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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n 05. 2020

그리움에 사로잡히는 성스러움

<그라이아이 : 주둔하는 신>



1. 


디지털 사회에서 가장 큰 화두는 비물질에 대한 물질의 개입이다. N번방 사건과 같은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온라인상으로만 존재하던 것들이 현실 세계에도 존재한다고 여겨질 때 우리는 당황한다. 누군가에게는 당황이겠지만 그것이 공포로 바뀔 수도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눈으로 보이는 가상세계의 이미지들은, 자체만으로도 겹쳐진 세계의 존재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때 존재의 암시는 다름 아닌 믿음과 신뢰를 통해 형성된다. 이를테면 성당에서 우리는 신의 존재를 몸으로 느끼게 된다. 평소 신을 믿지 않더라도, 신을 믿는 이들이 오가며 형성된 발자국의 겹침은 그 자체로 신의 증빙이 된다. 소위 말하는 ‘성역’은 이런 절차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성역, 혹은 소도. 성스러운 땅이기에 범죄자가 숨어들어도 아무런 위해를 가할 수 없던 장소. 달리 말하면 세속적 삶 안에 담긴 최후의 성스러움이 바로 소도라 할 수 있다. 이 모습은 범죄자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다는 점에서 바이러스의 벙커처럼 보이기도 한다. 찬란하고 아름다운 것을 위해서는 더럽고 추악한 것도 보장될 수 있어야 한다는 소도에서 우리는 방역을 본다. 세속이 아무리 침투하려 해도 근본적으로 나아갈 수 없는 지대가 있다. 그것은 종교의 성상이 겹쳐진 채로 만들어낸 겹친 세계의 틈새이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이 겹친 지대의 존재는 단지 가상에만 그치지 않을 수도 있다.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이어지는 흐름뿐만이 아니라 사이 간극에 담긴 숨은 뜻이 있기 마련이다. 이를 아무리 닦아도 사이 간극에 치석이 생기기 쉬운 것처럼, 겹침은 늘 벙커링을 동반하는 것이다. 


2. 


구조주의에서 씨실과 날실은 틈새를 만들어내는 원리이고 우리는 그 틈새에 취하곤 했다. 우물을 들여다보면 그 끝은 보이지 않았고 그렇기에 무한한 원전이 되었다. 그러니 우리가 형용할 수 없는 것들에 공포를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TV라는 겹친 세계에서 튀어나오는 일본의 귀신들, 우물이라는 겹친 세계에서 튀어나오는 한국의 귀신들. 이 과정에서 티브이와 우물물 정중앙에 비친 달의 모습은 처녀귀신과 연결됨으로써 여성성을 가상으로 만들어버렸다. 달이 뜨면 세계 안에 숨어있던 것들 것 깨어난다: 좀비, 강시, 늑대인간, 뱀파이어 등. 마찬가지로 달이 뜨는 날에 시작되는 월경(月經)은 현실 세계에서 겹친 세계로 월경(越境)을 암시했다. 그래서 생명의 잉태라는 성스러움은 ‘원혼’이라는 바이러스 최후의 벙커로도 작동했다. 


무시무시한 처녀귀신들이 소도를 찾아 이 땅을 떠돌기 시작했다. 정여름의 <그라이아이 : 주둔하는 신>은 그 처녀귀신이 한국에 깃들기 시작한 때를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으로 본다. 한국에는 일본에서 건너온 미군이 주둔하기 시작했고 이후 미군이라는 존재는 한국 사회를 정처 없이 떠돌게 된다. 그는 한국의 안보를 지키는 유령이면서도 냉전이 만들어낸 깊은 심연이기도 했다. 동시에 그 심연은 한국에 미국을 그대로 옮겨 놓은 월경지로서의 역할을 한다. 베트남전을 겪으며 향수병의 무서움을 알게 된 미군 수뇌부는 해외 미군기지를 ‘마치 자국처럼’ 꾸며 놓기로 마음먹었다. 한국의 주한미군 기지는 캘리포니아의 모습을 그대로 본떠 왔으며, 본토에서만 볼 수 있는 상점들이 입점해있다. 우편주소는 미국 본토와 동일하고 우체통에 편지를 넣으면 ‘정상적으로’ 편지가 간다. 


3. 


같은 공간에 있지만 사실상 다른 영토를 점유하는 곳이 바로 군사기지이다. 눈으로는 보여도 지도 데이터상에서는 야산으로 묘사되는 그곳이 바로 겹친 세계이다. 내셔널 지오그래피에 나오는 장엄한 자연을 보며 정말로 있는 곳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와 반대로 정말로 있는 곳을 보며 정말로 있지 않은 것 같다는 의구심을 품을 수도 있을 테다. 우리는 그것을 두고 ‘믿을 수 없다’는 표현을 쓴다. 동시에 믿을 수 없는 현상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겹친 세계에서 튀어나오는 형체 없는 것들은 형체가 없어서가 아니라, 겹친 세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현실화했기에 두려운 존재이다. 귀신이 있든 없든 간에 우리는 귀신이라는 단어를 이미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는 언어의 형태로 우리네 세계 안에 잠재되어 있으며, 그들이 단지 언어에만 그치지 않게 될 때야 비로소 ‘풀려남’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귀신을 보았다. 혹은, 나는 악마를 보았다. 악마라는 표현이 인칭대명사로 사용될 때는 끔찍하게 한심하지만 적어도 도망칠 곳이 없다는 점에서는 옳다. 범죄자나 악마처럼 우리 곁에 늘 있지만 겉으로는 구분되지 않는 이들이 세계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소도뿐이다. 그러나 소도는 언제나 내륙에 있어서 그곳에 숨는다는 건 평생을 감금당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는 언제나 함께할 수 있는 겹친 지대를 만들어냈고 사람들은 이곳을 성역화하여 범죄자로서의 자신을 도피시켰다. 개인의 인격은 분리되었고, 달이 뜨는 날 시작되는 변형의 이야기가 사람들을 분신(分身)하게 한다. 그렇게 면죄부를 받게 되지만 육체가 어디에 있든 간에 우리가 그들을 알 도리는 없다. 방역에 정면으로 대항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4. 


