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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27. 2020

2020년도 전주국제영화제 프리뷰룸 방문

가오밍, <습한 계절>

나카오 히로미치, <오바케>

카타리나 바스콘셀루스, <변신>

정여름, <그라이아이 : 주둔하는 신>

*네 작품은 온라인 미공개이며, 전주에서 장기상영됩니다. 



1. <습한 계절>



근래에 도드라지는 중국 신세대 감독의 어떤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중국은 항상 뉴웨이브 감독을 배출해왔다. 어쩌면 이는 중국이 그만큼 빠르게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오밍의 이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은 몸과 마음이 겉도는데, 이는 마치 강대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에 놓인 현대 중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개발과 관련된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바로 전 세대였던 지아장커와 친구들이 했던 물음이다. 이제는 완전히 현대에 접어든 중국에서 그것은 아련한 환지통으로 드러난다. 잊어서는 안 될 것들이 잊혀졌다는 것에 대한 슬픔. 그것은 사랑의 열병이 되어 돌아온다. 동시에 대기를 습윤기후로 만들어 슬픔을 마른하늘에 꽉 채워낸다. 그리고 그들-구름은 열심히 토해낸다. 마치 구멍이라도 뚫린 듯이. 하지만 원인은 전혀 모른 채로.



2. <오바케>



두 별이 나와 만담을 나눈다. 그런데 별들이 하는 이야기란 감독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렇다. 이 영화는 감독 자신이 영화를 어떻게 만드는지에 관해 말한다. 일종의 메이킹필름이자 자서전인 셈이다. 하지만 감독을 말하는 두 별들에게 감독은 그렇게 성실하게 보이지 만은 않는 듯싶다. 동시에 그들 자신도 그렇게 성실하지는 않다. 애초에 두 별의 화자가 감독이기도 하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두 별은 남자의 영화 작업을 열렬히 조롱한다. 마치 예능프로그램 [라디오스타]처럼 쉴 새 없이 조잘댄다. 끝내 남자는 벽에 손을 꽝꽝 칠 정도로 분노한다. 이것만 보면 실패한 영화감독의 이야기인 것만 같지만, 두 별 또한 감독의 대변인이라는 점에서 <오바케>는 모종의 자학개그에 가깝다. (전형적인 일본식 만담 개그 형식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다음의 이야기는 다소 특출나게 다가오는 감이 있다.



1) 두 별은 뜨끈한 게 당긴다면서 우동을 먹으러 가기도 하고, 열차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아마도 이는 소설 『은하철도의 밤』의 패러디인 것 같다.) 2) 그러던 와중 그들이 관찰하던 사내가 산비탈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3)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곳에서 별과 남자는 마주한다. 그들은 열차 안에서 우동을 먹는다. 그리고는, 플랫폼에 남자를 내려둔 채 제 갈 길을 간다.



<오바케>, 첫 장편을 만든 감독이 앞으로의 여정을 우려하고 있다. 먼 미래에 별이 된 감독은 하늘에서 자신을 내려다본다. 이 조롱이 이미 결론에 도달한 이의 여유일지, 아니면 영혼을 잠식하는 불안에 대항하는 신무기일지까지는 알 수 없을 듯하다. 감독은 두 전제의 중간지대로 꿈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설정한다. 산비탈에서 굴러 떨어진 감독은 자신이 만들던 영화 안으로 들어와 두 별과 겸상한다. 클라인의 병처럼 현실이 영화로 개입하고 영화는 현실에 개입한다. 동시에, 현실의 고민을 담은 영화도 영화의 고민을 담은 채로 현실로 개입해온다. 아마도 이는 혼자서 모든 것을 처리하는 1인 커뮤니티만이 할 수 있는 최대 장점일 것이다.



3. <변신>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와 유럽 사이에 자리한 국가이다. 그래서인지 아프리카의 열기와 유럽의 엄숙함이 묘하게 버무려지는 듯한 느낌이 있다. 물론 이것이 포르투갈 영화에 대한 정의가 될 수는 없을 테다. 그렇지만 포르투갈 국적의 영화를 보다 보면 우리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 과연 무엇 때문인지를 묻게 되는 감이 있다. 열기와 사랑, 엄숙함과 냉정함. 누군가 일본의 연애 연화를 두고서 <열정과 냉정 사이>를 꼽는다면, 여기서 우리는 그에 앞선 무언가를 되짚어보게 된다.



열정과 냉정 사이에는 ‘사이’가 아니라 ‘과’가 있다. 이 조사는 전건과 후건을 이어 논리를 성립시킨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가 익숙히 아는 관계에 어떤 논리를 제공하는 조사가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카타리나 바스콘셀루스의 <변신>은 열정과 냉정이 어떤 절차로 변신하는지를 되묻지 않고, 오히려 그 사이에 자리한 조사에 탐구적인 시선을 보낸다. 따라서 이는 집단 내에서 개인의 자리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나’는 엄마와 아빠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니 우리는 그 사이에 자리한 ‘와’에 대해 물어야 한다. 엄마와 아빠의 연결고리는 무엇인가? 이는 쇼트와 쇼트 사이의 분자적 결합이 아니라 기본적으로는 원소주기율표의 성질에 관한 이야기다. 엄마라는 세로항, 아빠라는 가로항, 그 중첩지대에 우리 가족의 현재가 있다.



4. <그라이아이 : 주둔하는 신>



정여름의 졸업작품이 전주국제영화제에 왔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품질에 대한 기대를 하게 된다. QC처리가 되었을 것이라는 기본 전제가 있는 셈이다. 반대로 말하면 이는 초심자의 풋풋함과 미숙함에 대한 염두를 어느 정도 해두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라이아이…>는 VR과 유튜브를 푸티징해 만들었고, 이는 보기 드문 형식임이 틀림없다. 전통적인 푸티징 작업이 앤디워홀과 같은 대중매체, 혹은 광고에서 이미지 판본을 따왔다면. 이후의 작업은 영화와 드라마 등지에서도 푸티징 재료를 가져왔는데, 정여름의 푸티징 작업은 그보다 이후의 재료를 사용한다. 이때 눈길이 가는 쪽은 아무래도 유튜브이다. 유튜브를 푸티징 작업의 재료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유튜브를 하나의 형식으로 비준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혁명은 넷플릭스를 넷플릭스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지금의 현실에서 미리 예견된 사안이라 할 수 있겠고 말이다.



정여름은 보안법률 상 지도에서 보이지 않는 군사기지가 [포켓몬 고] 게임에서는 보인다는 점을 응용한다. 아마도 굳이 미군기지를 택한 것에는, 미국의 패권주의를 말하기보다는 결말 부분에서 지적하듯이 ‘이제 곧 공원이 들어설 옛 미군기지 터’에 운율을 맞추기 위함이리라. 보안상 지도 데이터에는 푸른 숲으로 표기되어 있는 미군기지가 이제는 정말로 푸른 숲이 되었다는 점. 이는 마치 보안을 위해 가려둔 영화의 패권주의적 정의가 이제는 정말로 푸른 정의가 되었노라고 말하는 듯하다. 반대로 말하면 이는 ‘영화는 어떻게 진실을 확장하고 정복하는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할 것이다.




서울 사무소는 사람이 없어 황량하다. 이것도 아마 코로나19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해 좌석당 2M의 거리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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