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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26. 2020

<타부>의 바라봄과 멜랑꼴리의 형식에 관하여

<타부>(2012)

도피과정에서 저물어가는 연애에 지친 모습                                 


1.


포르투갈 영화에서 풍겨 나오는 멜랑꼴리함은 단지 서사만의 산물은 아닌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의 제목을 두고서도 같은 생각을 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페드로 코스타의 <행진하는 청춘>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희망인지 절망인지 딱 잘라 말할 수 없다. 행진이라는 말을 보면 활기찰 것 같은데 정작 그 안에 있는 것은 중장년의 남성이다. 그래서 우리는 청춘이라는 단어가 지시하는 대목이 궁금해진다. 마음만은 청춘이라는 것일지. 진격의 시대를 청춘에 빗댄 것인지. 그 어떤 물음도 우리에게 바른 상으로 돌아오지 않는데, 그것은 이 영화가 거울이 아닌 초상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거울이 보는 이의 얼굴을 반사해 보여준다면, 초상화는 보는 이와 늘 눈을 마주치곤 한다. 전자가 우리 얼굴의 겉 주름을 드러내는 용도라면, 후자는 눈동자를 통해 깊은 심연을 마주하게 하는 역할이다. 다르게 말해보면 우리는 그런 궁금증을 통해 영화 전체에서 미끄러질 수 있다. 주름이 말해주는 건 시간의 진행이지만 심연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심연은 어떤 물음이든 흡수해버리므로 그에 대한 궁금함은 해소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제목부터 어긋나 있는 어떤 괴리에 대해 암묵적으로 생각해보게 된다.


2.


미구엘 고미쉬의 <타부>에도 그런 괴리가 있다. 영화의 제목이 Tabu인데, 철자는 다르지만 ‘Taboo’라는 단어와 발음이 동일하고 그것은 어겨서는 안 될 불문율을 의미한다. 요점은 절대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시대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Taboo라는 단어 자체에 괴리가 숨어 있고 이따금 이는 어떤 멜랑꼴리함으로 우리 곁에 드러나곤 한다. 대표적으로 근친상간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근친상간은 법으로 제한할 수 있는 성격의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금기로 여기는 것 중 하나이다. 그러니 근친상간이 매우 아름다울 수 있다고 말한다면, 또는 실제로 그렇게 그려내는 영화가 있다면 우리는 멜랑꼴리를 느끼게 된다.


돌이켜 보면 멜랑꼴리함을 자아내는 영화는 많았다. 그러나 포르투갈이라는 국적이 주는 멜랑꼴리함에는 아무래도 무슨 연유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한국에서 포르투갈 영화가 생소하다는 점을 첫 번째로 데려와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혈액형별 성격 유형만큼이나 부질없는 의미 부여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생소함이 포르투갈이라는 미개척 지대에 대한 신비감과 그에 대한 불문율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볼 여지는 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은 순수의 영역이요, 그 출발선이 바로 금기라고 생각해본다면 그렇다. 예컨대 금기는 강렬한 첫 경험의 사회적 판본이다.


3.


<타부>의 첫 장면이 18세기 아프리카의 어느 초원이라는 점은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이해할 수 있는 해석의 한 조각이다. 먼저 이 영화에는 금기를 어기는 두 남녀가 있는데 그들은 불륜을 저지른다. 동시에 오랜 시간이 흘렀다 해도 그런 사랑에 후회 따위는 없는 듯 보인다. 영화에 도덕과 윤리적 잣대를 들이미는 게 명쾌한 일이 아니라는 걸 잘 알지만, 우리는 이들의 불륜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그들은 금기를 해쳤고, 그렇기에 좋은 결말을 맞이할 수 없다. 이는 테렌스 멜릭의 영화 <황무지>가 결코 보답 받지 못하는 땅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떤 것이냐면.


NTR이라는 속어가 있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는’ 것을 묘사하는 장르이다. 언뜻 보면 바람났다는 말과 동일하게 보이지만 장르 용어인 만큼 그 의미는 넓다. 여기서 핵심은 자신이 애정하고 바라던 것을 타인에게 빼앗겼을 때의 공허와 허탈, 혹은 분노의 총량이다. 더 많이 공허하고, 더 많이 허탈하고, 더 많이 분노하는 상황일수록 장르가 주는 쾌감은 배가된다. 이것이 용서받을 수 있는 범주의 일인지를 묻게 된다는 점에서도 ‘금기’의 성격을 어느 정도 띄고 있다 말할 수 있겠지만, <타부>에서의 NTR은 관계 자체에 대한 것보다는 기억과 시간의 문제에 더 면밀히 결합한다.


4.


