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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31. 2020

스튜디오의 계절과 촬영의 권태로움

<습한 계절>(2020)


1.



스튜디오 시스템이 확립된 이후로 영화에서 기후라는 건 이상하거나 특별한 일이 되었다. 왜냐하면 스튜디오 시스템이 가져다준 편리에는 ‘실내촬영’이라는 공간의 아늑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영화의 발명과 거의 동시에 만들어진 편집 절차를 통해서도 그것은 이미 극복된 바 있다. 영화에 적용된 편집 기술은 언제 어디서 촬영하든 간에 그 두 개의 시공간을 찰떡같이 붙여 놓았다. 하지만 가능 불가능 여부를 떠나 지연되는 촬영에 많은 비용이 소모되었고, 촬영에 제약이 없도록 실내에 제작공간을 확보하게 되는 데 그게 바로 스튜디오이다.



스튜디오 시스템이 가져다준 촬영의 편리함을 ‘제약의 해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사에서 농경이 ‘정착’이라는 이름의 선물이었음을 생각해본다면 그렇다. 더는 영화 촬영을 위해 떠돌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말과도 같았다. 만약 촬영 중에 비가 오거나 혹은 비가 올 예정이라면? 아쉽지만 약간의 리얼리즘 손해를 감수하고서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가면 된다. 촬영상에 몇몇 디테일이 사라지긴 하겠지만, 스크린을 통해 열화된 현실성은 관객으로 하여금 미묘한 차이를 눈치채지 못하게 한다.



원시인들이 ‘비를 피해 들어간 동굴’ 안에서 ‘일렁이는 그림자의 환영’을 발견한 일에 비유해보고 싶다. 동굴 바닥에 고인 물에 약간의 빛을 쬐이면 그것은 마치 비가 내리는 것처럼 보인다. 비록 동굴 밖의 현실보다는 약하겠으나, 그림자를 거치고 사운드를 살짝 조작하고 나면 얼추 비슷한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 영화가 플라톤의 동굴에서 이데아를 추출해낸 방식이 바로 그러했다. 동굴 안에서 비가 올 리 없지만 그럼에도 비가 오는 것처럼 묘사하는 기술, 이데아를 바르게 묘사할 수 없다면 간접적으로나마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 수는 있다.



이처럼 우리는 영화에서 기후가 어떤 특별한 의미작용을 하고 있음을 눈치채게 된다. 영화가 정말로 현실의 비를 찍었든 아니든 간에, 기후의 제약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기후를 통제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물론 자연의 섭리에 간섭한다는 것까지는 아니다. 우리의 능력은 어디까지나 영화 안으로만 한정되었다. 그리고 이는 영화가 인간이 만들어낸 가상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는 물음의 방향을 잘못 짚은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에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적용하는 것은 틀렸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현실에 눈을 돌려야 한다.



동굴 안에서 이데아를 발견하는 일은, 우리가 그 동굴을 또 다른 세상으로 여길 때부터 이미 그르게 되었다. 이를테면 우리가 농작물을 재배하는 행위는 명실상부한 자연의 섭리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자연의 진리의식인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영화를 찍는 행위는 필연적인 기술의 경과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게 인간의식의 지적인 고양은 아니다. 예컨대 인간이 자연에서 열매를 따던 채집의 기술로부터 벗어났을 때는, 인간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촬영하던 기술 영화의 시대의 종말과도 같았다.



스튜디오 시스템은 유목민에서 농경민으로의 변화를 상징하거나 암시한다. 이 안에는 스타 시스템이라는 제사장을 비롯한 기우제가 있다. 그와 반대로는, 정착하게 됨으로써 어딘가로의 일탈을 꿈꾸게 되는 마음도 생겨났다. 예를 들어 <오즈의 마법사>를 살펴보면. 도로시가 문을 여는 순간에 화면은 아름답게 채색된다. 그리고 그렇게 아름다운 곳은 오즈랜드이기 이전에 영화 스튜디오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동굴을 거쳐 다시금 밖으로 나오게 된 우리에게, 동굴이란 비록 거짓일지라도 좋은 낙원이었다. 바로 그렇게 농경 사회의 기우제는 영화로 옮겨온다. 기술 영화 시대에서 종교 영화의 시대로.