<그라이아이>는 기본적으로 미군기지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위의 것을 포함한 디지털 시대의 성역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곳이 월경지-겹친 세계이기에 한국 지역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포켓몬 고]를 통해 알려진다. 정여름은 VPN을 우회해 GPS 조작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디지털 상으로 존재하는 미군기지를 탐험한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장소를 눈으로 본다. 가상현실 혹은 증강 현실이라 부르는 것은 현실에 기반했지만 현실이 아니라는 말을 통해 현실의 복잡다단한 일들을 피해간다. 다르게 보면 이는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것들을 인간으로 본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 대목에서 다시금 복기하게 되는 단어는 악마, 뱀파이어, 늑대인간, 처녀귀신 등이다. 자신을 악마라고 지칭하는 이를 보며 우리가 그를 무엇으로 보고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오히려 그는 실체가 남긴 어떤 잔상 같은 게 아닐까? 


징병제 국가인 한국에서 군대라는 장소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그다지 이상할 것이 없는 공간이다. 그러나 군부대 안을 상세히 묘사하는 것은 엄연하게 금지되어 있고, 그렇기에 우리는 군대를 다녀왔더라도 군대에 대해 말할 수 없는 처지가 된다. 이 검역은 마치 군부대를 군사적이고 성스러운 것을 담은 소도로 보이게 하며, 소도 안에서는 군법이라는 자체만의 규율이 존재하므로 바깥세상과는 명백히 분리되어 있다. 물론 청와대와 같은 일급 기밀 시설도 지도에서 보이지 않는 건 마찬가지다만. 군부대는 그보다 더 나아가서 군법이라는 고유의 계율을 갖는다. 달리 말해 폐쇄된 공간에는 외부와 다른 것이 깃들며 이러한 점이 같은 인물에게 다양한 성격을 부여한다. 소도는 종교적 교리를 따르기에 그 안에서는 세속의 인간이 지워진다. 그렇게 개인에게는 잔상만이 남게 된다. 본체는 소도, 라는 거대한 성역으로만 보이게 된다. 


5. 


이런 가정에서 <그라이아이>의 푸티징 작업은 그 제목을 형식을 통해 재현하는 것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포켓몬 고]라는 증강현실과 유튜브에 올라온 방송의 조각을 모아 작품을 직조하는 푸티징 작업의 면모는 그 사이의 심연이 아닌 그 자체로의 소도를 만들어낸다. 정여름은 이를 두고서 ‘기억’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그곳이 소도라는 점에서 우리는 기억이 세속을 피해 영원히 성역을 떠돌 것임을 쉬이 예측해볼 수 있다. 아마도 정여름의 관심사는 한국에서 미군과 미군기지가 갖는 기억적 특성에 있는 것 같다.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기억은 떠도는 들개와 같다”는 언급이 전 세계에 퍼진 미군기지와 그 안의 작은 미국과 겹쳐질 때 우리는 향수병이라는 가두어진 기억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현대는 가히 미국적인 것들에 암묵적으로 지배당한 채 동조됨을 강요받고 있기 때문이다. 달러, 할리우드, 맥도날드와 같은 미국사회의 산물은 ‘미군’이라는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누군가는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만약 남성성이 폭력과 전쟁의 동력이라면 미군이 타지에서 겪는 향수병은 남자답지 못하고 그렇기에 남성성보다는 여성성에 가까운 무언가일 테다. 그렇기에 향수병의 발병은 남자답지 못한 것으로 조롱받게 되고(세계 경찰과 마초이즘), 미국적인 너무나도 미국적인 군대라는 명명에 손실이 가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군이 향수병에 대한 해결책으로 내놓은 것은 미군기지를 미국의 월경지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상시적으로 그리움에 사로잡히기보다는 그 안의 것들을 마치 증강현실처럼 꺼내어 보여주는 미군기지라는 환영은, 여성의 월경처럼 성스럽지만 그렇기에 더욱 터부시되었던 과거 시대의 유산을 떠오르게 한다. (우리는 왜 군부대를 군부대라고 말하지 못하는가?) 월경을 월경이라 말하지 못하는 모습은 지도 데이터에 포착되지 않는 군사 시설들의 모습과 유사하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겹친 세계에 있던 것들을 차례로 불러온다(Loading). 증오 범죄와 민간인 학살, 이름없는 전쟁과 드러난 참사, 성 문제에 대한 불감증과 안전문제에 대한 불감증. 우리는 그것들을 발사(Film-making)하기 위해 다시 불러올 (Re-loading) 준비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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