의 언어보다 선두에 선다. 찌푸린 얼굴로 밝은 인사를 건네면 사람에 대한 반가움은 전해지나, 밝은 얼굴로 기분 나쁜 욕설을 한다고 해서 기분 좋은 말이 되지는 않는다.



요컨대 위의 말을 반대로 하면 육체는 언제나 고유의 영역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소리는 무엇이든 감염시킬 수 있지만 육체는 언제나 그 자신으로만 존재한다. 이것을 영화의 영역으로 되풀이하자면, 우리가 어느 감독을 두고 ‘누구누구의 스타일을 닮았다’고 평가할 때 그것은 일종의 ‘감염’에 해당한다. 우리가 ‘제2의 오즈 야스지로’라고 그를 지칭할 때 그는 오즈의 영혼에 감염된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해두었듯이 육체는 그런 감염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즉, ‘제2의 오즈 야스지로’라고 해서 오즈의 영화를 재현해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오즈의 육체는 이미 1963년에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왼쪽은 <고하야가와...>이고 오른쪽은 <장례식>이다. 사진에 나오는 것은 류 치슈.


4.



망자의 시간이 산자의 시간에 종속되고 나면 산자는 유령이 되어 구천을 떠돈다. 산 자가 떠도는 구천은 현실을 저승의 맥락으로 만들고, 남겨진 이들에겐 저승의 문을 닫는 게 과제로 주어진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즈의 영향 아래 있었는지를 생각해본다면 이 말은 다소 도발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저승의 영향 아래에 있는 게 사실이다.



이상한 일은 우리가 저승에 있다는 사실이 죽은 이가 아직 이곳에 남아있으리라는 환상을 심어준다는 점이다. 이것은 난제이기도 한데, 저승에서 망자를 만나게 된다면 우리가 만나는 것은 육체일까 영혼일까? 영혼이 육체의 형태로 구성될 수도 있고, 육체만 같고 영혼은 다른 무언가일 수도 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난제를 파훼하는 방법으로 위의 도발적 제안을 꺼내든다. 우리에게는 강령술도 부두술도 아닌 안식이 필요하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경계 너머로 사라졌을 때 그는 비로소 심상이 된다. 플라톤식으로 말하면 그는 이데아가 된다. 예술가의 의무가 이데아의 현실 구현이라는 점에서, 그는 자신이 응당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다고 할 수 있겠다. 마치 사람이 죽으면 밤하늘의 별이 된다는 말이 있듯이 말이다.



이것이 (계급이 아니라 전건과 후건으로의) 주종관계에 대입되는 이유는, 주인에서 영향받은 이들에게 주인이 사라지게 될 때, 그들이 과연 주인을 진정 떠나보낼 수 있을지에 대한 약간의 우려 덕분이다. 좋든 싫든 간에 자신을 사로잡은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힘들기 마련이다. 신경 섞인 과거이든 불안정한 미래이든 간에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들은 감염으로부터 자유로워야만 한다. 눈으로 보는 것보다 귀로 듣는 게 더 강제성이 있다는 점은, 외관상으로 관측되는 육체가 살아있을 때 그를 언제나 궁지로 몰아넣지만, 역설적으로 육체가 죽어 사라지고 없을 때 뒤늦게나마 그를 그리워하게 된다는 점에서도 발견되곤 한다. 말하자면 더는 감염시킬 대상이 없다는 점, 간략하게나마 풀어보면 ‘잔소리를 해줄 수도 들을 수도 없다’는 점이다.



5.



류 치슈를 보고서 오즈를 생각하는 나 자신이 한심해졌다. 동시에, 류 치슈에게서 오즈를 제거한 채 보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생전에 오즈가 공언했듯이 오즈의 분신이기도 했던 류 치슈를 보며 나 자신이 감염되는 것을 피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위에서 제안했던 ‘안식’을 나도 수행하지 못한 게 되므로 그런 말을 할 자격 같은 건 없을지도 모른다.



이 대목에서 나는 다시금 1984라는 상징적인 숫자를 조커로 꺼내본다. 1984를 구성하는 이미지는 애플의 컴퓨터 광고에서도 묘사되었던, 거대한 얼굴이 티브이의 연합체적 구성으로 재현되는 것을 향해 망치를 내리찍는 모습이다. 이 광고는 독재자의 영혼이 도시라는 육체를 전위적으로 감염시키는 현상에 대해 망치라는 도발적인 제안을 한다. 핵심은 그렇게 창을 깬다고 해서 독재자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데아의 영역으로 돌아갈 뿐이라는 점이다. ‘독재자’에게서 육체를 뺀 ‘독재’는 영혼조차 되지 못하고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관념이 된다. 즉 그것은 마치 유령처럼 우리 사회를 떠돈다. 육체도 영혼도 아닌 뭔가 이상하고 추상적인 것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력이나 인력처럼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원리, 또한 간접적으로만 파악될 수 있는.