2.



종교 영화의 시대에 기후란 극적이거나 비(非)극적인 일을 상징하는 것이 되었다. 갑작스레 쏟아지는 폭우는 앞으로 좋지 않은 일이 닥칠 것임을 예언하는 영화적 장치가 된다. 우리는 여기서 쏟아지는 폭우의 영화적 사례를 몇 가지 살펴볼 수 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에서 폭우는 진실을 가린다. 오즈 야스지로의 <부초>에서 폭우는 대화를 소거한다. 혹은 <어바웃 타임>과 같은 로맨스 영화를 떠올려 보아도 좋겠다. 그것은 <지금 만나러 갑니다>처럼 잠시나마 현실로 돌아오는 기능을 한다.



이처럼 비가 내린다는 것은 나쁜 쪽으로든 좋은 쪽으로든 필연적으로 변화를 암시한다. 날이 개이면 풍경은 달라지게 되어 있다.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와 잎사귀에 맺힌 물방울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하늘은 비온 뒤에 유난히 맑고 푸르다. 대기는 살짝 습하지만 그럼에도 기분은 좋다. 그러니 이는 흩뿌려진 엔트로피의 총량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곧 무언가가 닥쳐올 것이라는 운동 에너지의 시각적 암시, 이윽고 비가 내리고 난 후에 세상은 말끔해진다. 허나 그렇다면. 과연 누가 기우제를 지낸 걸까? 변화와 흐름을 암시하는 영화 속의 기후를 만들어낸 장본인은?



생각해보면 기후라는 것을 포함한 모든 자연환경을 우리는 통제할 수 있다. 적어도 영화 속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일식>의 마지막 10여분 동안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좀 다르다. 두 남녀가 만나기로 했던 장소에는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일식이 시작되고 카메라는 멍하니 앉아 거리를 응시한다. 말 그대로 이곳에서의 시간은 죽어 있다. 일식이라는 보기 드문 자연현상임을 제하더라도 이 죽은 시간에 대해 이전까지의 이야기 모두가 가려지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비유하자면 이는 마치, 카메라 조리개와 경통에 뚜껑을 닫는 행동이다,



카메라 렌즈에 뚜껑을 닫는 행동이 눈을 감는 시점 쇼트와 유사한 시야를 만들어 내리라는 점을 쉽게 유추가능하다. 말하자면 영화의 기술(Technique)은 기술(description)을 위한 도구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비를 내리게 하는 제의를 기술사의 영역으로 편입해볼 수 있다. 즉, 영화 안에서 비가 오고 눈이 내리는 것과 같은 현상은 자연의 우연한 포착이 아니라 기술적으로 재현해낸 산물이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이는 것만 같은 이 사실을 우리는 그동안 눈치채지 못했다. 비가 내린다는 게 곧 비(非)라는 바깥 지대를 상정하고 있음을 말이다. (조리개의 바깥에서 안쪽을 투영하는 뷰파인더는 기술을 위한 기술의 좋은 예이다.)



이에 따라 위의 영화 목록을 다시 정렬해볼 수 있을 텐데. 나열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라쇼몽>은 진실의 바깥, 수풀 더미 ‘안’에서 바라보는 이야기이다. <부초>는 관계의 바깥, 집 안에서 가족의 바깥을 바라보는 드라마이다. <어바웃 타임>과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현재의 바깥에서 관계의 안쪽으로 향한다. 그리고 이러한 비(非)의 행렬은 영화에 어울리는 공간의 수사가 ‘안쪽’이 아닌 ‘바깥’이라는 점에 무게를 실어준다. 예컨대, 영화는 우리 세계의 안쪽이 아니라 바깥에 있기에 미지이다. 그는 집 안에 놓인 오래된 우물이 아니라, 성 안에 있는 우리를 비추어주는 심연이다.