<타부>에서 아우로라와 벤투라가 서로를 끌어안는 장면이 있는데, 그 위로 흐르는 나레이션이 “하지만 그 품에선 미래는 애매하고 실없어 보였다.”고 말한다. 1부 실낙원(Lost Paradise)을 봤다면 알겠지만 이 나레이션의 화자는 노년의 벤투라이다. 노년의 벤투라가 과거의 자신에 대해 평하는 모습이 바로 그 대사라고 본다면, 우리는 애매하고 실없는 미래가 노년의 벤투라를 뜻하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대사는 노년의 벤투라가 현재의 자신을 평하는 것일까. 실낙원이라는 제목 그대로를 믿는다면 밀턴의 서사시처럼 벤투라는 지옥의 죄인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1부에 앞서 있는 18세기의 아프리카를 되살려볼 필요가 있다. 18세기의 아프리카에 나오는 한 사내는 1부와 2부와 일말의 연관성도 없다. 그러나 그것이 그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효과를 발휘한다는 점에서 프롤로그는 일종의 버팀목과도 같다고 말할 수 있다. 1부의 현재와 2부의 과거는 프롤로그의 외딴 아프리카를 영접함으로써 그들이 금기를 어겼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 이는 영화에 대한 금기이자 영화라는 시간에 대한 금기이다. 영화가 연대기적인 구성을 취해야 한다는 생각은 그 입구부터 괴리되어 있는 셈이다.


5.


이를 두고서 1부와 2부의 모호한 괴리라고 표현한다면 숱한 ‘허리영화’의 범주에만 머물게 된다. 틀린 표현도 아니지만 뭔가 아쉬움이 남는 게 사실이다. 앞서 우리가 논했던 멜랑꼴리가 NTR이라는 금기에 대한 파괴적 에너지에서 도출된 것이라면, 그 공격성을 예술로 승화하는 게 가장 옳은 선택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절망의 폭이 극대화되기를 원하는 경험을 두고서 금기를 어길 경우의 아찔함에 섣불리 빗댈 수가 없다. 둘 다 선을 넘는다는 것은 같지만, 같은 배덕감을 두고서도 분해의 양상이 있고 충돌의 양상이 있기 때문이다.


<타부>의 사랑이 그럴듯한 모습으로, 멜랑꼴리하게 다가오는 건 그들 스스로가 현실을 자각했기 때문이라 말할 수 있다. 노년의 벤투라가 “그러나 전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아우로라는 점점 내 현실의 일부가 되었다.”라고 말하는 대목을 살펴보자. 두 사람의 금단의 사랑을 처음 시작할 때 그것은 비현실적인 무언가였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는 불륜이라는 게 안 좋은 의미에서의 ‘꿈만 같은 사랑’이어서다. 현실에 붕 떠 있는 느낌은 그것이 현실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 대한 반영적 이미지이다. 예컨대, 이는 거울이다.


6.


하지만 벤투라는 모종의 이유로 그들의 사랑이 초상이 되었음을 자각하게 된다. 붕 뜬 먼지와 같던 현실이 차분히 가라앉고 나자 아우로라는 현실적인 여인이 된다. 이는 이전처럼 아우로라를 자유롭게 상상할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우리가 현실이라 부르는 곳이 현재라는 지금-이곳의 시간적 개념인 것처럼, 아우로라를 현실의 일부로 받아들였다는 점은 그녀를 현재에 묻어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어떤 면에서 이는 금기의 상실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금기라는 이름의 첫 경험은 그것이 아직 수행되지 않았을 경우에만 본 능을 하기 때문이다.


금기는 그것이 수행될 수 없기에 금기로서 남을 수 있다. 한번 수행되고 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이는 금기를 어김으로써 생겨나는 배덕감이 그런 일회성의 힘에 기인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래서 금기는 최초이자 마지막인 것으로 작동한다. 이를테면 첫 사랑은 최초이자 마지막 사랑이기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수 있다. 만약 호기심이 동해 오래된 과거를 현재로 되살린다면 우리는 달라진 모습에 충격받을 것이다. 그러니 첫 사랑과 같은 첫 번째의 무언가는 늘 지금-여기의 현재에 묻어 놓는 게 옳다.


7.


아우로라가 생의 마지막에 벤투라에게 쪽지를 남긴 이유는 오래된 과거를 현재로 되살리기 위함이다. 아우로라가 그 금기를 깨뜨린 이유는 금기의 양쪽을 붙잡고 있던 자신과 상대 중에 자신이 곧 사라질 예정이어서다. 아우로라와 벤투라는 서로를 심연으로 남김으로써 시간의 진행을 어긋난 채로 유지해왔다. 그 사이에는 거울이 세워졌고, 이미 내 안의 현실이 되었기에 되돌릴 수는 없지만, 존재에 빗금을 치는 것으로 세상의 밖으로 밀어낼 수는 있었다. 예컨대 그들은 서로를 미끄러지게 하여 자신에게 도달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들이 처음으로 어겼던 게 사랑에 대한 금기였다면, 헤어지는 과정에서 시간에 대한 금기를 다시 세웠기 때문이다.


거울은 상대가 아닌 자신의 주름을 보여주고 그곳에서 우리는 켜켜이 쌓이는 시간의 결을 본다. 이 반사상은 세상에 대한 거부이지만 거울에 반사되어 자신에게로 온다.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음에 대한 시간의 진행이 성립한다. 두 사람 사이에 세워진 거울은 시간의 흐름을 동시진행에서 자기진행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러나 거울이란 본디 자신에 대한 자화상이기도 하다. 자신의 눈동자를 바라보면 그 안에는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또 하나 있다. 이 모습이 바로 <타부>의 1부와 2부가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이다. 그 사이에 놓인 거울, 1부와 2부의 모호함이 갖는 금기를 넘어서려는 자기 파괴적 면모가 바로 <타부>의 멜랑꼴리함이다.



막 연애를 시작해 행복하던 시절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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