그런데 이타미 주조의 <장례식>에서 류 치슈를 발견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으나, 오즈의 흔적을 느낀 건 우연이 아니었다. <장례식>의 마지막 장면은 등장인물이 한데 모여 화장터의 굴뚝을 지켜보는 것이다. 그들은 화장터 굴뚝에 연기가 언제 나는지를 가만히 앉아 지켜보는데, 이타미는 이 지켜봄의 시간을 덩그러니 놓인 간극으로 만들었다. 이 간극 동안 지난 영화의 시간들은 자연스레 화장터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노인의 시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영화의 서사는 그 시신이 화장되어 연기로 사라지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이 구조가 오즈의 <고하야가와가의 가을>(1961)과 유사하다.





위는 <고하야가와...>이고 아래는 <장례식>이다.


6.



<고하야가와…>의 마지막 장면에는 류 치슈가 어부 역할로 특별 출연한다. 일설에 따르면 오즈는 이 영화에 류 치슈를 등장시키는 것을 잊고 있다가, 각본에 그가 없다는 걸 알고 뒤늦게 집어넣었다고 한다. 오즈의 필모그래피에서 류 치슈가 등장하지 않는 예외적인 2편 중 하나가 <카카미지쉬>(1936)라는 다큐멘터리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어떻게든’ 류 치슈를 작품 안에 넣으려는 그의 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다.



오즈의 이 영화는 촬영 중에 어머니의 죽음을 맞닥뜨린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오즈의 다음 영화는 유작이 되었다. 이때 떠올리게 되는 이상한 가정은 <고하야가와…>에서 화장되는 시신이 오즈 자신이고, 그를 대체해 투입된 게 바로 류 치슈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유작인 <꽁치의 맛>의 마지막 장면이 그토록 체념적인 이유는, 류 치슈의 역할이 딸을 시집보낸 아버지여서가 아니고 집을 떠나 독립해야만 하는 딸의 심정이어서다.



<꽁치의 맛>에서 딸은 자신이 시집가면 홀로 남게 될 아버지를 걱정한다. 마찬가지로 류 치슈는 이제 곧 저승으로 향할 아버지 오즈를 걱정한다. 이때 아버지는 자신은 어디 가는 게 아니고 본가에 남아있을 테니 언제든지 놀러 오라며 딸을 다독인다. 그러나 딸은 알고 있다. 분가를 하고 결혼생활을 하다 보면 본가에 놀러 갈 시간은 없을 것이라는 점을 말이다. 동시에 딸에게는 본가로부터 독립해야 하는 정신적 과제가 주어진다. 딸은 더는 딸로 남지 못하고 어머니가 될 사명만이 남아있다.



오즈의 초기 영화에서 자주 사용되던 ‘But’이라는 접속사처럼, 딸이 아버지를 사랑한다면 아버지의 존재를 잊어야만 하는 이상한 상황이다. 아버지를 계속해서 사랑하고 기억해나가는 게 무슨 문제가 되는지 물을 수도 있지만, 저승의 문을 닫지 않으면 우리는 저승이 들려주는 지옥의 소리에 계속해서 감염되고야 만다. 귀를 막아야 들리지 않게 되는 것들에는 입으로 되뇌었을 때 더욱 슬프게 다가오는 울림 같은 게 있고, 그래서 오즈는 영화 안에서 자신을 화장한 게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영혼이 없을 때 사람들은 육체에 매료되기 때문이다. (*주 : 오즈의 어머니 아사에 오즈는 <고하야가와…>의 각본 집필 중이던 때에 암 선고를 받았다. 이후 운명을 직감하기라도 하듯이 만든 <꽁치의 맛> 촬영 도중 그녀는 사망한다.)



7.



계획되지 않았고 뒤늦게 발견되었다는 점이 의미 있는 일을 만드는 사례는 오즈 본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오즈는 비교적 재발견된 편에 속하니 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영화를 보다 보면 문득 내가 영화 안에 들어간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를 두고 몰입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그만큼 영혼 없이 살아가고 있음에 대한 반증이 아닐까 한다.



오즈의 연출과 구도를 동일하게 재현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덧없는 일인지만을 확인하게 될 뿐이다. 육체에 대한 매료는 우리식으로 말하면 ‘외모지상주의’이고, 이 사회 속에서 살아남는 것은 비슷한 성질에 끌리는 이들이다. 그러니 나는 이타미 주조의 <장례식>과 오즈 야스지로의 <고하야가와…> 사이에 당신이 서 있으면 좋겠다. 불현듯 느껴지는 것들에 대해, 원인과 결과를 느낄 수 없는 이상함을 질문을 던지고 균열 속으로 들어가 보았으면 한다.



무엇이 있는지는 몰라도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는 장소인 균열은 일상의 붕괴가 아니라 시작이다. 인식이 시작될 때 비로소 우리는 일상의 한가운데에 서 있을 수 있다. 항상 같은 것을 보고 듣고 향유하고 즐기는 일들은 자식의 결혼이나 부모의 죽음과 같은, 극적이면서도 사소한 일들을 통해 기쁘거나 슬픈 것으로 재발견된다. 일상의 소중함을 말하는 게 아니라, ‘But’이라는 단어를 덧붙이면서 무언가가 있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 인식의 균열이 보다 더 자주 되풀이되었으면 좋겠다. 화장터의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는 게 아니라, 세상이 굴뚝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은 느낌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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