인류가 동굴을 거쳐 다시금 성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동굴이 자리한 구역이 그만큼 위험해졌다는 점을 반증한다. 수렵 사회에서 다시금 농경 사회를 이루어 낸 우리에게 바깥은 위험한 곳으로 여겨진다. 이 과정에서 중간에 머물렀던 동굴은 그런 위험지대에 편입되어 버린다. 즉 우리가 잠시 묵었던 동굴은 우리 삶의 외곽에 있다. 여기서 우리는 동굴이 자리한 곳까지 개발하게 되는 숙명을 마주한다. 진리는 이전에 이미 사라졌지만,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것마저 내 손으로 부수어야 한다. 이처럼 스튜디오 시스템이 가져다준 촬영의 편리함에서 이데아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살아왔던 지난 곳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비 그치고, 무지개가 있는 곳을 정말로 발견했기에 그렇다.



3.



그 자체로 거대한 물웅덩이가 될 수몰예정지구에서 무지갯빛 미래를 상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지아장커의 <스틸 라이프>는 개발이 가져다줄 미래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 놓인 현재에 더 관심이 많다. 그래서 그는 현재를 탈피하지 못하는 우울증자다. 반면 신카이 마코토의 <날씨의 아이>는 개발이 가져다줄 과거를 감수하는 게 현재의 도리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정신분열증자다. 우리는 둘 중에 무엇이 더 나은 선택지일지 쉽게 판단할 수가 없다. 한쪽은 쏟아져 내릴 물의 무게를 걱정하기에 우울증에 걸렸다. 다른 한쪽은 쏟아져 내리는 물보다 ‘그것이 수행되지 않음으로써 남겨질’ 과거가 더 무섭다고 생각한다. (호다카의 총격질에서 <조커>의 얼굴을 우스꽝스럽게 꺼내 드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농담이 아니게 된다. 그는 정신분열증자다.)



중국이라는 나라가 매 순간 개발되어 감을, 일본이라는 나라가 매 순간 과거로 회귀하고 있음을 안다면. 우리는 두 영화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은 이유는 그 판단이 윤리적이거나 실용적이어서가 아니다. 기후를 조절하고 변화시키는 일은 스튜디오 안에서 자유롭고, 그런 자유로움에 반한 우리에게서는 진실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화가 진실을 담는다고 말했던 시절을 지나왔다. 오늘날 그 누구도 영화가 진짜라고 말하지 않는다. 진짜 같다는 말은 할 수 있겠지만, 그것조차 우리가 ‘진짜’로 삼는 것이 바로 현실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서, 영화는 어디까지나 현실의 복사품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영화에서 쏟아져 내리는 비를 본다는 것은, 우리가 지나온 과거가 아니라 앞으로의 미래에서 목격됨이 틀림없다. 말하자면 일기예보이다. 영화는 진짜인 현실의 뒤를 따라서 ‘~같음’이라는 속성을 획득하고,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리얼리즘이다. 그러니 일기예보가 충분히 틀릴 수 있음을 알면서도 그에 따르는 것은, 말 그대로 ‘진짜’가 아닌 ‘진짜 같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영화매체를 두고서 진실을 보여주는 거울이라는 상투적인 말보다는, ‘그럴듯함’에 집중해야 한다. 기상 데이터와 인공위성을 통해 산출해낸 값이 정말로 그럴듯한 일기예보를 한다는 것. 반대로 보면, 영화가 아무리 기술적으로 고도화된다 할지언정, 단지 기술(description)을 위한 기술(Technique)에 그치게 되는 것은 필연이다. 그 누가 기후를 완전히 예측할 수 있겠는가? 라플라스의 악마?



완전히 예측할 수 없다면 그게 수행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게 만들어 놓아야 할 것이다. 중국의 젊은 감독 가오 밍이 만든 <습한 계절>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언제라도 비 내릴 수 있는 계절이 배경이다. 후이난티엔(回南天)이라는, 가만히만 있어도 방바닥에 물이 고이는 중국 남부의 우기를 묘사한다. (작중 배경은 선전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기가 정확히 언제인지와 같은 것은 그다지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습한 계절은 비가 내릴 가능성을 품고 있고 그것은 예보나 예언이라기보다 현실에 가깝다. 그러므로 비가 내린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생각해보는 것은 나중의 일이 된다. 현세대 중국의 개발은 미래를 위한 것보다 현재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중국을 두고서 개발도상국이라는 호칭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4.



아마 <습한 계절>이 보여주려는 건 이야기도 의미도 아닌 기후이다. 권태기 연인과 그들 각각에 다가온 새롭고 성숙한 만남은 이야기로 볼 때 그다지 새롭지는 않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도 단조롭고 직선적이지만, 그들이 사는 공간에는 언제라도 쏟아져 내릴 수 있는 비의 존재가 막대한 존재감을 뽐낸다. 지아장커의 사례를 빌린다면 그들은 무척이나 걱정해야 한다. 혹은 이제 곧 사라질 것들에 집착해야만 한다. <스틸 라이프>의 사내는 수몰지구에서 떠나는 사람과 일하는 사람 모두를 본다. 이곳을 과거로 남기는 이들과 여전한 현재로 남기는 이들이 한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습한 계절>의 인물들은 두 가지 사례 모두에 해당하지 않는다. 계절은 기후와 시간이 함께 순환하므로 성립하는 단어이다. 항상 여름인 열대지방에는 비 아니면 평범한 날밖에 없다. 반면 봄부터 겨울까지의 계절이 있는 곳에는 기후를 특정하는 다채로운 수식이 가능하다. 다르게 말해 계절이 늘 변화하므로 습한 계절은 과거이자 미래이다. 작년에도 습한 계절이 있었고 내년에도 습한 계절이 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영화는 우울증도 정신분열증도 거부한다. 그대신에 집어드는 선택지는 권태로움이다. 이 권태로움은 일기예보가 어쨌거나 허구라는 점을 잘 알기에 느껴지는 감정이다. 작품 속 커플의 방식으로 말해보면, 그들이 느끼던 사랑이 결코 영원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을 때 사랑은 ‘~같음’의 후순위로 밀려난다.



따라서 작품이 묘사하는 권태감은 진짜에 다가서려 했지만 그럴 수 없음을 깨달은 현대 중국의 모습과도 어느 정도 겹쳐진다. 단순한 모방과 재현의 문제가 아니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부상하려는 근래 중국의 본격적인 시도가 본질적인 사랑은 아니라고 가오 밍은 말한다. 아무리 일기예보를 해보아도 그것이 진실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은, 기술이 기술의 용도로 사용되었을 때 아무런 이데아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을 말해준다. 중국 한복판에 지어진 에펠탑과 스핑크스는 우리가 그만큼 많이 떠나왔다는 것만을 말해줄 뿐, 이후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답을 쥐여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에 대한 해답 또한 불분명하다. 미래를 보장하는 과학 기술의 산물인 <스틸 라이프>와 과거를 되살려내는 선전 기술에 대항하는 <날씨의 아이> 사이에서 가오 밍은 생각에 잠겼다. 우울증도 정신분열증도 아닌 권태로움은 제정신으로 남을 수 있는 영원한 현재이므로, 질환 중에서도 가장 미래가 없는 병증이기에 그렇다.



추가 : 덧붙이자면 작품의 무대인 선전시는 중국에서 가장 빠르게 변화 중인 도시이기도 하다. 모든 대중교통을 전기 차량으로 교체 중일 정도로 말이다. 선전시는 개혁개방을 추진한 덩샤오핑에 의해 경제특구로 지정되었으며, 계획도시의 특성상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그 자체로 거대한 스튜디오처럼 보인다. 이 맥락에서 <습한 계절>은 영화의 속성에 대해 자기만의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선전시가 경제특구로 지정된 이후로 기후라는 건 이상하거나 특별한 일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중국 정부는 선진국이라는 이데아를 쫓지만 그것이 진짜가 아닌 ‘같음’에 불과하다고 가오 밍은 지적한다. 동시에, 그렇게 변화한 기후 양상 속에서 중국은 거대한 권태로움에 빠졌다고 비판한다. 그의 진단에 따르면 중국은 낙심하지도 미치지도 않았다. 다시 말해서, 열등감을 느끼거나 자폐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중국은 오직 현재만을 주시하고 이것이 그 어떤 미래도 창출해낼 수 없노라고 가오 밍은 선언하는 듯하다. 그래서 이 계절은 하늘을 찌르는 습기처럼 불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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